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274 (하나도...<88>후고려기(後高麗記)(1))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283 (하나도...<89>후고려기(後高麗記)(2))
* 위 두 글에서 발해고와 유득공 내용만 가져오고 제목은 임의로 달았습니다.

발해고와 유득공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8>후고려기(後高麗記)(1) 에서

내가 역사를 수집하는 것은 단순히 만화스토리로 쓸 소잿거리, 소설주제로 쓸 소잿거리를 찾아다니는 취재작업이고,
나 자신이 그만큼의 소양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판별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나는 엄밀히 말해 역사가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야사가(野史家). 이런저런 잡다한 야사를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이다. 제목을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라고 쓴 것은 내가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임을 말한 것이고, 야사가라고 한 것은 내가 한 말이 과연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나 자신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책은 그래도 좀 읽는다. 아예 맹탕으로 내 대갈 속에 아무 것도 없으면 이런 글을 쓸 시도도 않았겠지.
 
발해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생각해둔 것이었다. 고려편을 그냥 끝내기 찝찝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퍼온 사진들을 감당하려니 이젠 컴퓨터 용량이 꽉 차서 안 되겠기에 그걸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서 내걸고 인터넷에다 다시 풀려는 거지 뭐. 책임감없이. 그러니 글 쓰다가 내용보다 사진이 더 많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부처님의 자비가 글을 읽는 분들에게 모두 고루 돌아가기를 바라며. 나무아미타불.
 

<발해의 역사를 저술한 유득공의 발해고>
 
일단 내가 저본으로 삼는 것은 《발해고》.
조선조의 실학자이자 국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혜풍 유득공의 저술이자 우리 역사에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논문집이다. 조선 정조 18년(1784)에 처음 이 책이 지어진 이래로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1910년에 육당 최남선의 조선고서간행회(조선광문회)에서 발간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간행되었다. 같은 제목으로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1811)에도《발해고》와 《발해속고(渤海續考)》라는 이름의 지리고증논서가 있는데 기회가 되면 이것도 읽어봐야 되겠다.
 
《발해고》의 서문에서 유득공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고씨가 북쪽에 거주했으니 곧 고구려이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백제이고, 박 · 석 · 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신라인데,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으니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이것이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유득공은 우리 나라에서 발해라는 나라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한 사람이면서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다. 옛날 고려와 백제, 신라와 가야가 대치하던 사국시대, 그리고 고려와 백제, 신라가 이 갈고 으르렁대며 싸우던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발해와 신라가 각기 우리나라와 만주를 놓고 남북에서 서로 대치하던 시대를 가리켜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단재 선생은 남북국 대신 동북국이라는 단어를 쓰셨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차지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크게 넓혔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王氏)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차지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女眞)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契丹)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마땅히 빨리 발해사를 지어 이를 갖고 가서 여진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느냐. 발해 영토는 곧 고구려 영토이다’라고 말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어 거두어들였으면 토문강 이북 지역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가지고 거란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는가. 발해 영토는 곧 고구려 영토다’라고 말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거두어들였으면 압록강 서쪽을 다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유득공의 말에 대해서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변명해 말하자면, 사실 고려 조정이 발해의 역사를 편찬했는지 안 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우리 나라에 지금 남아있는 사료는 《삼국사》나 《삼국유사》이전으로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다만 고려에서도 실록을 편찬했던 일만은 확실하다. 삼국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는 《삼국사》 이전에 이미 《구삼국사》가 있었고, 그 책을 편찬한 원사료는 모두 신라에 남아있던 옛 문헌들이었을 터다.
 
그리고 유득공이 고려에게 왜 발해사를 쓰지 않았냐고 비판하면서 발해사만 제대로 편찬해놨더라도 우리가 저 땅을 장군 한 사람만 보내서 다 찾았을 거라고 말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너무도 이상주의적인 판별이다. 중국도 발해사는 편찬하지 않았으니까. 《발해국기》니 동이, 북적열전이니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정식기록에 딸려놓은 부연설명이거나, 개인적인 지리서에 기행문일 뿐이잖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발해는 요(遼)에게 멸망당했으니 고려가 어떻게 그 역사를 편찬할 수 있었겠냐고. 아니다. 발해는 중국 제도를 본받았으니 분명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격파당했을 때 세자 이하 10만여 명이 고려로 도망쳐 왔다. 사관이 없었다면 역사서라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사관도 없고 역사서도 없다 해도 세자에게 물어 봤으면 역대 발해 왕의 사적을 알 수 있고, 은계종(隱繼宗)에게 물어 보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고, 10만여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張建章)은 당(唐) 사람이었으면서도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만 왜 혼자 발해사를 편찬 못했단 말이냐? 아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년. 역사서를 지으려고 해도 자료를 얻을 수가 없다.
 
하지만 유득공의 지적은 사실이다. 고려 당대에 발해의 역사를 알자면 어떤 루트로든 알 방법은 많았다.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고려로 망명해 왔을 때에, 그를 따라온 무리가 10만 명. 그들에게 다 물어보면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곡(巫曲)이 많았다는 발해악(勃海樂)만 하더라도 9세기 중엽 고려의 우방악(右方樂)에 개편되었다고 하니까. 《니혼쇼키》에 인용된 수많은 백제 관련 사적들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한 백제인들이 갖고 있던 백제계 사료 아니었던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지어지던 고려 말까지도 전해졌다는 옛 발해인들이 갖고 있었음직한 고대의 문헌,
《단군기》나 《단군본기》, 《단군고기》, 《신지비사》같은 것이며, 조선조 세조 때에 민간에서 다 거둬오라고 시킨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삼성기(三聖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단기고사(檀奇古史)》(←이건 아닌가?;;)
 
발해와 관련된 정보ㅡ특히 발해인들이 갖고 있던 고려에 대한 옛 자료를 (왕건)고려가 다 이어받았을 텐데도 왜 그걸 정리할 생각은 하지 못했는가 하고. 옆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가볍게 보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질병.그래도 그 '단순한' 것과 '사소한' 것, '가까운' 것의 중요함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기에 이런 단편적인 글로서나마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사소하고 단순한 것의 중요함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듯. 우리 역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없앴다고 탄식하신 단재 선생의 말씀이 어찌 이리도 가슴에 와닿는지.
 
내가 내각(內閣)의 관리로 있으면서 궁중의 도서를 많이 읽고, 발해의 역사를 편집하여 임금, 신하, 지리, 직관, 의장, 물산, 국어, 국서, 속국 등 아홉 가지 고(考)를 만들었다. 이를 '세가(世家)'나 '전(傳)', '지(志)'라고 하지 않고 고찰한다는 뜻의 '고(考)'라 한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갑진년(1784) 윤3월 25일.
 
실학자답다. 발해의 역사를 저술하면서도 자신의 역사연구가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는 점을 드러낸 점에서, 철저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역사학을 주창한 국학자의 면모가 《발해고》에서 드러난다. 단재 선생도 유득공에 대해 '대씨 3백 년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한' 학자라는 평가를 내렸으니, 이 책이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단재 선생의 평가 하나만으로도 족하고, 이제는 내가 머릿속에 든 잡생각을 풀어서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되겠다.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9>후고려기(後高麗記)(2)에서


《발해고》의 판본은 현재 우리나라에 두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한권짜리와 네권짜리로 말할 것도 없이 네권짜리가 나중에 재편집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발해고》의 판본은 조선고서광문회 이래로 모두 한 권짜리 《발해고》를 갖고 번역된 것인데, 이건 《발해고》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책으로 엮여있어서 그런 듯 하다. 네 권짜리 《발해고》는 《영재서종(泠齋書種)》이라는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둘다 필사본이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유득공의 저술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다.(유득공의 다른 호로 영재가 있었음)
 
 유득공은 《발해고》를 일단 완성한 다음, 나중에 자료를 더 모아 수정을 가했다. 남아있는 두 판본을 보면 네권짜리 《발해고》의 본문 전체분량이 한권짜리보다 35% 정도 늘어나 있는데, 특히 발해의 지리에 대해 고증한 지리고의 내용이 세부목차 설정까지 될 정도로 대폭 늘어나 있다. 목차구성도, 한권짜리는 왕계도와 박제가ㆍ유득공의 서문 및 간단한 목록과 인용한 책의 목록이 실려있는데 네권짜리는 다 빠지고 발해 5경에 대한 도표에 목록이 좀더 상세해졌다. 실린 내용이 달라졌고 의장고는 품복(品服)이 신설된 직관고에 편입되었으며 물산고ㆍ국어고는 빠졌고, 국서에 관한 국서고(國書考)는 네권짜리 《발해고》에는 예문고(藝文考)로 바뀌었고, 발해 후신들에 대한 속국고(屬國考)는 부정안국고(附定安國考)로 바뀌었는데 유득공 자신의 견해가 곁들여져 있다. 한 권짜리를 네 권짜리로 늘려 적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발해사에 대한 본인의 늘어난 자신감이 가미되지 않았을까. 아직 번역본은커녕 원본사진도 못 봤지만 나중에 공개가 된다면 꼭 먼저 읽어보고 싶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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