책성으로 순행하여 바위에 공적을 새기다 ( 98년 03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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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羣臣宴飮, 賜柵城守吏物叚有差. 遂紀㓛於岩 校勘 001, 乃還.
 
校勘 001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巖으로 되어 있다.
 
 
46년(98) 봄 3월에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註 001을 순행하였다. 책성의 서쪽 계산(罽山)註 002에 이르러 흰 사슴註 003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와 함께 잔치를 열고, 책성(柵城)의 수(守)와 관리[吏]註 004에게 물건을 나누어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귀환 길에 올랐다.
 
註 001 책성(柵城) : 두만강 하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고구려의 성이다. 두만강 하류 유역은 본래 북옥저(北沃沮) 지역인데,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이나 같은 책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매구(買溝)’나 ‘치구루(置溝婁)’로도 불렸다. 이로 보아 본서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3년(30) 7월조의 ‘매구곡(買溝谷)’도 북옥저 지역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동천왕 19년(245) 조위의 침공으로 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동천왕이 ‘매구(買溝)’, 곧 북옥저까지 피신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고구려의 지배력이 강하게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본서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태조대왕 46년(98)에 왕이 책성을 순수하였을 뿐 아니라 같은 왕 50년(102)에도 사신을 보내 위무하였고, 산상왕 21년(217)에는 후한에서 망명 온 하요(夏瑤) 집단을 책성에 안치시킨 사실이 확인된다.
 
이 기사에 의거해 1세기 말경 두만강 하류에 책성수리(柵城守吏)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고 보기도 하지만(아래의 “책성의 수와 리” 항목 참조), 3세기 중반에도 동옥저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토착세력을 통해 지배하였다는 점에서 3세기 이전부터 지방관을 파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노태돈, 127~132쪽). 책성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대체로 3세기 후반 이후로 파악되며, 처음에는 목책(木柵) 형태로 성곽을 쌓아 ‘책성(柵城)’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전반 고구려의 영토가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렀다고 하므로(『위서(魏書)』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 늦어도 5세기 초에는 책성이 축조된 것으로 본다.
 
한편「고자 묘지명(高慈 墓誌銘)」에 따르면 고자의 할아버지로 600년을 전후해 활동했던 고량(高量)이 위두대형겸대상(位頭大兄兼大相)으로 최상위 지방관인 책성도독(柵城都督)을 지냈다. 또한 최근 발견된 「이타인 묘지명(李他仁 墓誌銘)」에 따르면 이타인이 고구려 멸망 직전에 책성도독겸총병마(柵城都督兼總兵馬)로 12개 행정구역[州]을 관할하고, 말갈 37부(部)를 통제하였다고 한다. 책성은 최고 지방관이 파견된 동북방의 중진으로 휘하의 지방행정구역뿐 아니라 말갈 부족을 통제하였던 것이다(여호규, 2017a, 136~149쪽).
 
책성의 위치는 종래 함경도 경흥(慶興: 李丙燾, 229~230쪽), 종성(鍾城: 李龍範, 56쪽), 투먼(圖們)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朴眞奭, 1998) 등으로 보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두만강 하류의 훈춘[琿春] 일대로 비정하며(金瑛河, 31쪽; 严長绿·杨再林, 1988; 방학봉, 1999), 구체적으로 두만강변의 평지성인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과 산성인 살기성(薩其城)이 세트로 책성을 이루었을 것으로 파악한다(정영진, 1990; 임기환, 2012). 고구려 멸망 이후 책성 지역에는 당의 기미주(羈縻州)가 설치되었는데, 고정문(高定問)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양현기묘지명(陽玄基 墓誌銘)」; 여호규, 2017b, 11쪽). 발해시기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두어졌는데, 훈춘 팔련성(八連城)이 그 치소로 비정된다.
 
〈참고문헌〉
李龍範, 1966, 「高句麗의 成長과 鐵」, 『白山學報』 1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金瑛河, 1985, 「高句麗의 巡狩制」, 『歷史學報』 106
朴眞奭, 1988, 「高句麗柵城遺址考」, 『朝鮮中世紀硏究』, 延邊大學出版社
严長绿·杨再林, 1988, 「延边地区高句丽-渤海时期纹饰板瓦初探」, 『博物馆硏究』 1988-2
정영진, 1990, 「연변지구의 고구려유적 및 몇 개 문제에 대한 탐구」, 『한국상고사학보』 4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방학봉, 1999, 「高句麗柵城의 위치에 대한 고찰」, 『京畿史學』 3
임기환, 2012, 「고구려의 연변 지역 경영-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8
여호규, 2017a, 「두만강 유역 고구려 성곽의 분포현황과 지방통치의 양상」, 『역사문화연구』61
여호규, 2017b, 「유민묘지명을 통해본 당의 동방정책과 고구려 유민의 동향」, 『동양학』 69
 
 
註 002 계산(罽山) : 책성(柵城)의 서쪽에 위치한 산이다. 책성은 두만강 하류의 훈춘[琿春] 지역으로 비정되는 만큼 함경북도 동북부의 산간지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구체적인 위치를 비정하기는 힘들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註 003 흰색 사슴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10년(62) 8월조 참조.
 
註 004 책성(柵城)의 수(守)와 관리[吏] : 이 구절을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로 해석하기도 하지만(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296쪽), ‘수(守)’는 ‘지키다’라는 서술어보다는 지방장관을 지칭하는 ‘수재(守宰)’의 ‘수(守)’를 뜻한다. 이에 이 기사의 ‘책성수’를 고구려가 두만강 하류 유역에 파견한 지방관(李鍾旭, 128~129쪽; 김미경, 42쪽; 장병진, 145~147쪽; 이종록, 175~176쪽), 이 지역에 주둔시킨 소규모 군대의 지휘관(김현숙, 140~143쪽), 이 지역에서 가동시킨 일정한 지배체제(박경철, 2012: 2018, 263쪽)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3세기 중반에도 동옥저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토착세력을 통해 지배한 것으로 보아 1세기 후반에 두만강 하류일대에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이 기사의 ‘책성수리’는 고구려가 파견한 지방관이 아니라, 고구려에 복속한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 토착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노태돈, 1999, 131~132쪽).
 
〈참고문헌〉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2-번역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李鍾旭, 1982,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 『歷史學報』 94ㆍ95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김미경, 2007, 「高句麗 前期의 對外關係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박경철, 2012, 「연변지역으로의 고구려 세력침투 및 지배의 실상」, 『동북아역사논총』 38
박경철, 2018, 『한국고대사의 재인식』, 서경문화사
장병진, 2019, 「고구려의 성립과 전기 지배체제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이종록, 2020, 「1~3세기 고구려의 두만강 유역 지배방식과 책성(柵城)」, 『역사와 현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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