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0704298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고구려 2대 유리명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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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爲太子, 大赦國內.]

23년(AD. 4) 봄 2월에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크게 사면하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죽은 도절 왕자의 뒤를 이어, 왕자 해명이 새로운 태자가 되었다.

동명왕이 고씨로 성씨를 바꾸기 전에는 해씨 성을 썼고, 유리왕이나 민중왕도 해씨 성을 썼을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 해명이라는 이름은 외자인 것 같다. 해(解)가 성씨이고, 이름은 명(明) 하는 식으로. 나라 안에 크게 사면령까지 내린 것을 보면 해명이라는 이 사람이 태자가 된 것은 국가적으로 굉장한 일이었던 듯 싶다.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 賜姓羽氏, 尙王女.]

24년(AD. 5) 가을 9월에 왕은 기산(箕山)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양쪽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 있는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조정에 등용하여 우(羽)씨 성을 주고 왕녀에게 장가들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바람의 나라에 나오는 세류. 극중에서는 주작을 부리는 신기를 지닌 여장부로 나왔다.>

 

내가 처음 만화를 그리겠다 생각하면서 모델로 삼았던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람의 나라>이다. 거기서 주인공 무휼의 누나인 세류가 괴유(극중 세류의 남편이자 연인)를 만나기 전에 주작과 혼인해서 살았던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님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삼국사》의 위 기록을 언급하였고, 단편적인 그 기록을 통해 왕녀와 혼인한 주작의 이야기를 창조해내셨다. 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여담으로 살짝 소개했으니까, 역사적 사실과 견주어 생각지는 마시길 바란다. 하지만 우씨라는 성씨에 대해서는 역사에 기록이 있는데, 《통지(通志)ㆍ씨족략(氏族略)》에 "고려의 우(羽)씨는 성씨를 고쳐 고(高)씨가 되었다."고 했고, 《속문헌통고》에는 "후위(後魏)의 우진(羽眞)씨는 본디 고구려의 고씨인데 우진씨로 고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우씨는 나중에 고씨로 성씨를 고쳤고, 그 일부가 후위로 흘러들어가서 우진씨가 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일단 여기에 그 일을 모두 적어둔다.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27년(AD. 8) 봄 정월에 왕의 태자 해명은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당겨 부러뜨리며 말하였다.

“내 힘이 세서가 아니다.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

황룡국왕이 부끄럽게 여겼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황룡국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 역사 지명을 전부 한반도 안에 우겨넣는 식으로 말을 하자면 지금의 평양 근교인 남포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단재 선생은 황룡국이라고 기록한 것이 사실은 부여를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하셨다만, 여기에 안정복 영감이 황룡국에 대해서 고증해놓은 이야기를 부기하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황룡국은 요지(遼地) 동북쪽 지경에 있었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졸본은 지금 흥경 등지이고 황룡국과 졸본은 이웃 나라라고 칭하였으니, 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용강(龍崗)은 옛날의 황룡국이다.”

하였는데, 《여지승람》에도 그대로 따랐다. 무릇 지명이 서로 같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억지로 이렇게까지 부회(傅會)하여 실지로 있었던 것처럼 꾸민 것은 무엇 때문인가? 《통전》에
“수 양제가 고려를 칠 때 군사들이 많이 병에 걸렸다. 황룡에서 동쪽으로 해골이 잇달았다.”

하였으니, 요계(遼界)에도 이미 황룡이란 이름이 있었다. 지금 봉천부(奉天府)의 개원현(開原縣)을 또한 황룡부(黃龍府)라 칭하니, 요(遼)가 발해를 칠 때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금사(金史)》에,
“태조(아골타)께서 요를 칠 때 황룡성(黃龍城)을 정복하였다.”

하고, 악비(岳飛)가 이른바,
“황룡주(黃龍酒)를 잔뜩 마셨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황룡국과는 다른 것이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 中 '황룡국고(黃龍國考)'

 

황룡국 사신이 새로운 태자 해명의 이야기를 들었을 무렵, 그는 옛 도읍[古都]에 있었다. 옛 도읍이란 고구려가 천도하기 전의 도읍, 그러니까 추모왕의 도읍 홀승골성을 말한다. 이미 4년 전인 유리왕 22년(AD. 3)에 수도가 국내성으로 옮겨졌건만 유독 태자만은 옛 도읍에 남아있었다. 무슨 이유로 남아있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서 알수 없지만, 이때 스무 살밖에 안 된 태자의 젊은 혈기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버리게 만들었다. 너무 혈기왕성한 나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태자는 외국의 사신이 보낸 선물ㅡ 강궁을 그 자리에서 꺾어버렸다. 힘이 세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 나름대로는 강한 활을 만들어 보냈는지 모르지만, 태자에게는 그것마저도 약했던 모양이다.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황룡국왕에게 말하였다.

“해명은 자식으로서 불효를 저질렀다. 과인을 위해 죽여주시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7년(AD. 8), 정월

 

유리왕에게는 고구려의 안위가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황룡국왕도 차마 죽이지 못한 아들을 그냥 놔두어도 되었을 것을 왜 왕은 죽이려 했는지. 자신에게 간언하는 신하를 좌천시켜 농장에 가둬버릴 정도로 다혈질이었던 유리왕의 성격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라의 유지와 안정을 추구하던 유리왕에게, 태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도발이었다.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의 황룡을 국호로 삼은 나라인 황룡국에서 이 일을 핑계로 자신들의 호의를 거절했다며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북쪽의 동부여와 한나라를 등지고 있는 고구려로서는 막아낼 길이 없다. 그 틈에 동부여나 한에서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왕이 선택한 대안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리는 것, 바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길이었다.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曰 “今國無故請見, 其意不可測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므로, 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간하였는데,

“지금 이웃 나라가 이유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고는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7년(AD. 8)

 

태자는 대담한 사람이었다.

"하늘이 나를 죽이지 않을 바에야 외국 왕이 날 어쩌겠나?"

적지로 가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배포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고도 남는다.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二十一歲. 以太子禮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

28년(AD. 9)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다. 자식된 도리로서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는 칼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자살하려는데 어느 사람이 말렸다.

“대왕의 맏아들은 이미 돌아가셨고 태자께서는 마땅히 뒤를 이으셔야 합니다. 지금 사람 한번 온 걸 갖고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 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이었다.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시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하시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東原]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타고 달려가 (그 위에 엎어져)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이 명이라는 왕자는 무척 호쾌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자살 방식부터가, 동원의 마당에 창을 거꾸로 꽂아놓고 그 위로 말을 타고 달려가서 뾰족한 창날 위에 엎어져 죽었다는 것. 웬만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방식으로 21살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으니, 용력이 대단했던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것이다. 그는 고구려의 태자다웠다. 태자가 죽은 뒤, 그냥 그를 태자의 예로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워주었다는 것말고는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왕이면 자식을 죽여도 되는 것인지, 왕이라서 어쩔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왕이라는 지위는 일개 백성의 지위보다도 못한 것이 아니냐. 이때의 일을, 김부식은 사관의 생각을 덧붙이는 사론으로, 이 일을 일러 이렇게 말하고 있다.

 

[論曰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 今王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논하노니,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해야 하니,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에 있으면서 무용(武勇)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들으니 《좌전(左傳)》에 말하였다.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쪽으로 가르쳐,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지금 왕은 처음부터 미리 가르치지 않다가 악해지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가히,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였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었다 하겠다.

 

김부식 영감은 유리왕이 자식인 해명을 똑바로 못 가르친 것이 잘못이었지만, 아들로서 해명도 잘한 것이 없다고 했다. 왜 아버지가 있는 수도에 있지 않고 구도에 남아서 무예나 즐기고 그러면서 아버지가 의심하게 만들었느냐고 말이다. 양자에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인데, 조선조의 여러 학자들은 대개 해명의 손을 들어주었다. 안정복 영감의 스승이자 조선조 후기 기호(機湖) 학파의 거두였던 성호 이익 선생이 《성호사설》에서 말하시기를,

 

고구려 태자 해명은 하사한 칼에 죽었는데, 사신(史臣)은 오로지 해명의 죄로만 공격하고 그의 죄가 왕 때문에 이루어졌음을 몰랐다. 이보다 앞서 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길 때 해명은 옮기기를 반대했는데, 이것이 첫째 죄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유리왕 22년에 도읍을 옮긴 이듬해에 이르러 태자로 세웠던가? 황룡국의 왕이 좋은 활을 선물로 보내 왔는데, 해명은 그 활을 잡아당기다 꺾어 버린 탓에 이웃 나라와 원망을 맺게 된 것이 둘째 죄였다. 대개 용맹하기만 하고 덕을 힘쓰지 않는 것을 가리켜 의리가 아닌 짓이라고는 하지만, 이때를 맞아 동명왕에서부터 왕업(王業)을 일으키는데 누군들 용맹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나중에 부여가 와서 무휼(無恤)을 꾸짖을 때에 왕명을 어기고 말로써 꺾어 버렸는데도 문제삼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왕은 황룡국에게 죽이라 했지만 황룡국에서는 초청해서 보고 해치지만 않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우(禮遇)를 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자로써 민물(民物)이 아직 미개한 그때에 공업(功業)을 도모했다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처럼 했어도 옳지 않음이 없었을 것인데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불효라 하시니 아버지의 명령을 피할 수 없노라.”

하고 마침내 창에 찔려 죽었으니, 이보다 앞에 있어서도 그는 아비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은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호사설> 권제22, 경사문(經史門)5, 해명(解明)

 

《삼국사》에서 해명의 죄를 거론하면서 첫번째 죄를 '왕을 따라 국내성으로 가지 않고 홀승골에 머무른 죄'라 했는데, 성호 선생은 그것에 대해서 '그게 죄라면 어째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듬해에 해명에게 태자의 자리를 주었느냐'고 반박하신다. '황룡국 왕의 선물인 강궁을 꺾어서 이웃 나라의 원망을 산 죄'에 대한 것도, 용맹하기만 하고 덕을 쌓지 않은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그런 용맹한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이 나라를 유지하고 지켜나갈 것이며, 더욱이 황룡국의 왕도 죽이지 않고 도로 돌려보냈으면 외교 문제로 불거질 이유도 없었을 텐데 구태여 죽일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한다.

 

자신더러 '죽어' 하고 말한, 그 강압적인 부왕의 명을 받고도 해명은 '아버님께서 나를 불효라 하시면 불효인 것이다'라며, 그 말을 피하지도 않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한 것에 대해 성호 선생은 그가 그저 용맹을 좋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지 않는 효성까지 갖고 있었다는 말을 하셨다.(즉 유류왕이 해명에게 품었던 오해는 그 자체가 '기우'이고 '망상'이었던 것) 성호 선생의 말처럼 그가 조금만 더 생각을 달리 했더라면, 비류나 온조처럼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뜻은 전혀 이해해주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충분히 '반발'할 여지나 근거, 그리고 그런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해명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러지 않고 순순히 '아버지 명령'대로 죽음을 맞았다.

 

성호 선생은 이 뒷부분에 조심스럽게, 해명의 죽음에 무휼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을 언급하셨다. 훗날 고구려 3대 대무신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무휼 역시, 부여 대소왕의 사신에게 부당함을 따지며 대소왕에게 '누란의 지위' 운운하며 대소왕을 협박하는 듯한 말까지 꺼냈었는데, 왕은 무휼을 죽이지 않았다. 황룡국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는 않을 부여에게 그런 말을 하고도 살아남은 무휼의 경우를 보면, '그럼 해명은 도대체 뭐하러 죽인 거야'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리고 유리왕이 죽기 1년 전에, 여진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비류수에 빠져 죽는다.)

 

성호 선생은 여기서 더 말을 하지는 않으시고, 다만 "무릇 제왕의 집안은 애증(愛憎)이 점점 노출되면 엿보는 자가 사방에서 이르게 되고, 세위(勢位)가 서로 비슷하면 날카로운 칼을 남모르게 더하게 되니, 해명의 죽음은 애매할 뿐이다."라는 끝말을 맺으셨다. 성호의 제자이자 《동사강목》의 저자인 순암 영감은 이러한 성호의 말을 언급하고서, 자신도 논평을 달아놓았다.

 

생각건대, 들어가서는 부왕의 반찬을 보살피고 나아가서는 국사를 감독하며, 일을 멋대로 하지 않고 순종하여 어기지 않는 것이 태자의 직책인 것이다. 해명이 이런 도리를 알지 못하여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고도(古都)에 머물러 있어, 인효(仁孝)로는 이름이 안 뜨고 용맹하다는 소문만 떴다. 그렇게 이웃 나라와 원망을 맺고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으니 죽어 마땅한 일. 죽고 사는 것이란 아주 큰 일인데 해명이 아버지의 명을 피해서는 안됨을 알고 죽었으니,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서 왜 천도할 때에는 순순히 부왕의 명을 따르지 않았던가?


처음에야 명을 따르지 않았다 쳐도, 칼을 내린 뒤라도 곧 칼을 안고 부왕에게 달려가 울면서 국문(國門) 밖에서 죄를 청한 다음에 그 소회를 다 아뢰어서 부왕의 감오(感悟)을 기다렸어야지, 바로 목숨을 끊어서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죽였다'는 악명을 듣게 하고, 자기 자신도 불순(不順)한 아들이 되었으니 옳은 일일까? 살피건대, 해명이 전날에 천도할 때에 명을 따르지 않은 것은 지나치게 은혜를 믿어서였고, 뒤에 곧바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버지가 너무 미워서였으니, 그의 말은 부왕의 명을 받드는 것 같았어도 그 심사는 사실 옳지 못했다.

 

그러나 해명을 이 지경이 되게 한 것은 왕의 잘못이다. 도절(都切)이 죽고 나라에 태자의 자리가 비자, 해명의 슬기와 용기가 사랑스러워 그를 태자로 세우고 국내에 크게 사령(赦令)을 내리니, 왕의 사랑은 참으로 깊었던 것이다. 사랑하기를 깊히 하자 교만하여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게 되고[驕溢], 그렇게 되자 제멋대로 하기를 좋아하고, 제멋대로 하기를 좋아하자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자 서로 책망하기를 지나치게 하고, 서로 책망하기를 지나치게 하자 원한의 마음이 일어났다. 더구나 애정과 증오가 궁희(宮姬)들의 사랑 다툼에서 생기고, 말을 꾸며 헐뜯는 소리가 양궁(兩宮)의 각 처소에서 일어나니, 왕의 마음이 현혹되어 부자의 윤기가 끊어지게 된 것이다.

 

옛날에, 세자는 날마다 세 번씩 어버이에게 문안을 드리고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남의 자식된 도리를 다했으므로, 참소나 이간질이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런데 아깝게도 해명은 이러한 의리를 알지 못하여, 부왕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게 하여, 부질없이 이웃 나라의 원한을 씻어 주고 참소한 자의 계책을 들어맞게 하였으니, 부자가 모두 잘못이라 하겠다. 아마도 뒷날 임금의 경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이 모두 똑같이 말하는 것은, 해명의 죽음에 해명의 반대 세력이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었다. 성호 선생은 해명의 죽음에 무휼 왕자(훗날 3대 대무신왕으로 즉위하게 되는)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했고, 순암 영감은 '대궐 궁녀들의 사랑 다툼에서 생겨난 애정과 증오', '두 궐의 각 처소에서 일어나는 헐뜯는 소리들' 운운하면서, 해명의 죽음은 정치적 배경이 깔려있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때 유류왕과 해명 태자 두 사람이 거점으로 삼고 있던 곳과도 연관이 있다.

 

오늘날에는 유리왕과 해명 두 사람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신도(新都) 국내성과 구도(舊都) 홀승골성을 거점으로 벌인 세력 다툼에서 해명 세력의 패배를 이런 식의 이야기로 풀어놓은 것이라 보는게 지배적이다. 유류왕이 수도를 옮긴 것은 선대왕의 신료, 즉 개국공신들이 득세하다시피 하는 홀승골에서 벗어나 자신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충성할 신진세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천도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 생긴다. 전자는 국내성에 세력 기반을 두고 있는 유류왕 지지세력 즉 신진관료들이고, 후자는 홀승골의 토착세력으로 추모왕을 도와 나라를 건국했던 개국공신 중심의 구세력이 대부분이다. 천도문제를 두고 양자간의 알력이 심해지는 것을 염려한 유류왕은 태왕 자신은 일단 새로 지은 도읍에 들어가 살고, 대신 차기 대권을 이어받을 태자인 해명을 옛 도읍 홀승골에 남겨두는 것으로 타협책을 제시했다.

 

이 타협책이 깨진 것이 바로 해명 태자가 황룡국의 활을 분지른 사건이었다. 사실 황룡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처벌을 원하지 않음에도 유류왕이 해명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내성파 신진세력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비록 태왕이 국내성으로 옮겨갔다고는 하지만 차기 대권을 이어받을 태자는 아직 국내성과는 거리가 있는 홀승골에 있으며, 홀승골을 중심으로 하는 구세력들은 해명을 중심으로 결집해 유류왕의 국내성 조정과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해명이 국내성에서 '무용武容으로 소문이 난 것은 국내성 천도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류왕과 삐걱거리던 구세력들을 무마하고 통솔해나가던 해명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으며, 그 역할은 유류왕 자신이 애초에 해명에게 부여한 임무이기도 했다) 즉 유류왕이 죽고 해명이 태자로서 즉위하는 순간 언제든지 세력판도는 뒤집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에 두려움을 느낀 국내성파 신진세력들은 유류왕에게 해명 태자의 무례상을 들어 그를 규탄했고, 국내성파 세력들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류왕은 불가피하게 해명에게 죽음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나아가 해명을 중심으로 홀승골 구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도)

 


<해명 태자(바람의 나라 홈페이지에서 월페이퍼로 퍼왔음)>

 

굳이 해명이 아니어도, 가족사로 보면 유리왕에게는 가족과 관련해서 그것과 관련 복은 지지리도 없었다. 어릴 때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니와 힘들게 살았고, 기껏 찾아낸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혼인해서 살고 있었다. 첫째 왕비는 일찍 죽고 후처 중 한 명은 도망가버렸으며, 맏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은 자기가 스스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고, 막내아들은 또 비류수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막내왕자가 물에 빠져 죽은 그 해에 유리왕 자신도 죽었다. 그가 죽음으로서 아버지와 자식간에 서로 죽이고 죽는 업보가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아직 유리왕의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고, 그 업보 역시 끊어지지 않았음을 어찌하리.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 讓王曰 “我先王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禮也, 以幼事長者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難矣.”  

가을 8월에 부여왕 대소(帶素)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나의 선왕과 그대의 선군인 동명왕(추모)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우리 신하들을 꾀어서 도망쳐 이곳에 와서 성을 수리하고 백성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 하였다. 대개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禮)이며, 어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 나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8년(AD. 9)

 

지난번에 사신을 보내서 인질을 내놓자고 하고선 군사 5만을 끌고 직접 쳐들어왔다가 폭설 때문에 돌아갔더니, 이게 몇년만인가 이게(그것도 해명이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땐 폭설때문에 실패했지만 앞으로 그런 실패는 두번 다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동명왕 때에만 해도 부여와 고구려는 화친을 유지하고 있었던 듯 두 나라 사이에 그렇다할 대립구도가 보이지 않지만, 이때부터 둘 사이에 서서히 조짐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소는 서서히 고구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것도 해명이 창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시점에서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 乃與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이에 왕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사가 약하니, 이런 정세에는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군신들과 서로 의논하고 회답하였다.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예의를 모릅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8년(AD. 9)

 

이 시기의 고구려는 아직 미약했다. 나라가 세워진지 겨우 47년. 이웃한 부여에 비하면 아직 모든 것이 미약한 나라였던데다, 금와왕의 뒤를 이어 재위한 대소왕은 아시다시피 고구려 동명왕과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다투고 못내 얄미워 죽이려던 자다. 아직 군대는 안 갔지만 이것은 비교하자면 상병 1호봉과 신출 이등병의 차이라 생각된다. 상병과 이병은 짬밥수으로도 비교가 안되는데다. 여기서 상병이 이병을 진짜 못살게 미워한다면 그건 볼장 다본 거 아닌가. 그 자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서서히 고구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고구려가 부여와 맞짱떠서 이기던지 아니면 그 말대로 순순히 머리 박던지. 아무튼 유리왕은 이 두 가지 기로 앞에서 제법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 일단 부여에 머리를 숙이고 기회를 노리기로 했던 것이다. 기록이 미약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기엔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에서처럼 치열한(?) 논쟁은 없었다.

 

[時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歸報大王,‘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그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선조(동명왕)는 신령(神靈: 해모수)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으셨다.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금와왕)에게 헐뜯어 말하여 부끄럽게도 말을 기르게 하였기에 불안하여 도망쳐 나오신 것이다. 지금 대왕은 예전 잘못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 나라[邦邑]를 경멸하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아뢰라. ‘지금 여기에 달걀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왕이 만약 그 달걀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臣)은 왕을 섬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8년(AD. 9)

 

김진 작가의 만화 <바람의 나라>는 이 시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주인공 무휼. 훗날 고구려 3대 대무신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인데, 자신이 직접 부여의 사신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부여와 고구려의 사이에 대해 달걀을 쌓은 더미에 비유하여 강조한다. 고사성어에서 '누란지위'라고 할까. 아버지께서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셨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라고 엄포를 놓으려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扶餘王聞之, 徧問下, 有一老嫗對曰“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부여왕이 듣고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한 할멈이 대답하였다.

“달걀이 쌓여 있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고, 그 달걀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은‘왕이 자신의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오기만 바라는 것이니,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8년(AD. 9)

 

부여왕 대소나 그 신하들는 무휼에 비하면 하이바가 좀 딸렸던가. 그걸 왜 신하들에게 물었으며, 그리고 그 자리에 할멈은 왜 있었을까? 신하들도 모르는 걸 할멈에게 물어야 할 정도였던가. 어쨌거나 할멈은 명쾌히(?) 대답했다.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둥글둥글한 달걀을 쌓아놓은 것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걸 한개라도 잘못 건드려서 전체가 흔들리게 뒤면, 위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져, 달걀은 하나도 먹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방이 터진 계란에서 새어나온 흰자와 노른자로 온통 난장판이 될 것이다. 바닥이 더러워지는 것은 고사하고, 닦을 때 노른자와 흰자의 찐득거리는 느낌이나 냄새는 또 어떤가. 그만큼 깨지면 뒤처리가 힘들다. 한마디로 달걀 더미는 쌓아서 그냥 놔두는 것만으로도 위태롭지만 잘못 건드리면 하나도 못 먹게 되고 자기 힘만 든다고. 뭐, 쉽게 말해서 "깝치면 맞는다. 닥치고 있어라." 이거지 뭐.

 

이런 뜻을 알게 된 부여왕은 분명 대노했을 것이고(안 하면 그게 사람인가), 그 자리에서 당장 고구려를 쳐부수네 마네 했을법도 한데, 정작 《삼국사》에는 이때의 대소왕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에 대해 유야무야, 특별한 기록이 없다.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鬪. 黑蛙不勝死. 議者曰“黑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秋七月, 作離宮於豆谷.]

29년(AD. 10) 여름 6월에 모천(矛川)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져서 싸웠다.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논의하던 사람[議者]이 말하였다.

“검은색은 북방의 색이다. 북부여가 파멸할 징조다.”

가을 7월에 두곡(豆谷)에 별궁을 지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복선일까.... 아니면 후대에 만들어넣은 이야기일까. 이 개구리라는 녀석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제법 비중이 있는 편이다. 금개구리처럼 생겨 금개구리란 이름을 얻었던 부여의 금와왕을 시작으로, 심지어 백제와 발해가 멸망할 때에도 개구리들이 그 징조를 알렸다. 검은 개구리라던지 붉은 개구리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 종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는 나중에 부여가 고구려에 병합되고 나서 일부러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튼 이때부터, 고구려 역사의 수레바퀴가 점차 굴러가기 시작해나간다. 고구려의 역사의 물길을 튼 세 명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의 부상과 함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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