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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도성

고구려는 건국 이래 여러 차례 도성을 옮겼다. 외침에 의해 도성이 파괴되어 왕의 거처를 임시로 옮긴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고구려 자신의 의지와 필요에 따라 천도를 단행했다. 특히 국제정세 변화와 국가의 발전방향을 고래해 새로운 도성의 위치를 선정했다. 이러한 점에서 도성의 변천에는 고구려사의 전체 흐름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도성(都城)은 왕궁을 둘러싼 평지의 나성(羅城)과 배후산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구려 도성은 조기 도성부터 중기 도성까지는 왕이 평상시 거주하던 평지거성(平地居城)과 배후의 농성용(籠城用) 산성(山城)으로 구성된 이중 구조였다. 흔히 이를 고구려식 도성제라고 부르는데 특히 입보를 위한 농성용산성인 오녀산성이 4,754m, 환도산성이 6,947m, 대성산성이 9,284m나 되는 규모를 가진 것은 역시 고구려다운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조기 도성의 오녀산성 발굴에서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3기 문화층이 확인되고, 왕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고성자토성이 고구려의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음이 확인된 것을 보면, 이러한 구조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도성인 졸본(卒本)은 혼강(渾江) 유역의 환인분지 일대로 비정된다. 이곳에는 비옥한 충적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을 뿐 아니라, 선진문물의 주요 창구인 제 2현도군과도 가까웠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성장도 다른 지역보다 앞섰다. 혼강을 따라 조밀하게 분포된 초기 적석묘는 이를 잘 보여준다. 


첫번째 도성 환인지역의 오녀산성

졸본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오녀산성(五女山城), 하고성자고성(下古城子古城), 나합성(喇哈城)등 의견이 분분하다. 최근 오녀산성에서 고구려 건국기의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또한 <광개토왕릉비> 에t서는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곽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고 했다. 양자를 연관시켜보면 산 위의 성곽은 오녀산성, 홀본은 그 동쪽의 환인댐 수몰지구로 비정할 수 있다. 고구려가 초기부터 평상시 거점[졸본]과 비상시 군사방어성[오녀산성]을 세트로 도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두번째 도성 국내성 서쪽 성벽과 서문(1930년대)
 
두 번째 도성은 국내성(國內城)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유리왕대에 국내로 천도하여 위나암성(尉那巖城)을 군사방어성으로 삼았다가 산상왕대에 환도성(丸都城)을 축조했다고 나오는 반면,《삼국지》에는 산상왕대에 ‘새 도성을 건설했다’고 전한다. 이에 우리나라나 중국학자들이 유리왕대에 국내로 천도했다고 보는 반면, 일본학자들은 산상왕대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일본학자들은 산상왕이전의 고구려 왕계를 불신하며, 국내성과 환도성도 같은 성곽에 대한 이칭(異稱)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데 산상왕이 축조한 성곽은 국내 도성 전체가 아니라, 새로운 군사방어성인 환도성만을 가리킨다. 산상왕대 천도성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제반 상황을 종합하면 고구려는 1세기 중 후반에 국내로 천도했다고 파악된다. 당시 고구려는 한의 분리 통제책을 차단하며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내지역이 제 2현도군과 멀리 떨어져 군사 방어상 유해했다는 점이 가장 큰 천도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압록강 중상류 수로망의 중심지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두번째 도성 국내성이 위치한 집안시 위성사진
 
국내 천도 초기 도성의 구체적인 위치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늦어도 3세기 중반에는 현재의 집안 국내성지와 산성자산성(환도산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무렵 도성의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거주구역이 국내성 외곽으로 확장되고, 고분 조영도 급격히 늘어났다. 대규모 인구를 갖춘 도시로 발전한 것인데, 국내성지 외곽의 건물지나 통구분지에 산재한 무수한 적석묘는 이를 잘 보여준다. 
 

두번째 도성 국내성의 평면도
 
고구려는 5세기 초반 만주와 한반도에 광대한 영역을 확보했다. 그런데 국내성은 광활한 판도를 경영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하고 교통도 불편했다. 더욱이 북위가 북중국을 석권하고 동방진출을 노리고 있었는데, 국내성은 이미 두 차례나 함락된 적이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대제국을 원활하게 운영하고 북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한의 중심지인 평양을 도성을 옮겼다(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한 다음, 처음에는 평양시 동북방에 도성을 건설했다. 이때도 평지성과 군사방어성의 도성체계를 구축했다. 다만 군사방어성이 대성산성임은 명확하지만, 평지성은 안학궁설과 청암리토성설로 대립된다. 대체로 북한학자들이 안학궁설, 일본학자들이 청암리토성설을 주장한다. 특히 일본학자들은 안학궁을 고구려 말기의 별궁이나 고려시기의 좌궁으로 파악한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대성산성 복원된 성벽
 
사실 안학궁지가 고구려 시기 유적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더욱이 안학궁지는 건물 배치상 전형적인 왕궁지인데, 과연 고구려가 5세기의 왕성이었던 국내성과 비슷한 규모의 초대형 왕궁을 조영했을 지는 의문이다. 이런 면에서 청암리토성설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청암리토성은 둘레가 5km에 이르지만 구릉지이기 때문에 가용면적이 넓지 않고, 왕궁지로 추정할 만한 유적도 확인된 바 없다. 두 견해 모두 문제점을 안고 있는 만큼 더욱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안학궁성의 평면도
 
6세기 중반 나제연합군의 북상과 북제의 압력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고구려는 552년부터 장안성(현재의 평양성)을 건설해 586년에 도성을 옮겼다. 장안성은 둘레 23km인 초대형 성곽으로 동 남 서 3면은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모란봉을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지이다. 각자성석(刻字城石)을 통해 42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했음을 알 수 있다. 성문터와 장대 등의 성곽시설과 함께 궁궐로 추정되는 건물지, 바둑판처럼 다음은 도로망과 운하 등이 확인되었다. 


평양성 북장대
 
장안성은 복곽식 성곽으로 북성과 내성은 산성, 중성과 외성은 평지성인데,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되었다 하여 평산성(平山城)으로 분류한다. 내성은 궁성(宮城), 중성은 관아와 귀족의 저택, 외성은 귀족이나 일반민의 거주지, 북성은 내성의 별궁이자 방어성으로 추정된다. 장안성은 종래 별개로 구성되었던 평지성 산성의 도성체계를 하나의 성곽으로 일체화시킨 형태이다. 이로써 적군이 침입하더라도 평상시 도성의 시설물이나 물자를 온전히 보전한 채 장기간 항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장안성은 초기 이래 발전시켜온 고구려 도성체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평양성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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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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