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67년, 71년…그리고 2012년!
등록 : 2012.12.07 15:15 수정 : 2012.12.07 22:05
박정희의 1963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생전에 세 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와 두번의 체육관선거를 치렀던 그는, 이제 딸을 통한 네 번째 직선제 선거를 통해 부활하려 하고 있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1> 박정희의 네 번째 선거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
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 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 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 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 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
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
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
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
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올해 대선일인 12월19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의 처형장에서 벌어진 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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