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키 마사오’가 포털 검색 1~2위 된 이유가…
등록 : 2012.12.05 10:53 수정 : 2012.12.05 13:39

5일 오전 네이버 인기검색어로 다카키 마사오가 1~2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4일 선관위 주최의 공식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언급된 ‘충성 혈서’와 ‘다카키 마사오’가 인터넷에서 관심주제로 떠올랐다.

토론 이튿날인 5일 오전 10시 현재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서는 ‘다카키 마사오’가 1~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 첫화면의 ‘실시간 이슈’에서도 ‘다카키 마사오’는 6위를 차지하고 있다.

포털을 이용하는 상당수 국민들이 전날 대선후보 토론에서 언급된 ‘다카키 마사오’를 궁금히 여겨, 검색해보는 데 따른 현상이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전날 TV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상대로 “외교의 기본은 주권을 지키는 것이다.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군사쿠데타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이다”라며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발언으로 박정희가 일제시절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 일본 황제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성과 이름도 일본명인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화제로 떠오른 것이다.

박정희의 ‘견마의 충성’ 혈서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과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一死以テ御奉公)을 하겠다는 박정희의 혈서는 당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에 ‘혈서 군관 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왼쪽은 황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1940년 4월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에 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3월 수석 졸업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박정희는 부상으로 만주국 푸이(溥儀)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은 졸업생 대표 ‘다카키 마사오’로서 이렇게 답사를 했다.

“나는 오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천황 폐하와 부의 황제 폐하께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할 것으로 다짐합니다. 나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백무현, <만화 박정희 1>, 90쪽)

이후 박정희는 1942년 일본 육사에 편입해 졸업을 한 뒤 1944년 황군(皇軍)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교사를 하다가 다시 군관학교를 다닌 등의 문제로 박정희가 연령 초과로 군관학교 시험에서 탈락하자, 박정희는 ‘혈서’와 함께 입학허가를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에 동봉해 제출하는 등 입학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몸부림쳤고 이는 당시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공개된 이 ‘혈서 편지’는 지금도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만주군관학교 생도 대표 박정희 <만주일일신문>(42년 3월)에 보도된 만주국 신경 육군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 박정희 생도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과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일본에 ‘개와 말(犬馬)과 같은 충성’을 바치고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에게 충성’(一死以テ御奉公)을 다하겠다는 박정희의 이 혈서는 당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에 ‘혈서 군관 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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