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609853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7>제6대 태조왕(3)

    《삼국사》(삼국사기)와 고구려 건국연대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4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5>제6대 태조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4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6>제6대 태조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48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7>제6대 태조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49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8>제6대 태조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0

[五十三年 春正月, 扶餘使來獻虎, 長丈二, 毛色甚明而無尾.]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 사신이 와서 범을 바쳤다. 몸길이가 한 길 두 자나 되었고 털 색깔이 매우 밝았는데, 꼬리가 없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부여는 꼬리 빠진 범의 신세였다.

얼룩덜룩한 범의 모습을 더욱 위엄있게 만들어주는 꼬리가 없으니,

이빨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진짜 볼만한 광경 아닌가. 범을 보고 벌벌 떨어야 되는데

꼬리가 없는 걸 보고 큭큭대면서 웃는다면, 그것도 참 진상이지.

그런데 왜 이걸 부여가 고구려에 보냈는가? 이때까지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王遣將入漢遼東, 奪掠六縣. 太守耿夔出兵拒之, 王軍大敗. 秋九月, 耿夔擊破貊人.]

왕은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53년(105)

 

《한원(翰苑)》이라는 책이 있다. 원래 당조에서 660년경 편찬한 백과사전인데,

송 시대까지 전해지다가 실전되어 사라진줄 알았던 것이 일본 후쿠오카의 다자이후덴만구

안에서 한 권이 발견됐다. 그것도 중국 주변의 이민족들에 대해 수록한 번이부(蕃夷部)만

쏙 빼서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도 그런 기적이 없었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들을 담고 있었으니까. 무슨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 파일도 아니고 오자 탈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이 책에 인용된 문헌 가운데

《고려기(高麗記)》라는 게 있는데, 7세기 초엽 영류왕 때 고려를 직접 방문하고

고려의 여러 지역을 답사한 사신 진대덕의 작품이다. 말이 좋아 사신이지 실은

고려의 국정을 염탐하기 위해서 온 간첩이었다고 보는게 더 적당하겠지만서도,

아무튼 재미있다.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으니까.

 

그 가운데 하나가 요동태수 경기에 대한 것인데, 범엽의 《후한서》에

"경기가 요동태수로 옮겼는데, 원흥(元興) 원년(105년)에 맥인이

군계(郡界)를 약탈하니 기(夔)가 추격하여 그 거수(渠帥)를 목베었다

[耿夔遷遼東大守,元興元年,貊人寇郡界, 夔追擊斬其渠帥]"고 한 기록을 먼저 실어놓고

뒤에 《고려기》를 참조해 "고성(故城)의 남쪽 문에 오래된 비석이 있어

글자는 마모되었는데 땅 위로 몇 자가 삐져나와 있었다[故城南門有碑, 年久淪沒,

出土數尺]."고 설명했다. 그게 곧 경기의 비석이라는 것.

 

맥인이라는 것은 고구려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흔히 맥인이라고 불렀다. 

이야기하겠지만 《삼국사》 태조왕본기에

"왕이 마한과 예맥의 1만 기를 거느렸다[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는 기록이 나온다. 단재 선생은 여기서 나오는 예맥이란 읍루,

곧 말갈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삼국사》김인문열전에도

"고려가 견고함을 믿고 예맥(穢貊)과 더불어 함께 악을 행한다[今高句麗負固, 與穢貊同惡]."

라고 적어서 말갈을 예맥이라고 자주 칭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서 '예'란 곧 '읍루'의 다른 이름이며, 《삼국지》 예전 즉 동예전은

동부여를 예로 착각해서 적은 것으로 서로 상관없는데 오인한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가만있어라보자. 고구려가 예맥족이 아니고 예맥족이 읍루족(여진족)이고 여진족이 말갈족이면,

말갈족이 고구려 변방 주민에 대한 멸칭이라면, 논법으로 이렇게 정리가 되나?

 

1) 고구려는 예맥족이 아니다.

2) 예맥족은 읍루족(여진족)이다.

3) 여진족은 말갈족이다.

4) 말갈족은 고구려의 변방 주민이다.

 

아, 머리아프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지?

 

꼬리없는 호랑이를 상서라고 여겨서 한의 요동을 공략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때의 요동 공략은 그 태수 경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五十五年, 秋九月, 王獵質山陽, 獲紫獐. 冬十月, 東海谷守獻朱豹, 尾長九尺.]

55년(107) 가을 9월에 왕은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하여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동해곡(東海谷)의 관리가 붉은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2년 전에는 부여에서 범을 바쳤고, 이번에는 또다시 동해곡에서 붉은 표범을 바치는데,

그 기록이 무척 괴이한 점이 있다면, 이것들의 생김새에 대한 것이다. 

범은 꼬리가 없는데, 표범은 꼬리가 9자라니....

이것이 상서로운 징조라면 상서로운 징조인데,

대체 무슨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고 싶어서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나?

꼬리없는 호랑이와 꼬리 긴 표범. 그리고 자주색 노루.

 

[五十六年, 春大旱, 至夏赤地, 民饑, 王發使賑恤.]

56년(108) 봄에 크게 가물었고, 여름이 되자 땅이 벌거숭이가 되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은 사신을 보내 진휼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표범을 바친 이듬해.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엄청난 가뭄이 든다.

봄과 여름에 걸쳐서 땅이 바짝 마르고 '벌거숭이[赤地]'가 되어 백성이 크게 굶주렸다.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왕의 탓으로 돌리던 시대,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 것만큼 왕에게 곤란한 것은 없다.

 

[五十七年, 春正月, 遣使如漢, 賀安帝加元服.]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원복이라는 것은 관례 즉 성인식을 의미한다. 중국식으로 계산하면

이때가 안제 영초(永初) 3년. 고구려가 한에게 패한 것이

안제의 선대인 화제(和帝) 때의 일인데, 이때에

적국인 한에 축하사절을 보냈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뭔가 나름의 생각이 있었나?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通鑑言『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寇玄,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59년(111) 사신을 한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통감(通鑑)에는 『이 해 3월에 고구려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으므로, 혹 속하기를 구하였는지 또는 침략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부식이 영감이 표시한 의문. 고구려가 '공격했는가'? 아니면 '항복했는가'?

《후한서》에는 '항복'이라고 했는데, 《자치통감》에서는 '공격'이라고 했으니,

'공격'이라 적은 문헌과 '항복'이라 적은 문헌이 공존했던 모양이다. 뭐, 고구려가 

요동의 공손씨 정권에게 패한 상황에서 한조를 곱게 볼 리가 만무하고,

더구나 《후한서》에 보면 안제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가 보기(步騎) 7, 8천 명으로 한조의 낙랑(樂浪)을 쳐서 

관원과 백성을 죽이는 기사가 나온다. 부여까지 나서서 한조를 공격하는 마당에 

고구려가 한조에 '항복'하려고 했을까.

 

하지만 당시에 막 부여의 공격으로 변경이 위태롭던 한조와 부여를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이해관계가 이때에 이르러 어느 정도 상치했고,

그런 고구려가 '복속'이란 이름으로 한조와 손을 잡고 부여를 견제하려 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부여로부터 한조를 떼어내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었다)

어쨌거나, 안정복 영감은 《자치통감》을 따라서 '공격'이라고 하셨는데, 

이게 맞다고 해둘까 그러면.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62년(114)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은 남해를 순수하였다. 겨울 10월에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일식이 있던 그해 가을 8월. 왕은 남해안의 고을들을 2개월간 순수하고서 돌아온다.

 

[六十四年, 春三月, 日有食之. 冬十二月, 雪五尺.]

64년(116) 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겨울에 눈 많이 오면 이듬해의 보리 농사는 풍작이라는데.

보리 곡식들이 잘 익어서 군량이라도 보충을 하셨을지?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秋七月, 蝗·雹害穀. 八月, 命所司擧賢良孝順, 問鰥寡孤獨及老不能自存者, 給衣食.]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왕은 예맥과 함께 한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가을 7월에 누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어질고 착한 사람과 효성이 있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자 및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이듬해 풍년(?)의 기세를 몰아 군량을 잔뜩 쌓아놓고서,

궁왕은 예맥을 이끌고 한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을 공격한다.

《후한서》에 보면 화려라는 것은 낙랑군에 속한 현의 이름인데,

여름 6월에 이르러서 고구려가 예맥을 동원해 이곳을 치기에 이른 것이다.

 

영녕(永寧) 원년(120) 12월에 부여에서 맏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한의 궁궐에 나와 공물을 바치자,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하사하였다.

《후한서》

 

고구려가 맹위를 떨치던 무렵에도, 부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고구려에게 밀려 노대국으로 전락하긴 했어도, 부여는 생존의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六十九年春, 漢幽州刺史馮煥 · 玄太守姚光 · 遼東太守蔡諷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69년(121) 봄에 한(漢)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왔다. 예맥의 우두머리[渠帥]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 ·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한에서는 곧바로 반격 들어온다.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유주는 지금의 만리장성 서쪽 베이징 일대일 것이고, (그 당시 베이징은 중국에서도 엄청난 변경이었음) 현도는 요령성 심양의 싱징라오청(興京老城)이라고도 하는데 알수 없고,

요동이라면 분명 우리가 아는 요동반도가 아니라 한의 요동군이었을터. 사실상 당시 중국의 동북쪽 변경 지역인데, 이 지역, 유주ㆍ현도ㆍ요동의 태수가 모두 나서야 할 정도였다면 거의 한조의 동북방 전선의 전력이 총동원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때 한조와의 전쟁에서 대활약을 펼친 고구려의 수성에 대해(《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그의 이름이 '수'라고 했다) 《후한서》에서는 태조왕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삼국사》에서는 궁왕의 아우라고 적고 있다.(삼국사는 우리 기록과 중국 기록이 서로 다르면 우리 기록이 옳은것으로 쳤다)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는 척 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것은 각종 전술에서 흔히 볼수있는 어찌보면 굉장히 초보적인 단계의 전술 같아보이지만, 상대가 완벽하게 속아줘야 한다는 점에서 또 한편으로는 어려워보이기도 한다.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隊縣. 遼東太守蔡諷,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曹龍端· 兵馬公孫, 以身諷, 俱沒於陣. 死者百餘人.]

여름 4월에 왕은 선비족[鮮卑]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수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이었던 용단(龍端), 병마연(兵馬)인 공손포(公孫)가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모두 진영에서 죽었다.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69년(121)

 

침략이라고 묘사된 이 전쟁은 사실 고구려의 대대적인 대한(對漢) 보복전이었다.

봄에 쳐들어온 한의 군대를 상대로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도 모자라,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I'm still hungry)"라면서 궁왕은 선제공격으로

한조의 요수현을 치기에 이른다. 지금의 중국 요령성 해성시 서북쪽. 

 

이 무렵 선비족은 이미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유류명왕 11년에 고구려에 쳐들어온 선비족을, 개국공신 부분노의 꾀로 대패시키고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에 둔 것이 엊그제(?) 일이다. 이때 고구려에 투항한

선비족의 군사를 한을 치는데 동원했던 모양인데, 이 싸움에서,

예전 고구려에게 패해서 도망갔던 요동태수 채풍과 그의 신하들을 비롯해

100여 명이 넘는 한조의 병사들이 고구려에게 사살당하는 등, 한조는 엄청난 패전을 치렀다.

 

[至殤ㆍ安之間, 句麗王宮數寇遼東, 更屬玄菟. 遼東太守蔡風, 玄菟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 興師伐之. 宮詐降請和, 二郡不進. 宮密遣軍攻玄菟, 焚燒候城, 入遼隧, 殺吏民. 後宮復犯遼東, 蔡風輕將吏士追討之, 軍敗沒.]

상(殤)ㆍ안(安) 두 황제의 치세에 이르러 구려왕 궁(宮)이 여러 번 요동을 노략질하더니, 다시 현도에 속하였다.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風)과 현도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이 궁 때문에 2군이 피해를 입어 군사를 일으켜 벌하였다. 궁은 거짓으로 화친을 청하고 2군에 나아가지 않았다. 궁은 몰래 군사를 보내어 현도를 치고 후성(候城)에 불을 질렀으며, 요수(遼隧)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나중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니 채풍은 가벼이 이사(吏士)를 거느리고 추토하였으나, 군사들이 패하여 몰살당했다[敗沒].

《삼국지》 권제30, 위서제30, 오환ㆍ선비ㆍ동이열전제30, 고구려조

 

사정이 이랬으니 중국측에서 태어나면서 이미 눈을 뜨고 있던 궁왕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꺼려하더라"고 부정적으로 써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기들을 엄청나게 괴롭힌 이민족 오랑캐의 왕이잖아?

 

[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겨울 10월에 왕은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묘(太后廟)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곤궁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숙신(肅愼)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紫狐裘]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69년(121)

 

한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 해 겨울 10월.

왕은 '태후묘 참배'라는 하나의 정치적 이벤트를 벌였다.

부여 소재의 태후묘ㅡ이것을 동명왕의 어머니 유화의 사당인 부여신묘(扶餘神廟)로 본다면

궁왕이 유화의 사당에 참배한 최초의 고구려왕이 되겠지만,

이 사당이 유화의 사당이라는 보장은 없다. '태후묘(太后廟)'라고 적혀있고

유화가 부여 땅에서 죽었고 부여 땅에서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졌다는 기록은 있지만,

내가 보기에 태조왕이 참배했다는 '태후묘'는 유화의 사당이라기보다는

태조왕의 생모인 부여인 태후의 사당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런지.

10월이 동맹제의 기간이긴 하지만 이미 동맹제에서 부여신으로서 유화를 제사지내고

고등신으로 추모왕을 제사지내는데 굳이 따로 부여로 행차해서

태후묘에 제사지냈다느니 하는 기록을 굳이 남길 필요는 없었지 않나 한다. 

궁왕이 태후의 사당을 참배한다는 명분을 들어 부여를 방문했을 때,

마침 숙신의 사신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부여의 지배를 강하게 받고 있었던 숙신은, 

부여에 행차한 고구려왕에게 자호구와 흰 매, 흰 말과 같은 예물을 바치며

고구려왕의 권위를 몸소 체험하고, 부여의 힘이 그에 비하면 

얼마나 유약한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11월에 왕은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은 수성에게 군무와 정사를 통괄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69년(121)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군무와 정사를 통괄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고수성.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자는 훗날 형에게서 왕위를 찬탈하고

제7대 차대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인물로서, 형왕의 충신인 고복장을 살해하고

궁왕의 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초기 고구려 역사의 악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형왕과는 별다른 마찰을 보이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한의 군사 2천을 기습전으로 궤멸시킨 맹장으로서

태왕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지위에 있었다. 태왕 자신도 그런 아우를 깊이 믿었기에

군사와 국정을 맡겼던 것이겠고.

 

노(魯) 은공(隱公)은 우보(羽父)로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마침내 종무(鍾巫)의 변이 일어나게 하였고, 장공(莊公)은 경보(慶父)로 병권을 잡게 하여 마침내 무위(武闈)의 화를 불렀으니, 《춘추》에 이른바

‘귀척의 경[貴戚之卿]은 이성(異姓)의 경에게 다스려지기 어렵다.’

한 것이 이것이다. 고구려왕이 너무 늙은데다 친동생 수성이 백료의 우두머리에 있으면서 위복(威福)을 전천(專擅)하여 오늘내일 벼르는 마음[今將之心]을 갖고 있었는데, 또 그로 하여금 군주의 중대사를 통리하게 하여 그 악을 조장하고, 마침내는 신기(神器)를 부탁하여 사랑하는 아들과 대신이 곧 주륙을 당하게 하며, 화가 종사에까지 미치게 한 것은, 그것을 일찍 분변하여 미미할 때 삼가지 못함에 연유했으니, 종무ㆍ무위의 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서거정이 주도하여 조선조 성종 15년(1484)에 완성된 동국통감. 우리 나라 최초의 통사이다.>

 

조선조의 최보가 《동국통감》에서 태왕이 수성을 신뢰한 것에 대해 비판한 말이다.

(《동국통감》에 실린 사론의 대부분은 이 양반의 입에서 나왔다ㅡ안정복 영감 왈.)

대략 간추리면 처음부터 수성이라는 자의 됨됨이를 못 알아보고 괭이에게 생선 맡기듯 

군권을 주어버렸던 것이 잘못이라고. 수성은 왕의 아우이고 수차례 전장을 드나들며

힘을 키운 무인이다. 마음만 먹으면 왕이나 태자를 제치고 왕위를 찬탈할수도 있는 위치이고,

정작 그 자신도 언제쯤 왕이 될까 하고 오늘내일 벼르고 있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권한을 넘겨줬으니 기회는 왔도다 하고 덥석 잡아무는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안정복 영감은 최보의 말에 대해 반박한다.

 

귀척의 경은 처지가 절박하면 쉽게 사심이 생기고, 권세가 중하면 쉽게 당여(黨與)가 형성되니, 다스리기 어렵다 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하지만 목이 멘다고 어떻게 밥을 안 먹을 수가 있겠는가?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주공(周公) 같은 성인이나 계우(季友) 같은 현인도 버려야 되겠는가? 마땅히 그 사람의 선악을 꾀하여 처리할 일이지, 고구려왕이 수성에게 위임한 것을 갖고 '사람 알아볼줄 몰랐다'고 할수는 있어도 '화를 자초했다'고 할수는 없다. 한(漢)의 왕망(王莽)과 조조(曹操)가 어찌 동성(同姓)이며, 주(周)의 진(晉)ㆍ정(鄭)이 어찌 지친(至親)이 아니겠는가? 종무와 무위의 변은 은공과 장공만 탓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임용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능력과 덕망을 함께 갖출 수는 없는 것인가.

얼굴 아름다운 사람, 잘 웃는 사람, 친근해보이는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곧 그 겉을 보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하게 전해지는 진리지만,

사람들은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고 쉽게 말해도 실상은 겉을 의식하게 된다.

 

개개인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들ㅡ공부 잘 한다고 이름나고 좋은 직장 가졌다고 이름나고,

대회에만 나가면 상을 휩쓸어오는 소위 '엄친아'들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우리네 어머니들은

도대체 그의 겉을 본받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속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인가.

범과 표범의 가죽도 털을 뽑고 보면 개나 돼지의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공자님 말씀이고 겉도 속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주종(主從)의 반열을 두고 논한다면 무엇이 앞서야 하는가.

사람의 속이 겉보다 중요하다면 속이 채워진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인가?

능력 또한 겉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사람을 보는데 우리가 '저 사람 괜찮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겉을 보고 하는 말인가,

속을 보고 하는 말인가? 모르겠다. 겉이나 속이나 다 똑같이 무시할 수 없다면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가?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12월에 왕은 마한(馬韓)ㆍ예맥의 1만여 기(騎)를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2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한의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69년(121)

 

뜻밖의 변수가 고구려에게 거침없는 하이킥으로 작렬한다.

부여가 고구려에 창날을 거꾸로 세운 것이다.

(이때 고구려측 전사자가 5백이었다.ㅡ《동사강목》의 설명이다)

신라를 가리켜서 '도둑을 끌어들여 형제를 쳤다'고 욕하신 단재 선생께서

부여가 한을 도와 고구려를 쳤다는 이 기록을 보셨으면 뭐라고 하셨을지 참.

 

[安帝建光元年, 高句麗王宮死, 子遂成立. 玄菟太守姚光上言, '欲因其喪, 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陳忠曰 “宮前桀黠光不能討, 死而擊之非義也. 宜遣吊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었다.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할까 합니다.”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이듬해(122)에 수성은 한의 포로를 돌려보냈다.

《후한서》인용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94년(146)

 

아직 죽지도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왕을 죽었다고 하다니?

이 엉터리 같은 기록에 카운터펀치를 멋지게 날려준 것이 우리나라의 기록, 《해동고기》다.

 

[高句麗國祖王高宮, 以後漢建武二十九年癸巳卽位, 時年七歲, 國母攝政. 至孝桓帝本初元年丙戌, 遜位讓母弟遂成. 時宮年一百歲, 在位九十四年.]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 계사(AD. 53)에 즉위하셨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셔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146)에 이르러 친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양보하셨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셨으며 재위는 94년이었다.

《해동고기(海東古記)》인용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94년(146)

 

김부식 이 늙은이가 그래도 참으로 친절하다 소리를 듣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기록 진위의 판정에서 우리쪽으로 조금더 기울어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는 우리 기록과 중국 기록을 대조해서 다른 점이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 기록을 따랐다. 여기서도, 김부식 영감은

"건광 원년이란 궁이 재위한지 69년째 되는 해인데 《한서》에서 적은 것과

고기에서 적은 것이 서로 안 맞는다. 《한서》 기록이 왜 이리 틀린 게 많은가

[則建光元年, 是宮在位第六十九年. 則漢書所記, 與古記抵捂, 不相符合.

豈漢書所記誤耶]?"라고 비판했다.

 

《한서》란 즉 《후한서》다. 반고가 지은 《한서》와 범엽이 지은 《한서》가 있는데

전자는 전한의 역사를 다룬 것이고 후자는 후한의 역사를 다룬 것이지만 엉뚱하게도

《후한서》는 《후한서》보다 먼저 편찬된, 그것도 후한 이후 삼국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의 동이전 기록들을 재탕삼탕 짜집기로 정리한 책이다.

《한서》도 무제 이전의 기사들은 대부분 《사기》의 기록을 재탕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후한서》가 멀쩡히 살아있는 태조왕을 죽었다고 말한 것은 그 뒤에 기록된,

고구려에서 한의 포로를 돌려보냈다고 한 기사의 설명을 위한 복선을 깔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성이 한의 포로를 돌려보냈다고

《후한서》가 기술한 서기 122년은 사실 부여와의 전쟁이 있었던 때였다.

  

[七十年, 王與馬韓 · 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구하고 깨뜨렸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AD.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부여는 고구려와 한의 전쟁에서 항상 고구려 대신 한의 편을 들었다.

후한의 연호로는 연광(延光) 원년. 이때 부여에서 지원군으로 온 것도 역시,

전번에 사신으로 한에 가서 인끈과 금채를 받아 돌아왔던 부여의 왕자 위구태였다.

고구려에 격파당해 힘이 약화된 상황에서도 한을 도와 고구려의 대군을 격파한 기록에서,

우리는 이때의 부여가 군사적으로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위략(魏略)》이라는 책에서도,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

"그 나라는 부강하여 선세 이래로 외부의 침략을 받아 파괴된 적이 없다."

라고까지 했을까. 고구려가 부여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지, 뭐 보복을 했다면 했을텐데도

그런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때 부여의 국력이

이미 고구려와 다시 맞설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반증으로 볼수도 있을 것이다.

 

《후한서》속에서 수성이 포로를 돌려보내기 전에 한 조정에서는 이런저런 논의가 벌어진다.

실제로는 아직 죽지 않고 정정하게 살아있는 궁왕이 죽었는데

왕이 없는 틈을 타서 고구려를 쳐야 한다느니, 다들 찬성하는데 한 사람만이 딱,

나서서 '상을 당한 나라에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오'하고 재수밥맛 딱인

자칭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그러한 '불의'는 행하지 않게 되고,

바로 이듬해에 고구려에서 한의 포로를 돌려보내면서 이런 말을 했겠지.

아아, 당신들은 참으로 의로우신 분들입니다. 평생 당신들을 따르고 당신만을 믿으렵니다

오오 주여~~(???) 하고. '수성이 포로를 돌려보냈다'는 사건이

어디까지나 한 조정의 '의로움'과 '도리', '양심'에 고구려왕이 감동하면서 일어난

사건이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아직 죽지 않은 궁왕이 죽은 것처럼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성이 포로를 돌려보냈다는 것은 거짓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포로를 돌려보낸 이유는 아마도 한과 함께 부여까지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오던 상황에서

둘 중 하나는 우리 쪽으로 포섭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 뿐이다.

정말 한조의 의리에 감동해서 그랬다면 뭐하러 포로를 돌려보낸 그 해에

군사를 들어 한조를 쳤겠나. 더구나 기록된 것과는 달리 궁왕은 30여년이나 더 살았는데.

 

한편 두 차례의 한 공격에서 나오는 '마한'의 존재. 

틀림없이 백제 온조왕 때에 멸망했을텐데, 어째서 지금 다시 튀어나와

태조왕과 함께 한을 치고 있는 것인지. 《동사강목》을 봐도,

별다른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소소한 잡변이지만,

마한이 멸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니

(주근이라는 사람이 6년만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마한이 멸망했을 때에 고구려로 도망친 사람들이 한을 치는데 참전한 것을 두고

고구려에서 마한이라고 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마한에서 누가 망명해왔다는 이야기는 고구려본기에 없더라.)

 

고구려본기에는 없고, 다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주 한씨ㆍ행주 기씨 두 집안의 족보에 보면 마한 마지막 왕의 이름이

원왕(元王)이고 마한의 9대 왕이라고 나오는데, 마한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역사가 짧았던가도 싶지만 서거정의 《동국통감》에서는

"기준(箕準)이 금마(金馬)에 도읍을 옮겨 4군(郡)ㆍ2부(府)를 거쳐

온조(溫祚) 무진년(AD. 8)에 망하였으니 또한 140여 년이다."라고 했고,

《동사강목》고이편에서는 "역년(歷年)이 202년이다"하고 기록을 해놨으니

한 대(代)를 30년으로 잡아도 30 곱하기 9는 270년. 무리는 아니다.

한 명의 왕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는 《동사강목》이 더 사실관계에 가까울 것이다.

 

청주 한씨의 족보에 보면 그 마지막 왕인 원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마한이 멸망한 뒤 세 사람은 각자의 운명을 달리하게 되는데, 

세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우평(友平)이 고구려로 도망쳐 

북원 선우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재미있는 얘기가 실려있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나머지 두 아들은 백제에 남고 신라에 가서 각기 행주 기씨와 청주 한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선우씨라는 성씨는 태원(太原) 하나밖에 없고

북원이라는 본관은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게 참 딱하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