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고구려 2대 유리명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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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인들은 흔히 '화이(華夷)'라는 기준으로 세계를 해석한다. 천하는 동서남북 그리고 가운데의 다섯 지역으로 나뉘는데, 한가운데에 사는 사람들이 중화(中華) 바로 자신들 한족이며, 나머지 사방의 사람은 모두 사이(四夷) 즉 '오랑캐'들이다. 방위에 따라 구분하는 명칭도 다 달라서 동쪽에 있는 것은 이(夷), 서쪽에 있는 것은 융(戎), 남쪽에 있는 것은 만(蠻), 북쪽에 있는 것은 적(狄)이다.(우리는 동쪽으로 동이에 속한다) 한족은 그들이 자신들보다 문화 수준이 떨어진다고 매양 질시하면서 그들이 사신이라도 보낼라 치면 죄다 자신들을 상국(上國)으로 섬기고 '조공'을 바친 것이라 적어놨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들은 항상 이민족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벌벌 떨며 살아야 했다. '천하의 지배자' 천자가 '신하' 제후에게 받는 것이 조공이라지만 천자라 자처하던 한나라는 제후로도 안 보던 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다 못해 여자까지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냈으며, 후대의 당나라도 토번(티벳)과 돌궐(투르크)에 왕녀를 시집보내며 평화를 구걸했던 역사가 있다. 중국 사람들이 자신들 역사책에 부기해놓은 이민족 관련 기록은 어쩌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손자병법》에서 이른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명구에 의지해 그들에 대한 자료를 여기저기 모아둔 것. 부여와 고구려도 중국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위험대상이었다. 이 무렵 고구려 소식을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2천 리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인접하였고, 지역은 사방 2천리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서 백성이 산곡을 따라 거주하며, 경작지가 적어서 농사를 업으로 하여도 생활하기에 부족하므로, 그 습속이 음식은 절제하되 궁실 꾸미기를 좋아한다. 동이(東夷)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하니, 그래서 언어와 법칙이 부여와 많이 같으며, 무릎꿇어 절할 때는 한 다리를 끌고, 걸음은 모두 달린다.
무릇 다섯 부족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ㆍ절노부(絶奴部)ㆍ순노부(順奴部)ㆍ관노부(灌奴部)ㆍ계루부(桂婁部)다. 본래는 소노부가 왕이 되었으나 점차 미약해져서 나중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그 관제는 상가(相加)ㆍ대로(對盧)ㆍ패자(沛者)ㆍ고추대가(古鄒大加)ㆍ주부(主簿)ㆍ우태(優台)ㆍ사자(使者)ㆍ조의(皁衣)ㆍ선인(先人)이 있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한 뒤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玄菟)에 예속시키고, 북[鼓]과 나발[吹], 기인(伎人)을 주었다.
그 풍속이 음란하다. 조촐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밤에는 남녀가 무리를 지어 창악(倡樂)을 한다. 그 공복(公服)은 모두 비단[錦繡]으로 만들고 금은을 장식하며, 대가와 주부는 모두 책(幘)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弁] 같다. 죄가 있으면 여러 가(加)가 평의하여 죽이고, 처자는 적몰해서 노비로 삼는다. 혼인은 모두 부녀(婦女)의 집에 가서 살다가 아들을 낳아 크게 자란 뒤에야 데리고 돌아간다. 틈틈이 장례[送終] 도구를 마련해놓고 금은과 재백(財帛)은 후장(厚葬)하는 데 다 써버리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한 솔과 잣을 심었다. 옥저와 동예(東濊)는 모두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고구려는 일명 맥이(貊耳)라고도 하며, 별종이 있어서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거주하므로 인하여 ‘소수맥(小水貊)’이라 부른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것이 곧 맥궁(貊弓)이다.
우리 나라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조사하려고 해도 《삼국사》 이전의 역사책은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서 전해지는 것이 없고, 신라 때의 문집은 최치원이 쓴 것 중에 간혹 우리 역사에 대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너무 빈약하다. 때문에 초기 역사는 중국인들이 보고 기록한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고구려를 중국사로 봐야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기를. 이 글은 단지 고구려의 이 무렵 민중들 생활모습을 찾아보고 싶어서 부기한 것 뿐이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31년(AD. 12) 한(漢)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胡]를 정벌하려 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가려 하지 않았다. 강제로 보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이에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했다. 주(州)와 군(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국외파병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서는 파병을 요청한 나라가 한(漢)이라고 했지만 이때 중국에 있었던 나라는 신(新), 유류왕 27년(AD. 8) 왕망이 전한(前漢)의 황위를 빼앗아 세운 나라 이름이다. 원래 한나라 원제의 황후 왕정군(王政君)의 조카였던 왕망은 성제(원제 바로 다음) 때 신도후(新都侯)로 봉해지면서 외척으로서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유류왕 24년(AD. 5)에는 아예 평제를 독살해버리고 두 살밖에 안 된 태자 영을 내세워 유자(孺子)라 부르면서 스스로를 '섭정황제'라고 칭하더니, 3년만에 양위받는 형식으로 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나라를 신, 연호까지 초시(初始)라고 정한다. 그러니까 이때가 고구려 유리명왕 재위 31년, 왕망 초시 5년의 일이다.
이때 왕망은 나름 여러 제도를 만들어 사회를 개혁하려 했는데,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이라 부르고, 노비를 사속이라고 불러 개인소유로서 매매를 금지시키고, 반량전 대신 오수전이라는 화폐를 사용하게 하며, 중앙과 지방의 관제와 관명도 고쳤다. 그리고 주변의 이민족을 강력하게 통제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훈'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과 한漢을 뒤흔들었던 흉노와 마찬가지로 몽골족 역시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유럽까지 휩쓸며 전 유라시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고구려로서는 원병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이때 왕망이 정벌하려 했던 오랑캐[胡]란 다름아닌 흉노족ㅡ중국에게 막대한 경비와 인력을 들여 거대한 만리장성을 쌓게 만든 북방의 지배자이며 유럽에까지 그 악명을 떨친 대륙의 무법자들. 한나라의 창업자였던 고조(高祖) 유방마저 그들을 정벌하려다 도리어 백등산에 1주일을 고립당해 겨우 목숨만 건졌으며, 동방의 조선과 남방의 남월(베트남)을 멸망시킨 무제조차 끝내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오랑캐들. 원제도 후궁 왕소군을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야 할 정도로 세력이 커져있던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왕망은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했다.
[嚴尤奏言“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斬之, 傳首京師. <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愈甚.]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와 군에 명해서 달래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분명,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아직 흉노(匈奴)도 누르지 못한 마당에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게 했다. (엄)우는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해다 목을 베어 수도[京師]로 보냈다.<양한서(兩漢書)와 남(南)ㆍ북사(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고 하였다.> 망은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때문에 한의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31년(AD. 12)
사실 흉노와 고구려는 같은 문화와 혈통을 공유하는 스키타이 계통의 북방계 민족이다. 고구려로서는 '이민족' 중국을 도와 흉노를 쳐야 할 이유가 없었는데, 그나마 어떻게어떻게 보낸 군사들마저도 모두 흩어져버렸다.(중국 애들 말대로라면 이 시기엔 아직 요동도 얻지 못한 고구려인데 왜 요서에서까지 병사를 잡으러 나섰다는 것인지 참ㅋㅋ). 말하자면 베트남과 이라크에 파병된 대한민국 군인들이 명분없는 전쟁에 염증을 느껴 탈영했고(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걸 잡으려고 미군이 병사들을 보냈는데 전부 살해당해버렸다. 는 것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록은 직접적으로는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이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우가 걱정하는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다. 당장의 문제보다 고구려와 변경을 접하고 있는 상태에서 고구려가 반발하면 부여도 분명 그 틈을 타서 일어날 것을 들어 '채찍'보다는 '당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흉노라는 커다란 적을 뒤에 두고, 고구려를 잘못 건드렸다가 자칫하면 부여와 예맥(말갈)이 반격해올 것이고 그 틈을 타 흉노뿐 아니라 다른 이민족까지 공격해올 것이다. 이 무렵 동방 세계의 향배를 선도하고 있던 부여가 고구려의 공격을 빌미로 신에게 반발한다면, 신으로서도 골치가 아파진다. 고구려 하나를 치는데 부여까지 끼어서 싸우자고 나설 것이고, 그러다 보면 흉노가 있는 후방이 허술해지고...
기실 고구려 하나를 상대하는데 통일왕조인 한이 후대의 수나 당처럼 직접적인 고구려 정벌을 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를 포함해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변방 이민족 때문이었다. 언제나 중원의 땅을 노리는 존재인 그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고구려 하나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이 소모되는 일. 그런 이유로 엄우가 아뢰는데도 왕망이 듣지 않고 추격하게 했고, 엄우는 생각끝에 고구려의 장수 연비라는 자를 잡아서 그의 목을 베어 왕망에게 바쳐 무마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이, 성곽[城]을 뜻하는 고구려 방언인 구루(構婁)가 변한 말 '구려(句麗)'에 '높다', '존귀하다'라는 뜻의 '고(高)'가 합쳐져서 생겨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왕은 후(候: 제후)보다 높고, 후는 부(夫)보다 높고... 그러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조공받고 내린 작위를 자기 마음대로 깎아놓고 그걸 좋아라 하고 떠든 모양인데. 이 뒤로 우리 군사가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 심해졌다고 한 것은 이 부분을 쓸때 중국 사서를 그대로 참조해서 썼기 때문이다. 중국 쪽에서 보면 고구려의 팽창정책은 분명한 '침범'이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상 가만히 있을 필요 없이 저 나라 국경을 공격해서 쳐서 영토 넓히고 하면 되니까.(실제로 《후한서》 고구려전에 이 내용이 나온다.)
쓰벌.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가 왕하고 싶으면 왕 하는거지 왜 지네들이 해라마라인지. 썅.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년(AD. 13)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왔다.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병사가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였다. 부여군은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왕자 무휼이 '달걀더미'에 빗댄 경고성 멘트를 날린지(제법 늦은 편인) 5년만에, 부여는 마침내 또 한번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고작 10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린애를 전장에 지휘관으로 보낸 유리왕도 그렇지만, 부여군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전쟁을 머릿수만 갖고 하는 것은 아니다만) 전세를 역전시켜 부여군을 궤멸시킨 무휼이라는 왕자의 능력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였을까.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烏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菟郡>]
33년(AD. 14)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께서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2만 군사로 서쪽의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격해서 차지했다.<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중국의 역사서인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를 다른 말로 '맥이(貊耳)'라고 불렀고, 그런 맥족의 별종으로 소수맥(小水貊)이 있어서 서안평(西安平)의 북쪽에 살았는데, 소수(小水)를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라고 했다. 이곳은 그 유명한 '맥궁(貊弓)'의 생산지다.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내려오고 있는 고구려의 활 - 만주 대륙을 휘어잡은 그 강인한 힘의 근원이 이곳에서 나왔다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각궁을 만드는 모습(궁시장)>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溺水死. 王哀慟使人求屍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37년(AD. 18)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애통해하시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건지려 하셨으나 찾지 못했다. 나중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알렸다.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열 근, 밭 열 경(頃)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1경(頃)은 100묘(畝).《삼국사》 기록대로는 유리왕은 5남 1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병으로 죽고 차남은 창원에서 자결했으며, 삼남 무휼 왕자가 대무신왕으로 즉위, 그 아우 해색주 왕자는 훗날 민중왕으로 즉위하며, 다음은 고추가 재사. 이름은 겨우 한 줄 등장하지만 그의 아들이 6대 태조왕으로서 고(高)씨 왕계의 중시조가 된다. 그리고 이번에 물에 빠져 죽은 해여진 왕자까지. 여섯 중에서 셋을 잃었다. 왕자가 왜 물에 빠져 죽었는지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바람의 나라>에선 강신江神에게 홀려 죽었다고 나오던데) 어쩌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 해에 고구려의 속국으로서 신라에 투항해버린 일곱개 나라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琉璃明王.]
가을 7월에 왕이 두곡으로 행차하셨다가 겨울 10월에 두곡 별궁에서 돌아가셨다. 두곡의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37년(AD. 18)
두곡의 별궁은 유리명왕 29년(AD. 10) 가을 7월에 지은 것인데, 그가 왜 여기에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조의 제도이기는 하지만 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르며 여러 행사를 치르고 실제로 거주하는 곳은 정궁(正宮) 혹은 법궁(法宮)이라 하고(경복궁이 여기에 해당함), 온양행궁이나 화성행궁처럼 각종 행사에 참여할 때에 임시로 머무는 곳이 행궁(行宮), 법궁에 불이 났거나 별다른 재앙 및, 왕이 그냥 거처를 옮기고 싶을 경우에 만드는 것은 이궁(離宮)이라고 하는데(창덕궁도 원래는 그런 이유로 지어진 이궁이었음), 별궁은 조금 특별한 경우로, 외국의 사신을 접대한다던지 비(妃)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한 곳을 가리킨다.
해여진 왕자가 물에 빠져 죽은 해 겨울 10월에 유리명왕 자신도 이곳에서 승하한다.
치세는 37년(《삼국유사》 왕력편에는 36년). 동명성왕의 원자이며, 고구려의 제2대 국왕 유류명왕은 그렇게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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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생은 파란(波亂) 그 자체였다. 어려서 '아비도 없는 놈' 소리 듣는 것이 싫어서 고구려까지 찾아와 아버지를 만났고 원자로서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들 셋을 잃고 그중 한 명은 자기 손으로 죽게 했다. 사냥가서 닷새 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책망한 신하(그것도 고구려의 개국공신이며 아버지를 모시던 조정의 중신이었던)가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이 싫어 관직을 뺏고 좌천시켜버릴 정도로 성질급하고 고집도 센 왕이었다. 하지만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겨 나라를 안정시켰고, 부여의 침공도 막아냈다. 국내성은 평양 천도와 맞먹는 대규모의 천도사업으로 동명성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역사의 기틀을 다진 그였기에 유리명왕의 존호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유리명왕은 해씨로 죽었다. 동명성왕을 비롯해 고구려의 왕실은 거의 고(高)씨인데, 유리명왕부터 모본왕까지의 왕들은 해(解)씨를 쓰고 있다. 해씨는 동명성왕이 부여에 있을 때부터 썼던 성씨로(동명성왕의 아버지 해모수 역시 해씨다) 고구려를 건국하고 고씨로 개성하기 전의 성씨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왜 유리명왕이 동명성왕의 고씨를 쓰지 않고 해씨로 기록되었는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분분하던데(심지어 둘은 처음부터 다른 계통의 사람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학자도 교수도 아닌 그냥 '미친놈'이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하고자 한다.
동명성왕 추모의 아들 해유리는 아버지를 그리워해서 고구려로 왔다.
하지만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한 아버지 동명성왕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 분노와 섭섭함에 유리는 아버지처럼 고씨로 성을 바꾸지 않고, 부여에서 쓰던 해씨를 그대로 사용했다.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그것도 이복 동생까지 두고 있는 것을 보고 그걸 좋아할 아들은 없다. 어릴 때부터 물동이나 깨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분노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아버지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태어나서 한번도 보지 못하고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존재를 처음 만난 순간의 그 설렘과 기대감. 심장이 두근거리던 순간, 아버지 옆에 다른 낯선 여자와 두 아이가 다정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본 그 순간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는 태왕이다. 모든 것의 정점에 서있는 남자. 그런데 왜. 왜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거야. 자식인 나와 어머니를 왜 찾지 않고. 다른 여자와 자식까지 두고 살면서 나를 찾지 않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게 만든거지? 왜? 어린 유리의 마음에 이런 수만가지 의문이 차올라 결국 머릿속을 메워버린다ㅡ.
왕은 인간적이어서는 안된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존재이며 신 이외의 그 어떤 자도 넘볼수 없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초인적인 능력을 보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권위를 보여야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거나 보통의 인간과 다름없는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지도자의 자격은 박탈되고 권위는 빛을 잃는다. 최고의 왕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괴로움과 욕망-사랑, 증오, 슬픔 따위의 인간으로서 가지게 되는 자잘한 감정 따위를 품지 않은 자이다. 왕이 가져야 할 것은 국정에 대한 봉사정신과, 국토 팽창과 국위 선양에 대한 야망 그 두 가지 뿐. 단지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금제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많다. 그 누구보다 강한 갈등과 고뇌를 마음에 품은, 그러니까 다시 말해 가장 인간적인 자에게 그들이 원하는 이상형의 왕의 모습을 얼마나 요구할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유리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인간적인 고뇌속에 살았던 왕이었는지도 모른다. 떠나버린 여자를 그리며 꾀꼬리의 노래를 지어불렀던, 그렇게 한 나라의 국왕이며 지도자로서 가져선 안될 맹독 같은 감정을 품고 갈등하며 고뇌에 찬 일생을 살았던 유리왕의 삶이 내게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친근한, 인간적인 매력으로 와닿는 것이다. 그것은 대의를 위해서 스스로 인간의 감정을 거세해버린 '지도자'의 화려하고 엄숙한 일대기가 아니라, 평생을 가도 치유되지 못할 고뇌를 안고서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살아간 우리와 같은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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