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goodfriends.or.kr/history/history2.html?sm=v&p_no=14&b_no=3168&page=2


고구려의 문화

* 문자
 
문자는 한자를 사용하였다. 일상언어는 한문과는 그 구조를 달리하는 우리말을 쓰면서도 문자표현은 중국어를 바탕으로 한 한문을 씀에 따라 여러 가지 불편함이 생겨,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는 독특한 표기법을 창출하게 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이러한 표기법은 광개토왕비문이며, 이 표기법이 뒤에 신라에 전해져 이두가 성립되는데, 이것이 7세기 후반 설총(薛聰)에 의해 정리되어졌던 것이다.


* 역사 편찬
 
기록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역사서로서 《유기 留記》 1백권이 있었다 하나, 그 편찬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 의해 《유기》를 재정리한 《신집 新集》 5권이 편찬되었다. 


* 종교, 사상

<불 교>
 
372년(소수림왕 2) 순도(順道)가 전진(前秦)의 사신과 함께 와 불경과 불상을 전한 것이 고구려에서의 공식적인 수용의 시작이다. 이어 374년 아도(阿道)가 왔으며, 375년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짓고서 각기 순도와 아도를 거처하게 하여 불교를 홍보하게 하였다.
 
고구려에서의 불교의 수용에는 별다른 알력이 없었고, 왕실에 의해 환영을 받으면서 공인되어졌다. 이는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가 지닌 북방 불교적인 '왕즉불(王卽佛)'의 사상, 즉 왕이 현세의 부처에 비견될 수 있으며 승려는 왕권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지배체제의 확립에 유용하였던 면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공덕사상(功德思想)과 혹은 인과응보설에 근거를 둔 윤회전생(輪回前生)의 사상이 당시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 귀족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하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던 면도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자연 당대의 불교는 호국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으며, 이 시기의 불교는 재래의 샤마니즘과 융합되어 기복적이며 주술적인 면이 강하였다. 또한 일체의 중생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열반종이 고구려 하대에 펴졌고, 만유(萬有)의 실상(實相)은 공(空)이라는 것을 주장한 삼론종(三論宗) 등이 고구려에서 깊이 연구되고 있었다. 
 
불교의 수용과 상호 전파 과정에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증진되면서 불교와 함께 서역 및 중국 문화가 광범위하게 유입되었고 불교 신앙이 토착화에 따라 사회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어 한국 고대 문화의 주요 기반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유교와 교육기관>
 
유교 또한 고구려에서 고대 국가의 사회질서와 집권체제를 유지하는 사상으로 중시하였다.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을 세워 중앙의 귀족 자제들을 교육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경당이 있어 젊은 사람들이 모여 독서를 하거나 활솜씨를 익혔다. 고구려인은 《오경 五經》과 같은 유교 경전이나,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의 사서, 그리고 《옥편》 《자림 字林》 《자통 字統》 등의 사전, 《문선 文選》과 같은 문학서 등을 읽었다.


* 문학과 음악
 
고구려의 문학은 역사적 실존인물을 다룬 것으로,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이야기의 설화문학과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 黃鳥歌>, 을지문덕이 여·수전쟁 때에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오언절구의 한시 등의 시가문학이 있다. 그리고 시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악도 또한 종교적인 성격이 짙으며, 악곡으로는 <지서가 芝栖歌><지서무 芝栖舞> 등이 전해오며, 일찍부터 한에서 고취기인(鼓吹技人)을 받았고 그 뒤 남조(南朝)를 통하여 악기를 받아들였으며, 동시에 종래의 풍속무(風俗舞)가 발달하게 되었다. 북위(北魏)나 몽고 고원의 유목민 국가들을 거쳐 오현(五鉉)·비파(琵琶) 등과 같은 서역계 악기를 다수 수용하였고 동시에 외래 음악이 전래되었다. 또 왕산악(王山岳)은 진(晉)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현학금(玄鶴琴)을 만들어 1백 여 곡을 지었으며, 뒤에 현학금은 신라에 전해져 옥보고(玉寶高)와 같은 대가를 낳았다. 
 
만주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무용총(舞踊塚)과 장천(長川) 제1호분의 벽화에서 보이듯이 그 형식이 다양해지고 조화 있는 율동의 춤으로 세련되어갔다. 고구려의 무용예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수나라와 당나라가 각각 7부기(七部伎)와 10부기를 제정하였을 때, 그 중 고구려기가 포함될 정도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은 고대 일본의 그것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고마가꾸 (高麗樂)'는 고대 일본에 전해진 외래 음악과 춤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 과학 기술
 
천문기상학·야금술·건축등이 주목된다. 고구려가 농업사회였으므로 일식·월식·지진·우박 등을 관측하고 기록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농사 외에도 정치적인 의미를 크게 지니고 있다. 초기 국가 체제 형성단계에서 왕은 비단 정치적인 군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장적인 기능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관(日官)을 두어 이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벽화고분의 천정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은 당대인의 천문지식과 그에 대한 관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함께 역법(曆法)과 수학·역학(力學)의 발달이 이루어졌는데, 오늘날 전하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축조물인 적석총 석실분등의 무덤과 성곽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야금술에서 고구려인들은 이미 서기 전후 무렵부터 강철 제품을 만들었으며, 평양에서 발견된 금동제 금동관장식 등은 고도로 발달된 고구려의 세공기술의 면모를 전해주고 있다.


* 미 술
 
조각품으로는 불상이 대부분이며, 회화로서는 고분벽화가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50기 이상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는데 평양부근과 집안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오늘날 전해지는 그 시기의 동아시아 전체 문화적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이다. 이 벽화와 그와 연결된 고분 양식은 백제와 신라에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에도 그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의 공예품으로는 금동제의 관모(冠帽)가 있고, 고구려의 토기로는 흑회색 연질토기 계통의 납작바닥(平底) 항아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매우 적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세 발이 달린 검은 간토기(黑陶)와 네 귀가 달린 항아리가 있다. 또한 와당(瓦當)은 연화무늬를 비롯한 인동(忍冬)·당초(唐草)·수면(獸面) 무늬 등이 풍부한 변화 속에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