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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6>제6대 태조왕(2)

    《삼국사》(삼국사기)와 고구려 건국연대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4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5>제6대 태조왕(1)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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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7>제6대 태조왕(3)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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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8>제6대 태조왕(4)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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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고,

무엇보다도 신화적인 요소가 여기저기 짙게 깔려있으니까.(《니혼쇼키》는 안 그런가?)

이런 고대사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는 대개 두 가지다. 그런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머리로 정리하기 힘든 이야기는 쉽게 거짓이나 허구로 치부해 부정해버리던지, 

아니면 어린애같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믿음으로 믿어버리던지.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던지 알에서 애가 태어났다던지, 하늘로 올라간 시신이 토막나서 떨어졌다던지

하는 이야기들은, 얼핏 듣기에는 모두가 황당한 낭설이고 소설같은 이야기들이지.

하지만 그런 엉터리같은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 순전히 우연의 소산이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전부 근거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저절로 생겨난 이야기인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주관이 그 속에 개입되어있지는 않은지.

비밀스러운 주술과 신이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의 사람들의 눈에 보인 세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시대에 그런 이야기가 퍼지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걸 생각하면서 역사를 읽다보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 황당해보이는 그런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던 의외의 사실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것은 유라시아 대륙이 모두 우리 영토였다느니 유라시아 제민족 모두 한민족의 후예라느니 하는

시시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대사를 읽을 때에 기록 속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신비로운 주술과 하늘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지금보다 강했던 그 시대에, 사람들이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숨겨 말하려고 했던 '사실'을. 그리고 그런 허무맹랑해보이는 이야기들이 오랜 옛날부터

끊이지 않고 전해져 오게 된 이유. <xxxHOLIC>에서도 나오잖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七年, 夏四月, 王如孤岸淵觀魚, 釣得赤翅白魚. 秋七月, 京都大水, 漂沒民屋.]

7년(AD.59) 여름 4월에 왕은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낚아 잡았다. 가을 7월에 서울에 큰 물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삼국유사》북부여조에 보면 늙도록 자식이 없었던 해부루왕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

'곤연(鯤淵)'이라는 연못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곤연'은 곧 '곤(鯤)'이 사는 연못(淵)으로, 《산해경》에 나오는 거대한 물고기의 이름이 '곤'이다.

황량한 북쪽의 땅에 어두운 하늘의 연못인 '천지(天池)'가 있고, 그 안에는 넓이가 수천리가 넘어서

얼마나 긴지 알수 없는 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한다. 등이 태산처럼 크고

그 날개를 펴면 하늘을 모두 가리고도 남았다는 붕새라는 새가 변해서 된 물고기.

(한 마리만 잡아도 아프리카 난민들 식량원조 되겠다.)

 

아마 이때 태조왕이 잡았다는 물고기가 《산해경》에 나오는 전설속의 곤은 아니었을까나?

하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고,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니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오른 것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물고기가 나온 '고안연'이라는 그 연못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곤연'이 아닐까도 싶다만

(발음도 얼추 비슷하고 '물고기'라는 공통적인 요소도 갖고 있고).

 

여담이지만 곤은 고대 중국 우임금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하다. 최고의 토목기술자이기도 했던 그는 

9년 동안 홍수예방 즉 치수(治水)에 힘썼으나 실패했다. 《사기》는 곤이 실패한 이유가 

홍수를 막는데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둑에만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곤의 아들인 우는 강의 근원부터 하류까지, 굽이치는 곳마다 물길을 새로 파서

홍수가 빠져나갈 길을 터놓았고, 치수에 성공하여 마침내 순의 뒤를 이어 하왕조를 열고 왕이 되었다.

지금의 왕은 곤인가, 아니면 우인가?

 

[十年, 秋八月, 東獵得白鹿. 國南飛蝗害穀.]

10년(AD. 62) 가을 8월에 동쪽으로 사냥 나가 흰 사슴을 잡았다. 나라의 남쪽에 누리가 날아 곡식을 해쳤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고구려 초기 3대(동명왕에서 대무신왕까지를 개인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 때에는

신비로운 '새'가 그렇게 나오더니. 이번에는 '사슴'이 또 그렇게 많이 나온다. 

사슴은 우리 같은 북방계 민족들에게는 신령하기 그지 없는 짐승이다. 사슴이나 순록의 뿔은

'태양의 운행 과정'을 설명하는데 쓰였고, 신라 금관에도 사슴뿔을 본떠 만든 금장식이 달려있다.

《동명왕편》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끝내 항복을 않는 비류국을 작살내려고

추모왕이 다란 흰 사슴을 잡아다 드넓은 바다(호수) 한가운데 거꾸로 잡아매놓고,

"하늘이 비류국을 물로 몰살시키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리라. 너는 나를 위해 비를 불러 비류국을 물에 빠뜨려라."

하고 저주하는 장면이때 쓰인 짐승 역시, 커다랗고 '흰' 사슴이었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자라고 빠지고 하는 것을 반복하는 사슴의 뿔은

그들이 신비롭게 여기는 우주수(宇宙授) 흰자작나무와도 닮은 모습이었다.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흡사 크고 아름다운 왕관과도 같은 것을 머리에 달고 유유히 숲을 걸어가는

사슴의 모습을 보고 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사슴이 지닌 아름다운 뿔의 모습을,

그리고 그 뿔 속에 담긴 우주나무의 가지를 본떠서, 북방의 샤먼들은 여러 가지 짐승의 가죽을 갖고

만든 옷에 사슴뿔 모양의 관을 머리에 쓰고서 하늘에 대한 의식을 행한다.

지금은 비록 그러한 관념이 없어졌지만 사슴이라는 존재의 생김새는 아직도 보는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자아낸다.

모노노케히메(원령공주)에 나오는 시시가미(사슴신)처럼.

 

[十六年, 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 冬十月, 雷.]

16년(AD. 68) 가을 8월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46년. 사실 빼앗은 나라치고는 제법 오래 갔다.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이 대무신왕 5년(AD. 22) 여름 4월.

부여 대소왕이 대무신왕의 공격을 받고 진흙창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고구려 장수 괴유에게 잡혀 죽은 뒤,

부여왕의 막내동생은 생각했다. 부여는 결코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다. 얼마 안가 부여는 망할 것이다.

부여가 망하게 되면 대무신왕이 부여 왕족을 가만둘리가 없다. 나는 무사하지 못한다.

그렇게 판단하고서 도망쳐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그렇게 부여가 망하고 자신이 죽을 것이 걱정됐으면 왜 '침략자' 대무신왕에게 맞서 싸우지도 않고

그런 소심한 방법을 택했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소왕은 그에게는 맏형이며 자신은 부여의 왕자다.

부여라는 나라가 그리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님은 대무신왕이 괴유를 시켜 부여왕의 목을 베었을 때도 잘 나타났다.

최고 사령관인 왕이 죽었는데도 부여군은 흩어지거나 도망가는 대신 오히려 왕의 원수를 갚겠다고

고구려군에게 반격을 가해 고구려군을 겹겹이 에워싸고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고구려가 한을 침공할 때에는 2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고구려군 5백 명의 수급을 거두어온 나라다.

흔히 알려진 부족국가 수준의 부여에게 2만이란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대소왕이 죽은 뒤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민족을 도와 동족에 맞선다는 건 쉽지 않지만, 부여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이만큼 적대적이었고,

또 항전의지도 강했다면, 왕자이자 왕족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끝까지 고구려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어야 했다. 

부여라는 나라가 그렇게 허망하게 고구려에게 밀려 버린 배후ㅡ왕의 죽음을 보고도 싸우지 않고 회피해버린

왕족의 책임은 막중한 것. 부여보다 못한 조선만 하더라도 의친왕 같은 왕족은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을 하려 했고,

고종 황제 자신도 의병 봉기의 밀지를 임병찬에게 내리면서 망명하여 나라를 되찾고자 했는데,

갈사왕에게는 고종 정도의 소심한 저항마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서는 결국 나라가

고구려에게 망해 없어져버리고 만다. 그렇게 보면 사람이나 나라나, 없어지는 게 무척 어려운 일 같지만

사실 아주 쉬운 일이다. 스스로 살아가기를 포기해버리면 되니까.

 

갈사왕의 손자라면 항렬로는 호동왕자의 삼촌 정도쯤 되겠다.

호동왕자의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딸이었으니까. 그리고 고구려에 귀부한 대가로,

도두가 고구려로부터 받았다는 우태라고 불리는 이 자리에 대해서 말인데, 《삼국사》 백제본기에서 말한

비류ㆍ온조 형제의 친아버지 이름도 우태(그는 해부루왕의 서손으로 부여왕 금와나 대소와도 혈연이 있다)다.

그리고 중국의 《북사》와 《수서》 백제전에서 백제의 시조로 지목한 구태.

한(漢)을 공략한 고구려 태조왕에 맞서 싸웠던 부여왕 위구태. 이 세 가지는 모두 어느어느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 곧 우리가 모르고 있던 부여의 또다른 관직명이다. 

고구려의 고추가나 신라의 갈문왕처럼 일종의 명예직(봉작같은). 고구려가 자국의 왕족들에게

'고추가'라는 칭호를 주고 신라가 왕의 아버지로서 추봉된 사람에게 '갈문왕'을 주었던 것,

리고 고려와 조선에서 '~~공', '~~후', '~~~군(대군)' 하던 것처럼, 부여에도 왕족에게 주는 

작위 비슷한 명예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우태'이고, 졸본부여에 동명의 서손이자 해부루왕의 서손으로서

'우태(구태)'라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의 친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웠고

구태(혹은 동명)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면, 고구려가 졸본부여 땅 홀승골성에서 건국되었던 것과

백제가 부여의 후계를 자처한 사실에 부합한다. 그리고 이번에 항복한 갈사왕의 손자 도두에게 

'우태'의 칭호를 내린 것도, 그가 부여 왕실의 왕족, 그것도 해부루왕과 금와왕의 피를 이은

혈손이었기에 부여 왕족으로서 예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아씨 머리 아프다) 

궁왕의 어머니가 부여 사람이라는 것도 그의 항복에 한몫 했을지 모르겠다.

대무신왕에 비하면 그래도 부여에 대한 반감이 궁왕에게는 다소 덜하리라는 계산.

 

[二十年, 春二月, 遣貫那部沛者達賈, 伐藻那, 虜其王. 夏四月, 京都旱.]

20년(AD. 72) 봄 2월에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조나라고 불리는 나라는 여기에서 한번 나온다. 그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나,

조(藻)라는 글자를 보면 바닷가에 붙어있던 나라였던 것 같기도 하다고.

 

[二十二年, 冬十月, 王遣桓那部沛者薛儒, 伐朱那, 虜其王子乙音爲古鄒加.]

22년(AD. 74)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사실 이 기록을 읽을 때에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조나, 주나라는 이름 때문에(무슨 여자 이름 같아서가 아니라).

분명 고구려의 행정구역은 5부체제, 그리고 그 이름들을 보면 대개 '나(那)'자가 들어간다.

관나부나 환나부처럼. 그러므로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조나'와 '주나'라는 이름만 보고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진압한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더랬다.

사실 여태껏 고구려에 복속되거나 스쳐간 인연이 있는(?) 나라들을 보면,

대개 '국(國)'자 들어가는 이름들 많았잖아. 비류국부터 시작해 행인국ㆍ개마국ㆍ구다국ㆍ갈사국ㆍ해두국

(아, 아닌 것도 있구나. 부여ㆍ옥저ㆍ말갈ㆍ낙랑.) 이 둘을 연나부나 관나부처럼 고구려의 행정구역 속에 속한

하나의 '나(那)'로 생각했기에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을 이렇게 기록했던가.

내부에서도 왕자를 칭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조나/주나'이렇게 쳐서 알아보니까, 그냥 나라 이름이라더라.

뭐 고구려를 고구려국으로도 읽는 그런 식인가보다. 그리고 이때의 정벌을 주도한 것은

'나(那)'나 '부(部)'같은 귀척 세력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왕이자 태왕이었던 궁왕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기존 학계에서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3세기경에나 나라 꼴을 갖추었다는 주장의

근거라고 내세우기도 한다. 고구려 초기의 '나'와 '부'는 왕의 통제를 받지 않은 존재였다는 것인데,

나부 자체에서 다른 나를 공격하거나 왕도를 공격하고 왕이 이끈 기내 병마에 대항할 정도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즉 '나'와 '부'에서 벌이는 정복활동은 태왕마저 통제할 수 없었고 태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삼국사》 태조왕본기 20년조와 22년조 기사다.

아마 《니혼쇼키》가 야마토 조정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심지어 야마토 조정과는 별반 상관도 없는 일까지)

'덴노의 명'으로 행하고 '덴노의 의지'에 따라 행한 것처럼 윤색해놓았듯 《삼국사》도 마찬가지로

'나'와 '부'에서 독립적으로 벌인 일들을 마치 궁왕이 한 것처럼 써놓았다는 논리겠지.

이희진 교수의 <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에서 지적한 부분이지만 《삼국사》는 적어도

《니혼쇼키》처럼 마음먹고 역사를 조작하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삼국사》에서

고구려 중앙정부와는 별 상관없는 일인데 마치 중앙정부가 한 것처럼 윤색하는 《니혼쇼키》식의

비틀기를 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그 근거가 있어야 할텐데 기존사학에서는 아무래도

'《니혼쇼키》에서 그랬으니까'라는 전제를 깔고 넘어가시는 듯 싶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저자세'라니. 우습다.

 

솔직히 좀 지긋지긋하다. 《니혼쇼키》가 그랬는데 《삼국사》도 별수 있겠어 하는 식으로

《니혼쇼키》의 비판법을 《삼국사》에 적용시키는 근거라고 내세운 것이

《니혼쇼키》도 그랬으니까, 라니. 강마에가 봤다가는 이런 말을 했겠지.

"좀 추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난 아직 역사를 공부하는 중이라서 잘 모르지만 적어도 '구체적인 근거와 합리적인 논리'라는 것이

저런 식으로, 《니혼쇼키》에서 그랬으니 《삼국사》도 그랬을 거야 라는 식으로 근거를 대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말할수 있다.

 

[二十五年, 冬十月, 扶餘使來, 獻三角鹿·長尾免. 王以爲瑞物, 大赦. 十一月, 京都雪三尺.]

25년(AD. 77) 겨울 10월에 부여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은 상서로운 물건으로 여겨 크게 사면했다.11월에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조선조의 이첨이라는 자는 이때의 일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다던가.

 

절후가 순조로워 풍년드는 것이 으뜸가는 상서로움이다. 그렇지 못하면 비록 단 이슬이 내리고 단 술이 샘솟더라도 상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정상에 반대되는 것은 요물이언정 상서로운 것은 아니거늘, 태조왕이 이를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하여 재앙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도리어 상서라 했으니, 자못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겠다.

 

평화로운 것이 가장 상서로운 것이라는 그 양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뿔이 세 개 달린 사슴과 꼬리 긴 토끼는 흔히 구할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부여 사신이 바친 이 물건들을 받고, 왕은 상서로운 징서로 여겼다고 한다.

(사슴은 좀 이해가 가는데 토끼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참.) 상서로운 물건도 얻었고, 마음좀 쓰자.

하고 왕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한다. 그러고 한달 뒤에 수도에는 석 자나 되는 눈이 내린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상서라고 항상 좋다는 법이 있을까?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46년(AD. 98) 봄 3월에 왕은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다. 책성의 서쪽 계산(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베풀어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왕은 책성에서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뭐 21년이나 갑자기 건너뛰냐;;;) 궁왕 재위 46년. 왕은 동쪽으로 책성을 돌아보았다고.

책성이라는 곳은 원래 갈사국이나 옥저의 땅이었다는데, 대체로 지금의 두만강변에 있는 훈춘 지역이라고 한다.

(발해 때에는 여기 된장이 특히 유명한 특산품이었다던가.) 태조왕 시절에는 책성이라는 이 성이 꽤나 주목받았었던 것 같다.

왕이 한 곳에 7개월 동안이나 머무르기도 쉽지 않은데.

 

[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

50년(AD. 102)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책성 백성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삼국사》 권제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 때에 한조로부터 조복과 의책을 받아가는 성이 따로 있었고,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幘溝漊)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於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한 때에는 고취(鼓吹)와 기인(技人)을 내렸는데, 항상 현도군을 따라 조회하면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고 고구려에 그 명적(名籍)을 주재하도록 영하였다. 뒤에 점점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이르지 않았는데, 동쪽 경계에 조그만 성을 지어 조복과 의책을 그 안에 두고 세시(歲時) 때면 와서 가져갔다. 지금도 호(胡)는 그 성곽을 일러 책구루(幘溝漊)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의 말로 '성(城)'을 가리킨다.

《삼국지》 권제30, 위서제30, 오환ㆍ선비ㆍ동이열전제30, 고구려조

 

《삼국지》에 나오는 저 '책구루'와 《삼국사》에 나오는 '책성'이 같은 곳인지 하는 것은

일단 '아니다'로, 우선 글자가 서로 다르다. 책구루의 '책(幘)'은 머리에 쓰는 관모를 가리키고

한조에서 사여한 의복의 일습이며, 책성의 '책(柵)'은 목책 즉 군사시설을 가리키는데 서로 같을 리가 없잖아.

하나는 옷이고 하나는 방어벽인데. 그런데 《삼국지》의 한자문장은 문맥이 안 맞는 구석이 많다.

책구루의 위치에 대한 것인데, 그 위치인 '동쪽 경계'를 고구려의 동쪽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현도군의 동쪽으로 해석해야 할지, 조복과 의책을 책구루에 보관했다고 했는데

한조에서 해마다 보냈는지 아니면 예전에 한조에서 보낸 것을 거기 보관 했을 뿐인지가 의문스럽다.

 

만약 '동쪽 경계'라는 것이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 동쪽이라면 한조에서 보낸 것을 보관만 했는 것이고,

중국 한조의 입장에서 본 동쪽이라면 한조로부터 꼬박꼬박 사여가 이어졌던 것을 말하는 것일게다.

하지만 이 경우 책구루는 고구려의 동쪽ㅡ길림 지방이 아니라 지금의 요령성 방면,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고 적어야 옳을 것이다. 단재 선생이 말씀하신바 우리나라 관련기록엔

동서 양자가 서로 치환된 것이 많은데, 이것도 '서쪽 경계'라고 적어야 할 것을 '동쪽 경계'라고 적었을

가능성을 떠올려보게 된다. 설마 하니 한조의 사신이 고구려 깊숙이까지 들어가서 동쪽 끝까지 옷을 놔두러 갔을라구.

그랬다면 처음부터 동쪽 '경계'라는 말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만방자'라는 말은 중국쪽 입장에서 저술한 것이지만 고구려쪽에서는

중국에 저자세로 나서지 않는다는 강경입장인데, 그런 입장을 고수하느라 현도군을 따라 한조에 조회하던 것도

그만둔 고구려에서 한조가 준 의복을 책구루에 '처박아두고' 나서도 정초만 되면 꺼내서 다시 입었다는 것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의복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문물제도의 일부, 어떤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그 나라에 복속되기를 청한다는 의미나 다름없는 뜻으로 쓰이던 시대다.

그런데도 조회하는 것을 관둔 고구려가 한조로부터 받은 옷을 버리지 않고 세시 때마다 꼬박꼬박 꺼냈다는 것인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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