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090102.22018193124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39> 북한과 중국이 발굴한 발해유적
北·中 공동발굴 결과 만주 고조선·발해가 韓역사로 밝혀지자 '쉬쉬'
中, 63년 이후 30년 넘게 침묵 1997년 마지못해 내용 공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2009-01-01 19:32:11/ 본지 18면

북한과 중국이 공동발굴한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 고분군.

1963년 8월 늦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때에 17명의 북한 고고학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6·25동란이 끝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당시였겠지만, 그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쓰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한의 학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중국 학자들과 공동으로 한 팀은 고조선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요령성, 내몽고 동남부 지역의 비파형동검 관련유적을 조사했고, 또 다른 한 팀은 길림성과 흑룡강의 발해유적을 살폈다. 그들의 조사는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3년 간의 조사는 1966년에 북한에서 보고서로 출판되었지만 누가 발굴하고 집필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중국 측은 이 발굴에 대해서 30년 넘게 침묵하다가 1997년에서야 그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중국 보고서에는 북한과 같이 발굴했다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잊고 싶은 발굴이었고, 북한 측에게도 숨겨놓고 싶은 보고서인 셈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발굴로 만주지역의 고조선과 발해는 한국의 역사이며, 한민족의 고대사는 현재의 국경이 아닌 만주지역을 포괄한다는 주장을 굳히게 되었다. 반대로, 중국으로서는 문화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데다 자칫하면 공동발굴이 갓 점유한 만주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번질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조·중 공동발굴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보고서가 남한과 일본에서 계속 인용되자 마지 못해 공동발굴이라는 이야기는 뺀 채 그 내용을 공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인심 좋은(?) 중국의 결정에는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周恩來)의 역할이 컸다. 그는 만주지역이 고대 이래로 한국의 역사였으며,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은 뜻 깊다고 적극적으로 공동발굴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때 중국은 지금같이 역사의 왜곡에 집착하지 않았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고, 만주가 현재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을 고마워했지, 결코 그 역사를 뺏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학자들은 길림 돈화의 육정산 고분, 발해의 수도였던 흑룡강 영안 동경성 유적을 발굴했다. 육정산 고분군은 발해 정효 공주묘가 발굴된 대표적인 고분유적이요, 동경성은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발굴한 이래 발해의 대표적인 궁성지였으니 가장 중요한 유적들을 조사한 셈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성과는 매우 알찼다. 특히 동경성에서 발굴한 얼굴이 그려진 벼루는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자료로 평가된다. 

필자가 이 보고서를 접한 것은 1994년으로, 당시 비파형동검자료를 모으던 중에 어렵사리 흐릿한 복사본을 구해서 읽으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2006년, 2007년에 육정산 고분과 동경성을 갔을 때 따사로운 아침햇살에 펼쳐진 유적을 보노라니 대학원 시절 놀라움에 넘겼던 책장 하나 하나가 떠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필자의 답사는 중국의 감시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육정산과 성자산(대조영이 건국한 동모산으로 추정됨) 유적은 감시를 피해 새벽에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발해 동경성을 답사할 때는 중국 관계자들에게 몇 시간 억류되기까지도 했다.

2006년 여름의 일로 필자가 동경성을 갔을 때에 중국은 단독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정비 중이어서 제한된 지역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답사팀 중 한 명은 출입금지 팻말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발굴장면을 무심코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었고, 우리 답사팀은 몇 시간 버스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사진기의 사진을 지우고 벌금을 무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는데, 며칠 뒤에 다른 한국 학자팀이 방문하자 먼저 왔던 사람들이 억류되었네 하면서 아예 출입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떻게 돌았는지 한 달 뒤에 러시아를 가니 공동발굴하는 러시아 친구가 "강인욱, 자네 중국에서 감옥에 들어갔다는데 어떻게 도망친거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데 천리 가는 발 없는 말 치고 제대로 가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에는 1963~1965년도 같은 국가 간의 사이좋은 공동연구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가 도래하길 바랄 뿐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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