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782971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9>제19대 광개토태왕(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5>제19대 광개토태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8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6>제19대 광개토대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8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7>제19대 광개토대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8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8>제19대 광개토태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8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9>제19대 광개토태왕(5)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88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0>제19대 광개토태왕(6)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89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1>제19대 광개토태왕(7)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90

앞에서도 말한 것이지만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숱하게 왜의 침공을 받았고, 그것도 잠시 뜸하다 싶더니 내물왕이 고구려에 김실성을 인질로 보낸 바로 이듬해부터 또다시 침공이 시작되었다. 왜가 신라를 침공한 건 우선 왜국과 금관가라 사이의 교역을 신라가 훼방놓고 있었던 것도 있겠지만 이 무렵에는 백제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영락 10년에 왜병이 임나가라를 거점으로 신라를 공격한 것 역시 깊게 들어가보면 그 배후에는 고구려의 '악의 축' 백제가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능비』에선 백제를 까느라 이 사실을 뺐지만)

 

남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58개나 빼앗긴 백제로서는 신라를 직접 치기에는 부담이 컸다. 무엇보다 백제가 직접 일선에 나서서 신라를 치게 된다면 그걸 고구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신라는 일단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쓰고 '속국'이라고 읽는다)이었으니 어떻게든 한반도 안에서 영향력을 넓힐 기회만 엿보는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친다'면서 신라에 파병해버리게 되면 백제는 정말 멸망할지도 몰랐다.

 

고구려라는 강적을 두고 신라라는 부담을 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구려에 붙어 알랑거리는 꼬락서니 계속 보고만 있기도 그렇고.마침내 집단안보체제를 형성하고 있던 '남방해양동맹', 백제 '패거리'들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제3세력인 왜에게는 '백제로부터의 선진문물' 및, '신라침공으로부터 얻을 재보'라는 떡밥을 던져주면서 신라를 치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금관가라에게 왜병의 거점 및 전진기지 역할을 맡긴 것도 백제였다.

 

신라로서는 왜병의 배후에 백제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병은 고사하고 그들이 근거지로 삼고있는 금관가라까지 공격하기에는 국력이 딸렸다. 뱀을 잡고 싶으면 그 목을 잡던가 아니면 뱀이 숨을 굴을 막으랬다고, 뭐든지 그 근원이 되는 지점을 차단하지 못하면 원점이거든. 왜병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주는 금관가라를 치게 되면 가라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보나마나 왜병을 도와 신라와 맞설 거고, 왜와 금관가라 둘의 배후에 서있는 백제가 개입할 소지를 주게 된다. 셋 다 한 패거리들이니까. 왜병을 몰아내되 백제까지 끼어들지 못하도록. 그 목적을 위해 신라는 고구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고구려가 백제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고구려 역시도, 신라 앞에서 자신들의 위신을 세우고 백제의 계획을 차단하기 위해,5만이나 되는 대군을 한반도 남쪽으로 파견했다. 목표는 금관가라였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戌兵新▨▨▨▨其▨▨▨▨▨▨▨言▨▨▨▨▨▨▨▨▨▨▨▨▨▨▨▨▨▨▨▨▨▨▨▨▨▨辭▨▨▨▨▨▨▨▨▨▨▨▨▨潰▨▨▨▨安羅人戌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上廣開土境好太王, ▨▨▨▨寐錦▨▨, 僕勾▨▨▨▨朝貢.]

10년 경자(400)에 왕명으로[敎] 보기(步騎)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셨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우글거렸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은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 조공하였다.

『광개토태왕릉비』

 

'배급(背急)' 배후를 급히 쳤다는 뜻. 죽령을 따라 내려온 고구려군은 중간에서 동해 해안선을 따라 감포쪽 바닷길로 해서, 그대로 서쪽으로 서라벌(경주) 방면으로 틀어 왜군이 퇴각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면서 돌격해 들어왔다. 금관가라를 거점으로 삼고 있으면서 신라를 마음껏 노략질한 다음, 감포쪽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려 했을 왜군들은 감포의 바닷길을 틀어막고 곧바로 서라벌로 쳐들어온 고구려군에게 혼비백산해서 그들의 거점이었던 임라가라로 후퇴했다. 그 다음은 뭐.... 전쟁이 아니라 거의 '살육'파티지. 누가 누가 더 잘 죽이나?

 

<덕흥리고분 벽화. 한반도 남부 가야까지 파견된 고구려의 5만 군대는 왜병을 섬멸하고 금관가야를 쳐서 거의 초토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주목할 단어가 '안라인수병(安羅人守兵)' 이 다섯 글자인데, 영락 10년에 종발성이 항복하자마자, 똑같이 같은 해의 기사에서 '궤(潰)'라는 글자가 나온 이후, 그리고 영락 17년의 대방계 전투에서 왜병의 궤멸 직후까지 꼭 세 번. 『능비』에 세 번 나오는 이 단어는 고구려군이 치른 전쟁 성과 결산 및 정리 작업으로 쓰였던 것 같다.

 

왜병을 쫓아 종발성까지 밀고 내려온 고구려 '관군'에게 임라가라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해버렸다. 고구려군이 내려왔을 때 이미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해 겁을 집어먹은 것 같다.(그들도 위급한 상황에서 아무 것도 못해주는 백제에게 자기들 목숨을 걸기는 싫었겠지) 그리고 고구려군은 '라인(羅人)', 즉 항복한 친고구려계 '임나가라' 인사들을 발탁해 그들에게 성을 돌려주고 지키게 했다. 

 

고구려-신라의 대륙세력 연합과,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해양세력 연합 사이의 전쟁, 같은 부여계 기마민족의 후예로서 철기를 바탕으로 성장한 고구려와 백제의 군세가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은, 영락태왕을 정점으로 한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한반도 안에 고구려 중심의 정치역학관계를 재편성한 태왕의 '관군'이 고령까지 적군을 압박하고도 왜 그들을 아주 작살을 내지 않고 돌아와야만 했을까?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11년(401) 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宿軍]을 공격하였다. 연의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앞서 말했지만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나 왜국 말고도, 북서쪽의 후연이나 비려(거란), 동부여, 숙신(말갈) 같은 수많은 북방 왕조들과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영락 9년(399)에 후연은 3만 군사로 고구려를 공격해 고려 서북쪽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백리 영토를 빼앗아갔다. 고구려는 이들도 항상 예의주시해야 했다. 백제나 신라를 무너뜨리는데 온 힘을 쏟아부을 형편이 못되었다.

여기에 집중하면 저기서 쳐들어오고, 저기에 집중하자니 여기서 또 쳐들어오고.

 

보복전으로, 태왕은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동사강목》에 보면 숙군성은 후연의 옛 수도 용성 근교에 있었고 평주자사의 관할을 받았던 성이었지만, 고구려 '관군'이 이 성을 공격했을 때, 평주자사 모용귀는 그대로 성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한편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신라 왕자 김실성은 이때 신라로 돌아와 신라왕으로 즉위한다.(《삼국사》에는 광개토왕 10년이라고 했음)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원년(402) 3월에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왜라는 '듣보잡' 국가를 치기 위해서 5만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한 고구려 태왕을 향해 '그만큼 왜가 강했었나'하는 진짜 개풀 뜯어먹는 소리는 여기 이 글 읽으면서 제발 하지 말기 바란다. 미국도 1983년 파나마 침공 때에 그라나다라는 섬나라 들어가는데 해병대 몇 개 대대 동원했는데 그라나다가 미국보다 세서 그랬던가? '그라나다'라고 네이버에서 검색해보시라 뭐가 나오는지. 삶은 돼지대가리가 웃을 일이지. 그래도 이해 못 하실 분들이 있을까봐 정리를 해드리자면, 태왕이 왜라는 놈을 치는데 5만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한 것은 왜의 배후에 있는 백제가 개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는 일종의 '선빵'이었다. 그리고 '왜'라는 미지의 세력이 고구려의 천하를 위협하고 있다는 안보체제를 고구려 내에 조성해 지방의 군권을 자신에게 모으고 그로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5만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한 임나가라원정(경자남정)도, 신라의 두통거리였던 왜의 침공을 근절시키는 근본적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변방에 쳐들어와서 재물이나 뺏고, 무력행사 약간 하는 것 말고는 거의 기습적으로 치고빠지며 귀신같이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는 저것들을 무슨 수로 막을까. 채찍으로 안 될 때는 당근으로 달래야지. 신라는 왜에 대한 강경책 대신에 온건책을 선택하기로 했다. 외교로 왜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해보려고 한 것. 나아가 자신들을 무슨 변방속국 취급하는 고구려에게서 나름 벗어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 식민사학이 주장한 것 가운데 하나가 5세기 고구려의 가장 큰 라이벌이 바로 왜였다는 것인데, 백제나 신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대세력으로서 고구려에 맞섰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소할 수 있는 근거가 이때, 신라가 왜와 우호를 통할 때의 고구려의 태도다. 고구려가 왜와 전쟁을 벌인 것이야 『능비』에 나오니 말은 없지만, 고구려가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에 뭔가 어떤 조치를 취한다거나 민감하게 반응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인질로 잡혀있다가 돌아와서 국왕이 된 실성이 고구려에 대한 정책변화를 시도하다가결국 눌지에 의해서 왕위를 빼앗긴 것에 비하면.(이나마도 고구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왜는 신라가 고구려에 인질 보냈다고, 곧바로 다음 해에 신라로 쳐들어왔는데, 고구려는 왜에 인질 보낸 것을 알고도 '어 그래?'하고 무신경하게 나온다. 그뿐인가? 《고구려본기》에는 백제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왜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이쪽에서는 저쪽한테 '너 죽었어!'하고 이를 부득부득 가는데, 저쪽은 반대로 이쪽을 무슨 동네 소나 닭 보듯이 하는 황당한 상황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옳을지. 

 

[秋七月, 百濟侵邊.]

가을 7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2년(403)

 

신라에서 왜에 인질 보낸 바로 다음해에 아신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때린 것을 봐도, 신라가 적국인 왜와 가까워지는 것을 고구려가 '어 그래?'하고 방치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오히려 신라가 왜와 사이좋게 지내면 더 고마운 일이다. 골치아픈 백제와 왜 사이가 소원해지는 효과를 볼 수가 있거든. 친고구려 정책을 펼치며 백제에 적대적이던 신라가 백제의 우호국이자 동맹국인 왜와 친해지게 되면 좀 난감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백제의 든든한 '남방해양동맹'의 와해라는 성과를 고구려는 거두는 셈이다. 고구려가 노린 것은 어디까지나 왜가 아닌 백제의 고립이었던 셈이다.

 

아화왕은 다급히 손을 썼다. 태자 전지를 왜에 보낸 것에 이어, 미사흔이 왜에 인질로 간 이듬해 2월에 백제에 온 왜의 사신들에게 예전에 없던 후한 접대를 하고, 신라의 변경을 치는 등. 결국 이러한 백제의 외교술로 왜는 전지왕 즉위년(405)부터 다시 신라를 공격하지만(사실 왜로서도 백제가 필요했거든) 백제와의 우호를 유지하기로 했으면서도, 왜는 신라와의 관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자기들 이익이 걸린 문제라)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 ▨石城, ▨連船▨▨▨, 王躬率▨▨從平穰, ▨▨▨鋒相遇.]

14년 갑진(404)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하였다. 잔병(殘兵)과 화통하여 석성(石城)을 … 하고, 수군의 배를 잇대어[連船] … 평양(平穰)을 거쳐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광개토태왕릉비』

 

왜가 대방계에 쳐들어왔다는 대목 뒤에 '和通殘兵'이라는 구절은 중국 학자 왕진쿤(王健群)의 해석에 따라 삽입하였다. 잔병(殘兵)이라는 것이 백잔 즉 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아신왕은 다시 왜를 사주해 고구려의 대방계ㅡ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이 전투에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해양활동'이라는 군사전략, 백제와 왜의 수군 연합작전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한반도 중부를 넘어 고구려 중심부의 중요한 지점, 그러니까 고구려의 차기 수도로까지 주목받던 평양 근교까지 확대되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백제가 가진 해상력이 크게 작용했다. 한반도 중부, 지형이 복잡한 서해안의 물길에 어두운 왜군이 이곳까지 오려면 백제 수군의 해상 지식이 필요했고, 백제는 영락 10년에 타격을 입은 자신들 대신 그나마 건재한 왜군 선단을 수족처럼 부리면서 '국남 7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해상 거점들을 봉쇄하고, 원래 지니고 있었던 서해상에서의 우위를 회복하는 데에 있었다.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왕의 군대[王幢]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느니라.

『광개토태왕릉비』

 

왕당(王幢). 백제의 사주를 받아 대방(황해도?)을 침공한 왜를 정벌한 광개토태왕의 군대를 비문은 그렇게 불렀다. '당(幢)'은 군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왕당은 풀이하면 '국왕 직속 부대'라는 의미다. 고국천왕이 4연나의 반란을 정벌할 때에 동원했다는 '기내병(機內兵)'과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파견된 군대를 관군(官軍)이라고 했다. 단순한 용어같지만, '관군'이라는 단어는 이 시기엔 굉장히 무게있는 단어였다. '관(官)', 그것은 '국가'나 '정부'같은 합법성(?)을 지닌 기구를 가리키며, 그 관에서 보낸 군대가 '관군'으로서, 그들의 무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지닌 무력 집단, 즉 '허가받은 싸움패'들이 곧 '관군'인 것이다.(자기들은 허가만 떨어지면 마음놓고 싸우고, 죽여도 법적으로 걸릴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지.)

 

담덕왕이 집권하기 전 고구려의 군대는, 『능비』에서 '왕당'이라 표현한 국왕 직속 친위부대, 각 나부(那部)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린 '사병', 흔히들 말하는 '좌식자'들. 이렇게 왕과 귀척이 저마다 군사권을 지니고 있는 이원적 체계였다. 태조왕을 몰아내고, 모본왕과 차대왕 두 태왕을 시해한 연나부나 비류나부의 귀척들, 산상왕 때에 발기를 지원하던 비류나부 군사들이 왕궁을 에워싸고 왕위 내놔라 시위하고, 5부 귀족들이 왕을 둘러싸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때로는 그 군사력으로 왕을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도 했다.

 

태조왕 20년에 왕명을 받은 관나부 패자 달가가 조나국을 쳐서 그 왕을 사로잡았을 때에, 관나부가 만약 조나국에게 패했다면 어땠을까? 군사력이 곧 힘이던 시대에, 군사를 잃는다는 것은 곧 힘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아직 왕의 권한이 그리 강하지 않던 고구려 초기에, 왕의 명령이라고 해도 자신들이 이길지 질지 뻔히 알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사병을 내어 전쟁하는 위험을 감수할 사람이 있을까? 전쟁이란건 결국 '이기느냐' '지느냐'의 도박인데 말이다.

 

고대 국가에서 왕 한 명에게 집중되지 못한 권력은 곧 국력의 손실이었다. 5부 대족과 귀척들은 저마다 나라의 군사력을 '사병'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고구려의 군사력은 축소되기가 쉬웠다. 그러던 것이 담덕왕 때에 이르면서 '관군'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통합된 것이다. 신라왕의 구원요청에 5만의 '관군'을 파견하고, 자신이 지닌 직속부대로 왜구를 칠 정도로 고구려 내부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져보면 이러한 담덕왕의 성과도, 그의 선대이자 조부인 소수림왕 때에 불교를 받아들여 하나의 사상체계를 정하고, 태학을 짓고 유교를 장려해서 국가에 대한 충(忠)을 고취시키며, '율령'이라는 국왕 중심의 성문법까지 제정해 통치 기반을 확립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아마 소수림왕 때에 이미 이러한 일련의 내정개혁이 없었다면 담덕왕의 군사력 통합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담덕왕 자신도, 그만큼의 역량이 있었다. 《양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보면, 이 무렵 고구려에서 새로 설치된 벼슬 이름이 나오는데, '장사(長史)', '사마(師馬)', '참군(參軍)' 등이 그것이다. 고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해서 설치한 이 관직들은 담덕왕의 중앙집권화를 도왔던 소위 권력의 핵심들, 군사 중심의 효율적인 국가체제 재편을 위한 교두보였다.

 

장사라는 건 '여러 사관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고대 중국 진(秦)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 국초부터 있었다는 1백 권의 역사책 《유기(留記)》라는 것이, 이때에 이르러 편찬된 것이라 봐도 이상할 것은 없을듯. 그 외 사마나 참군은 모두 군사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다. 벼슬 이름만 봐도, '사마'라는 것은 곧 '말[馬]을 관리하는[師]' 임무를, '참군'은 '군사[軍]에 간여하는[參]' 임무를 띠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지간에 담덕왕의 수군에 의해 백제-왜의 연합수군이 격퇴당함으로써 백제는 서해 중부의 제해권을 완전히 고구려에게 빼앗겼고, 5세기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중심국가가 될 기회를 잃고 만다.

  

[十三年, 冬十一月, 出師侵燕.]

13년(404) 겨울 11월에 군사를 내어 연을 쳤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재위 13년에 또다시, 담덕왕은 후연을 공격한다.

그리고 이듬해 후연은 고구려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해왔다.

 

[十四年, 春正月, 燕王熙來攻遼東城. 且陷, 熙命將士 “毋得先登, 俟剗平其城, 朕與皇后乘轝而入.” 由是, 城中得嚴備. 卒不克而還.]

14년(405) 봄 정월에 연왕 희가 요동성을 침공해 왔다. 함락되려 할 즈음에 희가 장병들에게 명하였다.

“먼저 오르지 마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 짐이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엄히 방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후연의 고구려 침공은, 굉장히 '황당한' 이유로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요동성은 《삼국사》에 나오는 오열홀(烏列忽). 이걸 저쪽에서는 요동성이라고 부르면서, 그 땅을 되찾겠다고 이렇게 고구려 요동성을 친 것인데, 뭐 황당하게도 다 함락되려는 순간에 모용희가 장병들이 성에 오르지 못하게 한다. 자기가 먼저 들어갈 거라고.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는 반격준비 다 끝내놓고 저것들을 쫓아버린거지.

 

여담으로 《해동역사》에 보면 《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라는 책을 인용해서, "남연왕(南燕王) 초(超) 때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천리마와 생웅피(生熊皮)ㆍ장니(障泥)를 바치니 초가 몹시 기뻐하면서 물소와 앵무새로 보답하였다."는 기록을 부기하고 있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남연이라는 나라를 찾아봤더니 398년에 건국된 나라로 그 태조는 모용덕, 옛날 고구려를 공격해 환도성을 작살내고 미천왕의 무덤까지 파헤쳤던 모용황의 막내아들이다.

 

건국 이후 새롭게 부상하던 강자인 북위에 밀려 397년 10월에 후연의 수도 업성이 함락당했을 때, 업성에서 황하 유역의 활대로 거점을 옮긴 모용덕은 398년 그곳에서 연왕을 선포하고 신정부를 수립했지만, 건평(建平) 연호를 선포하고 나라가 그럭저럭 안정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때는 청주와 연주 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동진을 공격할 계획도 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그의 뒤를 이어 405년에 즉위한 조카 모용초는 숙부였던 선황의 공신들을 대거 몰살하고 독재정치를 펴다가 동진의 공격을 받아 5년만에 폐위되고 건강(建康)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고.

 

[十五年, 秋七月, 蝗旱.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陘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15년(406) 가을 7월에 누리가 날아들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월에 연왕 희가 거란을 습격해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 했다.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기에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이 무렵 후연에서 거란을 치려고 하다가 생각을 바꿔서 군사를 돌려서 고구려를 쳤는데, 고구려로 가던 3천 리는 족히 되는 그 길에 병사와 말이 지치고 얼어 죽어, 결국 그것 때문에 목저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도무지 고구려를 칠만한 건이 안 되어 돌아와야 했다ㅡ는 건가. 어쩐지 수 때의 일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구만.

 

[十六年, 春二月, 增修宮闕.]

16년(407) 봄 2월에 궁궐을 증축하고 수리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궁궐 증축이라. 그러면 뭐하나, 거기서는 살지도 않으셨으면서. 평생을 정복과 전쟁으로만 살아왔으니, 그 새로 지은 대궐에서 지낸 햇수가 과연 얼마나 되려나.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 ▨住城, ▨城, ▨▨▨▨▨,  ▨城.]

17년 정미(407)에 왕명[敎]으로 보기(步騎) 도합 5만을 파견하였다. … 붙어 싸워서[合戰] 모조리 죽이고 산산조각냈노라[斬煞蕩盡]. 노획한 갑옷이 만여 벌, 이 밖에 얻은 군수물자[軍資器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노라. 돌아와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성(▨城), ▨▨▨▨▨▨성(城)을 깨뜨렸노라.

『광개토태왕릉비』


영락 17년의 이 정벌 기사에 대해 누구와 싸웠는지 마모된 글자가 많아서 알수 없다. 고구려와 싸운 것이 후연(後燕)이라고도 하고,왜국이라고도 했으며,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 맞서 벌인 토벌전이라고도 했지만 대체로는 백제와의 전쟁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 때에 고구려군이 깨뜨렸다고 하는 사구성(沙溝城)은 《삼국사》 백제본기 전지왕 13년(417)년조에 기록된바 "동ㆍ북 2부에서 15세 이상의 사람들을 징발해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다[徵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는 기록에 나오는 그 사구성과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구(溝)'는 포구의 뜻이고 '구(口)'는 입이라는 뜻이지만 똑같이 '드나들 구멍'의 뜻을 갖고 있으니까. 두 성은 동일 지역이고 영락 17년의 전쟁은 백제와 치른 것이 된다는.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