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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4>제5대 모본왕

정치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지는

단군이 이 세상에 내려와 나라세우신 때보다 더 오래됐다.

정치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때부터,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다.

오늘같은 날에도 선거 투표할 때에 표 잘 찍어서

나라가 5년만에 부쩍 강성해지고 국위 떨치는 경우도 있지만

자칫 한번 잘못해서 그 5년 동안 국력 약해져서

결국에는 남의 나라 경제식민지로까지 전락하는 경우도 있으니,

나라 백성들이 부유하냐 가난하냐와는 상관없이,

정치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나라가 성장하고 쇠퇴하는

이런 당연하면서도 개같은 이치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든 다 똑같은 것이다. 

 

하물며 왕조국가에서는 또 어떠했던가.

성군이 나온다면 그 나라 백성들 모두가 기뻐서 하늘에 감사하겠지만,

폭군이 나와도 그 나라 백성들은 다들 그저 하늘에 기도만 할 것이다.

제발 빨리 저놈의 왕좀 죽게 해달라고.

고구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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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本王, 諱解憂<一云解愛婁> 大武神王元子. 閔中王薨, 繼而卽位. 爲人暴戾不仁, 不恤國事, 百姓怨之.]

모본왕(慕本王)은 이름이 해우<또는 해애루(解愛婁)라고도 하였다>이고 대무신왕의 원자다. 민중왕이 죽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람 됨됨이가 사납고 어질지 못하며 국사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어린 동생 대신 나라를 권지하다가 석굴 속에 들어가 누우시고.

민중왕이 대리하던 왕좌가 다시 태자에게 돌아갔다.

이름은 해우, 성이 해씨니까 이름이 우, 혹은 성을 해씨로 하고 이름을 애루라고 해도 되겠다.

독살맞은 어머니 잘 둔 덕에(?) 왕위계승서열물망 1위였던 이복형 호동을 제치고서,

운좋게 태자 자리 꿰차고 약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왕위에 오른 녀석.

고구려 제5대 모본왕이시다.

(《삼국사》에는 민중왕이 대무신왕의 아우이고 모본왕 해우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도리어 바꿔서, 대무신왕의 아들이 민중왕 해색주고

해우는 그 민중왕의 형이라고 써놨다. 뭐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아들인 것은 둘다 똑같으니

자질구레한 것은 신경쓰지 말자.) 

 

그런데 이 녀석이 성격 하나가 대단해.

《삼국사》에서도 기록해놨지만, 한성깔 했거든.

'성격 더럽고 어질지 못한 것'은 자기 엄마(원비) 닮은 것이야 잘 알겠는데,

그 더러운 성격에 나랏일 돌보는데도 젬병인 놈이었거든.

한마디로 '개자식'이었던 거지.(그럼 대무신왕이 개라는 소린가;;;)

 

[元年, 秋八月, 大水, 山崩二十餘所. 冬十月, 立王子翊爲王太子.]

원년(AD. 48) 가을 8월에 홍수가 나서 산이 20여 군데 무너졌다. 겨울 10월에 왕자 익(翊)을 왕태자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하늘도 무척 못마땅하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원통하게 죽은 호동왕자의 저주였던 걸까?

하긴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없겠다만....

어머니가 못됐어도 아들이 착하면 그래도 딱하기나 하지.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까)

이녀석이 즉위한 그 해 가을 8월에 홍수를 때려서 산을 20군데나 부셔주는 센스.

그런데 왕태자가 뭐니 왕태자가.

황태자면 황태자고 왕세자면 왕세자지.

 

그런데 참 이상해. 분명히 삼촌이 정치를 대신 맡을 정도로 어렸던 녀석이.

이맘때에 벌써 왕태자로 삼을 아들이 있었다니.

고구려에서는 혼인을 일찍 했나봐.

하긴 옛날에는 열다섯살 이상이면 어른 대접을 해줬다는데.

(조선조 예종은 나이 9살에 자식을 봤다던가?)

아무리 혼인을 일찍 했다고 쳐도,

이 녀석이 태자로 책봉된 것이 대무신왕 15년(AD.32) 겨울 12월.

이때부터 아버지 대무신왕이 사망(AD. 44)하기까지의 기간 12년에,

삼촌 민중왕이 대리한 5년의 기간까지 합치면

12+5=17.

못돼도 20년은 족히 되는데, 그걸 나이가 어렸다고 하는 건가?

(그가 갓난아기였을때 대무신왕이 태자로 책봉했다고 쳐도 대무신왕 승하때에는 이미 12살이다)

그만큼 장성한 녀석(?)이 왜 '어리다'는 이유로 자기 동생도 아닌 삼촌에게

5년이나 국왕 대리를 시켜야 했을까? 정말 나이가 어렸던 걸까?

아니면 어려서 즉위를 못한게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삼촌에게 대리를 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가.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2년(AD.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北平) · 어양(漁陽) · 상곡(上谷) ·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대무신왕의 피는 못 속였던 걸까.

즉위 이듬해 봄, 왕은 한을 공격해서 내륙의 북평과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략하게 한다.

북평이나 어양, 상곡, 태원.

거긴 현재 중국의 북경 일원으로 요동이나 요서를 훨씬 뛰어넘어 위치한 곳인데.

그곳을 공략하게 했을 정도라면 고구려의 군사력이 어디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의미지?

지금이야 중국의 수도가 거기 베이징에 있지만,

후한 시대에는 지금의 뤄양에 수도 경사(京師)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일대를 쳤다는 건 후한의 동쪽을 공략했다는 건데....

 

순암 영감은 동사강목에서 중국 역사책《강목(綱目)》을 인용해서, 

‘이 해에 맥인이 입조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의 맥인이 바로 고구려라 했다.

이렇게 중국 대륙 깊숙이까지 고구려의 깃발을 꽂고자 쳐들어갔다.

당시 한의 요동태수로 있던 제융이라는 사람이 고구려를 은혜와 신뢰로 대우했다.

그래서 고구려는 다시 화친했다.

어딘가 좀 이상한 이 기록은 《후한서》라는 중국 역사책을 바탕으로 부식이 영감이 써놓은 건데.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땅 뺏으려고 쳐들어갔는데 은혜와 신뢰는 개뿔....

(그래서 거길 우리가 뺏아서 차지했다는 거야 뭐야?)

 

10월에 부여(夫餘)의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후한서》

 

한편 부여에서는 고구려에서 후한을 공격한 그 해에 후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AD. 49)

 

이렇게 보면 왕의 성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지금의 북중국 동부 지역까지 국토를 넓게 개척하고,

폭풍과 서리, 우박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할줄도 알고....

그런데 왜 그렇게 왕의 성격을 못되게 써놨냐구?
여길 보면 안다.

 

[四年, 王日增暴虐, 居常坐人, 臥則枕人. 人或動搖, 殺無赦. 臣有諫者, 彎弓射之.]

4년(AD. 51)에 왕은 날로 포학해져서, 앉아 있을 때에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개삼았다. 사람이 혹 움직이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에게 쏘았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만에 왕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본색을 드러냈다고 해야할지.

땅도 넓히고 백성들도 구휼할줄 알길래 좀 괜찮은 녀석인가 싶었는데,

앉을 때마다 사람을 깔고 앉지를 않나,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눕지를 않나.

그래갖고 움직이면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신하들이 그걸 갖고 뭐라 그러면 당장에 활을 쏘아대니...

(역시 애들은 엄마보고 배운다니까.)

 

[六年, 冬十一月, 杜魯弑其君. 杜魯慕本人, 侍王左右, 慮其見殺, 乃哭. 或曰 “大丈夫何哭爲? 古人曰, '撫我則后, 虐我則'. 今王行虐以殺人, 百姓之也. 爾其圖之.” 杜魯藏刀以進王前, 王引而坐. 於是拔刀害之. 遂葬於慕本原, 號爲慕本王.]

6년(AD. 53) 겨울 11월에 두로(杜魯)가 임금을 죽였다. 두로는 모본(慕本) 사람으로 왕의 가까이[左右]에서 모셨는데, 살해당할까봐 겁나서 울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장부가 왜 우느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쓰다듬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네가 그를 죽여라.”

두로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나아가니 왕이 (그를) 눌러 끌어다 앉았다. 이에 칼을 빼어 왕을 죽였다. 마침내 모본원(慕本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모본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폭군'이라는 칭호 받은 왕 치고 멀쩡히 죽은 왕이 몇 명인가?

모본왕도 그 '폭군'리스트에 이름을 당당히(?) 올리고 죽었다.

두로라는 이 남자가 마침내 참다 못해서 왕을 죽여버린 것이다.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웃긴건 이 두로라는 남자의 본적과, 그에게 시해된 모본왕의 무덤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

 

어찌 보면 굉장히 대담하게 행한 거사같아보이는 이것은,

사실 아무 뒷생각없이 저지른 대책없는 사건이었다.

두로라는 이 남자가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해서 울고 있는데,

누가 와서 왕을 죽이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칼을 갖고 가서

왕을 죽인 것인데, 개인적으로 보기엔 대담한 협객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심한 그의 태도(왕이 죽일까봐 질질 짜던)에 기가 차지 않을수 없다.

단독범행으로 폭군을 죽였는데도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고,

(그렇다고 뭐 공신칭호를 받았다는 기록도 없으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상투적인 멘트도 쓰지 않은걸 보면,

아무래도 이자의 행동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필요할것 같다.

 

뭐 어쨌거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굴러간다.

해(解)씨의 시대가 다시 고(高)씨로 넘어가게 되는 중대한 기로.

모본왕은 본의 아니게 이 분기점에 서있으면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조선조의 이첨이라는 사람은, 《동국통감》이란 책에서 모본왕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군신은 한몸이라서 마땅히 예로 대하고 은혜로 사랑해야 하는데, 해우는 이토록 흉칙하고 사납게 굴었다. 그런 까닭에 간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간한 것은, 분명 위태로움을 보면서도 목숨을 내던지고 몸을 희생하여 일을 이룬 것인데, 그저 자기의 뜻을 거스르는 것만 미워할 뿐,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히 어려운 데서 나옴을 알지 못하였으니, 예로부터 크게 무도한 임금이 아닌 이상에야 간하는 신하를 경솔하게 죽이는 이가 없었다. 진(陳) 영공(靈公)이 예야(洩冶)를 살해하고, 진 후주(後主)가 부재(傅縡)를 살해했으며, 당 희종(僖宗)이 상준(常濬)을 살해한 것은 모두 곧 망하게 된 때에 있었던 일로, 《춘추》와 《강목》에서 그 일을 직필로 기록하여 그 망하게 된 소이를 드러냈다. 해우도 또한 오래지 않아서 자신은 시해되고 자식은 폐위되었으니, 천하의 나라 가진 자는 마땅히 이것으로 흥망을 점쳐야 할 것이다.”

 

아직 유교가 정착되지 않았던 고대사회를, 유교에 물든 근세의 시각으로 평가하자면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서로의 가치관과 성장배경이 틀린데,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왕이 지배하느라 왕에게 그렇다할 대꾸 한번 못해보던 이 나라에서

지금은 대통령을 개나 쥐에 비유하는 판국이 되기까지 대체 몇년이나 걸렸던가?
한세기도 안 된 지금에 이렇게 변했는데, 천년이나 전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우리 시각에서 저들을 본다면 분명 그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대무신왕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영토를 넓히고, 필요할 때는 백성을 구휼해주기까지 했던

모본왕이 그저 단순한 폭군으로 기록될수는 없으리라 본다.

 

하지만 모본왕이라는 왕의 행동은, 왕의 권위라고 하기엔 용납되지 못할 행동이 많았다.

적어도 그 시대. 왕의 권한이 아직 여러 귀족들을 찍어누를만큼 강성하지 못했던 시대에.

왕의 권위를 위해서 모본왕은 귀족들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수고(?)를 서슴치 않으셨고,

이 수고 덕분에 제대로 수명 못 누리고 일찍 비명에 가신 것이라 하겠다.

아버지 대무신왕같은 카리스마나, 삼촌 민중왕같은 유연함이

모본왕에게 반의 반만이라도 있었다면 또 모르겠다만,

왕에게는 정치적인 카리스마와 함께, 신하들과 공존할수 있는 노련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은 절대군주이든 입헌군주이든 마찬가지로 통용되는 법이다.

 

왕으로서 신하의 위엄이나 체면을 어느 정도는 존중해 주면서 정치를 해야 되는데,

사람을 밟아가면서 체면을 있는대로 깎아버렸으니

(두로같은 소심한 사람까지 꿈틀하게 만들 정도로)

신하의 권력을 그저 깎아내고 공포로 누르려고만 하면 이런 꼴을 맞이하지.

드문 일도 아니다. 신하들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정치를 잘하기도 하고

폭군이 되어 결국 쫓겨나기도 한 선례가 우리나라에 도대체 몇 개인가?

아무튼 정치라는 건 우리가 할게 못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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