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0>제19대 광개토태왕(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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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1>제19대 광개토태왕(7)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90
고구려 하면 떠오르는 대명사는 '무예'다. 우리 기억 속의 고구려인들은 언제나 활을 손에 들고 화살을 등에 차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말을 달리는 강인한 무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수도에 둔 태학과 마찬가지로 지방에 경당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 경당에서 글만 가르친 게 아니라 활쏘기도 가르쳤다는 것을 본다면 말이다. 무덤 벽화에 그려놓은 숱한 그림 속에서 열의 넷은 대개가 말타고 활쏘고 칼 들고 창 휘두르는 그런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만 봐도 고구려인들과 무예는 뗄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일상으로 즐기던 마사희(馬射嬉).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서 맞춘 과녁의 숫자에 따라 승부를 짓는 놀이로, 군사훈련을 겸한 것이다. 덕흥리 고분 벽화 소재.>
하지만.... 담덕왕이 그렇게, '무예'로서 이름을 날린 군주였다고 해도, 그 왕이 꼭 성군이었다고 말할수 있는건 아니지. 무슨 말이냐면, 살아 생전에 정복전쟁을 많이 벌였다고 해서 꼭 성군이라는 이름을 얻어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사실 내가 보기에 '성군'이라는, 어진 군주라는 말에 대해서 하나로 정해진 정의가 없다. 유약한 왕이 고종이나 순종처럼 덜떨어진 멍청이 소리를 듣고, 성질 더러운 왕이 연산군처럼 살인마에 미치광이 소리 듣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았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군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약탈했는데도(그가 죽인 사람의 숫자에 비교했을 때 세계의 내노라하는 '폭군'이 죽인 목숨의 숫자는 그야말로 저리가라다) 사람들은 그를 인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사람의 한 명으로 칭송한다.
대체, 사람들이 말하는 성군의 조건은 어디에 있는가? 무예와 문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 왕이 성군의 모범형이라면, 세종은 무예를 얼마나 즐겼기에 성군 소리를 듣는가? 담덕왕이 학문을 장려한 기록이 《삼국사》에 있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성군의 조건은 무엇을 말하는지. 다만 담덕왕이라는 한 사람의 군주가, 이 무렵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북부와 왜에까지 상당한 파장을 미치면서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왜의 역사에까지 어느 정도 그 흐름을 바꾸고 일정한 영향력을 이룬, 기존의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확립한 공이, 그를 고구려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칭송받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주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미미한 약소국으로 전락해버린 오늘날에 가장 시사되는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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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17년(407)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의 정[宗族]을 베풀자, 북연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句麗]의 갈래로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 하여 성을 고(高)로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였을 때 운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북연왕 모용운의 성씨는 원래 고씨이며 고구려에서 왔다고, 《삼국사》는 전한다. 그의 할아버지 대라면 미천왕이나 고국원왕 때인데, 전연과 크게 전쟁을 치렀던 고구려가 크게 패했었고, 그때 포로로 끌려갔던 고구려 왕족 가운데 고운의 할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후대 당(唐)의 심장부를 노렸던 평로치청 제(齊)의 이정기처럼.
고양씨 자손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그닥 신경쓸 필요는 없다. 신라도 자기네들을 소호 금천씨 자손이니 어쩌니 했었는데, 이 고양씨나 소호 금천씨 모두 상상의 인물이지 실존인물이 아니다. 아마 중국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까 고구려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되겠고 어딘가 좀 갖다붙여야 되겠는데 생각하다보니 나온 헛소리다.
하지만 고운이라는 이 사람은 2년만에 피살당하고, 풍발이 왕으로 즉위한다. 중국의 《십육국춘추》에는 북연 건국을 풍발의 집권때(409)로 보고 있지만, 《자치통감》에서는 고운을 북연왕이라고 해서 북연 건국을 고운 때부터로 잡았고, 부식이 영감이 《삼국사》에서 《자치통감》을 인용하면서 그걸 써먹은 거다.
[十八年, 夏四月, 立王子巨連爲太子.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八月, 王南巡.]
18년(408) 여름 4월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民戶)를 옮겼다. 8월에 왕은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이 때에 이르러 담덕왕은 자신의 아들 거련을 태자로 삼고, 독산 등의 성을 쌓고, 백제에게서 빼앗은 땅이 있는 남쪽 지역을 순수하고 돌아온다.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軍, 到餘城, 而餘▨國駭, ▨▨▨▨▨▨▨▨▨.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20년 경술(410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아니하니,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서 토벌하셨느니라.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이르니,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더니라.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니 이에 개선하였느니라.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노라.
『광개토태왕릉비』
오늘날에는 동부여는 원래의 부여와는 별개의 나라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서기 285년에 선비족 모용부가 부여를 공격했을 때, 옥저 지역으로 도망쳤던 부여인 가운데는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동부여다. 그 위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후보지는 지금의 함경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일대, 두만강 유역의 옛 북옥저 일대, 그리고 서풍 혹은 길림 지역의 세 곳으로 축약되는데, 옥저로 도망갔다고 했으니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가 동부여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두만강 유역에서는 부여 문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또 고민거리다.
다만 그 나라가 285년 이후 어느 시점부터 적어도 410년의 광개토태왕의 정벌 때까지 100년 동안 존속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의 길림시와 장광재령의 가운데에 있는 교하(蛟河) 일대ㅡ옛 부여의 산성과 주거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 그곳을 동부여의 중심지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나는 자세히 모르겠다.
이 영락 20년의 부여 정벌은, 선대 대무신왕에 이은 2차 원정이었다. 《삼국사》에서는 고구려의 건국과 동부여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때의 정벌을 통해 고구려에 귀부하여 고구려 정계에 진출한 동부여계의 입김으로 고구려의 건국에 동부여에 대한 건국설명이 섞여서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광개토태왕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덕흥리 고분이 있다. 평양의 인천이라고 할 수 있는 남포의 강서구역에 있는데, 덕흥리 고분은 튼실한 잠금장치로 보호받고 있다.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온 대로 적으면, 우선 입구로 두 겹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서 복도를 지나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도록 길고 깊게 우회로를 내놓고, 다시 또 두 겹 철문과 유리문을 열어야만 비로소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직사광선을 피하고 무덤 안의 온도와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이 무덤의 주인은 벽화 주인공으로도 그려져 있는데, 이름은 진, 벼슬은 유주자사였다.
그의 벽화 위에 기록된 묵서명에서 그의 일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釋加文佛弟子, ▨▨氏鎭, 仕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龍驤將軍遼東太守使持節東夷校尉幽州刺史. 鎭年七十七薨焉, 永樂十八年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乙酉, 成遷移玉柩. 周公相地, 孔子擇日, 武王選時. 歲使一良, 葬送之後, 富及七世, 子孫番昌, 仕宦日遷, 位至矦王. 造○萬功, 日煞牛羊, 酒宍米粲不可盡掃. 旦食鹽○食一椋. 記之後世, 寓寄無疆.]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사람이며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弟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였다. 진(鎭)은 77세로 죽어, 영락(永樂) 18년 태세재(太歲在) 무신(戊申), 12월 신유 초하루 25일 을유(乙酉)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武王)이 시간을 택했도다. 날짜와 시간을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世)에 미쳐 자손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소서. 무덤을 만드는 데는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로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노라.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니, 이 무덤을 방문하는 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뭐 이런 내용이다.
흔히 유주자사 진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의 출신지, '신도현 도향 중감리'가 어디를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고려사》지리지에 "가주(嘉州)는 원래 고려의 신도군이다[嘉州本高麗信都郡]."라는 기사에 근거하여 평북 운전(雲田)·박천(博川)으로 보는 설로서, 여기서는 군명(郡名) 두 글자를 영변(寧邊)의 옛 이름인 밀운(密雲)으로 추정하고 있다.(손영종)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진서(晉書)》 지리지에 보이는 기주(冀州) 안평국(安平國) 신도현(信都縣)을 들어, 이곳을 중국 하북성에 있는 것으로 보는 설이다. 안평(安平), 또는 284년에 안평이 장락(長樂)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것을 이유로 장락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고려사》를 따른다면 진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위와 같은 관직을 역임했고, 고구려가 옛날 유주, 지금의 북경 일대까지 장악했다는 증거가 될수도 있겠지만, 《진서》를 따른다면 진은 중국인이고 중국에서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지내다가 고구려로 와서 그 관직의 '이름'만을 유지했다는 것이 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전자를 따를 것이다.
고구려가 옛날 북경 일대를 차지했다는 것은 신라 때의 최치원도 주장한 바가 있다.
최치원이 당의 태사에게 올린 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高麗 · 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 · 越, 北撓幽 · 燕 · 齊 · 魯, 爲中國巨蠹.]
고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 월(越)을 침입하고, 북으로는 유(幽) · 연(燕)과 제(齊) · 노(魯)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구려가 쳤다는 유와 연, 제, 노의 땅이라는 건 중국 사람들이 생각한 옛 관념의 하나로
춘추시대 나라들이 있던 수도의 위치를 갖고 지명을 이야기한 것이다. 유는 곧 유주, 지금의 북경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고, 연이란 그 북경 일대ㅡ오늘날 우리가 '요서'라고 부르는 곳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춘추시대의 중국 왕조 이름이다.
제와 노는 모두 산동 반도를 가리키는데, 공자가 태어난 곡부가 이 근처에 있다. 나중에 고구려 유민 출신의 이정기가 이 산동반도에서 평로치청절도사로서 반기를 들었을 때에도 나라의 이름을 제(齊)로 삼았고, 저 유명한 해상왕 장보고도 이곳에 법화원을 세워 재당 신라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았다.
오와 월은 지금의 강남 해안ㅡ백제가 고구려에 맞서 요서 지역에 진출해 진평군을 두었다는 소위 '요서진출설'은 차치하고서라도, 고구려 때에 이미 북경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중원 북부를 제패했고, 장보고를 위시한 재당신라인들이 이곳을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며 소위 '신라방'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세력거점을 이룩했던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 후손인 우리라고 저 땅을 차지하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고구려처럼 그곳을 완전한 영토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의 물자와 문화만이라도 우리가 영향을 끼칠 방법을 찾는 것이, 옛 영토를 잃어버린 우리가 조상들께 할 수 있는 속죄의 한 방법이 아닐까.
덕흥리 고분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척도이자 권위이다. 여지껏 발견된 고구려의 벽화 무덤 가운데 문자기록이 있는 것은 안악 3호분이나 모두루무덤 두 군데 뿐이었는데, 덕흥리 고분 벽화는 이 무덤이 정확히 언제 누구를 위해 만든 무덤인가를 정확하게 밝혀놓았다. 한국 고대문화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이 덕흥리 고분인 셈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무덤 속을 지상의 생활환경처럼 장식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도 영혼은 살아서 영원히 남는다는 믿음으로 무덤 속에 그들이 생각하는 축소된 우주를 벽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해놓았다. 고구려인들의 세계관, 천하관이 벽화 속에 묻어 있는 셈이다.
덕흥리 고분 벽화는 유교적인 충의 이념과 함께, 도교와 불교적인 색채도 강하게 띠고 있다. 천정에 그려진 천상세계의 모습 중에는 중국식의 도교 사상에서나 볼 수 있는, 《산해경》에 그려진 여러 짐승들과 천녀들의 모습이 가득 그려져 있으며, 또한 유주자사 진 본인이 불교신자였던 것에 기인해서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무늬도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는 이 무렵에 이르면 고구려 사람들의 재래신앙과 융합했다. 고구려의 재래신앙을 불교 신앙이 대신한 것이 아니라 합쳐진 것이다. 불교 전래 이후, 연꽃은 고구려 벽화 속에서 가장 빈번한 소재로 발견되곤 한다. 온갖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기어이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부처의 가르침처럼 언젠가 우리도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거듭날 수 있기를 연꽃에 바라는 마음으로 무덤 주인의 식구들은 저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주인공이 내세에 다시 태어나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서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 주인공이 평생을 걸고 주인으로 모셨던 태왕께서 저 천수국, 도솔천에 오를수 있기를 바라면서.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0>제19대 광개토태왕(6)|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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