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8>제6대 태조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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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
일본 속담이다. 텐쇼 10년(1581년), 일본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던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그가 두려워한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가신이었다. 아케치 미츠히데라는 가신이,
노부나가가 행군 도중 머무르고 있던 혼노지를 급습하고 절을 불살라 그를 할복자살하게 만든 것이다.
가장 위험한 적은 언제나 바깥에 있지 않고, 항상 자기 옆에 따라다닐수도 있다는
이런 기분나쁜 교훈은, 일본에서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속담으로 변해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본 하나뿐이겠나. 따져보면 우리 역사에서도 적은 항상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조선이 멸망할 때 왕검성 안의 니계상 삼이 한에 투항할 것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왕인 우거왕을 죽임으로서 시작된 내분이,
결국 고조선이 한의 손에 멸망당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내부에서 적이 생기면 그것은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나에게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내 약점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적이든 아군이든 누군가에게 내 약점을 들키는 것은 무척이나 곤란하고 기분나쁜 일이다.
[七十一年, 冬十月, 以沛者穆度婁爲左輔, 高福章爲右輔, 令與遂成, 參政事.]
71년(123) 겨울 10월에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궁왕은 이제 내정에도 신경을 많이 쓰기 시작한다.
왕제 수성에게 군국의 일을 맡기더니, 이제 목도루와 고복장을 각기 좌보와 우보로 삼게 하는
트로이카[三頭] 체제를 고구려 조정의 정계에 확립한다. 수성의 세력이 커지고 있음을 알고
그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안정복 영감은 궁왕이 너무 늦게 대책을 세웠다며 비판하신다.
고구려왕은 용병(用兵)을 좋아했지만 나이가 쇠하여 국사에 게을렀다. 수성은 왕의 큰 아우로서 날래고 사나우며 싸움을 잘해서 여러 차례 놀라운 공을 세웠다. 왕은 그를 매우 사랑하고 의지하여 나라를 영위하고자 국정을 맡겨 다스리게 한 지가 3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가 완고하고 기가 세서[强梁] 다스리기 어려운 기운을 일하는 동안 분명 많이 보였을 텐데, 또 두 사람을 정사에 참여시켜 그 권세를 나누고자 하니, 아아, 그것은 이미 늦었다. 이걸 미리 쉽게 이걸 분변하지 못하고 형세가 이루어진 뒤에야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니,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어질다면 어륙(魚肉)이 될 것이요, 어질지 못하다면 족히 그 악을 방조하기에 알맞을 것이다. 저 두 사람이 장차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이미 늦은 이상 태조왕이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
좌보와 우보로 임명된 목도루와 고복장이 만약 어질다면 틀림없이 수성에게 죽을 것이고,
어질지 못하다면 분명 수성에게 붙어서 태조왕에게 덤벼들기나 할 것이라고.
두 사람의 처신은 과연 어떻게 돌아갈까나?
[七十二年 秋九月, 庚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漢朝貢. 十一月, 京都地震.]
72년(124) 가을 9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한에 보내 조공하였다. 11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일식과 지진.
태조왕 72년의 그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그저 단순한 기상현상으로 그치지 않았다.
훗날 그 무렵의 역사를 읽는 후세 사람들에게 그것은,
나라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 엄청난 사건을 예고하는 전주곡이기도 했다.
태양은 고대 세계에서 왕과 그 힘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왕이 있는 서울을 왕도(王都)라고도 부르며, 나라의 중심으로 여긴다.
왕을 상징하는 태양이 어둠에 잠식당하고, 왕이 있는 수도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이 곧 하늘이라 여기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로 여겨졌을까?
[卒本城連靺鞨<或云今東眞>. 羅第六祇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졸본성(卒本城)은 말갈(靺鞨)<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했다>과 닿아 있다. 신라 제6대 지마왕(祇麻王) 14년 을축(127)에 말갈병이 북쪽 경계에 많이 들어와서 대령책(大嶺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왔다.
《동명기(東明記)》인용
《삼국유사》 권제1, 기이1, 말갈발해
《동명기(東明記)》는 제목상 고구려의 건국조 동명성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문헌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지만,
《삼국유사》에 이렇게 딱 한 번 짧게 인용되어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오늘날로서는 알 길이 없다.
졸본성은 고구려의 첫 수도 홀승골. 그리고 이곳이 '말갈'과 맞닿아 있었다고 《동명기》는 저술했는데,
여기서 일연 땡중이 달아놓은 주석으로는 고려 당시의 동진(東眞)ㅡ그러니까 옛 여진족 왕조였던
금(金)의 장수 포선만노가 지금의 두만강 북쪽 동간도 땅에 세웠던 나라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대개 영양왕 이전의 '말갈'은 예족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아방강역고》 및 단재 선생의 주장을 상기하면
예족(가말갈)의 범위는 서쪽으로 홀승골(랴오양)에서 동쪽으로 간도까지 넓게 퍼져 있었을 거라 혼자서 짐작해본다.
그리고 그들이 이하 강가까지 넘어왔다고 했으니 남쪽으로는 강원도까지도 예족이 지배하고 있었으리라.
물론 북쪽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있지만.
[八十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 與左右宴. 於是, 貫那于台彌儒·桓那于台菸支留·沸流那皂衣陽神等, 陰謂遂成曰“初, 慕本之薨也. 太子不肖,羣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欲使兄老弟及. 今王旣已老矣, 而無讓意, 惟吾子計之.” 遂成曰 “承襲必嫡, 天下之常道也. 王今雖老, 有嫡子在, 豈敢覬覦乎?” 彌儒曰“以弟之賢, 承兄之後, 古亦有之. 子其勿疑.” 於是, 左輔沛者穆度婁, 知遂成有異心, 稱疾不仕.]
80년(132) 가을 7월에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이때 관나(貫那)의 우태 미유(彌儒) · 환나(桓那)의 우태 어지류(菸支留) · 비류나(沸流那)의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은밀히 수성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였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려 했으나 재사가 자신은 늙었다며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가 잇게 하기 위한 것이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당신은 헤아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뒤를 잇는 것은 반드시 맏아들이 하는 것이 천하의 상도(常道). 왕이 지금 비록 늙었긴 하지만 적자가 있는데 어찌 감히 엿보겠느냐?”
미유가 말하였다.
“아우가 현명하여 형의 뒤를 잇는 것은 옛적에도 있었소. 당신은 의심하지 마시오.”
이로써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이때에 이르러.
내부의 적이 싹트고 있었다.
태조왕의 왕제 수성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은밀히 태조왕에 대한 모반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나와 환나, 비류나는 모두 고구려의 부(部) 이름이다.
태조왕 자신의 업적을 보자면, 즉위 이후에 동옥저며 갈사국을 복속시키고,
책성 지역을 직접 돌아보고 부여의 유화사당에 제사지내는 등의 왕권강화정책을 펼쳤다.
대개 이런 왕권강화정책 속에는, 세력이 약해진 신하들도 생기는 법이다.
5부연합체제로 시작한 고구려 왕실의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들과,
그 정책에 반발한 5부의 귀족들이, 태조왕을 몰아내려는 정변 계획을 세웠다.
순제(順帝) 영화(永和) 원년(136) 정월에 부여왕이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하자 순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牴戱)를 보이게 하고 전송하였다.
《후한서》
한편 부여는 후한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왕이 직접 후한의 수도 뤄양을 방문한다.
후한의 순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여기서 '각저' 즉 씨름을 벌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왜냐면 그건 중국에서 고려기(高麗技)라고까지 불린, 고구려 고유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씨름도.>
씨름. 그것은 두 사람이 상대의 다리와 허리에 감은 '샅바'를 맞붙잡고 힘과 재주를 이용해서 상대 선수의 신체 부분을 바닥에 먼저 닿도록 넘어뜨리면 이기는 경기를 말한다. 한자로는 각력(角力), 각저(角抵), 각희(角戱), 상박(相撲), 쟁교(爭校), 졸교(拙校), 환교(環校) 등으로 적고, 치우희(蚩尤戱)라는 이름도 있는 걸로 봐서는 예로부터 동이족 계열의 기예로서 중국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각저의 각은 '겨루다', '다투다'라는 뜻이고 저는 '치다', '때리다', '맞서다'라는 뜻이니까 서로 맞붙어 치고 밀어내는 경기였을 텐데, 우리말로 '씨름'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오래된 표기가 조선조 《석보상절》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씨름'이라는 우리말의 어원과 관련해서 지금 경상도 지방에서 쓰는 말중에 '서로 막 버티고 힘겨룬다'는 말을 '씨룬다'고 하고, 꽤 오래 버티는 것을 보고 '데게 씨루네'라고 하는 것에서 착안해 '씨룬다'라는 동사가 명사로 변해서 '씨름'이라는 말이 되었다고도 한다. 몽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우리말로 '다리'를 뜻하는 말이 몽골어로는 '실비'인데 이 단어의 어근인 '실'이 우리말 씨름의 어근인 '실ㅡ'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다. 몽골에도 우리나라 씨름과 비슷한 것이 있어 이름을 '부흐' 또는 '바릴토호'라고 하는데 우리말의 '발[足]'과 비교된다.
우리나라에서 '씨름'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자료는 5세기 집안 각저총(씨름무덤)과 장천 1호분에 그려진 씨름 그림인데, 그 중에서도 각저총의 것이 제일 유명하다. 나무 아래서 두 사람이 서로 맞붙어서 씨름을 하고 있고 오른쪽에서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데(심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 모두 오늘날의 씨름처럼 양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특히 고개를 상대방 오른쪽에 두고 있는데 이건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를 제외한 거의 전 지역에서 행해지는 왼씨름 형태의 것이다. 조선조 김홍도가 그린 것과도 비슷하다.
(여담으로 씨름할 때에 허리하고 한쪽 다리에 두르는 '샅바'라는 말은 우리말로 '사타구니'를 의미하는 '샅'과 무명으로 굵직하게 만든 줄을 가리키는 '바'라는 말이 합쳐진 것. 황해도나 평안도, 함경도에선 '살에 대는 바'라고 해서 '살바'라고 불렀단다.)
<고구려 무용총 수박도>
씨름 말고도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무예로 유명한 것은 수박(手搏)이 있는데,
단재 선생은 이 수박은 동양 삼국, 즉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모든 맨손무예의 시초라고까지 단언을 하셨다.
그림은 고정되어 있어서 수박이 대체로 어떤 무예였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일단 고려나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고려 때에 무신난이 일어난 계기가 '수박희' 때문이었다는 것은 《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조선조에도 왕궁을 지키는 겸사복들에게 수박을 가르치게 했다. 지금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무예들 중에는
'수벽치기'라는 것이 수박과 가장 가까운 형태라고 알려져 있단다.
부여와 고구려는 서로 같은 언어와 풍속을 공유한다고 했으니 부여와 고구려가 다 마찬가지로
씨름과 수박이라는 공통의 무예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고, 씨름은 특히 중국인들에게 '고려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질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특기(?)가 되었다.
이 무렵 부여를 다스리고 있던 왕 위구태에 대해서, 단재 선생은 고구려의 차대왕 수성과 마찬가지로
가장 무예를 숭상했던 왕이며, 그가 다스리던 시대의 부여는 건국조 해모수나 해부루 이후로
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였다고 평가한다. 무려 2만이나 되는 기병을 일으켜 한의 현도군을 공격할 정도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부여에게 눌려, 한조에서는 종실(宗室)의 딸까지 아내로 내주면서
부여를 고구려와 선비에 맞설 혈맹으로 삼고자 했다고 말이다. 기록된 것은 많지 않지만,
이 무렵 부여는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八十六年, 春三月, 遂成獵於質陽, 七日不歸, 戱樂無度. 秋七月, 又獵箕丘, 五日乃反. 其弟伯固諫曰 “禍福無門, 惟人所召. 今子以王弟之親, 爲百寮之首, 位已極矣, 功亦盛矣. 宜以忠義存心, 禮讓克己, 上同王德, 下得民心, 然後富貴不離於身, 而禍亂不作矣. 今不出於此, 而貪樂忘憂, 竊爲足下危之.” 答曰 “凡人之情, 誰不欲富貴而歡樂者哉? 而得之者, 萬無一耳. 今吾居可樂之勢, 而不能肆志, 將焉用哉?” 遂不從.]
86년(138) 봄 3월에 수성은 질양(質陽)에서 사냥하면서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놀고 즐기는데 헤아림이 없었다. 가을 7월에 또 기구(箕丘)에서 사냥하고 닷새 만에 돌아왔다. 그 아우 백고(伯固)가 간하였다.
“화복(禍福)에는 문이 따로 없고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왕의 아우의 몸으로 모든 관리의 으뜸이 되어, 지위가 이미 높으며 공로 또한 큽니다. 마땅히 충의로써 마음을 지키고, 예절로써 사양하여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위로는 왕의 덕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재난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즐거움을 탐하여 근심거리를 잊고 계시니, (저는) 은밀히 형님을 위하여 위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성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람의 심정에, 부귀하면서 환락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러나 그걸 얻는 자는 만 명 중에 한 명 있기도 드물다. 지금 내가 즐길수 있는 형편인데 뜻대로 할 수 없다면, 그걸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라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이때에 이르러 수성은 점차 전횡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이.
아우 백고가 간언하는 것도 듣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냥만 하고 있었다.
단순해보이지만 사냥은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다.
몽골의 군대가 그랬듯, 전술을 익히는데 사냥만큼 좋은 훈련도 없는 것이다.
사냥을 즐기던 조선 태종에게 대간들이 사냥을 줄이라고 했을때에 태종이
"사냥은 나 하나만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군사 훈련을 위한 것이다."
라고 그랬다던가. 어딘가 조금 방탕해보이는 수성의 사냥은,
만의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키기 위한 사병 훈련이었을수도 있다.
형이 양위할 생각이 없다면, 힘으로라도 왕좌를 빼앗겠다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부터 사병을 길러놓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九十年, 秋九月, 丸都地震. 王夜夢, 一豹齧斷虎尾. 覺而問其吉凶, 或曰 “虎者百獸之長, 豹者同類而小者也. 意者, 王之族類, 殆有謀絶大王之後者乎.” 王不悅, 謂右輔高福章曰 “我昨夢有所見, 占者之言如此. 爲之奈何.” 答曰 “作不善, 則吉變爲凶, 作善, 則災反爲福. 今大王憂國如家, 愛民如子, 雖有小異, 庸何傷乎?”]
90년(142)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왕이 밤에 꿈을 꾸는데 한 표범이 범 꼬리를 물어 끊었다. 깨어나서 그 길흉 여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범은 백수의 으뜸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이나 작은 것입니다. 그 뜻은 왕의 족류로서 태왕의 후손을 끊으려 음모를 꾸미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은 불쾌하여 우보 고복장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었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이와 같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고, 착한 일을 하면 재앙이 거꾸로 복이 됩니다. 지금 태왕께서 나라를 집처럼 근심하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국내성 북쪽 환도산성의 왕궁터. 환도산성은 고구려의 수도을 보위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환도에 때아닌 지진이라.
왕이 머무는 나라의 수도를 지키는 환도에 지진이 일어났다고ㅡ.
그리고 왕의 불길한 꿈.
표범이 범의 꼬리를 깨물어 자르는 꿈ㅡ.
이 대목에 이르러서, 예전 고구려 왕에게 공물로 바쳐졌던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부여 사신이 바친 털이 밝고 덩치가 크기는 하지만 꼬리가 없던 범과.
동해곡에서 바친 털빛이 붉고 꼬리 길이가 무려 9척이나 되는 표범.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왕이 꿈에서 본, 범의 꼬리를 깨물어 자르는 표범과.
수도를 방위하는 산성 위나암성ㅡ환도성에 일어난 지진까지.
그것은 아마도, 무언가 긴박한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하늘의 계시였던 걸까.
수도를 뒤흔든 지진과 같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송두리째 흔들 엄청난 모반의 조짐.
모든 산짐승의 왕이라는 범의 꼬리를 물어 잘라버리는 표범의 존재.
누군가가 이 나라를 송두리째 흔들며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진정으로 하늘이 왕에게 말하고자 하는 참뜻은 아니었을까 한다.
[九十四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之下, 謂左右曰 “大王老而不死, 吾齒卽將暮矣. 不可待也. 惟願左右爲我計之.” 左右皆曰 “敬從命矣.” 於是, 一人獨進曰 “向, 王子有不祥之言, 而左右不能直諫, 皆曰敬從命者, 可謂姦且諛矣. 吾欲直言, 未知尊意如何.” 遂成曰 “子能直言, 藥石也. 何疑之有?” 其人對曰 “今大王之賢, 內外無異心. 子雖有功, 率羣下姦諛之人. 謀廢明上, 此, 何異將以單縷繫萬鈞之重 而倒曳乎? 雖復愚人, 猶知其不可也. 若王子改圖易慮, 孝順事上, 則大王深知王子之善, 必有揖讓之心, 不然則禍將及也.” 遂成不悅, 左右妬其直. 讒於遂成曰 “王子以大王年老, 恐國祚之危, 欲爲後圖, 此人妄言如此, 我等惟恐漏洩, 以致患也, 宜殺以滅口” 遂成從之.]
94년(146)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 밑에서 사냥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태왕이 늙도록 죽지 않고, 내 나이도 장차 저물어 간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주위에서 나를 위하여 꾀를 내어라.”
주위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삼가 명을 따르겠나이다.”
이때 한 사람이 홀로 나아와 말하였다.
“저번에 왕자께서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실 때, 주위 사람들이 직간하지 못하고 모두‘삼가 따르겠나이다.’라 말했으니, 간사하게도 아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른 말을 하려고 하는데, 높으신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대가 직언을 할 수 있다면 약석(藥石)이 되는 것이니, 어찌 의심을 하겠느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지금 대왕께서 어지셔서, 서울과 지방에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은 비록 공이 있으나 무리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어진 임금을 폐하려 모의한다면, 이것은 한 가닥의 실로 1만 균(鈞)의 무게를 매서 거꾸로 끌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은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왕자께서 의도와 생각을 바꾸셔서 효성과 순종으로 임금을 섬기면, 대왕께서 왕자의 착함을 깊이 알고 반드시 선양할 마음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수성은 기뻐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 곧음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언하였다.
“왕자께서는 대왕이 늙었기 때문에 임금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뒤를 이을 것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언하니 저희는 누설되어 화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죽여 입을 막아야 합니다.”
수성은 그 말을 따랐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어떤 쿠데타든지,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왕 자격이 없다. 없다면 왜 없는가.
자신은 지금의 이 왕과는 어떻게 다른가.
그런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켜야만 반동 쿠데타를 일으켜도 성공하는 법이다.
어차피 그게 반정인지 쿠데타인지는 나중에 역사 기록하는 사가들이 알아서 적을 노릇이고.
그때 사가들이, 이것은 명백한 '반정'이었노라고 적으려면,
그 쫓아낸 왕이 어느 정도는 흐리멍텅한 구석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압력이 작용하지 않는한 대부분은 쿠데타로 적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조가 단종에게 양위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어떻게든 사양하는척, 어린 왕을 위하는척 하다가 못이기는척 덥석 받는등,
세조 자신이 그렇게나 티를 안내려고 했는데도 사람들이 그걸 모두 쿠데타라고 했다.
세조가 만약 김종서같은 단종의 신하들을 죽이지만 않았던들,
아니 그런 것은 고사하고, 세조가 죽인 그 신하나 단종에게 조금이라도 티끌이 있었던들,
사가들이 그걸 쿠데타라고 적었겠는가?
정말 야심이 큰 사람은 그런 야심을 찍어눌러서 감추고 숨길줄 안다.
왕위라는 것을 힘만으로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급한 마음에 군대를 일으켜봤자, 잘해야 나중에 역사에서 평가를 좀 덜 받고,
실패하면 역적으로 낙인찍혀서 씨까지 완전히 말린채 두고두고 온갖 욕은 다 먹어야 한다.
수성에게 좀더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말했던 그 사람은 아무래도,
뭔가 그런 쪽으로 일가견이 있어서 그랬던 모양인데,
궁왕으로부터의 평화로운 양위를 종용해야 한다는 그런 간언마저도 무시해버리고.
수성은 고구려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요동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94년(146)
궁왕은 수성의 그런 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한을 공격하는데 주력했고,
서안평에서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冬十月, 右輔高福章言於王曰 “遂成將叛. 請先誅之.” 王曰 “吾旣老矣. 遂成有功於國, 吾將禪位. 子無煩慮.” 福章曰 “遂成之爲人也. 忍而不仁. 今日受大王之禪, 則明日害大王之子孫. 大王但知施惠於不仁之弟, 不知貽患於無辜之子孫. 願大王熟計之.”]
겨울 10월에 우보 고복장이 왕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먼저 죽이십시오.”
왕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다. 수성이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나는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다. 그대는 번거롭게 걱정하지 말라.”
“수성의 사람됨이 어떻습니까.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오늘 태왕의 선양을 받고 내일 태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태왕께서는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 베풀 줄은 아시면서, 무고한 자손에게 화가 미칠 것은 왜 모르십니까. 태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소서.”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94년(146)
고복장의 말은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성급하게 왕위를 빼앗을 생각보다는 겉으로라도 생각이 없는척하면서
왕의 눈에 들어 환심을 사서 좀더 평화적인 무혈혁명으로
궁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자고 하는 간언도 무시해버리는 잔인한 성품의 수성이고,
그런 수성이 왕위에 오른다면 궁왕이나 그의 자손이 어떻게 될지,
고복장에게는 너무도 뻔하게 머릿속에 그려졌을 터이다.
[十二月, 王謂遂成曰 “吾旣老, 倦於萬機. 天之曆數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允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其卽位, 永孚于休.” 乃禪位, 退老於別宮, 稱爲太祖大王.]
12월에 왕은 수성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어 모든 정사(政事)에 싫증이 났다. 하늘의 운수는 네 몸에 있다. 더욱이 너는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軍事)를 총괄하여 사직을 오래 보존한 공이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내가 맡기는 이유는 사람을 얻었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왕위에 올라 영원히 신의를 얻어 경사를 누려라.”
그리고 선위하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이라 칭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94년(146)
하여튼 피는 못속인다.
궁왕이나 수성에게는 모두 그들을 위해 간언하는 신하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면서 서로가 도움이 되는 방안을 내놓으려 했는데,
왕도, 그 아우도 모두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평화적인 정권 교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른채,
야심만 가득한채 먹이만 서둘러 채가려는 매처럼 성급한 자와,
그런 매 앞에서 그저 비둘기처럼 감싸는 것이 최고의 인(仁)이라고 여기는 생각 짧은 왕.
결국 왕은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하고야 만다.
못된 이무기한테 여의주 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별궁에 들어가 별궁 늙은이를 자처하다니.
어쨌거나 재위 94년에 이르러, 태조왕이 물러난다. 이때 궁왕의 나이는 104세.
백두산에서 잉어를 잡아다 산삼탕에 곁들여 잡쉈는지,
사냥할 때마다 잡아오시던 노루고기에다 호랑이 골수를 부어 드셨는지.
나이에 맞지 않는 아주 펄펄 끓어넘치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대통령 임기로만 치면 우리나라에서 이 아무개, 박 아무개 대통령 못지 않을
우리 역사상 최장기 장기집권기록을 달성하신 궁왕께서.
이때에 이르러 겨우 왕궁 내주고 별궁 상왕이 되신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8>제6대 태조왕(4)|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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