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1573655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고구려 2대 유리명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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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고구려 2대 유리명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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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의 성립',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 신라, 가야 같은 나라들이 세워졌다는 단순한 사실이란 의미만 가지지는 않는다. 그런 나라들이 세워질수 있을 만큼의 통치력, 사람들을 통제하고 하나의 조직을 갖출 수 있는 노하우가 갖춰지고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초기 문명을 볼 때에 나라 발전의 척도를 고대국가 체제를 세워서 운영했는지를 많이 따진다. 이는 곧 고대국가를 일찍부터 세워서 운영하던 나라들은 그에 걸맞은 국가적 힘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기에ㅡ뒤집어 말하면 나라의 체제조차 갖추지 못한 나라가 이미 체제를 갖춘 나라를 침략하고 발전을 막았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초기는 어떨까? 고구려의 건국, 추모성왕 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었던 시점으로 보고 고대국가의 출발을 잡아도 될까?

 

[二年, 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2년(BC. 18) 가을 7월에 다물후(多勿侯) 송양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송양은 말갈 정벌 이후 고구려의 최초로 복속된 비류국의 군주였다. 그리고 그의 딸이 왕비가 되었는데, 왕비는 1년만에 죽는다.

 

[ 九月, 西狩獲白獐. 冬十月, 神雀集王庭. 百濟始祖溫祚立.]

9월에 서쪽으로 사냥가서 흰 노루[白獐]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신작(神雀)이 궁궐 뜰에 모였다. (이 해에) 백제(百濟)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년(BC. 18)

 

하얀 노루를 잡았다느니, 신작이 궁중에 모였다느니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기에 고구려에서 내려간 온조가 부아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유리왕과의 다툼에서 밀릴 것을 두려워한 두 왕자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백제를 세웠다는 것은 《삼국사》에 실려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무튼 백제의 건국과 함께, 이 나라에서 비로소 '무통'의 시대라 불리는 삼국(삼한)시대가 펼쳐지게 되니까, 백제의 건국은 한국사적으로 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하겠다.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鶻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3년(BC. 17) 가을 7월에 골천(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겨울 10월에 왕비 송(松)씨가 죽자, 왕께서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들어 후처[繼室]를 삼았다.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하나는 치희(稚姬)인데 한(漢) 사람의 딸이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중국 놈들이 고구려가 자기네 역사니 어쩌니 하고 개소리하면서 내세운 주장 중에서 얼토당토 않은 것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를 들자면 바로 이 대목에서 유류왕의 두 후처중 하나였던 치희의 이야기이다. 치희는 기록에도 나오다시피 한(漢), 중국 사람인데 이걸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고구려에서는 중국 사람을 왕비로 맞이했다", "한으로 떠난 왕비를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른 것을 봐도 고구려가 한족문화국가라는 증거다"라고.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한족 여자를 왕비로 삼았으면 남편도 한족이 된다는 식이니. 하긴 티베트 왕이 당의 공주를 왕비로 삼은 것을 갖고 '서남공정'을 해서 성공시킨 놈들이니 그런 주장도 나올수 있겠다. 게다가 황조가가 중국식 한자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중국인의 노래라고? 우리 나라에서 글자가 없었던 시절에 별수 없이 한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천년 전의 일이며, 고구려 황조가가 중국 한자로 된 노래라서 중국인의 노래라고 본다면, 금관가야 구지가는 한자 아닌가? 우리 나라가 아직 글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쓰다 보니 어쩔수 없이 중국식 표기법을 받아들였던 사실이 자명한데 그걸 갖고 트집을 잡는 저 정신나간 놈들의 머릿속 구조가 궁금하다.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凉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두 여자가 사랑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다. 왕은 양곡(凉谷)에 동 · 서 두 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었다.

“너는 천한 한인(漢人) 계집 주제에 어쩜 그리도 버릇이 없냐?”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서 도망쳐 돌아갔다. 왕께선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께서 어느날 나무 밑에서 쉬시다가, 꾀꼬리[黃鳥]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감탄하여 노래하셨다.

 

翩翩黃鳥        훨훨 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        외로운 이내 몸이여

誰其與歸        뉘와 함께 돌아가리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3년(BC. 17)

 

치희가 한의 여자였다는 대목도 그래. 중국에서 이민족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중국사를 공부 안 해서 잘 모르겠다만, 분명 또 하나의 왕비(그것도 고구려 본국 사람)인 화희는 치희더러 "천한 한나라 계집년 주제에"라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부연설명 더 해? 고구려 여자가 중국 여자더러 "천하다"라고 했다고. 그리고 그 말에 삐져서 중국 여자는 자기 나라로 가버렸고. 두 나라 사이에 힘의 우열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중국놈들이 말하는) 변방의 소국 여자가 대국(?) 한의 여자를 가리켜서 '천한 년'라고 욕했을 정도라면, 대체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였단 거지?

 

아무튼지간에 유류왕이 부른 저 노래가 이름하야 황조가(黃鳥歌).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도 한번 나왔고, 필자가 배운 국어 교과서에는 '한(恨)의 정서의 원류'니 어쩌니 하면서 진짜 질리게 봤다. 유리왕은 생각건대 무척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고 계신 분으로 보인다. 저런 노래까지 지을 정도라니. 왜 그렇게까지 '천한 한나라 여자'인 치희를 못잊어하셨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읽었던 국어참고서에는 '농경과 수렵의 두 세력을 대표하는 집단간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위정자의 갈등을 노래한 노래'라고 황조가를 평했었는데, 몰라. 이 황조가는, 훗날 고려가요 '동동' 4월령의

 

4월 아니 니저(아으) 오실셔 곳고리새여.

므슴다 녹사님은 녯 나를 닏고신뎌.

 

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상관관계야 어떻든간에,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가진 '한(恨)'이라는 정서는 이미 그 무렵에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

 

[十一年, 夏四月, 王謂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11년(BC. 9) 여름 4월에 왕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시었다.

“선비(鮮卑)는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는다.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험고한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긴 해도 멍청합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려워도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 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며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부분노는 고구려의 개국공신이다. 비류국의 왕궁에 몰래 들어가서 고각을 훔쳐오기도 했고, 행인국과 북옥저를 정벌할 때에도 고구려 군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변경을 위협하던 선비족을 치는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기도 하다.

 

선비라는 부족에 대해서 안정복 영감이 《문헌통고》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선비는 옛날 흉노족에게 멸망당한 동호(東胡)의 지파로서 선비산(鮮卑山)을 의지해 살았기에 ‘선비’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언어라든지 풍속 같은 것은 흉노와 많이 닮았지만, 한(漢) 초기에 흉노의 묵특(冒頓) 선우에게 격파당하여 멀리 요동의 변경 바깥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그러니까, 흉노 선우에게 아끼는 말을 달라고 하니까 선우는 그 말을 그냥 주고, 미녀를 뽑아서 보내라고 하니까 보냈는데, 여기서 오만해져서 선우에게 이번에는 흉노족이 사는 땅을 달라고 했다가 묵특 선우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이다. 말을 달라고 해서 줬고, 미녀를 달라고 해서 줬는데 이젠 땅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아무리 불모의 땅이라고 해도 '땅은 나라의 근본인데[地者國之本]' 내가 사는 내 땅을 어떻게 쉽게 넘겨달란 말이냐. 묵특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군사를 모아 동호를 쳤고, 그들은 흉노에게 크게 패해 도망쳐버렸다. 이때 이들이 옮겨간 땅은 오환(烏桓)이라는 부족과 인접한 땅으로서 우리 쪽에서 보면 부여의 서쪽, 고구려의 북쪽에 해당한다는 것이 《동사강목》의 설명이다.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 良馬一十匹.]

선비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갔다. 선비는 그걸 보고 크게 놀라서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서 베어 죽인 것이 몹시 많았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아서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해 상으로 식읍(食邑)을 내렸으나,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

그리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서른 근과 좋은 말 열 필을 내려주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11년(BC. 9)

 

"전쟁은 속임수다[兵者, 詭道也]."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한 여러 명언들 가운데 이보다 더한 명언이 있을까. 《손자병법》 시계(始計)에서 손자가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정의한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전쟁에 대해 가장 간단 명료하게 정의한 멘트로 꼽히고 있다.

 

이들을 칠 계책에 대해서 부분노가 말하는 것은 곧 유인작전. 옛날 고대 중국 전한의 개국공신이었던 한신(韓信)이 조(趙)를 칠 때 이미 써먹었던 전술이기도 하다. 미리 정병(精兵) 2천 명을 뽑아 샛길로 가서 조의 성을 숨어서 망보게 하고는, 한신은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도전했다. 조가 응전해 오자 한신은 거짓 패하여 도망쳤고, 조의 군대가 성을 비워두고 추격하는 사이에 망보던 군사들이 그 사이에 들어가서 성을 점령하고 한신은 반격, 조의 군사는 성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여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ㅡ는 것. 이게 바로 벤치마킹이지 뭐. 다른 거 있나?

 

<평양 진파리 9호분. 북한에서 부분노의 무덤이라 주장하는 고분으로 동명왕릉과 가장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선비족은 이후 역사에서, 고구려의 가장 큰 라이벌로 등장하게 된다. 어쩌면 고구려는 중국과 싸운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선비족과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실제 역사에서 선비족은 중국 북부를 차지해 그들의 왕조를 세우고 여러 번 고구려를 공격했고, 실제로 고구려는 선비족 왕조에게 두 번이나 대파(大破)당하는 엄청난 경험을 했으며(실제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 두 번의 대파 가운데 마지막 두 번째에 이르러 고구려는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그 마지막 두 번째가 바로 당(唐)이었기 때문이다.

 

[十三年, 春正月, 熒惑守心星.]

13년(BC. 7) 봄 정월에 형혹(熒惑)이 심성(心星)을 지켰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삼국사》에서 돋보이는 기록 가운데 하나는 천문관측기록인데, 이 기록들의 정확성 여부를 두고 참 말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관측된 일식이 다른 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 관측기록들은 모두 대륙에서 관측된 것이라는 둥(실제로 삼국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이 대두된 적도 있었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 人多凍死, 乃去.]

14년(BC. 6) 봄 정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했지만 도절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다. 대소가 성을 냈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5만 군사로 침략해 왔다가 폭설로 사람들이 많이 얼어죽었다. 때문에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유리왕은 37년간 국왕으로 있으면서, 선대왕이 추진했던 대외팽창보다도,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의 존망에 더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부여국왕 대소가 그에게 모욕적인 말로 편지를 보내어 인질을 보내라고 했을 때에도, 정말 아들 도절을 부여에 인질로 보내려고 했다. 비록 그것이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부여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생각이었겠지만(실제로 그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다). 아무튼 부여의 대소왕, 추모왕이 부여에 있을 때부터 추모왕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이 친구는 이 무렵에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고구려를 슬슬 볶아대기 시작한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 · 斯卑爲.” 王使謝之, 卽愈.]

19년(BC. 1) 가을 8월에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장옥(長屋)의 연못[澤] 가운데에 이르러 찾아내서,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였다.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을 어떻게 다치게 할 수 있느냐?”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했다.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된 것입니다.”

왕은 사람을 시켜 사과하니 곧 병이 나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교제(郊祭)라는 건 즉 천제(天祭).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고구려는 이미 국초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음이 자명한데, 이것은 중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 제사는 누가 지냈지? 왕? 아니면 무당?

 

[二十年, 春正月, 太子都切卒.]

20년(AD. 1) 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죽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첫째 아들은 일단 죽었고, 둘째 아들이 태자가 되어야 되겠지만, 글쎄, 어떨까.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曰 “臣逐豕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21년(AD. 2) 봄 3월에 교제에 쓸 돼지[郊豕]가 도망쳤다. 왕은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찾아내서 국내 지방 사람의 집에 가둬 기르게 하고, 돌아와 왕을 뵙고 아뢰었다.

“제가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수도를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 4월에 왕은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9월에 왕은 국내로 가서 지세를 보고 돌아 오다가 사물택(沙勿澤)에 이르러, 한 장부가 진펄 위의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왕에게 말하였다.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왕은 기뻐하면서 허락하고, 사물(沙勿)이라는 이름과 위(位)씨 성을 내려 주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하여튼 돼지 덕분에 할일이 꽤 많다. 왕이 병에 걸리지를 않나, 이제는 수도까지 옮기지 않나.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돼지 때문에 정해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가는 바람에 그 돼지를 쫓아서 도착한 국내성이 너무 살기 좋아서, 그곳을 수도로 정하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고 전쟁 걱정도 면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신하 설지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 왕은 수도를 옮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옛 모습. 지금은 중국 당국의 의도적 관리부실로 거의 부서짐>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22년(AD. 3)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드디어 국내성 천도가 이루어졌다. 지세를 돌아보고 온지 겨우 13개월만에, 추모성왕 이래의 수도에서 떠나 유류왕은 국내성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삼국사》 지리지에서 말한 바, 동명성왕 추모가 흘승골성에 도읍한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국내성의 다른 이름은 위나암성(尉那巖城) 혹은 불이성(不而城)이었다. 《삼국사》 지리지에서는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按漢書, 樂浪郡屬縣有『不而』 又緫章二年, 英國公李勣奉勅, 以高句麗諸城, 置都督府及州縣, 目錄云 『鴨淥以北, 已降城十一, 其一國內城, 從平壤至此十七驛.』 則此城亦在北朝境內, 但不知其何所耳.]

《한서(漢書)》를 살펴보건대 낙랑군(樂浪郡)의 속현에 불이(不而)가 있다. 또한 총장(緫章) 2년(669)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을 받들어 고구려의 여러 성(城)에 도독부(都督府)와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는데, 그 목록에 이르기를

『압록(鴨淥) 이북의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요, 그 중의 하나가 국내성인데, 평양에서부터 이 곳까지 17역(驛)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 성도 북조(北朝)의 경역 안에 있었던 것이나, 다만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 권제37, 지리지6, 고구려

 

안정복 영감이 빠질 수야 있나. 참으로 친절하게도(?)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그럴듯한 주장을 해놓으신 것이 《동사강목》에 실려 있다.

 

유리왕 22년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상고하건대, 《여지승람》에,
“이산군(理山郡) 북쪽 2백 70리에 우라산성[兀剌山城]이 있다. 압록ㆍ파저(婆猪) 두 강 사이의 큰 들 가운데 있는데 사면이 벽처럼 높이 솟았다.”

하고, 《고려사》공민왕(恭愍王) 19년 조에,
“동녕부동지(東寧府同知) 이오르티무르(李兀吾帖木兒)가 우라산성에 의거하였다.”

하고 유계(兪棨)는,
“이것이 옛날의 위나암성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중국어[漢音]로 ‘兀剌’과 ‘尉那’가 음이 같으니 그 말이 가깝고 비슷하다. 《삼국사기》에 보인 이적의 주문(奏文)에,
“압록 이북의 항복한 성 가운데 국내성(國內城)이 그 하나인데, 평양성에서 여기까지는 17역입니다.”

하고, 《통전》에도,
“압록강은 국내성 남쪽을 지나고 또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쳐진 다음에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 두 설에 의하면, 그것이 압록강 북쪽에 있어 우라성(兀剌城)으로 전하였음이 분명하다.<염난수는 곧 파저강이니, 비류고(沸流考)에 보인다.> 국내라고 한 것은 아마 졸본 기내(畿內)의 땅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리라. 교제 지낼 돼지[郊豕]를 놓쳐 달아난 까닭에 이것을 얻었으니, 돼지가 아무리 달려서 도망쳤다고 해도 쉽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천 리나 백 리 되는 먼 거리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국내 위나암성이 졸본과 서로 가까웠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인주(獜州)를 국내라 한 것은 아마 나중에 따로 둔 것이리라. 《삼국사기》에
“《괄지지(括地志)》에 국내를 불내성(不耐城)이라 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의 낙랑 동부(樂浪東部)에 있는 불이현(不而縣)은 딴 이름이니, 이것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 中 '국내위나암성고(國內尉那巖城考)'

 

《동사강목》에서 안정복 영감은 김부식이 국내성의 위치를 말하면서 들먹인 '불이'라는 이름은 국내성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혼동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안정복 영감이 국내성의 위치로 비정한 곳은 우라산성ㅡ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하추를 무찌르고 여진을 토벌하기 위해서 올랐던 곳으로 지금의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 바로 그곳이다.(우리가 지금 졸본이라고 알고 있는 그곳) 안정복 영감이 지금의 시라무렌 강에 해당하는 염난수를 파저강으로 혼동한 것은 실수이긴 한데, 주장을 들어보면 우라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한 것에 대해서는 안정복 영감도 나름 근거가 있다.

 

옛날에는 '나라=수도'라는 등식이 으레 성립하곤 했다. '신라'라는 나라를 말한다고 신라가 차지한 전 국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라가 도읍하고 있는 '수도' 경주 한 곳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안정복 영감은 흥경(심양) 동남쪽에서 졸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졸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발음상으로도 가장 그럴듯한 곳, 돼지가 도망칠 수 있는 거리 안에서 국내성의 위치를 찾았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오녀산성이었다. 맞는지 아닌지는 내가 모르지만, 요양이나 심양을 홀승골성으로 잡더라도 환인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결코 아닐텐데, 참 멀리도 갔다. 고놈.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墜地.”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12월에 왕이 질산(質山) 북쪽[陰]에서 사냥하며[田] 닷새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부가 간하였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형정(刑政)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하러 나가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만약 (왕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신은 정치가 황폐하고 백성이 흩어져서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왕은 듣고 크게 노하여 협부의 관직을 빼앗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부는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2년(AD. 3)

 

이 기록만 갖고 보면 유리왕은 굉장히 성질 급하고, 남의 말 듣는 것을 싫어하는 다혈질인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사냥가서 닷새 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책망한 신하는 고구려의 개국공신이었고, 아버지를 모시던 조정의 중신이었는데, 그런 중신이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이 싫어 관직을 뺏고 좌천시켜버릴 줄이야.(안정복 영감의 《동사강목》에 보면 신라 사람들은 나라 서쪽의 마한을 가리켜 서한西韓이라 불렀고, 동옥저東沃沮 남쪽에 있었던 신라는 그들로부터 남한南韓이라 불렸다는데, 고구려에서도 남쪽에 있는 마한을 가리켜서 그냥 남한이라고 불렀던 듯) 아무튼 선대 동명왕의 개국공신을 마한으로 내쫓아버린 것을, 안정복 영감은 《동사강목》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고구려가 개국한 지 겨우 40여 년, 천도한 지도 얼마 안 됐으면서 마땅히 정교(政敎)를 닦아 농사에 힘쓰고 백성을 휴양시켜 새 터전을 견고히 했어야지, 오히려 들판에서 동물이나 쫓느라고 닷새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 크게 잘못했다. 협부가 간한 것은 매우 절실하다고 하겠는데, 간언을 거절하고 따르지 않으며 어진 신하를 박대하여 선왕의 훈구지신(勳舊之臣)을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왕의 평생을 상고해 보건대 덕을 잃은[失德] 것이 너무 많다. 두 부인이 불화하였으니 이는 부부의 도가 무너진 것이고, 협부는 도망쳐 버렸으니[出奔] 이는 군신(君臣)의 의가 이지러진 것이요, 아들 해명(解明)을 칼에 엎어져 죽게 했으니 이는 부자의 은(恩)이 끊어진 것이다, 그런데 시호를 명왕(明王)이라고 한 것은 무슨 덕으로써 한 것일까? 예로부터 밝은 임금들도 이 부부와 군신과 부자지간의 윤리[三倫]를 지켰던 자가 적은데, 뭐하러 저 오랑캐의 소군(小君)을 탓하겠는가?

 

여기서 처음으로 해명이라는 존재가 부각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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