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9>제7대 차대왕
[次大王諱遂成, 太祖大王同母弟也. 勇壯有威嚴, 小仁慈. 受太祖大王推讓, 卽位. 時年七十六.]
차대왕(次大王)의 이름은 수성이고 태조대왕의 친동생이다. 용감하고 굳세며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함이 적었다. 태조대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 때 나이가 76세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차대왕(수성왕).
휘는 수성(遂成) 또는 수(遂)라고도 하며, 고구려 제7대 태왕.
초대 동명왕의 아드님이신 유리왕의 손자이며, 제3대 대무신왕과 제4대 민중왕의 조카.
제5대 모본왕과는 항렬이 같으며, 제6대 태조왕의 손아래동생....
이라는 뼈대 굵은 집안의 왕손이시며, 공로 또한 높으시어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신출귀몰한 기습작전으로 한나라의 군사 2천을 죽이고
요동과 현도의 성을 싸그리 불바다로 만드실만큼 승전의 관록도 있는 장수이시며,
3형제가 모두 타고난 노익장을 유감히 과시하사 이번에 76세의 나이로 양위를 받아 즉위하신 분.
헌데 딱 한가지 흠이 있다면 인자함, 즉 인(仁)이라는 것이 이분한테 좀 부족하셨더라고.
인(仁). 즉 어진 마음.
군자로서 누구나 꼭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공자께서 주유열국 떠돌이 생활 하시면서
제후들 앞에서 그토록 열변 토해서 강조하시던 그 한 글자의 덕목.
그게 이 왕에게는 조금 부족했다고, 《삼국사》는 전한다.
즉위하셨을 때의 나이가 76세. 이때 태조왕의 나이가 100세.
형제 사이에 무려 24년의 차이가 있다.(뭐가 이래?)
이들의 아버지 재사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다.
《삼국사》에 기록된바, 태조대왕이 죽은 나이가 119세, 차대왕이 95세, 그 아우 신대왕이 77세.
이 세분의 할아버지이신 유리명왕께서 사망한 것이 AD. 18년의 일인데
이때에 태왕 3형제(;;;)의 아버지이신 재사가 태어났다고 쳐도,
(재사의 나이를 가장 젊게 볼때는 유리명왕이 죽던 그 해에 재사가 태어났다고 봐야 된다)
장남인 태조왕께서 태어난 때(AD.47)의 나이는 서른.
그러면 태조왕이 즉위하실 때 재사의 나이가 36세.
(왜 그가 즉위하지 않고 어린 아들이 즉위해야 했던 것일까.)
더구나 신대왕이 태어날 때(AD. 89)의 재사의 나이는 무려 72세라는 고령의 나이였는데....
이 재사라는 이 자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먹은 사람인걸까.
무슨 약을 그리도 많이 잡수셨길래 나이가 일흔이 다되도록 정정하신지 참.
(그 시대에 뭐 비아그라가 있었을리도 없고;;)
뭐였을까, 도대체?
고구려의 국왕들이, 그것도 궁왕 때부터 이다지도 장수를 하시는 이유는?
[二年, 春二月, 拜貫那沛者彌儒爲左輔.]
2년(147) 봄 2월에 관나패자 미유를 좌보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수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옆에서 도운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부터 벌였다.
[三月, 誅右輔高福章. 福章臨死嘆曰 “痛哉寃乎. 我當時爲先朝近臣, 其可見賊亂之人, 默然不言哉? 恨先君不用吾言, 以至於此. 今君甫陟大位, 宜新政敎以示百姓, 而以不義殺一忠臣. 吾與其生於無道之時, 不如死之速也.” 乃卽刑. 遠近聞之, 莫不憤惜.]
3월에 우보 고복장을 죽였다. 복장이 죽음에 임하여 탄식하며 말하였다.
“원통하구나. 내가 그 때 선왕[先朝]의 가까운 신하로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賊亂之人]을 보고도 어떻게 묵묵히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한스럽게도 선왕[先君]께서 내 말을 따르지 않아 이런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대[今君]는 이제 막 왕위[大位]에 올랐으니, 마땅히 정치와 교화를 새롭게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터인데, 불의로써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는구나. 나는 도(道)가 없는 때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겠다.”
하고는 처형당했다. 가깝고 먼 사람들이 듣고 모두 분해하며 또한 애석하게 여겼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2년(147)
그리고, 태조왕의 선위를 반대하며 자신을 죽일 것을 간했던,
태조왕의 측신이며 우보인 고복장을 죽여버린다.
《동국통감》에서 최보는, 이때의 고복장의 일을 두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더라.
복장은 당시 우보로서, 마땅히 조짐을 밝히고 잘 도모해서 쉬울 때에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작을 때에는 큰 일을 했어야 했다. 환도(丸都)에 지진이 있었을 때나 어떤 사람이 꿈을 점쳤을 때, 복장의 입장으로서는 말을 다하여 극진히 간했더라면 왕이 반드시 뉘우쳐서 깨달았을 것을 도리어 범연히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음탕한 자에게 화를 주는[福善福淫]' 것을 말하여, 아첨하는 말로 왕을 기쁘게 해서 왕으로 하여금 다시는 의심을 갖게 하지 못했으니, 뒤에 비록 수성을 죽이자고 청했다 하나 때는 이미 늦었더라.
라고.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秋七月, 左輔穆度婁稱疾退老, 以桓那于台支留爲左輔, 加爵爲大主簿.]
가을 7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칭하고 은퇴하였으므로, 환나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2년(147)
좌보 목도루(穆度婁)와 우보 고복장(高福章).
지금은 차대왕으로 즉위한 수성과는 한때 함께 고구려 정계의 '삼두체제'를 이끌었던 중신들이며,
또한 태조왕이 직접 임명한, 어떤 의미에서 태조왕의 최측근이기도 했던 자들.
양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성의 불법적인 '찬탈'사건 앞에서, 이들의 태도는 너무도 달랐다.
목도루나 고복장 모두 수성의 계획ㅡ태조왕에게서 왕위를 빼앗으려는,
수성의 그 시커먼 속내를 알면서도, 그 처신만큼은 서로가 기록 속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대개 왕위다툼, 옥좌라는 의자 하나를 놓고,
이미 그 옥좌에 앉은 자와 그 아래에서 빼앗아 앉으려는 자.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데,
서로의 힘차이가 어쩐지 분명해보일때,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은 크게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미유나 어지류처럼 빼앗으려는 자를 도와 옥좌를 비우는 것.
둘째는 고복장처럼 이미 옥좌에 앉은 자를 지키는 것.
셋째는 목도루처럼 이도저도 아닌채 어디로든 숨어버리는 것.
목도루는 처음 미유나 어지류같은 자들이 수성과 결탁할 때부터 그것을 알았지만,
그것에 대해서 고복장만큼의 적극적인 반발의사를 보이지는 않는다.
수성에게 모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때,
목도루가 취한 행동은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목도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수성이라는 저자와는, 저자가 왕이 되기 전부터 함께 정치를 했던 사이이고,그가 한과의 전쟁에 나가서 보여준 그 눈부신 활약을 눈으로 지켜본 자다. 서로 정치를 함께 한 동지인만큼, 그의 성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나아가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면 가만두지 않는 수성의 그 성급하고 불같은 성격도 잘 알았을터다. 그렇다면 그를 죽일 것을 간한 고복장이 수성에게 죽임당할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수성이 왕이 되면 고복장이 걱정한 것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란 사실도 불보듯 잘 알았을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수성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걸까.
한때나마 정치적 동지였던 수성의 그 성격을 잘 알았다면, 그가 어떤 권위라던지 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 경외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 그가, 조정의 원로대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태조대왕의 측근이었던 자신이나 고복장을 살려둘리가 없다는 것도ㅡ.
하지만 여지껏 태조대왕의 측근으로 살아왔던 자신이, 어느날 하루아침에 자신이 섬기던 왕을 갑자기 헌신짝 버리듯 등을 돌려버리기도 힘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지였던 고복장의 죽음 앞에서 그가 택한 길이란, 태조왕과 차대왕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채,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었으리라. 어쩌면 지금의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에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수 없을테니. 태조왕의 측근으로서 고복장만큼이나 좀더 적극적이었다면, 그래도 수성이 저런 식으로 왕위에 올라 태조왕의 측근을 죽이기까지 하지는 않았을테니.
목도루에 대해서 안정복 영감은 이런 말을 했다.
목도루는 난을 겪기 전에 놀라 물러났으니, 가히 명철한 선비라 할 만하다. 그러나 속된 세상을 도망쳐 멀리 떠나지 못하고 찬탈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다가 마침내 역적놈의 신하가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태조왕의 마지막 신하가 떠나고 그 자리를 차대왕의 측근이 메우게 되면서,
고구려의 조정은 거의 차대왕의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冬十月, 沸流那陽神爲中畏大夫, 加爵爲于台. 皆王之故舊. 十一月, 地震.]
겨울 10월에 비류나 양신(陽神)을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았다. 모두 왕의 오랜 친구들이다. 11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2년(147)
태조왕의 중신들은 죽거나 조정을 떠나고, 차대왕의 중신들이 그 자리를 꿰차니,
희비의 교차라는 것은, 차대왕이 즉위할 때의 신료들의 얼굴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차대왕의 편에서 그의 '거사'라는 이름의 반정을 도왔을 그의 측근들과,
태조왕의 편에서 차대왕의 계획을 저지하려던 신하들 사이의.
고구려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한 차대왕은 자신에게 거사를 종용했던 자들ㅡ
관나패자 미유, 환나우태 어지류, 비류나 양신 등의 소위 '공신(公臣)'들에게,
좌보며 대주부며 중외대부, 우태 같은 관직들을 수여한다.
(친절하게도 김부식 영감이 '왕의 오랜 친구들이라네.'하고 부연설명까지 달아주셨다)
[三年, 夏四月, 王使人殺太祖大王元子莫勤. 其弟莫德恐禍連及, 自縊.]
3년(148) 여름 4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莫勤)을 죽였다. 그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연이어 미칠까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일찌기 고복장이 내다본 앞날의 모습은 현실이 되었다.
고복장이 수성왕의 손에 죽고 그 이듬해,
수성왕은 자신의 조카이자 상왕의 원자인 막근을 죽인다.
어쩌면 자신을 제치고 태조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후보.
자신이 태조왕으로부터 왕좌를 반 빼앗다시피 해서 즉위하고도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걸까.
수성왕처럼 한때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자를 죽임으로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역사속에서 그리 드문 현상이 아닌,
너무도 흔해서 찾고자 하면 얼마든지 찾을수 있는,
정계에서는 거의 수학정석처럼 관습화되고 법칙화되어있는 흔한 현상이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도 그런 식으로 이승만에게 죽었지.
이때까지도 살아있던 태조왕은 머무르던 별궁에서 별별 꼴을 다 본다.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지)
자신의 신하들이 죽고 이 조정을 떠나더니, 이제는 자신의 아들들마저 죽는다.
(둘다 수성왕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
ㅡ수성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 반드시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이다.
이것은 고복장이 이미 예견한 터이다.
태조대왕이 정말 바보이던지 아니면 정말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수성왕이 자신의 아들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고복장의 말을 흘려들었을 리가 있나.
(정말 그랬다면 그건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것이지)
그래도 자신이 상왕이고 한때는 태자였던, 그래 왕위를 순순히 물려주신 형님의 아들들을
그렇게 죽였단 말인가. 정말 태조왕은 그 정도로 노망이 들어버린 것이었을까?
아니면 양위를 할 그 당시에 무슨 어쩔수 없는 불가항력이 작용했단 건가?
자신의 왕자들을 보호할 무슨 대책보장도 보험도 없는 졸속행정으로
개차반 스카(라이온킹에 나오는)같은 개차반같은 성격의 동생에게 양위하실만큼?
[論曰: 昔宋宣公不立其子與夷, 而立其弟. 繆公小不忍亂大謀, 以致累世之亂. 故春秋『大居正』 今太祖王不知義, 輕大位以授不仁之弟, 禍及一忠臣二愛子, 可勝歎耶!]
논하노니, 옛날 송(宋) 선공(宣公)은 아들 여이(與夷)를 세우지 않고 동생을 세웠다. 목공(繆公)은 작은 것을 참지 못해서 큰 뜻을 어지럽히고 여러 대의 환난을 가져왔다. 그래서 《춘추(春秋)》에서는
『큰 것이 바른 것을 없앴다[大居正]』
고 하였다. 지금 태조왕이 의(義)를 알지 못하고 왕위를 가벼이 여겨 어질지 못한 동생에게 주어, 그 화가 충신 하나와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한탄하지 않을 수 없구나!
부식이 영감이 나중에 이 일을 두고 위와 같게 사족을 덧붙였더랬다.
중국 춘추시대 송의 군주였던 선공 역시 태조왕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 아들을 놔두고 동생을 상공으로 세웠는데,
상공도 죽을 때 자신의 아들 대신 조카를 목공으로 세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목공은 뒤에 대부 화독(華督)에게 피살되고 목공의 아들 풍이 장공으로 즉위했으며,
장공의 아들 민공도 피살되고 장공의 아우가 환공으로 즉위하는등,
선공 이후 송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란이 잦았다고 《춘추》는 말하고 있다.
양위라는 것도 그냥 하면 다 되는게 아니다.
다 사람 봐가면서 나라와 백성 살찌울만한 어진 사람 발탁해서 해야지.
뭐 살인방화강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개망나니 자식한테
자기 왕자리에 나라 백성까지 아무 대출기한 및 담보도 뭐도 없이 통째로 넘겨주고
'나는 욕심이라고는 모르는 소탈한 자다'라고 말해봤자
그걸 착하다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는게다.
(나라가 얼마 안 가서 망하거든)
최규하가 죽어서도 욕먹는 이유가 다 그런 이유다.
전두환같은 놈이 탱크 앞세워갖고 나라 따먹는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으니까.(비유가 적절한가?)
하여튼 폭군보다도 더 골치아픈게 무책임한 왕이다.
왕이 양위 잘못하면 무책임한 왕이란 소리 듣기 십상이고,
대통령이 사임 잘못하면 무책임한 대통령 소리 듣기 십상이고,
(결국 양위하든 사임하든 정치인이란 족속들은 다 욕먹게 돼있다)
국민이 대통령 잘못 뽑으면....? 모르겠다.
[秋七月, 王田于平儒原, 白狐隨而鳴. 王射之不中. 問於師巫, 曰 “狐者妖獸非吉祥. 况白其色, 尤可怪也. 然天不能諄諄其言. 故示以妖怪者. 欲令人君恐懼修省, 以自新也. 君若修德, 則可以轉禍爲福.” 王曰 “凶則爲凶, 吉則爲吉, 爾旣以爲妖, 又以爲福, 何其誣耶?”遂殺之.]
가을 7월에 왕은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하는데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었다. 왕이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무당[師巫]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우라는 놈은 요사스런 짐승이어서 상서로운 조짐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 색이 희니 더욱 괴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 말을 간곡하게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요괴를 보여줌으로써, 임금[君]이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살펴서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임금께서 만약 덕을 닦으면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왕은
“흉하면 흉하고 길하면 길한 거지, 네놈이 아까는 요사스럽다고 했다가 또 복이 된다고 하니, 그딴 엉터리같은 말이 어디있느냐?”
라며, 결국 그를 죽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3년(148)
참 성격 불같다. 나이 많은 분 치고는.
하여튼 고구려 풍속이 조금 야생적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노인네들까지 이렇게 정정하게 왕 자리 갖고 싸우시고
귀먹어서 말 이해 못하고 죄없는 무당도 죽이고.
그런데 백여우라고 하면 보통 여우가 아니리라.
네이버 국어사전 찾아보니까 백여우라는 단어가, 털이 흰 여우 말고도
"요사스러운 여자"를 속되게 욕하여 이르는 말이라더라.
백제가 망할 때도 왕궁에 여우가 그렇게 많이 들어왔다던데.
혹시, 그때 왕께서 뭐 숨겨둔 여자라도 있으셨던가?
(설마, 그 나이에)
[四年, 夏四月, 丁卯晦, 日有食之. 五月, 五星聚於東方. 日者畏王之怒, 誣告曰 “是君之德也, 國之福也.” 王喜. 冬十二月, 無氷.]
4년(149) 여름 4월 그믐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5월에 다섯 별이 동쪽에 모였다. 일자(日者)가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속여서
“이것은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
고 고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겨울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왕한테 쓴소리 안 하는 나라 치고 잘 되는 꼴을 못봤다.
다섯 개의 별이 동쪽에 모이는 것을 보고, 천문 관측하는 일관이
"임금의 덕입니다"하고 아부를 떤다.
그 말 속에 무슨 잘보여서 벼슬이나 얻어보자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일시성 거짓말.
그것만으로 왕에게 거짓말한 일관의 잘못이 정당화될수야 없겠지만,
일단 뭐 살고 봐야 될 일 아닌가.
왕한테 말 한마디 잘못 했다고 무당이 왕에게 죽은 것이 벌써 작년의 일인데.
[八年, 夏六月, 隕霜. 冬十二月, 雷, 地震. 晦, 客星犯月.]
8년(153) 여름 6월에 서리가 내렸다. 겨울 12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그믐에 객성(客星)이 달을 범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예전에도 말했지만.
《삼국사》 읽다 보면, 조공 기록 아니면 대개 천문이나 기상관측기록.
그거 읽다가 초기 역사는 볼장 다 보는 수도 수두룩하다.
농경사회에서 여름에 서리 내리고(뭐 여자가 한 서렸던가) 지진 일어나고,
객성이라고 불리는 별이 달을 침범했다는 등의 기상관측 이야기야 뭐 중요하게 들린다만,
천둥 친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실어놨는지.
뭐 이런 것들이 왕의 실정이나 나라 상태를 은유해서 적어놓은 말이라고 치고
이 기록들을 하나하나 풀어보자면,
여름 6월의 서리는 뭔가 여자한테 원한 살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고
(여자가 한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 내린다잖나.),
겨울 12월에 천둥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는 건 뭔가,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왕의 분노와 그에 따른 대숙청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객성이라는 말은 우리 무속에서는 별성마마라고 해서 호구별성,
즉 역신(疫神)을 의미한다. 전염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가리키는 말인데,
의술이 그리 발달치 못했던 그 시대에 병의 원인이라고 사람들이 떠올릴수 있는게
'귀신'말고 달리 또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다른 의미로 보면, 객성이라는 별은 일정한 곳에 늘 있지 않고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
천문학적인 말로는 '신성(新星)'이라고도 불린다.
뭐 '별이 폭발하는' 것으로 볼수 있는데,
육안이나 망원경으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던 별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수일 내에 그 빛의 밝기가 수천 배에서 수만 배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도 우주에서 매년 수십 개씩 발견된다고는 해도
망원경으로 관측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데.
수성왕 8년(153) 12월 그믐(28일경)에 관측된 그 신성은 아마 오래 전에
우주 어딘가에서 폭발한 것이 수천 광년을 날아서 고구려의 하늘에 그 빛을 보였고,
일관은 그 별의 폭발한 것을 운좋게 보고서 그 별을 기록하여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별을 본 사람들은 그것이 전염병을 가져오는 귀신이 아닐까 하며
놀라 이리저리 굿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겠지.
[十三年, 春二月, 星孛于北斗. 夏五月, 甲戌晦, 日有食之.]
13년(158) 봄 2월에 살별[星孛]이 북두에 나타났다. 여름 5월 그믐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객성이 달을 범한지 5년만에 또다시 살별이 다시 북두에 나타나고 일식이 생기다.
북두라는 것은 북두칠성을 말한다.
사람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칠성신이 바로 북두칠성의 화신인데,
사실 북두칠성의 방위, 즉 북쪽을 주목한다면 이것은 정변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볼수도 있겠다.
옛날부터 북쪽이라고 그러면 꼭 '왕궁'이 있는 쪽으로 쓰였거든.
살별이라고 하면 흉조 즉 재수없는 일이 터질 징조인데,
왕조국가에서 살별 때문에 일어날 재수없는 일이라면 뭐,
왕이나 충신이 죽던지 아니면 전쟁 터지는 것말고는 딱히 재수없다고 할만한 일이 없다.
일식이야 뭐 예전에도 말했었고....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 12월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후한서》
고구려의 내정이 저토록 혼란스러운 틈에, 부여는 또다시 후한에 사신을 보낸다.
이번에도 왕이 몸소 후한의 수도 뤄양을 방문하는 성의(?)를 보여주신다.
부여로서도,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저기 후한과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해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듯, 특이하게도 부여가 후한에 외교교섭을 벌일 때는 대체로, 고구려 안에 무슨 혼란이 생겨 부여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 때였다. 이번만 하더라도 차대왕이 고구려 안에서 여러 가지 폭정을 행해서 국인들로부터 알게모르게 미움을 사고 있는 시국이 아닌가.
거기다 동예까지 고구려를 제치고 후한에 사신을 보냈다.
"예(濊)의 사신이 와서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斑魚)를 바쳤다."는 것이
《후한서》및 《삼국지》에 실려있다.
6년(163)에 선비(鮮卑) 단석괴(檀石槐)가 용맹이 있고 지략이 있어서 남쪽으로 변경을 침략하면서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고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퇴각시키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격파하여 흉노(凶奴)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하였다. 그런 다음 스스로 그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러 부여와 예ㆍ맥과 경계를 접해 25개 고을을 묶어 동부(東部)라 하고는 각각 대인(大人)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후한서》
한편 선비족들은 단석괴라는 지도자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후한서》 선비열전에 실린 그의 일대기에 의하면, 후한 환제 연간, 단석괴의 아버지 투록후(投鹿侯)가
남흉노와의 전쟁 때문에 3년간 집을 비웠는데, 그 사이에 투록후의 아내가 낳은 것이 단석괴였다.
얼마 뒤 무사히 귀환한 투록후는 자신이 없는 동안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통해서 단석괴를 낳았다고 의심하며
단석괴를 죽이려 했지만 아내는 강력히 거부했고, 마침내 단석괴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외가 부족으로 쫓겨났다.
(나중에야 투록후는 단석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고 이후 세자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 선비족 부족의 하나였던 복분읍족이 단석괴의 어머니 부족을 밤에 몰래 습격해
부족이 기르던 소와 양을 약탈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식에 격노한 단석괴, 스스로 친위대를 이끌고
복분읍족의 취락을 공격해 그 족장의 목을 베고 빼앗겼던 소와 양을 되찾아 돌아왔으며,
이 일로 전 선비족 사이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서기 150년경, 단석괴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에 해당하는 동몽골 탄오(弾汚) 산의
철구(啜仇) 산 골짜기(지금의 차하르 시 장북현 부근)의 강가를 거점으로 하던 막남(漠南) 선비를 병탄하기에 이르렀고,
그의 소문을 들은 우문(宇文)·모용(慕容)·탁발(拓跋)·단(段)·걸복(乞伏) 등의 선비 제족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단석괴를 선비족 최고의 지위인 부락대인(部落大人)으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후 흉노나 오환·정령 부족이
앞다투어 단석괴의 신하가 되기를 청했고, 마침내 흉노 이상으로 방대한 세력을 기른 선비족은 점차 후한을 압박해왔다.
고구려의 내정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고구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세력을 넓혀갔던 것.
마침내 부족을 모두 통일한 선비족은 부여를 동쪽으로 내몰고 과거 흉노족이 지배하던 땅ㅡ
오늘날의 몽골 전역을 모두 차지했으며, 마침내는 요동에까지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땅에서 하나의 나라를 이룬다. 이것이 선비족 최초의 왕조였을 것이다.
선비족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후한의 환제는 장수 장환에게 흉노중랑장 관직을 주어 선비족을 치게 했으나
장환은 되려 단석괴에게 크게 패해 도망쳤고, 당황한 환제는 사자를 파견해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려 했지만,
'나는 한나라 노예가 아니야!'라는 격노와 함께 사자를 내쫓아버린 단석괴는 한나라 유주를 시작으로
병주·안문 등지에 침공하며 죽을 때까지 후한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환제의 뒤를 이은 영제도 희평 6년(177년)에 하육을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 전안을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郎將),
장민을 흉노중랑장(匈奴中郎將)으로 삼아 대군을 인솔해 선비를 치게 했고, 이들은 선비족과 대립하고 있던
남흉노의 선우 도특약시축취(屠特若尸逐就)와 함께 단석괴를 쳤지만, 단석괴는 이들마저 격퇴시킨다.
이 무렵 선비족은 식량난에 빠져 있었다. 단석괴는 비옥한 토지를 찾아 진수 방면으로 이동했고,
낚시 기술이 전무했던 선비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마침 현지에 와있던 왜국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잡아 식량난을 해결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한 광화(光和) 연간에 단석괴는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후한서》 선비열전은 전한다.
선비족과 후한의 대립을 마냥 남의 나라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게,
나중에 고구려를 공격해서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한 전연이나 고구려를 마침내 멸망시켜버린 당나라 역시
이들 선비족의 후손이 세운 왕조였기에 선비족에 대해서 각별히 적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二十年, 春正月晦, 日有食之. 三月, 太祖大王薨於別宮, 年百十九歲.]
20년(165) 봄 정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돌아가셨다. 나이가 119세셨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따져보면 정치를 맡은 사람은 임기에서 물러나기 직전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더욱이 자신의 후임을 스스로 선택할수 있는 자라면.
자신이 누구를 택하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바뀔수도 있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항상 유념하고 있을 것이다.(그래야만 하니까)
자신의 후임이 얼마나 자신보다 더 잘할지,
얼마나 더 유능하고도 효율적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수 있을지.
현명한 왕은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한편으로도 항상 그 문제를 떠올리며,
최대한 신중하고도 엄중하게 자신이 물러난 뒤의 문제를 걱정할 것이다.
그것은 신하들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지금의 왕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앞날도 보장될수 있고 또 파멸할수도 있으니까.
(빨리 결정해야 어서 가서 줄을 설것 아닌가)
그러므로 신하들 역시나 왕의 뜻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다음 대의 왕이 누구인가에 역시 중요한 의미를 둔다.
왕의 권한과 신하의 권한은 그런 양팔저울같은 관계다.
한쪽이 무거우면 한쪽이 내려가고 한쪽이 세면 다른 한쪽이 약해지는.
왕이 직접 자신의 의지로 후계를 결정한다는 것은 왕권이 강하다는 의미지만,
신하들의 의지가 개입된다면 그건 명백한 왕권침해이고 신권의 성장이다.
고대 왕조사는 그런 왕권과 신권의 대립의 역사였다.
자신이 하기 싫어서 물러난다면 그걸 말릴 사람은 솔직히 없겠지만,
대신 자기가 물러남으로 해서 나라의 위신이나 근간에 금이 간다면
두고두고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했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태조왕이 수성왕에게 양위하고 아들 둘과 신하를 잃은 것을 보면,
그의 선택이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수 있다.
그리고 태조왕의 양위가 자의가 아니었다는 것도.
그러게 처음부터 수성을 죽이자는 고복장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의가 아닌 반(半) 타의로 양위한 태조왕이 치른 대가는 너무 컸다.
[冬十月, 椽那皂衣明臨荅夫, 因民不忍, 弑王. 號爲次大王.]
겨울 10월에 연나(椽那) 조의(皂衣) 명림답부(明臨荅夫)가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므로 왕을 죽였다. 왕호를 차대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20년(165)
그리고 그 해 10월. 연나조의의 벼슬을 맡고 있던 명림답부가 수성왕을 살해한다.
이때 수성왕의 나이는 96세.
고령임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이며 왕위 찬탈에 대한 열정(?)을 유감없이 내비치셨고,
그렇게 왕 자리 얻어서 조카 죽이고 신하 죽이고 무당 죽이고 근20년간 통치하다가
이때 이르러서 명림답부라는 사람 손에 칼 맞고(?) 돌아가셨더라.
《삼국유사》 왕력편에 의하면 국조왕 즉 태조왕의 재위 기간이 93년이고,
수성왕의 재위 기간이 19년(즉위한 해를 기점으로 한것이 아니라 즉위한 이듬해를 기점으로 잡았음).
형제로서 왕 해먹은 두 분이 모두 다음 왕인 신대왕에게 살해당하셨다고 해놨다.
명림답부라는 이자는 연나부 조의라는 벼슬을 맡고 있었는데,
여지껏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다가 태조왕이 승하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서
수성왕을 죽여버린다. 마치 지금까지 태조왕이 눈에 밟혀서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듯,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으로 두 왕이 같은 해에 겨우 몇 달 간격을 두고 사망한 것을 보고,
후대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도 그런 명림답부의 행동을,
수성왕 다음으로 즉위한 백고왕(신대왕)의 획책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왕력에다 '형제 두 임금이 모두 신대왕에게 살해당했다'고 해놨다.
따져보면 명림답부가 백고왕을 즉위시키려고 수성왕을 시해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백고왕이 명림답부에게 시켜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볼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일연이 《삼국유사》에 그렇게 적어놓은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고대사는 우리나라에도 남아있는 기록이 적어서,
하나의 기록을 그저 이상한 일로 여기던지 이해못할 일이라고 치부해버리기는 어렵다.
기록이야 이렇게 적어놨지만, 사실 기록에는 이렇게 적힌 역사의 장면 뒤에
어떤 말 못할 뒷사정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관들은 그 짧고 단편적이며, 스쳐지나가는 기록들을 가지고 당시의 정황을 추측하고,
언뜻 봐선 이해가 안 되는 점을 설명하며, 나름의 논리를 붙여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주장들 중에서 100% 확실하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러한 것은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당대의 사실들에 대해서, "어째서?", "왜?" 라는 이유를 걸고 늘어지면서,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련의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그리고 떠도는 소문들(100% 옳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수도 없는)을 모아,
입으로 전하기도 하고, 글자를 아는 사람은 글자로 적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과 신화와 민담들이,
'야사'라는 이름으로 그 시대 역사의 또다른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수많은 야사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정사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진면목을 다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뒷사정'을 '짐작'할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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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거나 좋다.
조금 횡설수설하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태조왕과 차대왕의 이야기까지 모두 마쳤고.
그리고 어차피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모두 야사(野史)의 일종이니까.
《삼국사》는 정사의 기록이지만, 《삼국유사》는 야사의 기록이다.
야사는 역사의 뒷담화, 그 시대의 루머다.
(한마디로 믿든 안 믿든 자유라는 말이다)
남의 뒷담화하는 게 재미있긴 하지.
다른 사람 사생활은 다들 관심있어 하니까.
역사의 뒷담화를 찾아내서 폭로하는 것이 바로 사관의 일이다.
나는 야사가(野史家)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9>제7대 차대왕|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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