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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동모산은 어디인가?
[구당서(舊唐書)]<발해전(渤海傳)>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멸망후에 대조영(大祚榮)은 가족들을 이끌고 영주(營州)에 와서 살았다. 696년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이 패하여 죽은 후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이진충의 잔당을 치게 하였다. 먼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죽이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추격하였다가 고려와 말갈을 합친 대조영에게 패하였다. 대조영은 군중들을 이끌고 동쪽 계루고지(桂樓故地)에 자리잡았다.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자립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고 하였다.
高麗 旣滅. 祚榮 率家屬 徒居 營州...祚榮 遂率其衆, 東保 桂婁之故地, 居東牟山, 築城 以居之."
발해의 동모산은 어디인가?
게 시 자 : 수심자 (구자일) 게시번호 : 37
게 시 일 : 1997/08/23 12:55:36 수 정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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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동모산은 사평시 쌍료현 후고가진이다
(東牟山, 雙遼縣 後高家鎭)
발해의 건국기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에 실려 있는 바, 먼저 [구당서]부터 차례로 소개한다.
1. 구당서와 신당서
[구당서(舊唐書)]<발해전(渤海傳)>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멸망후에 대조영(大祚榮)은 가족들을 이끌고 영주(營州)에 와서 살았다. 696년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이 패하여 죽은 후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이진충의 잔당을 치게 하였다. 먼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죽이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추격하였다가 고려와 말갈을 합친 대조영에게 패하였다. 대조영은 군중들을 이끌고 동쪽 계루고지(桂樓故地)에 자리잡았다.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자립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고 하였다.
高麗 旣滅. 祚榮 率家屬 徒居 營州...祚榮 遂率其衆, 東保 桂婁之故地, 居東牟山, 築城 以居之."
여기에 [신당서]<발해전>의 기록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동모산은 영주(營州)로부터 2000리 되는 곳이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추장 걸사비우라는 자는 고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 오루하(奧婁河) 변에 자리하였다.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용서하였으나 걸사비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이해고를 시켜 걸사비우를 쳐서 죽였다.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인 대조영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도망을 쳐서 이해고가 천문령까지 쫓아갔다가 패하고 돌아왔다. 이후 거란족이 다시 돌궐국에 투항하며 영주를 돌궐이 차지하니 중국과 길이 끊어져 발해를 토벌하지 못했다."
위에 소개한 두 기록 사이에 약간의 차이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 첫째는 [구당서]에 없던 걸걸중상이 [신당서]에서 대조영의 아버지라고 등장한 것이고
둘째는 천문령 전투의 시기가 서로 반대이다. 즉 [구당서]는 천문령 전투 후에 대조영이 동모산을 쌓았고, [신당서]는 걸걸중상이 먼저 태백산 오루하변에 자리를 잡고 진국공(震國公)이라 불리다가 천문령 전투를 맞게 되었다.
이 모순을 풀기 위해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면 거의 정확하게 실체적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 <조대기>는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인용되어 있다.
2. 조대기
고려말 태백일사가 편찬한 <대진국본기(大震國本記)>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고구려, 발해 여러 왕의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기록이 있고 이 중 발해의 연호들은 대개 [신당서]와 일치한다. 그러나 [신당서]에서 빠진 걸걸중상의 연호 중광(重光)과 대조영의 연호 천통(天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사실(史實)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를 지지하는 것이 [요사지리지]<동경요양부서문>이다. 윗글에는 발해 대이진(大彛震)왕이 12세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발해 시조를 걸걸중상으로 모시고 계산한 것이다. 후세 사가의 입맛대로 발해 시조를 대조영으로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소개된 건국기는 <조대기>를 인용하였고 앞서의 두 당서 기록과 다르다. 특히 대조영이 건국왕이 아니라 건국왕인 걸걸중상의 태자였다.
"조대기(朝代記)에서 이르기를, 개화(開化: 고구려 보장왕의 연호) 27년(서기 668년) 9월1일 평양성 함락 때에 진국장군 대중상(振國將軍 大仲象)은 서압록하(西鴨 河)를 지키다가 변고를 듣고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개원(開原)을 지날 때는 소문이 퍼져서 8000인으로 합쳐져서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후고구려(後高句麗)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광(重光)이라고 연호를 세웠으며 이후 주위 원근의 여러 성이 따르었는데 중광 32년에 돌아가셨다. 묘호를 세조(世祖)라고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고 하였다.
태자 조영은 부음을 전한 관리를 따라서 계성( 城:현재 북경)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고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천도하였다. 말갈의 걸사비우와 거란의 이진영 등과 손잡고 당나라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패시키고 국호를 대진국(大震國)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하였다. 천통 21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고 하였다."
대중상이 지키던 서압록하는 오늘날의 유하(柳河)로 추정된다. 즉 마자수압록강(鴨 江; 今 大遼水)의 서쪽으로서 신민시나, 법고현이 된다. 개원은 현재 요령성 심양 북쪽에 있는데 이는 원나라 이후에 개원이라고 하였고 고구려, 발해, 요나라의 개원(開原) 지방은 기록에 없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이 즉위(서기 699년)하기 30년 전에, 걸걸중상이 세운 후고구려(後高句麗)가 발해 모국으로서 존재하였고(668년 이후), [신당서]도 이를 인정하여 천문령 전투 이전에 후고구려를 대진국의 전신으로 표기하기 위하여 걸걸중상을 기록한 것이다.
<조대기>에서 말하는 진국장군(辰國將軍)은 고구려에서 임명한 대중상의 관직이었는지 당나라가 준 관직인지 불확실하다. 사리(舍利), 또는 대사리(大舍利)는 지명과 관계된 대중상의 고구려 작호로 추정된다. 뒤에 고구려 땅 위에 당나라 사리주도독부가 설치된 곳이 대중상의 봉지(封地)였을 수도 있다. 당나라가 설치한 사리주는 장수왕의 평양성이 있던 무순시로 추정된다. 이곳으로부터 걸걸중상은 개원 방향으로 후퇴하면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을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로부터 진국공의 작위를 책봉받은 걸걸중상은 분명히 나라를 건국하여 중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걸걸중상이 사망한 중광(重光) 32년은 고구려 망국년도인 668을 원년으로 계산하여서 서기 699년이 된다. 또한 719년에, 재위 21년만에 붕어한 대조영의 즉위년도도 역시 699년이 된다. 따라서 대조영의 대진국(大震國) 즉위연도는 확실하게 699년이고, 중광에서 개원한 연호는 천통(天統)이다.
하지만 중국 기록에서 백제의 건국을 고이왕 이후로 본다고 해서, 온조왕을 백제 시조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발해 건국도 668년 고려망국 직후 걸걸중상의 후고구려 중광 원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진국과 후고구려가 국호가 다르기는 하지만 다 발해인 것이고, 신라를 신라라고 국호로 정한 것이 역시 박혁거세(국호는 계림이다.)는 아니었지만 그가 신라의 시조인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발해의 건국연도는 이제까지 알려진 698년, 699년 등이 아니라 668년, 걸걸중상의 중광 원년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요사지리지]의 명백한 기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걸걸중상의 후고구려가 건국된 곳은 오늘날의 쌍료현 후고가(后高家)로 추정된다. 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려의 최초 건국지는 고구려 계루부가 있던 곳이다. 오루하변이라고 하였는데 오루하(奧婁河)는 발해 막힐부의 오희현(奧喜顯)이다. 즉 창도현 오라파가(烏拉巴街) 부근으로서 아라마도성이 있었다고 전한다. 읍루(相婁)가 변한 말이 오루인 것이다. 걸걸중상의 동모산성은 길림성 사평시 쌍료현 파리성자진 후고가(後高家)이다. 후고가는 바로 후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뒤에 발해 막힐부의 고주(高州)가 되었다. 후고가 동쪽에 모성자(毛城子)라는 곳도 있다.
<조대기>의 기록은 후고구려의 태자 조영이 거란의 이진충군에 합류하여 영주 반란을 일으키고, 이진충의 북경 점거에도 동참하여 북경 근처인 계성까지 갔다가 걸걸중상의 부음을 듣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이진충의 거란군은 반란의 기세를 몰아서 영주에서 북경성까지 점거하여 20만에 달하는 당나라 군을 몰살시켰다. 이후에 당나라의 구원을 자처한 돌궐국의 영주 침략으로 인하여 거란군은 배후에서 고립을 당하여 그만 패퇴하고 이진충은 전사하였다. 거란 장수였던 이해고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오히려 거란과 연합군이었던 걸사비우의 말갈병과 대조영의 고구려군의 추격에 나서고 있다. 대조영은 [구당서]에서처럼 본래 영주(營州, 今 朝陽)의 유민이 아니라 발해 건국 후에 영주에 쳐들어와 점령했던 것이다.
역시 중국왕에게 허국공(許國公)의 작호를 받은 말갈추장 걸사비우는 진국공 대중상과 동렬의 위치인데, 송막도독 이진충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말갈추장 걸사비우가 거란과 합세하여 당나라를 치러가면서, 대조영도 걸사비우를 따라서 참전하여 계성( 城; 今 북경)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유물로 추정되는 함화4년(咸和; 836년) 불상(日本 所在)에 허왕부(許王府)가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당나라는 신라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 663년 설치)를 두어 신라왕을 계림도독이라고 불렀고,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 차츰 신라를 병탄하려 하였다. 이후 674년 신라가 멸망한 고구려 후예인 반란군과 연합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당나라가 소유한 백제 땅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계림도독이던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金法敏)을 삭탈관직하고, 즉 왕위를 폐지하고 대신에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지명한 후에, 신라와 전쟁을 치르었
는데 675년부터 2년간 지속되었고 676년의 경기도 적성의 칠중성, 인천의 매초성 전투(買肖城)로 끝났다. [신당서]에서 당나라는 매번 승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패수를 장악하여 지켜내었는데 당시 지리적 정황으로는 패수가 바로 청천강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백제의 땅 모두와 고구려 땅의 일부안 청천강까지 당나라가 신라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또한 문무왕도 복권되었다. 문무왕의 복권은 당나라의 인정이 그러한 것이고 실제 신라 왕권은 변함이 없었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676년 요동 고성(古城; 沈陽市 道義)으로 물러나고, 다시 일년만에 요동 신성(新城, 開原市 老城)으로 옮긴다. 신라가 청천강 이남을 굳건히 지켜내니 대동강 평양에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696년 이진충의 반란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안동도독부로 축소되고 유명무실하다가 705년에 다시 복위되지만 714년에는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으로 또한번 후퇴한다. 그 이유는 712년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 설눌(薛訥;설인귀의 아들)의 군대가 돌궐의 지원을 받는 해족(奚族, 난하의 북부 민족)에게 대패하여 다시 영주 땅을 돌궐에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676년 요동 고성(古城; 沈陽市 道義)으로 물러나고, 다시 일년만에 요동 신성(新城, 開原市 老城)으로 옮긴다. 신라가 청천강 이남을 굳건히 지켜내니 대동강 평양에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696년 이진충의 반란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안동도독부로 축소되고 유명무실하다가 705년에 다시 복위되지만 714년에는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으로 또한번 후퇴한다. 그 이유는 712년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 설눌(薛訥;설인귀의 아들)의 군대가 돌궐의 지원을 받는 해족(奚族, 난하의 북부 민족)에게 대패하여 다시 영주 땅을 돌궐에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은 713년에 발해에게 최흔(催炘)이라는 사자를 보내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는데 그 목적은 발해와 당나라가 동서 양면에서 돌궐이 차지한 영주를 협공하자는 속셈이었다. 아무튼, 당의 속셈이 이루어져서 그 몇년 뒤인 서기 716년경에는 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영주 땅이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730년부터 4개 북방 민족이 북경을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732년에는 발해가 대장 장문휴를 시켜서 바다 건너 산동의 등주를 침략하고 돌아왔는데 이후 발해와 당의 국경이 만리장성 근처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743년 요서고군성(遼西故郡城, 盧龍縣)으로 안동도호부가 한번더 생겨났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754년) 이후에 안동도호부 자체가 폐지된다. 당나라가 안서, 안남, 안북 도호부의 눈부신 성과에 의하여 얻어진 국토확장에 비하면 안동도호부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소위 당 현종의 "개원의 치(開元之 治)"는 동쪽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안록산의 난 이후로는 각 지방을 점거한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들에 의하여 당나라 국토가 요리되었다. 이를 번진(藩鎭) 시대라고도 한다. 그 번진의 선두는 산동에서 제왕(濟王) 칭호를 가졌던 평로치청 절도사(平盧淄靑節都師) 이정기(李正己)이다. 그는 안록산 이후 가장 큰 절도사였으며, 고구려의 후인으로서 산동반도를 지배하면서 당나라와 발해와 당나라와 신라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또한 소금으로 소득을 올렸다. 이정기는 3대 4왕을 전하였다. 즉 아들 이납(李納)과 손자인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에게 평로치청절도사를 전하여 약 90년 동안 산동 15주의 지배권을 가졌는데, 당나라의 위협을 받으면 발해가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7세기말의 시대 상황을 검토해 보건데 후고구려의 황태자인 대조영이 부왕인 걸걸중상의 명령을 받고, 말갈추장 걸사비우를 따라서 거란의 당나라 침공에 응원하러 갔다가 걸걸중상의 부음을 듣고 돌아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698년 북경으로부터 패퇴하여 요수를 건너오면서 중국 땅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을 많이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며, 걸사비우의 전사로 인하여 걸사비우의 말갈군중도 흡수하였을 것이다. 대조영은 698년에 천문령(무순시 청원현)에서 당나라 군대를 분쇄한 다음에 699년 걸걸중상이 죽자 후고구려 왕위를 계승하여, 통화시 대통구 나통산성을 쌓아 홀한성이라고 이름부치고 나라 이름도 대진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등극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조영은 후에 713년을 전후하여 국호를 발해국으로 다시 변경하였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속일본기]에서 보듯이 대무예왕은 고려국왕이라고도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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