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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5>제6대 태조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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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大王, 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太后扶餘人也. 慕本王薨, 太子不肖, 不足以主社稷. 國人迎宮繼立. 王生而開目能視, 幼而岐, 以年七歲, 太后垂簾聽政.]

태조대왕(太祖大王)<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모태후(母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사직을 주관하기에 부족하였다. 국인(國人)이 궁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은 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뛰어났다. 나이가 일곱 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궁(宮)이라고 하는 이름보다도, 궁왕의 시호인 '태조' 혹은 '국조'라는 단어는

식민사학자들의 주목을 끌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아시다시피, 한 나라의 왕으로서 

'태조'니 '국조'니 하는 시호는 대개 나라를 '건국'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의 건국자 추모왕은 그런 '태조' 칭호를 못 받고 6대나 내려와서야

비로소 '태조'의 칭호를 가진 왕이 나타났다는 것이 식민사학자들에게는 고구려 초기 왕대를 부정하기에

더없는 근거였다. 물론 이건 《삼국지》및 《후한서》에서 왕망(王莽: BC. 45 ~ AD. 25) 때

이미 고구려가 중국과 충돌하는 기사 하나로도 그 근거를 상실한다

(흉노를 칠 원병을 고구려에 요청했다가 개피본 이야기. 유류명왕편에서 말했었던).

 

식민사학자들이 고구려 초기 왕대를 깎아내렸다고 미친 소리는 집어치우고서도,

왜 고구려에서는 초대 추모성왕 대신 6대 궁왕에게 그런 칭호를 주었지? 고구려의 왕실 계보를 뒤져봤더랬다.

우선 고구려의 초대 국왕은 추모왕이고, 그 추모왕에게는 예씨 소생의 맏아들(친자) 유류와,

소서노 소생의 양자 비류ㆍ온조가 있었고, 맏아들 유류가 동명왕의 뒤를 이어 2대 유류왕으로 즉위했으며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백제를 세웠다.) 유류왕에게는 맏아들 도절과,

둘째 해명, 셋째 무휼, 넷째 해색주, 다섯째 여진, 그리고 여섯째로 '재사'라는 아들을 두었다.

 

자식복 지지리도 없던 유류왕의 아들들 중 도절(병사), 해명(자살), 여진(익사)은 일찍 죽고,

셋째 무휼이 3대 대무신왕으로 즉위한다. 대무신왕이 죽고 그의 아우 해색주가 4대 민중왕으로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이 민중왕 다음으로 5대 모본왕으로 즉위해서

이리저리 까불다가 두로에게 칼맞고 죽었다. 그리고 모본왕의 태자 익을 제치고 유류왕의 손자 궁이 즉위한 것인데, 

사실 나랏사람들이 모본왕 사후 그 태자를 제치고 다른 왕족의 아들인 궁왕을 추대했다는 것은 

조선조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폐위당한 뒤에도 그 세자나 대군들을 아버지와 함께 내쳐서 귀양갔으니,

피살당한 모본왕의 태자가 왕위에 못 오른 것도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태자가 불초하다고 하면,

다른 왕족을 시켜도 될 것을 왜 하필 7살짜리 코흘리개에 불과한 어린 왕자를 왕위에 앉혔던지.

더구나 재사는 왜 자신이 왕이 되기를 사양했던거지?

 

특이하게도 궁의 어머니, 즉 재사의 부인은 부여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태조왕이 즉위할 당시의 나이가 7살이고, 서력으로 따지면 AD. 53년인데, 53-7=46으로

왕이 태어난 것은 민중왕 3년(AD. 46년), 부여와 전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선대 대무신왕 때 이르러서 부여의 많은 귀척들이 고구려로 망명해와서 살고 있었다.

재사의 어머니 역시 그런 부여의 귀척들과 함께 고구려로 와서 살다가, 왕족 재사와 혼인하여 궁을 낳았다.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大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ㆍ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ㆍ皁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ㆍ皁衣先人同列.]

왕의 종족(宗族)은 그 대가 모두 고추가(古雛加)를 칭한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기에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해도 적통대인(適統大人)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고 또한 종묘를 세워 영성과 사직을 제사지낼 수도 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약을 맺어 고추(古雛)의 호가 더해졌다. 여러 대가 또한 스스로 사자(使者)와 조의선인(皁衣先人)을 두는데 이름은 모두 왕에 달하니 경대부(卿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으며, 회동하여 앉고 일어설 때 왕가의 사자나 조의선인들과는 동렬이 되지 못한다.

《삼국지》 권제30, 위서제30, 오환ㆍ선비ㆍ동이열전제30, 고구려조

 

태조왕의 아버지 고재사는 《삼국사》 기록상으로는 고구려의 왕족,

유리왕의 왕자로서 봉호는 고추가였다. 고구려에서는 왕족들에게 이 작호를 주었고,

품계로는 고려나 조선의 대군(大君)ㆍ원군(院君)쯤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삼국지》에는 대체로

계루부뿐 아니라 선대 왕족(졸본부여계 왕족?)이었다는 연노부의 적통대인이나

왕가의 사돈(외척)인 절노부에 속한 사람들이 받은 것으로(멀리는 흉노, 가까이는 백제처럼

고구려에도 '왕비족'이 존재했었음), 외국에서 귀빈이 오면 그 귀빈들을 접대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ㅡ

는 것이 《후한서》의 부연설명이다.(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라면 부여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대무신왕의 부여 망명객 우대의 일환으로, 재사가 부여인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궁왕 때에 이르러 다시 고(高)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해(解)씨였던 동명왕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뒤 처음 고(高)라는 성씨를 썼지만,

유류왕 때에 갑자기 도로 해(解)씨를 쓰기 시작하더니, 대무신왕과 민중왕, 모본왕을 거치고

궁왕 때에 다시 고씨로 되돌렸던 것이다. 이 사실이 그에게 국조왕의 칭호를 부여하게 하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또한 부여인 태후가 섭정했다는 이야기에서 보여주듯,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섭정',

즉 수렴청정을 받았던 왕이 바로 고구려 태조왕이기도 하다.

('왕과나'에 나오는 성종도 어려서 즉위하는 바람에 할머니 정희대비가 수렴청정했었지)

고구려 태조왕이나, 신라의 진흥왕과 혜공왕도 그 어머니 즉 태후가 섭정했고,

고려 목종이나 충목왕도 그러했다. 조선이라면 뭐, 수렴청정의 대명사로 여인천하에서

명종의 어머니로 한 카리스마 날리시던 문정왕후 윤씨도 계시지 않은가.

 

허나.... 수렴청정, 즉 섭정이라는 제도의 단점은, 왕권이 쇠약해지고 외척이 득세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왕조국가에서 왕의 권한이 약해진다는 것은 곧 신하의 권한이 강해진다는 의미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역성혁명이라는 왕조교체의 사태로까지 치닫는 수가 있다.

 

우리 나라나 일본의 국가발달상이 중국과 구별되는 점인데,

왕권이 신권보다 약해지는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치체제가 대부분 역사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세를 왕이 아닌 그 측근이 쥐고 있기에, 왕이라는 존재는 유명무실해지고 그 틈을 이용해 외척이 득세한다.

그 외척이 왕을 등에 업고 독재를 행한다면(조선조 말년의 세도정치나 흥선대원군 집권기처럼),

왕조국가의 체제 근간은 흔들리기 마련.(좀더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던지

그래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라면 또 모르지만 대개 그런 일은 거의 가뭄의 콩나듯

지극히 드문 현상이었기에.)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외척의 득세'까지는 아니어도

'왕의 권위 실추'운운한 말에 대해서는,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염두에 두시기를.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蝗害穀.]

3년(AD. 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서 메뚜기[蝗]가 곡식을 해쳤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궁왕의 업적은 정복사업, '전쟁'과 관련된 것이 유난히 많다.

고구려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던 것하며(94년) 오래 살았던 것도 있고

(113세까지 살았다고 하니까), 그래서인지 태조왕이라는 왕이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었는지

의심스러워하긴 했으나, 《삼국지》ㆍ《후한서》 및 《위서》 등의 중국 기록에서 태조왕의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로 일단, 그 업적에 대한 한 신빙성이 높은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삐딱하게 적은 게 꽤 많다. 태조왕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겼다."고 했는가 하면, "성격이 포악하다"고도 해놨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눈 동그랗게 뜨고 나 쳐다보고 있으면 무섭긴 하지)

실제로 궁왕 때에 한조와 자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빼앗았던 기록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즉위 3년 봄 2월, 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으라 명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물론 이때는 아직 열살이니까 태후의 뜻이라고 해도 되겠지). 그런데 요서라면... 

벌써 요서 지역이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는 뜻인가?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4년(AD. 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옥저는 그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서 이름이 동옥저, 북옥저 혹은 남옥저 등으로 다양했는데,

추모왕 때에 이미 북옥저를 정벌하여 영토로 만든바가 있고, 이때 다시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고구려에 복속시켰다.

('옥저'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단재는 '숲'을 가리키는 만주어 '워지'의 음역이라 하셨다.)

위치는 중국측 《후한서》 동이전에 기록된 바 고구려 개마대산(盖馬大山)의 동쪽이었고, 

영토는 아마 지금의 함남 고원ㆍ영흥에서 경성 이남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닿아있으며, 동쪽으로는 거대한 바다에 막혀 있었다.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어 그 길이는 1천 리,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한 지세, 땅이 좁다보니

큰 나라 사이에 끼여 이리저리 치이고 살았다. 신라 혁거세왕에게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기도 하고 

후한 광무제로부터 옥저후(沃沮侯) 책봉을 받는 등 나름 살아남으려고 아둥바둥거렸지만 

결국 고구려에게 멸망당한 딱한 나라.(이노우에 야스시의 <누란>에 나오는 누란국처럼) 《삼국지》에 보면

고구려 조정은 동옥저의 대인(大人)을 고구려의 관직인 사자(使者)로 임명하고 맥포(貊布)나 반어피(물개가죽),

소금과 해초류 같은 특산물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며, 때로 옥저의 미인을 데려다 고구려 귀척의 첩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동옥저를 차지한 고구려인들 앞에 드넓게 펼쳐진 저 푸른 동해 바다(고구려 방언으로 바다를 내미라고 불렀다),

그리고 낙랑과의 경계에 놓인 넘실거리는 살수. 고구려인들에게 바다란 어떤 의미였을까?

아침이 되면 항상 새벽해의 황금빛으로 물드는 곳. 드넓은 초원처럼 세상의 저 끝까지 평평하게

이어져 있는듯 보이지만, 발 빠른 말로도 달릴수 없고 수레도 가라앉아버리는 곳.

가물어도 마르거나 닳지 않으면서 얼지도 않고 변함없이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그래서 어쩐지 공포스럽기까지 해보이는 저 바다가.

 

만주와 연해주를 석권하고 저 멀리 요서와 북경에까지 고구려의 깃발을 꽂았던 광개토태왕의 업적이나,

그런 광활한 영토에 대한 향수에서 나온 거의 '광적인' 수준에 가까운 고구려에 대한 한민족의 애정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광개토태왕이 대륙을 정벌했고 저 대륙이 우리 영토에 있었다고 해서,

저 대륙에만 목맬 필요는 없다고 본다.(미수복지역인 간도 땅에 대해서는 예외)

우리가 넓혀야 할 영토가 대륙에만 있는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저너머 바다도 있고

(바다 하니까 태안반도쪽 생각이 나서 조금 암울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만) 하늘에는 우주도 있는데....

고구려의 해상권역사에 대해서는 감히 아는 바가 없어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다. 우리가 넓혀야 할 땅은 저 대륙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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