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2/2004021903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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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북방고대사 5] 문명·종족 다양했던 고구려
입력 : 2004.02.19 18:40 09' / 수정 : 2004.02.20 07:16 58' 윤명철

▲ 土城이 있던 자리 중국 랴오둥반도 남쪽 장산군도에 있는 고구려 토성 흔적. 고구려가 강력한 해양 방어체계를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는 북방을 향해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부터 100년에 걸쳐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북쪽으로는 농안(農安) 또는 그 이북,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 유역과 연해주 일부, 남쪽으로는 경기만~소백산맥 이남~삼척을 잇는 지역으로 팽창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역 너머 유목 지역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영향권은 더욱 확대됐을 것이다.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해양 활동도 활발하였으니,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처럼 영토가 커지면서 고구려란 나라는 폭넓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갖게 됐다. 송화강·두만강·혼하·요하·눈강 등 길고 수량이 많은 큰 강이 있었고, 산악 지형도 처음 나라를 세웠던 길림과 집안 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의 여러 지역과 연해주 지역, 흥안령의 대삼림 등으로 확대됐다.

요동의 넓은 평원, 북방의 초원, 호수 등을 골고루 가졌고 남쪽으로 진출하여 비옥한 농토를 얻었다. 건조한 초원, 겨울에 몹시 추운 아한대 삼림지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온대 등 기후에 따른 식생대도 아주 다양했다.

이런 다양한 자연환경은 경제양식의 차이는 물론 생활방식, 집단의 세계관과 신앙 등 문화의 형태와 성격에 다양성을 불러왔다.

농경문화가 무엇보다 굳건한 토대를 이루었다. 요동반도의 남단과 황해도·한강 유역의 경기만 지역에서 농사가 발전했다. 부여의 옛땅인 송요평원 역시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 광개토대왕 정복전쟁지/ 내몽골 대흥안령 부근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때 여러 차례 이 지역에서 대규모 정복 전투를 벌였다.
 
북방과 서북방으로는 유목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북류(北流) 송화강 하류와 눈강 하류 및 동류(東流) 송화강이 만나는 지역은 끝없는 초원지대로서 일찍부터 유목문화가 발달했다. 거기다가 거란(契丹)을 거쳐 유연(柔然) 돌궐(突厥) 등과 충돌하면서 유목 문화의 성격을 흡수해들였다.

고구려가 하늘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기마문화를 중시하며, 고분 벽화에 별자리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유목문화의 영향이다. 이 지역의 산물인 명마(名馬)는 고구려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구려는 흥안령 산록에 사는 실위(室韋) 집단과 철을 팔고 말을 사는 마철(馬鐵) 교역을 추진하였고, 남쪽인 송(宋)에 800필의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동북쪽에서는 삼림·수렵문화가 발전했다. 동옥저로부터는 담비 가죽을 조세로 받았다. 담비 가죽은 북옥저와 접한 읍루(?婁)에서도 명산품으로 취급됐다.

동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은 동류 송화강의 일부와 우수리강이 흐르고 삼림이 무성한 지역으로 지금도 주변 종족은 어렵과 수렵으로 생활하고 있다.

고구려의 해양 문화는 일찍부터 동해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고 소금을 생산했으며, 고래를 잡는 등 다양하게 발전했다. 태조왕 때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지금의 단동 지역)을 공격한 이후 계속 황해로 진출을 시도한 고구려는 미천왕에 이르러 드디어 숙원을 풀었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요동반도를 영토화한 이후에는 황해 중부 이북은 물론 요동만도 고구려의 내해(內海)가 됐다. 이처럼 성장한 해양 능력을 토대로 양자강 유역의 송나라 등 남조(南朝)의 여러 국가들과 빈번하게 교섭하면서 남방 해양문화가 들어왔다. 일본 열도와 바다를 건너 문화교류를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고구려는 거대한 영토 안에 다양한 자연환경과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국가였다. 대륙과 해양, 반도를 동시에 가지면서 서로 다른 여러 문화가 어우러지는 경험을 가졌던 것은 우리 역사상 고구려가 유일하다.



漢族·거란·말갈족등 흡수 
먼거리의 유목·수렵종족은 租稅받는 간접통치로 지배
입력 : 2004.02.19 18:43 22 윤명철

고구려는 다종족(多種族) 국가였다. 예맥족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다양한 종족들이 고구려의 정치체제 안에 흡수됐다.
같은 예맥족인 동부여·북부여와 동예·옥저 외에 한(漢)군현의 잔재였던 낙랑과 대방 지역에 있던 주민과 화북(華北)의 유이민 등 일부 한족(漢族)도 들어왔다. 또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동몽골에 가까운 시라무렌 강 유역의 거란계 북방 종족들과 요하 유역에 있던 연(燕)의 선비족(鮮卑族)을 흡수하였으며, 동몽골 지역의 지두우족(地豆于族)도 일부 편입시켰다. 그리고 동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말갈계는 고구려의 강력한 구성원이 되었다.

고구려는 이처럼 광대해진 영역과 다양한 종족을 지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영토의 핵심 부분에는 욕살·태수 등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통치를 했지만, 먼 거리에 있는 유목 및 수렵 종족들은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과 영역을 보장해 주는 대신 조세와 군사력 등을 제공받는 간접통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중원(中原) 고구려비에는 신라를 ‘형제국’이라고 부르며 독립을 인정해주면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다층적(多層的)인 영향력 행사 방식을 갖고 있었다.


多종족·多문명 갈등 해결위해 中고급문명 적극 받아들여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입력 : 2004.02.19 18:47 04'

거대한 영토를 가진 다종족·다문화 국가였던 고구려는 종족 간의 갈등과 문화적 혼란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고구려는 천손(天孫) 의식과 단군 신화를 중심으로 하는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중국의 고급 문화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써 문화적 통일을 시도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朱蒙)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와 달의 아들’로 묘사됐다. 또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점도 강조됐다. 하늘과 땅의 결합, 하늘과 물의 결합이라는 단군신화적 요소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주요 소재의 하나이다.

한편 고구려는 유교·불교·도교 등 고급 사상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수도에 유교 고등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세웠고 이어 지방에도 경당(?堂)을 세웠다.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유교의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과 역사서, 문학서를 가르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려고 했다.

불교 역시 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에 의해 고구려에 전해졌다. 또 고구려 고분 벽화에 신선이 많이 등장하고 도교의 기본 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이 널리 읽혔다는 사실에서 도교의 영향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윤명철 교수는 동국대 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고구려연구회 연구위원·해양문화연구소장 저서: ‘고구려 해양사 연구’ ‘말 타고 고구려 가다’ 등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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