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0>제15대 미천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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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한지 2년만에 군사 3만으로 현도를 쳐서 승리한 미천왕.
그뒤 9년 동안 무슨 연예인들 재충전이랍시고 은둔생활 하듯
기록에 얼굴 비추지도 않으시고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十二年, 秋八月, 遣將, 襲取遼東西安平.]
12년(311)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옛날 동천왕이 쳐서 빼앗았다가 잃었던 것인가.
이 서안평을 미천왕 때에 다시 수복한다.
<고구려 군사의 모습. 안악 3호분 대행렬도 벽화 중에서.>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이무렵 5호 16국의 전란으로 중국이 온통 소란스럽던 틈을 타서,
고구려는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으려고 자주 중국을 쳤는데,
이 무렵 진의 장수로서 장통(張統)이라는 자가 대방과 낙랑에 근거지를 두고
미천왕과 서로 싸우다가 수차례 깨지기만 했다.
단재 선생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낙랑이나 대방은
모두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닌 요동에 가설(假說)된 것이었다 했다.
미천왕이 그 낙랑을 공격했을 때, 장통은 고구려의 적인 모용외에게로 도망쳐버렸고,
모용외의 부하 장수 낙랑왕 모용준(幕容遵)에게 구원을 청했다.
하지만 그를 구원하러 갔다가 오히려 고구려에게 패한 모용준은
장통을 꾀어 백성 1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투항해버렸고,
모용외는 요(遼)의 땅 유성(柳城)ㅡ지금의 금주(錦州) 등지에 또 낙랑군을 두어
장통을 그곳의 태수로 삼았다. 그리고 장통이 다스리던 요동의 낙랑과 대방은
고스란히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게 된다.
이로써 한(漢) 무제 원봉(元封) 3년 계유에 중국 군현이 되었던 낙랑이,
(조선조에는 한반도내의 한사군의 존재를 그냥 믿었던 듯 싶다)
무릇 421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안정복 영감은 말하고 있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 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314) 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장통인지 밥통인지가 없는 틈을 타서 계속해 밀어붙이며,
낙랑을 손에 넣은 이듬해에 또다시 남쪽의 대방을 침공하는 미천왕의 정복전쟁은,
그야말로 쾌속질주의 연속 그 자체였더란다.
실상 호기 아닌가. 중국에 통일된 세력도 없고 여기저기 찢어져있는 지금이.
중국 애들이 안 되는 것은 곧 우리에게는 되는 것.
5호16국의 전란으로 중국 대륙이 소란스럽던 이 시대에,
고구려는 맹위를 떨치며 중국 세력을 축출하는데 온힘을 쏟아부었고 마침내 성공시켰는데,
결국 당이라는 중국사상 세번째 통일왕조에게 망하고 말았으니,
저들에게는 '통일'이라고 좋아했던 것이 우리에게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비극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중국과 우리는 사실 상극과 같은 것.
영영 서로 함께 하려고 해도, 체질적으로 힘들 것이다.
<안악 3호분 대행렬도 속의 고구려 군사들의 모습. 미천왕은 적극적인 중국 군현 축출에 나섰고, 그것은 성공을 거두었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16년(315) 봄 2월에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에 살별[星孛]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현도성을 쳐서 깨뜨렸을 때에는 말 그대로,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그렇게 말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었다.
이 현도성을 쳐서 깨뜨리는 것으로, 미천왕은 마침내 고구려 국경 서쪽의
옛 중국 군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로서 동명왕 때부터의 오랜 숙원이었던 중국 세력의 축출을 완수한 것이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史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廆. 三國進攻棘城, 廆閉門自守, 獨以牛酒, 犒宇文氏. 二國疑宇文氏與廆有謀, 各引兵歸.]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의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나라와 단씨(段氏), 우문씨(宇文氏)를 달래어 함께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우유[牛酒]를 보내 위로하였다. 두 나라(우리와 단씨)는 우문씨와 외가 음모한다고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그러니까 진의 평주자사 최비라는 이자가, 고구려와 단씨, 우문씨에게 모용외를 치게 했는데,
안정복 영감이 이 부분에 대해 《자치통감》을 인용해서 적어놓은 것을 보면,
최비라는 이 작자는 일찍부터 중주(中州)에서 인망(人望)이 있었는데,
요동을 다스리면서 선비며 백성들이 자신에게 많이 귀의해오니,
내심 모용외를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모용외가 자주 사신을 보내 초대하는데도,
모용외가 혹시나 자신을 잡아 가둘까봐 겁을 내서 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우리 고구려와,
요서에 살던 선비족 일파 단씨(段氏), 흉노계 선비족인 우문씨(宇文氏),
그리고 선비별부(鮮卑別部)를 가만히 꾀어 함께 모용외를 치도록 중간에서 거간을 한 것인데,
이것이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오랑캐로서 제압한다.
같은 오랑캐끼리 싸움 붙여서 그 사이에서 실리를 챙기겠다는 되게 얍삽한 수법.
모용외가 있는 극성(棘城)에서 그만 모용외가 쓴 꾀에 말려들어서,
우리와 단씨는 우문씨가 모용외와 내통하고 있는줄 알고,
의심하면서 일찌감치 군사를 빼버린다.
[宇文大人悉獨官曰 “二國雖歸, 吾當獨取之.” 廆使其子皝與長史裴嶷, 將精銳爲前鋒, 自將大兵繼之. 悉獨官大敗, 僅以身免. 崔毖聞之, 使其兄子燾, 詣棘城僞賀. 廆臨之以兵, 燾懼首服. 廆迺遣燾歸, 謂毖曰 “降者上策, 走者下策也.” 引兵隨之. 毖與數十騎, 棄家來奔, 其衆悉降於廆.廆以其子仁鎭遼東. 官府市里案堵如故.]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
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嶷)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은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했다. 최비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 형의 아들 도(燾)를 시켜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도는 두려워 머리를 조아려 사실을 고하였다. 외가 도를 돌려보내고 비에게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
라고 말하고,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갔다. 비는 수십 기(騎)와 함께 집을 버리고 도망쳐 왔고, 그 무리는 모두 외에게 항복하였다. 외는 그 아들 인(仁)에게 요동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관부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20년(319)
고구려와 단씨가 서로 자기 군사를 빼버린 틈을 타서,
모용외는 아들 모용황과 장사(長史) 배의(裴嶷)와 함께, 혼자 남은 우문씨를 쳐서 깨뜨린다.
일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된 최비는 조카 최도를 시켜 모용외를 거짓으로 축하하게 해서
자기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려고 했고,
(이때에 고구려며 단씨의 사신도 또한 이르러 강화를 청해왔다던가.)
최비가 보낸 최도는 모용외의 협박에 어쩔수 없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최평주(崔平州) 즉 자신의 삼촌인 최비가 시킨 것이라고 털어놓고 만다.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
즉 항복하면 살려주겠지만 도망치면 죽여버리겠다는 경고지.
하지만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나같은 바보라도 그 말은 안 믿겠다.)
최비는 그만 고구려로 튀어버린다.
그리고 최비가 다스리던 땅은 모두 모용외의 수중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我將如孥據于河城, 廆遣將軍張統, 掩擊擒之, 俘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廆遣慕容翰·慕容仁伐之, 王求盟, 翰·仁乃還.]
우리 나라 장수 여노(如孥)는 하성(河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1천여 가를 사로잡아서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자주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외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왕이 맹약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20년(319)
하성(河城)이라면 강가에 있어서 붙은 이름 같은데,
최비를 숨겨놓고 내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인지 뭔지,
모용외는 그 하성을 지키고 있던 우리 장수 여노와 그의 부하 1천 가를 잡아 극성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가뜩이나 소원하던 우리와 저들의 사이는 엄청나게 나빠졌다.
모용외는 일찌기 진으로부터 평주자사라는 벼슬을 받은 일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진은 317년에 세워진 동진(東晉)을 말한다.
그 이전의 진인 서진(西晉)이, 311년 흉노족 유연이 세운 한(漢)에 의해 멸망당하고
진의 남은 잔당들이 남쪽으로 세운 나라가 바로 동진인데,
모용외는 이 틈을 타서 진의 땅이었던 창려 대극성을 차지한다.
말하자면 세력 약해진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빼앗긴 땅'의 주인으로 '인정'해줬다는 것인데,
무슨 도둑놈 물건 훔쳐간 것을 '너한테 주마'하고 괜히 허세부린 거다.
미천왕이 자주 요동을 쳤다는 것에서도 당시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수 있다.
하성을 지키고 있던 여노라는 장수에 대해서 단재 선생은 고노자(高奴子)의 오기라 주장하며,
봉상왕 때부터 선비족을 여러번 격파한 명장인 그가
봉상왕 5년 이후로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들어 그 사이에 이미 죽었다고 봤다.
그런 그가 40년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의심스럽다며 아마도 거짓 기록이 아닐까 한다고,
《조선상고사》에 주장을 해놨다만.... 그건 생각이 좀 다르다.
여노와 고노의 글자가 비슷하다고 두 사람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나,
봉상왕 5년 이후 기록에 안 보인다고 그 사람이 죽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단재 선생께서 지레짐작을 하신 것이다.
[二十一年, 冬十二月, 遣兵寇遼東, 慕容仁拒戰破之.]
21년(320) 겨울 12월에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요동이라는 이 땅의 범위에 대해서 지금이야 랴오허 즉 요하 동쪽을 요동이라고 하지만,
그 무렵에는 수도 뤄양(樂陽)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있으면 다 요동이라 불렀다.
모용외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가 점거한 지역은 '창려 대극성'인데,
《북사》에서는 '을불리' 즉 미천왕이 모용외와 싸우며 자주 침공한 지역이 '요동'이라고 해놨다.
모용외가 점거한 창려군이라는 곳은 지금의 진황도(秦皇島) 부근.
요서에서도 한참이나 서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그러고보면 고구려가 점거했다는 요동이 꼭 우리가 아는 그 요동이라는 법도 없는거다.
여기서 말하는 이 요동도.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선생은 요동의 군치가 양평(襄平), 즉 지금의 요양(遼陽)라고 봤다.
하지만 이 요동에서의 전쟁을 표현한 기록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진서(晉書)》에,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해서 물러나 도리어 맹약을 청하였다.”
고 한 기록과 《양서(梁書)》에서
“을불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되 모용외가 제어하지 못하였다[乙佛頻寇遼東, 團不能制.].”
고 한 기록이 모순된다는 것을 단재 선생은 지적한다.
여기서 단재 선생은 일단 양서의 편을 들어《진서》가 틀렸다고 설명한다.
나중에도 말하겠지만 저 《진서》라는 책은 엄청난 오점투성이 역사책이라
중국에서도 그닥 신뢰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다.
[三十一年, 遣使後趙石勒, 致其楛矢.]
31년(330)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고시(楛矢)를 전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고시라는 것은 곧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을 뜻한다.
보통 화살이라 하면 대나무로 만드는 죽시밖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고구려나 발해, 고려, 심지어 조선조 초기만 해도, 웬만한 명궁(名弓)들은 모두,
싸리나무로 만든 호시를 사용했다.
주로 북방에서 많이 쓰던 것 같은데, 북방의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 자랐던
조선 태조 이성계는 대초명적(大哨鳴鏑)이라 해서, 싸리나무[楛木]로 살대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용비어천가》에 실려 있다.
하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읍루'편에 보면,
그들이 쓰는 화살을 모두 싸리나무로 만들고 촉은 검은 돌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조선조의 학자 성호 이익은 읍루 즉 숙신은 즉 우리나라 북도 두만강 이북의 지대이고,
함경도 북부 일대에는 속칭 서수라(西水羅)라고 하는 나무가 있어,
이것을 잘게 쪼개서 높이 매달고 그 끝에 무거운 돌을 달아,
하룻밤을 지나면 줄같이 곧아 화살대를 만들 수 있다고(《성호사설》 中 '고시석노')
이 서수라가 바로 광대싸리나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광대싸리나무는 북쪽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산기슭 중턱에
볕 잘 드는 곳에 가면 여기저기 볼수 있는 것인데,
질기면서도 또 가벼워서 화살대 만들기에 좋다고 했다.
특히 백두산 부근의 싸리나무가 질기면서 곧았는데,
이걸 캘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던가.
아무튼 고구려에서 다른 나라에 예물로 바칠 만큼 귀하게 여긴 화살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맨날 대나무 화살밖에 안 나오지만.)
고구려로부터 광대싸리나무화살을 선물받은 이 후조는,
중국의 5호(胡) 가운데 하나로서 흉노족의 지파였던 갈족이 319년에 세운 나라였다.
후조의 개국자 석륵은 원래 전조 유연의 휘하에서 서진을 토벌에서 큰 공적을 세웠는데,
유연이 죽고 그 뒤를 계승한 유총도 죽자 전조에서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당한 틈을 타서,
석륵은 유연의 후손인 유요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고, 유요을 황제에 즉위시켰다.
그리고 석륵 자신은 조공으로서 벼슬하다가, 그후 독립하여 조왕을 칭했다.
석륵과 유요는 10년간 서로 겨루었지만, 329년에 이르러 석륵은 전조를 멸망시켰다.
이를 계기로 석륵은 스스로 천왕이라 칭하고 다음 해에는 황제를 칭했다.
(미천왕이 보낸 싸리화살은 석륵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하선물이었던 셈.)
하지만 이 나라는 333년에 석륵이 죽은 뒤에 점차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한족 출신의 염민이라는 자에게 351년 멸망당한다.
(염민 이 자가 갈족을 대량학살한 장본인)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32년(331)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미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미천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그리고 미천왕은 죽었다. 치세 32년만에.
미천왕이라는 왕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편의 인생극장이었다.
왕족이었다가, 머슴이었다가, 소금장수였다가, 전과자(?), 그리고 일국의 태왕에 이르기까지.
미천왕의 그러한 삶이 그의 정치에 어느만큼 반영되었는지 보려고 하면,
그의 일생이 온통 '전쟁'으로밖에 일관하지 않으니,
백성을 위해서는 어떤 정치를 펼쳤던가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내 짧은 지식으로는 당최,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할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왕으로서의 자신의 소임을 다했고,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치세 기간 동안, 그는 옛 조선 땅에 남아있던 한 군현 세력,
낙랑과 현도와 대방의 중국 세력을 완전하게 몰아내고 그 땅을 되찾았으며,
민족사적으로 완전한 '광복'이라고도 할수 있을만한 대업을 이룬 왕이었다고 나는 보고 있다.
굳이 민족사적인 업적 운운하지 않아도, 미천왕의 인생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인생역정'의 기록으로서, 그리고 '군왕의 길'로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미천왕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겠지.
어렸을적 들었던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 그 험난한 삶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역경을 딛고 마침내 지존으로서 군림하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왕의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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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인데 단재 선생님이 환인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왕자평(王子平)이라는 그 지방의 학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셨단다. 그 사람은 원래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 출신으로, 단재 선생님께 '우굴로'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주족 노동자들이 신고 다니는 가죽신발이 바로 우굴로인데, 그 신발의 연원에 대해서 단재 선생님이 들은 이야기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옛날 고구려 때에 우굴로라는 대왕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걸식을 할 때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서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은 '우굴로'라 합니다. 그 대왕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것입니다.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해야 할 정도로 곤궁하였지마는, 늘 요동을 되찾을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요동 각지를 돌아다닐 때, 산과 강의 험하고 평탄한 것,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갖고 다니면서 길가에 뿌려서 그 지나간 길을 기억했으므로, 지금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습니다.”
라고.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단재 선생은 그 이야기를 듣고 '우굴로'라는 단어는 '을불', 즉 미천왕의 휘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젊어서 떠돌면서 구걸했던 왕은 을불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것을 들어, 이 '우굴로'는 미천왕이 젊었을 때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주장을 하셨다. 신을 신발도 없어서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고 다니면서, 그 와중에도 한족에게 빼앗긴 땅을 수복하겠다는 의지만은 변함이 없었기에 항상 풀씨를 갖고 다니면서 길가를 정탐했다는 미천왕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야 알 수 없지. 을불이라는 이름으로 구걸하고 돌아다닐 때는 자기가 오늘 하루 무사히 버틸수 있을지 없을지도 곤란한 입장인데 언제 왕이 될줄 알고 그런 생각을 했겠나. 다만 단재 선생님이 수집한 이 이야기가 나름 흥미롭게 생각돼서, 지금 여기 적어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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