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6>제19대 광개토대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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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필자는 신라에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이야기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다.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 37년(392)
《삼국사》에는 내물왕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능비』에 의거해 기년을 수정하면 내물왕 36년이자 담덕왕 즉위 원년. 서기로는 391년에 해당한다. 예전에는 전왕이 죽으면 바로 그 해가 신왕(新王)의 즉위년이 되는 '즉위년칭원법'을 썼는데, 《삼국사》도 마찬가지였다. 태왕 즉위 원년은 즉 선왕인 고국양왕 9년에 해당된다. 《삼국사》에는 실성이 인질로 온 것이 391년 봄 정월의 일이라고 했는데, 고국양왕은 여름 5월에 죽었으니 그때 아직 고국양왕은 살아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해에 고국양왕이 죽고 담덕왕이 즉위했을 뿐이다.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는 이야기에 누구보다도 펄펄 뛴 것은 백제였다. 이 무렵 백제는 금관가야와 왜를 끌어들여 '반(反) 고구려 동맹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동맹체에 유일하게 가입되지 않은 것은 신라였다. 《삼국사》에 보면 371년에 백제의 독산성 성주가 300명의 백성을 이끌고 신라로 망명한 것을 백제가 송환해달라고 했지만 신라쪽에서 거부한 내용이 나온다. 이때부터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화친은 깨졌다.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2년(392)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이 무렵 백제에는 진사왕의 아우 아신(아화)이 즉위해 있었다. 침류왕의 원자이면서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울분을 삭혀오다가, 진사왕이 고구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지지를 잃게 되자, 그것을 빌미로 구원행궁에 사냥나간 진사왕을 살해한 것이다.
한성별궁에서 태어날 때 이미 오색의 기운이 궁 안에 서리는 등 태어날 때부터 신령한 조짐을 보였다는 아신왕. 숙부에게 찬탈당했던 왕위를 되찾아 한창 끓어오르는 정치욕심에 덧붙여, 이 무렵 백제의 주적이었던 고구려에게 설욕하고 백제의 위상을 되살리겠다는 강한 의지에 불타있던 왕은 우선적으로 백제가 관미성을 잃으면서 고구려에게 빼앗기다시피한 해양에서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방 경영의 중요한 전초기지 관미성을 꼭 되찾지 않으면 안되었기에(더구나 관미성을 놔두고 북쪽으로 계속 가면 후방을 위협당할 소지가 있다) 자신의 외숙부이자 좌장(佐將)이었던 진무(眞武)를 부른다.(※원래는 '왼쪽'을 뜻하는 '좌左'이지만 <새로 쓰는 백제사>에 의거해 '보좌한다'는 뜻의 '좌佐'로 고쳐썼음)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가을 8월에 왕이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설욕하라.”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아신왕 원년(392)
이 기록은 《백제본기》에서 원래 아신왕 2년(393)의 일이라고 적었지만 여기서는 고구려본기의 기년에 맞춰서 1년 앞당겨 392년으로 적었다.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고 기록한 진무. 조카이자 어라하(국왕)인 아신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빼앗긴 관미성을 되찾고자, 군사 1만을 내어 관미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아신왕 원년(392)
하지만 실패했다. 백제 아신왕의 관미성 탈환전은. 《삼국사》에서 전하는 바, 관미성 탈환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고구려의 수성전과 군량 수송의 문제에 있었다고 했다. 고구려 사람들 성 잘 지키는 거야 다 아는 사실인데, 군량 수송이 안 됐다ㅡ후방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설마 태왕이 후방으로 군사를 보내서 백제의 군량수송을 끊어버린 걸까?
[創九寺於平壤.]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2년(392)
태왕이 평양에 지었다는 평양 9사(寺). 굳이 아홉 절을 지은 것은 '9'라는 숫자가 가지는 나름의 상징체계를 따른 것이다. 인도의 우주관은 세상에 산이 아홉 개, 바다가 여덟 개라고 말하는데, 가운데에 수미산을 중심으로 주변에 여덟 개의 산들이 둘러싸여 있고각각의 산과 산 사이에 바다가 있다는 것이 그들이 인식한 세계였다. 태왕은 그러한 불교적 세계관을 평양이라는 도시에 적용해서,'불교'라는 이름으로 수미산을 비롯한 아홉 산이 존재하는 불교의 세계를 재현하려고 했다. 대체로 들라면 평양의 영명사(永明寺)와 광법사(廣法寺). 영명사는 유명한 부벽루가 있는 곳인데, 6.25 때 폭격으로 박살나고 그 자리에는 지금 요양소가 들어서있다던가.광법사는 부서진 것을 20세기에 들어서 시멘트로 복원했단다.
<담덕왕이 평양에 세웠다는 광법사. 6.25때 파괴된 것을 1990년에 다시 지음.>
담덕왕이 정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 역시, '영원한 낙토', '영원한 법의 즐거움'이라는 불교적인 의미가 짙다. 나라를 새롭게 일신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으로, 태왕은 불교를 선택했다. 평양의 민심을 다잡으면서 또한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백성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삼국유사》에 보면 요동성에 세워진 육왕탑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일연 땡중은 《삼보감통록》이라는 책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 按行國界次, 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 云 "是佛塔." 王委曲問詰,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 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 行軍薛仁貴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問古老, 云 "是先代所現." 便圖寫來京師.<具在若函.>]
고려의 요동성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려의 성왕께서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오색 구름이 당을 뒤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곳에는 중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중이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곁에는 3중으로 된 흙탑이 있었다. 위에 솥을 덮은 것 같은데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거친 풀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곳을 파보게 했더니 한 길[丈]쯤 되어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다. 더 파보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수행하던 신하[侍臣]가 그 글을 알아보고 말했다.
"이는 불탑(佛塔)이올시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그 모시던 신하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한(漢) 때에 잠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원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고 쓴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祭天金人]이다.>이라 합니다."
이에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곧 7중 목탑을 세웠으며, 그 뒤 비로소 불법이 전해 오자 그 시종(始終)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본래 탑이 썩어 무너졌다. 아소카 왕[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이할 것이 없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인용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요동성육왕탑
기록은 더 이어져, 훗날 고려와 당이 한창 전쟁을 벌이던 661년, 당의 장수로서 요동에 이른 행군 설인귀가 이 불상이 있는 산을 다시 찾을 일이 있었고, 그 불상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 장안으로 돌아왔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삼보감통록》이라는 책은 일단 불가에서 '삼귀의처(三歸依處)'로 꼽는 부처(佛寶), 부처의 가르침(法寶), 그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 집단인 승도(僧寶), 이들 '삼보'의 영험함을 찬미한 책이고, 요동성에 세웠다는 그 육왕탑은 '승보'에 해당한다. 정작 '성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일연은 모른다고 했다. 간혹 동명성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동명제가 즉위한 것이 BC. 37년이고 죽은 것이 BC.19년. 아직 한에서도 불교가 뭔지를 몰랐던 시대에 동쪽에서 불교를 알았겠냐.
하지만 위에서도 말하듯 한과 동일한 시대 흉노족의 제후왕이었던 휴도왕 역시 금인(金人)을 만들어 섬겼다고 했고(이는 훗날 김金씨의 유래가 됐다), 후대 사람들이 그 금인이 곧 부처였다고 말한 것도 있고(최치원은 백제의 소도가 곧 휴도왕의 제천금인이었다고 했음) 불교 전승에서 육왕, 즉 인도의 아소카 왕은 인도를 통일한 다음,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을 세우고 사리를 모셨는데모두 8만 4천개에 달했다 한다. 아소카왕이 요동 땅까지 왔을 리는 없으니 요동의 불탑을 아소카왕이 세운 것이라는 말은 차치하고서도, 꼭 우리 나라의 불교수용을 소수림왕 때로 기점을 잡을 필요가 있을까.
《삼국유사》가 말해주듯 평양뿐 아니라 요동에도 여러 불탑이 건립되었다. 절이 늘어나면서 승려로 출가하는 사람도 많아졌는데, 이때 고구려에서 활약한 승려 중에 담시(曇始)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아니고 중국 사람인데, 다른 이름으로는 '혜시(惠始)'라고도 한다. 《양고승전》및 《삼국유사》에 인용된 원위석담시전(元魏釋曇始傳)에 보면 동진 효무제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경전과 율전 수십 부를 갖고 '요동' 즉 고구려에 와서 불법을 펴서 교화하고,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가 고구려 불교에 끼친 영향이란 것은 '삼승(三乘)'의 가르침으로 '삼귀오계(三歸五戒)'의 법을 세웠다는 것에 있다. 천주교의 계명이나 세례랑 비슷한 건데, 삼귀란 삼귀의라고 해서 불보, 법보, 승보의 삼보에 귀의하는 것, 오계란 불교 신자로서 출가 여부에 상관없이 두루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계율을 말한다. 토착사상을 빌려 불교를 설명하던 기존의 '격의불교'에서 벗어나, 불교경전에 의거해 반야사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불교의 경향이 담시에 의해 고구려에 새롭게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것은 곧 중국 내에서의 불교 동향이기도 했다. 이전의 격의불교는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는데 기여하기는 했지만, 폐해도 적지 않아서 이 시기에 오면 중국 교단에서 배척을 받았다. 그 중심이 도안(道安: 312~385)이라는 승려였는데, 불교를 불교 자체로 이해한다, 즉 기존의 도교적 토착신앙을 빌려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본연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가르침으로 불교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론의 연구 및 실천수행이 강조되었다.
수계를 받는데 필요한 계본과 수계 작법인 갈마법이 담시를 통해 고구려로 전해지면서, 고구려에서는 승려 출가가 본격화되었고, 이렇게 해서 확대된 교단은 불교의 다섯 가지 계율로 통제되기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 '불교'라는 종교를 매개로 하는 네트워크망이 담덕왕 때에 이르러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평양 부벽루. 원래 영명사의 부속암자로 담덕왕 때에 처음 세워졌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6.25 때에 폭격을 맞아 파괴된 것을 다시 지은 것.>
한편 관미성 탈환에 실패한 백제는 곧장 관미성을 우회해서, 평양의 코앞인 수곡성으로 직행해 들어왔다. 일찌기 백제의 태자가 이르렀던 그곳이었다.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3년(393) 가을 7월에 백제가 쳐들어왔다.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은 밤에 도망쳤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이것을 백제본기는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水谷城) 밑에서 싸워 패하였다[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고 적고 아신왕 3년(394)의 일로 기록했다.(여기서는 마땅히 아신왕 2년(393)의 일로 끌어올려 적었다.) 서해의 관미성(강화도)이 수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백제가 그 관미성을 제치고 황해도에 있는 수곡성(신계)을 질러 공격한 것은 일단 관미성은 놔두고 북쪽부터 먼저 친 다음에 관미성을 감싸서 되찾는다고 하는. 백제의 외통수였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위도상 수곡성은 관미성보다는 훨씬 더 위에 있다. 후방 연결이 안 돼서 관미성 탈환에 실패했던 백제다. 수곡성을 치게 되면 관미성에 있는 고구려군에게 배후를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데도 그런 무모한 작전을 펼친 이유는 이제 와서는 알기 어렵다.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전장이었던 한수(한강) 이북과 패수(예성강) 사이의 전선은 아직 불확실했다. 백제도 고구려도 모두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기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이었고, 관미성이라는 이 성이 지리적으로 봐서 백제의 최북변에 있던 건 아니다보니(안 그랬으면 백제군이 관미성을 후방에 두고 수곡성까지 치고 올라갈 리가 없으니까) 이 안에서는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막 뒤섞여서 혼전을 벌이는 판국이 됐다.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3년(393)
백제의 이러한 '외통수'가 고구려에게 살짝 위협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수곡성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막아낸 고구려는 바로 다음 달에 변경에 백제를 막기 위한 일곱 요새를 만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황해도 방면에 있었다. 태왕은 이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구역 편제, 나아가 황해도 남부 해안 지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백제 수군을 막기 위해서도 축성은 필요했다.
황해도 남부 해안 지대에는 배천 치악산성이나 연안 봉세산성, 해주 수양산성, 옹진 고성 같은 고구려 산성들이 많이 있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성들도 여럿 있는데, 최창빈이라는 학자는 그 성들을 모두 고구려 때에 7성을 쌓으면서 방어성으로 함께 쌓았다고 했다. 일종의 해양방어기지인 셈이다. 수양산성이 있는 해주도 고구려 때에는 내미홀(內未忽)이라고 불렸는데(고려 방언으로 '바다'는 '내미內未'였는데 이 단어는 훗날 일본어 '나미'의 어원이 됐다) 다른 이름으로는 지성(池城)이나 장지(長池)라고도 했다. 치악산성은 치양산성이라고 해서 고구려 때에는 도랍현이라고도 불렸던 배천에 있고, 예성강에서 봐서 가장 전방에 있는 성으로서 한성으로 가장 빨리 진격할 수 있는 곳이다. 연안은 고구려 때에는 동음홀(冬音忽), 또는 시염성이라고도 불렸던 곳으로 황해도 남부 지역의 중심지다.
이들 국남 7성에 남평양이 있는 장수산성(신원)과 성황산성(태백산성)이 있는 평산(고구려 다지홀), 고구려 때의 옹천이었던 옹진현이 백제와의 해안 접경지대를 방어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수곡성이 공격당한 바로 다음에 담덕왕이 국남7성을 쌓았다는 것은 후방에서 칼날을 들이댈 소지가 다분한 관미성을 두고 모험을 감행한 백제에 적극적으로 맞서기 위한 보다 강력한 방어책이었다. 백제에 대한 좀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공세를 감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4년(394) 가을 8월에 왕은 패수(浿水) 위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천여 급을 노획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삼국사》에서는 광개토태왕 4년(394)ㅡ비문에 기록된 바로는 영락 5년(395). 이 전쟁은 일단, 백제의 선제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 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眞武)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했다. 고구려왕[麗王] 담덕(談德)이 친히 7천 군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8천 명이 죽었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아신왕 4년(395)
관미성을 공격했던 맹장 진무까지 가세한 백제군에 맞서, 왕은 소(小)패수(예성강)에 진을 치고 맞섰다.(※고구려에서는 '평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 근교의 강은 모두 패수라고 불렀음. <조선사연구초> 참고.) 이 전쟁에서 백제군을 맞아 싸워 8천이나 되는 군사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 過富山ㆍ負山, 至鹽水, 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 羊不可稱數. 於是旋駕因過襄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田, 獵而還.]
영락(永樂) 5년인 세재(歲在) 을미(395)에, 왕께서는 비려(稗麗)가 ▨▨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자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들의 세 부락과 6, 7백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와 말과 양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거쳐 동쪽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한 후에 돌아왔다.
『광개토태왕릉비』
지금의 요하 상류, 시라무렌 강인 염수 가에 거주하던 비려ㅡ거란족에 대한 정벌. 영(營)이란 천막[帳]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락으로 '마을'로 해석할수 있는데, 이때의 정벌에서 '실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와 말과 양'을 얻었다고 비문은 적고 있다.
양평은 요양(遼陽)의 옛 지명인데, 뒤의 북풍 등의 위치를 보아, 요양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지금의 요동 반도를 따라 나있던 길이 양평도라고.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선 북풍을 지금의 심양 서북쪽 봉천부(奉天府)으로 비정해놨지만, 북풍은 3세기 무렵에는 중국 위(魏)의 요동군 속현 가운데 하나였고, 240년 요동군의 문현(汶縣)과 북풍현의 유민이 발해만을 건너 산동반도에 제군(齊郡) 신문(新汶)ㆍ남풍(南豊) 등의 현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문현을 지금의 개현(蓋縣) 지역으로 볼 때, 문현 유민과 함께 바다를 건너갔다면 두 고을의 위치는 그만큼 가까웠을 것이고, 북풍현 역시 개현과 가까운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 사면(斜面)에 있었다고 보아야 된다.
그런데 만약 영락 5년이 태왕 즉위 5년이 아니라 태왕의 즉위년이라면 어떻게 될까? 조사해보니 일부 학자들은 『능비』의 '영락 5년 비려(거란)정벌기사'가 《삼국사》의 '광개토왕 원년 9월 거란 정벌기사'와 일치하는 것을 들어 『능비』의 비려 정벌은 실제로 담덕왕 5년이 아닌 담덕왕 원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고도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한 가지 명제를 두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는 의문. "저 '영락(永樂)'이, 정말 광개토태왕 한 사람만의 연호일까?"
모두 다 알다시피 연호는 중국에서 황제국을 칭하면서 스스로 달력을 만들 때 쓰는 일종의 연대표기 방식이다. 황제가 즉위하면서 정하는 연호가 왕조의 연도이자, 그 나라 달력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영락'이라는 그 연호를 담덕왕이 직접 즉위하면서부터 썼느냐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무척 의문스럽다. 왜냐면 광개토대왕이 살아있을 당시 중국에서조차 황제가 하나의 연호를 즉위하자마자 새로 바꾸던지, 자신이 죽거나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쓰는 일이 흔하지 않거나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태왕이 재위할 당시 중국 동진(東晉)의 안제(安帝)는 융창(隆安), 원흥(元興), 의희(義熙)로 세 번 연호를 바꾸었다. 황제를 세 번 바꾼 것이 아니라 한 명이 그 세 개의 연호를 모두 쓴 것이다. 신라만 해도, 진흥왕 한 사람이 '개국(開國)', '태창(太昌)', '홍제(鴻濟)'라는 세 개의 연호를 그 자신의 즉위기간 동안 순서대로 모두 썼다. 그나마도 법흥왕 때 제정한 '건원(建元)' 연호를 진흥왕이 즉위한 뒤에도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쓰다가, 진흥왕 재위 12년(서기 551년)에 이르러서야 '개국'으로 고친 것이다. 진흥왕 재위 12년은 신라에겐 개국 원년이면서 또한 건원 12년이 되는 셈이다. 발해 때에 고왕 대조영과 무왕 대무예가 '천통(天統)'과 '인안(仁安)' 각기 하나씩의 연호를 쓰기는 했지만, 뒤를 이은 문왕 대흠무는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라는 두 개의 연호를 재위 기간 동안 번갈아가며 모두 썼다. 10세기 고려 4대 광종이 천자국을 표방할 때에도 '광덕(光德)'이니 '준풍(峻豊)'이니 하는 연호를두 개씩이나 바꿔가면서 사용했던 것에서, 이 '영락'이라는 연호를 광개토대왕 혼자서 썼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황제 한 명이 즉위해서 죽을 때까지 하나의 연호를 쓰는 것은 중국에서도 훨씬 뒤인 명(明: 1368~1644) 홍무제 주원장 때에 가서이며, 일본에서도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에 들어서야, 한 명의 덴노가 하나의 연호를 쓰는 이른바 '1세1원(一世一元)'이 보편화된다. 아직 그러한 '1세1원'이 연호의 '발상지'인 중국에서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그 시대, 태왕이 '영락'이라는 연호 하나를 직접 제정해 그걸 죽을 때까지 썼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능비』에도 담덕왕을 가리켜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고 불렀고,그의 업적을 기록하면서 줄곧 '영락'이라는 하나의 연호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연호 하나를 '직접 만들어서 죽을 때까지 쓰는' 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능비』에 나오는 최초의 업적ㅡ비려 정벌을 기록하면서 영락 원년이 아닌 영락 5년을 잡은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골치아픈 일들은 이렇게 의문제기만 해놓고, 다음으로 이어가야 되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연대가 다르다는 것만으로는고구려의 역사를 부정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연대는 단지 숫자상의 표기일 뿐이지, 그 사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1년 정도의 차이라면 가볍게 받아넘겨 줄수도 있지 않겠나. 이제 겨우 시작인걸. 태왕의 정벌전쟁은.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6>제19대 광개토대왕(2)|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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