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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후신(後身) 발해는 천문령전투 결과였다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10.03.06 02:57 / 수정 : 2010.03.07 07:05

696년부터 698년 사이에 일어난 고구려 유민들의 대이동은 모세의 이집트 탈출을 연상시킨다. 당나라 땅 영주(營州)로 끌려갔던 10만여명의 유민들이 수십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동진(東進)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얼마나 먼 길이었기에? 영주에서 최종 귀착지인 동모산(東牟山)까지 이동한 거리는 650㎞가 넘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선거리의 두배 정도가 되는 거리를 남부여대해 가축들을 이끌고 걸어가는 광경을 생각해 보면 된다.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敦化)다. 이들의 지휘자는 대중상(大仲象)·대조영(大祚榮) 부자였고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영주에 있었던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의 세력이 여기에 합류했다.

이들은 먼저 요하(遼河)를 건너 옛 고구려 땅인 요동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여 큰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676년 한반도에서 쫓겨나갔던 안동도호부 소속 군사였다.

당나라는 거란족의 반란 때문에 여기에 신경을 기울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중상 부자와 걸사비우는 두 과제를 동시 수행해야 했다. 옛 땅에 백성들을 정착시키는 일과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방어 태세를 갖추는 일이었다.

■ 측천무후, 유화책 쓴 뒤 대조영 공격

대중상은 자신의 옛 근거지인 태백산(백두산) 동북쪽 송화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성벽을 쌓았다. 이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유민들이 처음으로 다시 집결해 새 나라의 건국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섰음을 의미한다.

대중상 부자의 세력은 진국(震國), 걸사비우 세력은 허국(許國)을 표방했다. 697년 거란족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 사태 앞에서 경악하고 머리를 싸매야 했다.

10만명이 넘는 고구려 유민들이 빠져나가 고구려를 재건하려 하고 있다니? 측천무후는 일단 회유책을 택하고 대중상을 '진국공',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책봉했다. 사실상 이들 세력의 실체를 인정했던 것이다.

대중상이 세상을 떠난 건 이 무렵이었다. 이로써 수십만 고구려인의 운명은 아들 대조영에게 넘어오게 됐다. 사람들은 당시 그의 나이를 50세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개국시조들처럼 대조영에게도 신화 비슷한 게 전해진다.

'어머니가 북두성을 삼키는 꿈을 꾼 뒤 낳았는데 태어날 때 붉은 기운이 방안을 가득 차고 지붕을 덮었다. 얼굴은 흑칠 같고 등에는 해와 달과 용 무늬가 있었으며 신장은 9척 2촌이었다. 신묘한 무술과 영웅의 자태를 갖췄으며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했다….'

책봉 소식을 가져온 당의 사신이 도착한 것이 대중상이 죽기 전인지 그 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걸사비우가 책봉을 거부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요하를 건널 준비를 하던 측천무후로서는 더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 험준한 밀림지대로 유인해 당군(唐軍) 섬멸

698년 초 당나라 대군의 선봉에 선 장수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 색구(索仇)였다. 얼마 전 항복한 거란 반란군 출신의 장수 이해고는 밧줄과 긴 창을 잘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황장곡 전투 때는 당나라 장수 두 명을 사로잡아 한인(漢人)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인물이었다. 대조영·걸사비우의 연합군은 이들과 요동에서 맞붙었으나 첫 싸움에서 크게 패했다.

걸사비우는 전사했고 남은 군사들은 모두 대조영 휘하로 들어갔다. 대조영은 본거지 쪽으로 퇴각했지만 이해고의 당군은 집요하게 이들을 쫓아 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대조영의 퇴로가 점점 산골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도주인 동시에 유인이었다. 당나라 대군에 의해 요동 지역에서 밀려나면서도 당나라로서는 전혀 정보가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이 바로 백두산 서북쪽의 험준한 밀림지대 천문령(天門嶺·지금의 길림성 합달령)이었다.

한·중수교 직후 이곳 근처를 답사했던 한규철 경성대 교수는 "사륜구동 차량이 겨우 올라갈 난코스였는데 마적단이라도 나올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당나라군은 너무나 먼 사지(死地)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천문령 고개를 넘어선 순간 밀림 사방에서 출현한 것은 대조영의 복병이었다. 이 기습으로 당나라 대군은 거의 전멸했고 이해고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주했다. 적군을 물리친 대조영에게는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발해의 건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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