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r.theasian.asia/archives/58512

[강위원의 포토차이나] 발해의 세번째 수도 ‘훈춘’을 가다
02:41 PM Monday 26 November 2012  
강위원 강위원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명예교수,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운영위원·심사위원 역임, 사진집 '못 다한 이야기들', 저서 '조선족의 오늘'

발해의 세번째 수도 ‘동경용원부’가 있던 ’훈춘시 고성촌’

훈춘은 중국 조선족자치주에 속해 있으며 북한과 러시아를 마주보고 있는 중국 동북지역의 끝자락이다. 이곳은 발해의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785년 천도한 뒤 제5대 성왕 대화여(大華與)가 상경용천부로 천도한 794년까지 10년간 발해의 수도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있던 곳이다. 도성으로 추정되는 팔련성의 주소는 길림성 훈춘시 삼가자향 팔련성촌(三家子鄕 八連城村)이다.

이곳을 동경용원부로 추정한 근거는 발해사 연구자였던 일본인 토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가 1920년 처음 이곳을 답사하고 1937년 궁전 터와 그 동남쪽에 있는 절터를 발굴하여 와당(瓦當)과 문자 기와를 발굴한 데서 비롯된다.

이 터에서는 흙으로 빚어 만든 불상 파편들, 치마조각, 연꽃무늬 기와조각 등이 출토됐다. 또한 6세기 후기에서 7세기 초기 사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도 출토됐다.


이불병좌상의 모사품. 국립중앙박물관.

필자가 처음 팔련성을 찾은 것은 1995년이었다. 훈춘으로 들어가는 입구 훈춘발전소 부근에서 팔련성촌이라는 표지석을 보고 찾았던 팔련성은 넓은 벌판에 무너질 듯 서있는 표지석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 뒤에도 훈춘을 들를 때마다 이곳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2009년 팔련성이 발굴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이곳에 들렀다. 표지석이 있던 지점 부근은 덤프트럭과 천막으로 둘러져 있었고 새롭게 건설된 수로와 다리 부근에는 1961년 길림성 인민정부가 공포하고 1984년 4월 20일 훈춘시인민정부가 세웠다는 표지석 두 개가 있었다. 오른쪽은 중문(中文)으로, 왼쪽은 한글로, 뒷면에는 팔련성의 정황을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팔련성터를 알리는 표지석.
 
팔련성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는 삼가자향 고성촌(古城村) 입구가 있다. 중앙에는 고성촌, 오른쪽과 왼쪽 기둥에는 건설 신농촌, 타조신고성(打造新古城)라고 표시된 일주문이 세워져 있고, 마을의 정황을 알리는 입간판 아래에는 1981년 4월 20일 길림성 인민정부가 공포하고 훈춘시 인민정부가 세웠다는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의 글귀는 다음과 같다. “온특혁부성은 당나라 발해국(698~926)에서 수축하였다. 성터는 장방형 모양이고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는데 둘레의 길이는 약 2,260m이다. 동북쪽 성벽은 지금의 비우성(裵優城) 서남쪽 성벽 밑에 깔려 있다. 성내에서는 돗자리무늬와 네모 칸 무늬가 돋은 암기와, 연꽃무늬 막새기와, 질그릇, 쇠가마 등 문화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벽 밖으로부터 20m까지의 구역은 중점보호범위이며 30m까지의 구역은 건설통제지대이다.” 앞부분의 ‘당나라 발해국’이라? 중국의 동북공정 주장이 여기서도 엿보여 씁쓸했다.

표지석 위의 고성촌을 소개하는 입간판에는 “훈춘시 삼가자만족향 고성촌은 훈춘시구와는 8km거리에 있으며 삼가자만족향 서부, 훈-사공로 북측, 조선 샛별군을 바라보는 두만강 북부, 동강자촌 남부, 사타자촌 서부, 영풍촌 동부에 있는 발해시기 고성의 터이다. 그러한 연유로 비우성과 온특혁부성은 예전에는 고려성이라고 부르다가 1960년 고성촌으로 개명하였다. 중요한 작물은 옥수수와 콩이며 157호에 468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237명과 231명이며, 만족 270명, 한족 182명, 조선족 15명, 몽고족 1명의 민족분포를 가지고 있으며 전향에서 가장 적은 인구를 가진 촌락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온특혁부성에 들어서 있는 고성촌의 입구.
 
온특혁부성은 고구려의 책성(柵城)을 계승하여 발해시기에도 사용한 성으로서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이 지역이 발해의 판도에 들어간 후에도 책성부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흙을 다져서 쌓은 성벽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연적으로 허물어지고 파괴되어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

성안과 남쪽 성벽 바깥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기와조각과 질그릇 파편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1960년대 전후에 발견된 깨어지지 않는 완전한 연꽃무늬 와당은 집안시 동태자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같았다. 고구려의 특색을 담은 무늬 돋친 네모 기와들이 이 성안에서 뿐만 아니라 성 밖의 남쪽 구역과 동북쪽 구역에서도 많이 출토된 사실은 고구려시기에 이 책성의 규모가 현재의 온특혁부성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측되는 점이다.


비우성의 토성.
 
이 성의 북쪽으로는 요·금 시대의 비우성이 붙어서 자매성을 이루고 있는데 책성의 북벽을 자신의 남벽으로 이용하고 있다. 표지석은 온특혁부성과 같은 날 세웠으며 새겨진 글은 다음과 같다.

“비우성은 금나라 시기(기원1115~1234)에 수축되었고 원명시기에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성터는 불규칙 장방형 모양이며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는데 둘레의 길이는 2,023m이다. 동남쪽과 동북쪽 성벽에는 옹성이 있고 성벽 위에는 각루와 치가 있고 성벽 밖에는 해자가 있다. 성내에서는 동하국 연호가 새겨져 있는 관정도장 등 중요한 문화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벽 밖으로부터 20m까지의 구역 안은 중점보호범위이며 30m까지의 구역 안은 건설통제지대이다.”


토담에서 본 비우성,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비우성과 온특혁부성에서는 현재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성터는 흙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언덕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필자가 비우성에 들렸을 때 주민들은 옥수수를 거둬들이거나 수확이 끝난 옥수수 대를 태우고 있었다. 집집마다 텃밭에는 배추와 무 등 채소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촌에서 소개하는 글에서는 인구 468명 중 조선족이 15명이라고 했다. 필자보다 먼저 조사한 류연산 교수는<발해 가는 길>에서 주민 626명 중 조선족이 24명이라고 밝혔다. 전체인구와 조선족 인구가 비례해 줄고 있는 것이다.


비우성안 농가의 모습.
 
한인(韓人)들이 다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부터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선통(宣統) 2년(1910년) 마을 이름은 고려툰이었다. 고성촌의 소개에서도 1960년 이전 이 두 성은 고려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구한말 한인들이 거쳐 갔던 마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동경 - 팔련성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4376
발해의 지방과 성 목록 http://tadream.tistory.com/4502


책성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4379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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