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1228060311291


연개소문은 왜 당과 맞서 싸웠는가?

[고구려사 명장면 86] 

임기환 입력 2019.12.28. 06:03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의 구(舊) 제도를 타파해 정권을 통일하고, 서국(西國) 제왕 당 태종을 격파하여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 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초점은 신채호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당 태종의 무력 침공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사실에 있다. 이 점에서 근대에 들어 연개소문은 한국 역사상 자주성의 대표적인 인물로 표상되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부각되면 상대적으로 연개소문에 의해 살해된 영류왕은 사대온건책에 급급한 소극적인 인물로 폄하되게 마련이다. 이 두 사람은 그렇게 대조적인 입장이었을까? 과연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자주성과 자부심을 지키려는 영웅이었는가?


모든 의문의 출발은 642년 10월 연개소문의 쿠데타에서 시작한다. 연개소문이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답도 아직 충분하지 않지만, 정변 이후 상황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연개소문은 정변 이후 중앙이나 지방의 지배층들에게 어느 정도 지지를 얻었을까?


일단 정변 시에 대신 100여 명 혹은 180여 명을 살해할 정도였으면 당시 집권층의 주류 세력 대부분이 제거되었을 터이니, 정변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서 중앙 정계의 판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회에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 중에 소장파 대 장년·원로층 간 갈등도 있지 않았을까 추론한 바 있다. 이런 추정이 옳다면 일단 이런 판갈이 과정에서 소장파들은 대거 연개소문을 지지하거나 새 정권에 적극 등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방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일본 '성덕태자전력(聖德太子傳曆)'이란 책에서 황극천황 원년 2월조에 눈길을 끄는 한 대목이 있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연개소문의 정변을 전하는 '일본서기' 기사와 동일한 문장 뒤에 "이로 인해 국내에서 큰 변란이 일어났다(緣斯國內大亂也)"란 구절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 역시 고구려 사신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귀중한 내용이다. 이를 보면 연개소문 정변 이후 이에 대한 반발이 각 지방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그 유명한 안시성주를 들 수 있다.


645년 당 태종이 거느린 당나라 대군이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해 공격할 때다. 당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험하고 병사들이 정예병이며, 그 성주도 재주와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연개소문의 정변) 때에도 성을 지켜 복종하지 않았는데, 막리지가 공격해서도 함락시키지 못해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신당서' 권220 고려전)"


당시 안시성주 같은 사례는 아마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즉 연개소문의 정변은 주로 중앙의 기존 세력에 타격을 주었을 뿐이지 정변 직후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반대파 세력들에게 지지를 얻지도 못하고 또 그들을 제압하지도 못했던 듯하다. 연개소문이 정변 시 대신들을 대거 살해함으로써 중앙 정계에서는 어느 정도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향후 지방 세력을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최대 현안이었을 것이다. 이런 국내 정치 상황으로 보아 연개소문은 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그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도 처음부터 당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견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듬해인 643년 고구려는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3월에는 연개소문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道敎)를 청하였고, 당 태종은 이에 대해 도사 여덟 명을 보내고, 또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을 보냈다.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불교 사찰을 빼앗아 도관으로 삼고 이들 도사가 머물게 하였으며, 또 유사들보다도 윗자리에 앉게 할 만큼 예우하였다.


이처럼 연개소문이 추진한 도교(道敎) 진흥 정책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내적으로는 당시 왕실이나 귀족 가문들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는 불교계와 유교계에 대한 통제나 억압책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인다. 불교 사찰을 도관으로 만든다든지, 도사를 최고 자리로 예우하는 분위기에서 엿볼 수 있다. 연개소문 정권의 국내 정책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보도록 하고 여기서는 대당 정책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연개소문의 도교 정책은 영류왕 때 당에 도교를 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 왕실이 노자를 조상으로 받드는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당 태종의 환심을 얻기 위한 외교정책으로 보인다. 일단 이런 의도가 당 조정에도 전달되었는지 당은 윤6월에 보장왕을 책봉하는 방식으로 화답하였다. 당시 책봉·조공 관계가 가장 주된 외교 형식이라고 볼 때 연개소문 정변 이후 새로운 고구려 정권에 대해 외형적으로는 당나라 정권이 인정하는 모양이 되었다. 어쩌면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이로 인해 당의 태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 조정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보장왕 책봉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당 태종과 장손무기(長孫無忌)는 고구려 정벌을 전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즉 당 태종이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농단하니 고구려를 정벌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치니, 장손무기가 "지금은 연개소문이 스스로 죄를 짓고 방비를 엄중하게 하니, 정벌의 뜻을 보이지 말고 방심하게 한 뒤에 정벌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결과 보장왕 책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장손무기 : 당태종 이세민의 처남으로, 고구려에 대해 강경책을 주장했다. /사진=바이두


그리고 643년 6월에 정변 이후 처음으로 당의 등소(鄧素)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아마도 보장왕 책봉과 관련된 사절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등소가 당 태종에게 경과를 보고하면서 고구려 접경지대인 회원진(懷遠鎭)의 병력을 보강하여 고구려를 압박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당과 고구려 사이에 긴장 관계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아마도 등소는 고구려에 대해 강경한 당나라 조정의 분위기나 당 태종의 의중을 읽고 이에 부합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듬해인 644년 정월에는 당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당 태종의 조서를 주어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이 조서는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행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당이 정벌하겠다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면 연개소문은 왜 이렇게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을까?


아마 이때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입장을 분명하게 읽었던 듯하다. 상리현장이 소속된 사농시(司農寺)는 식량 비축 등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외교와는 전혀 무관하였으며, 게다가 사농승은 종6품상 관료에 불과했다. 즉 상리현장은 당 태종대 국외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 가장 하급 관리였다. 담당 업무도 아니고 권한도 없는 하급 관리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이 고구려와 외교적 해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당이 상리현장을 파견한 것이 단지 고구려 침공을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했음을 연개소문도 직감했을 것이다. 실제 상리현장이 돌아가 연개소문이 거부한다는 의사를 보고하니, 당 태종은 곧바로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제 당의 침공 의도가 분명해진 이상 연개소문으로서도 더 이상 온건한 태도를 유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연개소문이 끝까지 당에 항전을 계속한 것은 자주적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고구려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당 태종의 야심 문제였다. 당 태종은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었다. 주위의 어떤 세력과도 공존하려는 뜻이 없었다. 그는 이미 중원과 막북의 유일한 지배자인 '황제천가한(皇帝天可汗)'으로 자처하였다.


그의 야심은 동방 삼국마저 자신의 지배 아래 거느리는 명실공히 최고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으니, 고구려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 점은 뒤에 당이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마저도 복속시키려 했던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더욱 만백성 위에 중화적 법과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자신의 치세에 왕을 죽이고 권력을 독단하는 연개소문과 같은 '대역죄인'이 공존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당의 고구려 정벌은 당 태종의 야심이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로서 고구려 정책과는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으로서도 당의 침략이 결정적인 상황이고, 또 당의 침략 명분이 자신의 정변에 맞추어져 있는 이상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끝까지 당에 항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고구려와 당의 쌍방 강경한 대외 정책이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의 집권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연개소문의 권력 기반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연개소문이 기습적인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앙 정계 상황이었고, 곧 이어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무력 기반을 갖추고 있던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쳐야 했다. 그는 이들의 일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주와 같은 세력과는 서로 지위를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 연개소문의 권력은 사실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의 칩입이 시작되고 대외적 위기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일단 내부 권력투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전쟁 전체를 중앙에서 지휘하면서 연개소문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지방의 군사력이 소실되면서 연개소문은 그의 정적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즉 연개소문은 당과 대결해 승리하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과 전쟁하는 데 모든 것을 걸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의 승부수는 통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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