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를 둘러싼 궁금증 6가지
평소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고, 언론 인터뷰도 꺼리는 박근혜 후보도 과거에는 언론 인터뷰에 자주 응했다. 이들 인터뷰를 토대로 약혼설, 전두환과의 관계 등 박근혜 후보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짚어보았다.
주진우 기자 | ace@sisain.co.kr [259호] 승인 2012.09.04 09:16:45
“가장 유명한 정치인. 그러나 가장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 한 선임 외신기자는 정치인 박근혜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박근혜 후보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사는 것 같다. 사적인 일화들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인터뷰를 꺼리고, 기자들에게 단호하다. “병 걸리셨어요?” “한국말 모르세요?” “지금 저랑 싸우자는 건가요?” “본인(박지만 회장)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러면 끝난 것 아닌가요” 등. 정치부 기자들도 박근혜 후보에게는 쉽게 질문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 일간지의 박 후보 담당 기자는 “박 후보가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것 같다. 쳐다보면 무섭다”라고 말했다.
1970년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하던 박근혜 후보는 언론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당시 박 후보는 신년 특집 혹은 송년 특집으로 방송 3사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신문은 이를 받아 대서특필했다. 박 후보는 국민들이 정신을 개조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새마음 운동’ 선전에도 열을 올렸다. 흡사 종교단체 교주 같은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박근혜 후보(맨 오른쪽)는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뒤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박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있다.
그때 박 후보는 20대였다. 1977년 12월29일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과의 대화’의 한 부분이다. “군인들이 행진할 때 손을 위아래로 힘차게 흔드는데 예전에 그냥 걸을 적에 아버지께서 보시고 뭔가 기운이 없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실제로 걸어보시고 연구를 해보시고 해서 지금은 국군의 날 행진 때 전부 손을 흔들면서 걷게 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박 후보는 곧잘 여성지 인터뷰에 나서기도 했다. 기자들을 집으로 불러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나온 언론 인터뷰를 토대로 박근혜 후보에 대해 유권자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의문점들을 풀어보았다.
정치에 나선 이유
박근혜 후보는 5·16 쿠데타 이후 18년간 청와대에 머물렀다. 10·26 이후에는 18년간 칩거에 들어간다. 그러다 박 후보는 1997년 12월 이회창 후보를 돕기 위해 정계에 입문한다.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기자회견을 연 박근혜 후보는 이렇게 말하며 향후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일 뜻을 시사했다.
“1960~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안타까움을 넘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서 목이 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1997년 12월 <조선일보>)
은둔의 18년, 무엇을 했나
박근혜 후보는 2007년 자서전을 통해 “지금도 내가 걸어온 18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웃음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박 후보가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1987년까지 박 후보는 두문불출했다.
“작년 말까지는 새마음병원을 운영했고, 어린이회관, 정수장학회, 영남대 등 유관단체 일을 계속해왔다. 사람들은 마치 내가 숨어 지내기라도 하는 듯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 자신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지냈다.”(1988년 8월 <경향신문>)
1980년대 박근혜 후보가 특별히 매진한 일은 영남대 운영이었다.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의 합병으로 설립된 영남대는 이후락, 김성곤, 이동녕, 백남식 등 추종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퇴 후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설립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전해져왔다.(1988년 11월 <조선일보>)
그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박 후보가 영남대로 오게 된 것이다. 박 후보는 1980년 4월24일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재단 비리, 전횡, 부정 입학 등을 계기로 교수와 학생들이 퇴진 요구를 벌이자 사퇴했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도 재단 퇴진, 유신 잔당 퇴진을 외쳐왔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경영을 계속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남긴 뜻을 빛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가 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 것이지요.”(1988년 11월 <조선일보>) 박 후보는 “아버지께서 설립하신 영남대이므로 자식 된 도리로 그 학교를 잘 키워서 빛내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태를 맞고 보니 돌아가신 분의 뜻을 빛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에 부딪쳤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학교가 무슨 인연이 있겠습니까”라는 송별사를 남기고 영남대를 떠났다.
박 후보가 영남대 이사장을 거쳐 이사로 재직한 7년6개월 동안 영남대를 방문한 것은 이사장 취임 초기 딱 한 차례였다.
결혼과 약혼을 둘러싼 진실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박 후보의 결혼 문제는 뜨거운 관심사였다.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더 시급한 일들이 많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모두 일임했던 문제다. 그 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일이 없다.”(1975년 6월 <경향신문>)
그런가 하면 1989년 <박경재의 시사토론>에 출연한 박 후보는 “결혼 여부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아버지의 재평가에 평생을 바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육영수 여사는 박 후보의 결혼 상대를 점찍어놓고 있었다고 한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홍성우 전 국회의원 등과 혼담이 오갔다고 한다. 육 여사가 사망한 이후에도 박 전 대통령이 몇 차례 결혼을 권유했지만 박 후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10·26 당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각하가 구국여성봉사단 관련조사를 김재규에게 지시한 뒤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근혜양을 불러 ‘봉사단 활동을 그만하고 시집을 가라’고 했으나 근혜양은 ‘결혼을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2007년 대권 출마를 선언하면서 박 후보는 ‘박근혜 90문 90답’을 내놓았다. “첫사랑은 언제? 비밀이다.” “지금 결혼하고픈 사람 있는지? 없다.” “결혼은 언제쯤? 이미 나라와 결혼했다고 생각한다.”
1979년 10·26 뒤 박 후보는 서울 신당동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982년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지어준 곳이다. 2007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신씨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가 살 집을 지어달라고 내게 말했다. 정확하게는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에 지시를 받았다. 돈 받고 지었으며, (공사비는) 누가 줬는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한때 박 후보와 약혼설이 나돌던 인물. 신씨는 영남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에서 이사를 역임하며 박 후보를 도왔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청문회에서 생각을 밝혔다. “집이 좁아 유품 같은 것을 정돈할 수 없었는데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신기수 회장이 사정을 전해 듣고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으니 유품도 보관하고 이사 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해 받아들였다. 무상증여를 받은 셈이다. 신 회장과 약혼해 집을 줬다는 설도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증여세 납부 여부에 대해서 박 후보는 “그때 법적으로 세금 관계나 모든 것을 알아서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믿고 맡겼다”라고 답변했다.
38년 한결같은 헤어스타일의 비밀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암살됐다. 그리고 엿새 후 그녀는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스물두 살 때이다. 그때부터 같은 헤어스타일을 고수했다. 이른바 육영수 스타일이다.
“박근혜씨는 한때 단발머리로 바꿔 생활의 변화를 꾀한 듯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고로 다시 옛날 스타일로 돌아갔다. 그녀는 “헤어스타일도 내 맘대로 못해요”라고 웃는다.”(1988년 9월 <레이디경향>)
언젠가 “싫증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박근혜는 “가끔 바꾸고 싶은데 머리 모양을 바꾸면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한다”라고 대답했다. 실제 1988년쯤 머리를 단발로 바꿨더니 근화보사단(당시 박근혜 주변조직) 회원들이 만날 때마다 옛날이 훨씬 좋다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다시 본래로 돌아갔다고 회고한 바 있다.(<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 천영식 저)
2003년 말 박근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머리 모양을 잠깐 단발머리로 바꾸었다. 당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오전 회의에서 박근혜의 머리를 보고 놀라 “헤어스타일이 바뀌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지금 머리 모양이 중요한 때입니까?” 이렇게 본인이 단번에 말을 잘라버리자 회의장은 약간 썰렁해졌다. 다음 회의 때 박 후보의 헤어스타일은 육영수식 말아올린 머리로 돌아왔다.(<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
전두환 ‘오빠설’의 진실
한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근혜씨를 친누이처럼 여겨 그에 상응하는 배려를 유가족에게 할 것이라는 추측이 떠돌았다. 더욱이 박근혜씨가 전씨를 ‘오빠’라고 호칭한다는 뒷말도 떠다녔다. 그러나 박 후보는 이에 대해 단호히 부인했다. “‘전 장군’ 혹은 ‘전 사령관’으로 호칭했으며 그뿐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모든 분에게도 직함으로 불렀고 서로 공대했습니다. 사사로이 언니니 오빠니 하는 호칭은 써본 적이 없습니다.”(1988년 11월 <여성동아>)
10·26 사태 직후 박 후보는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으로부터 6억원을 받았다. 1988년 11월 <여성동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최근 국회 내 ‘5공비리 조사특위’의 안건으로 올라 있는 청와대 비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근혜씨는 확인을 해주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 돈(6억원)을 받았습니다.’ 문상객의 접대에 한창 경황이 없을 때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갈이 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활비에 보태 쓰도록 그 돈을 전해와서 받아 두었는데 그다음 날인가 이틀 후에 전두환 합수부장(당시)이 근혜씨를 방문하여 ‘그것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도 보고된 사항이며 최 대행도 기꺼이 인가했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회창 측으로부터 받은 2억원
박 후보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에게 집단지도체제를 요구하다 탈당한다. 그리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박 후보는 대선을 한 달 앞두고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그해 11월 이회창 후보 측으로부터 2억원을 받았는데 이는 대선자금 수사에서 문제가 됐다.
2004년 2월 박 후보는 “한나라당과 합당하면서 합당 조건으로는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다만 유세 지원 활동비로 2억원을 당에서 받은 사실은 있다”라고 밝혔다. 박 후보는 기자회견을 열어 “2002년 11월25일 선대위 공동의장에 임명된 후 26일 김영일 당시 사무총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았고, 12월7일 두 번째로 1억원을 받았다. 당시 이회창 후보와 별도로 개별 유세팀을 꾸려서 충청권·강원권을 다니며 유세 지원을 했다. 당에서 영수증이 필요 없다고 해서 영수증 처리 등 공식적인 회계처리를 하지는 않았다.”
당시 대선자금 수사를 담당한 한 검찰 관계자는 “대선자금 수사에서 유세지원비를 받아 문제가 된 것은 박 후보가 유일했다. 만약 수사가 더 진행됐다면 박 의원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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