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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5회분 4호묘 벽화에 보이는 약 단지를 들고 가는 신선의 모습.
[삼국사기]에는 624년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도교를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려에서는 이보다 앞서 신선사상이 퍼져 있었고 연단술이 발달했으며 신선이 되고자 하는 수련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의학, 약학, 화학, 연금술을 익히고 방술(方術)을 갈고 닦아 선인(仙人)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림 :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이광현(李光玄, ?~?)은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발해의 상인이자 도교 수련자다. 바다와 대륙을 넘나들어 ‘해객(海客)’이라 불렸던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발해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무역에 종사하다
이광현은 9세기 말 거만금(巨萬金)의 재산을 가진 발해 상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 대한 정보는 그가 쓴 [금액환단백문결(金液還丹百問訣)]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정확한 출생과 사망 시점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와 하인들과 함께 살았다. 20세가 되었을 때 고향 사람들을 따라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대륙 동해안의 산둥반도, 장쑤성, 저장성 지역을 왕래하며 이곳저곳에서 무역을 하였다.
당시 발해인들 가운데는 당나라, 신라, 일본 등을 무대로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하는 이연효(李延孝), 이영각(李英覺) 등의 상인들이 있었다. 특히 이연효는 853년부터 877년까지 8회에 걸쳐 당나라의 월주, 대주(저장성 지역)와 일본 사이를 왕래하며 무역활동을 벌였던 대표적인 발해의 무역상이다. 그는 862년에는 43명, 865년에는 63명의 일행을 인솔하여, 일본의 대외교섭창구인 다자이후(규슈 북부)에 도착하는 등 발해 정부와는 별개로 선단을 이루고 독자적인 무역활동에 종사한 국제상인이었다. 이광현도 이들처럼 바다를 건너 당, 신라, 일본 등을 무대로 국제 무역에 종사했다. 그런데 그는 무역을 통해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구도의 길을 찾아 나서다
이광현이 24세 되던 해에 장사를 마치고 당나라에서 고국인 발해로 돌아오기 위해 탄 배 안에서 백세가 넘은 도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광현은 도인과 함께 신라, 발해,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도인이 이광현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미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어찌하여 먼 바다의 풍파를 무릅쓰고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오?”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재산이 많아도 나의 몸과는 상관이 없고 내 목숨을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인(眞人- 도를 깨우친 사람)과 달사(達士- 이치를 깨우쳐 사물에 얽매여 지내지 않는 사람)를 찾고, 그들로부터 장생술(長生術- 늙고 오래 살아 신선이 되는 방법)을 얻기를 원했으나, 여러 나라를 가 보아도 비범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광현은 도교에 심취하고 있어 구도(救道)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도인은 그가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에게 수명을 연장하고 보존하는 비법을 전해주었다.
감각기관을 닫고 단전(丹田)에 집중하는 내관법, 옛것을 뱉어내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호흡법, 침을 모아 삼켜 수명을 늘리는 간수법(干漱法)을 도인에게서 배운 이광현은 집에 돌아와 열심히 수련을 했다.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나 다시 창해(蒼海-황해)를 떠돌다가 운도(雲島)라는 섬에 들어가 10년을 살며 수련을 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다르게 변했다. 이 때문에 그와 함께 무역을 했던 사람들이 그를 해객(海客)이라고 불렀다. 그는 도가의 상청파(上淸派)에서 수련하는 내관법(內觀法)에 의한 인체수련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광현은 이것이 오래 살기는 하지만 신선이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신선이 되고자 연단법을 배우다
고구려 5회분 4호묘 벽화에 보이는 약 단지를 들고 가는 신선의 모습.
[삼국사기]에는 624년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도교를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려에서는 이보다 앞서 신선사상이 퍼져 있었고 연단술이 발달했으며 신선이 되고자 하는 수련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의학, 약학, 화학, 연금술을 익히고 방술(方術)을 갈고 닦아 선인(仙人)이 되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수련에 한계를 느낀 이광현은 운도를 떠나 중화(中華- 중국 내지)로 가서 여러 이름난 산들을 돌아다니며, 간절한 마음으로 달사를 만나고자 했다. 그는 도를 찾아 20여 년간 바다를 건너 두루 돌아다녔다. 기유년(己酉年- 889년으로 추정)에 숭고산 소동암의 절에 10여 일간 머물다가 현수(玄壽) 도인을 만나게 된다. 신선에 관한 이론과 역사를 집대성한 갈홍(葛洪, 283~343)의 [포박자(抱朴子)]에는 신선은 득도(得道)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약(仙藥)을 복용해야 하는데, 선약인 신단(神丹) 금액(金液)의 제조법을 얻는 과정이 곧 깨우침을 위한 수업이라고 하였다. 이광현은 현수 도인에게 금액을 제조하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자 현수 도인이 물었다.
“그대가 금액의 도를 구하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것인가? 자신만을 위하려는 것인가?”
“금액을 도를 찾아다니는 것은 첫째는 내 몸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세상의 인연 있는 사람을 구제하여 함께 연마하려는 것이니, 단지 저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광현이 이렇게 대답하자, 현수도인은 그에게 금액을 만드는 방법(金液之道)을 전해주었다.
이광현의 저서와 연단술(鍊丹術)
1445년 명나라에서 도교의 경전을 모아 편찬한 [도장(道藏)]에는 이광현과 관련된 4권의 책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금액환단백문결(金液還丹百問訣)]은 이광현의 대표작에 해당되며, [해객론(海客論)]과 [금액환단내편(金液還丹內篇)]은 이를 요약한 책이다. [태상일월혼원경(太上日月混元經)]은 이광현이 2세기경에 살았던 동한(東漢)의 위백양(魏伯陽, ?~?)의 저서인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 단약(丹藥)을 만드는 재료와 수량, 만드는 방법, 그리고 단약을 먹은 후 몸의 변화 등에 대한 연단술(鍊丹術- 불로장생의 약으로 믿었던 단(丹)을 만드는 기술)의 핵심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그는 [금액환단백문결]에서 신선이 되는데 필요한 선약인 금액과 관련한 내용을 현수 도인과의 문답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도가에는 다양한 연단술이 있다. 황금과 단사를 중심으로 단약을 만들고자 하는 금단파, 납과 수은으로 만드는 연홍파, 유황과 수은으로 만드는 유황파 등 저마다 다른 재료와 방법을 이용한 연단술을 제시하고 있다. 위백양은 납과 수은을 사용하는 연홍파의 입장이다. 이광현도 역시 납과 수은을 통해 단약을 만들려고 시도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금액환단백문결]에서 위백양의 설을 지지하고, 다른 연단술과 연단 재료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언급한 단약의 재료는 72종 100여 가지에 달한다. 그는 영혼불멸을 위한 단약은 약초와 같은 변하는 성질의 재료로는 만들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 납과 수은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광현의 구도가 후대에 남긴 것
[금액환단백문결]은 이광현이 현수 도인과 헤어진 후, 그와의 대화를 기록하여 세상에 단약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이 책을 보고 생각하고 연구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따라서 현수 도인과 이별한 이광현의 나머지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다만 현수 도인이 단약을 만들기 좋은 곳으로 추천한 천태산(天台山)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장생불사의 핵심인 단약을 제련하며 자신의 깨달은 바를 기록하며 살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가 원했던 것처럼 그의 책은 여러 도교 수련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금액환단백문결]을 요약한 책인 [해객론]이 송(宋: 960〜1279)나라 시대에 출간된 것은, 그의 저술이 대중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송나라 도사 증조(曾慥)가 소흥(紹興: 남송 고종의 연호, 1131〜1162) 연간에 역대 도교 수련방법을 모아 편찬한 [도추(道樞)]라는 책에 [금액환단내편]이 수록되는 등 그의 저서는 도교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발해인 이광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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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팔선(八仙)을 그려넣은 사발. 제작연도 미상,
아드리앙 뒤부쉐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
구름 위에 있는 도교 신선들 문양이 있는 사발. 1660~1680년경, 아드리앙 뒤부쉐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
이광현은 1990년대 이후 중국 학계에서 도교 경전을 조사하면서 그 실체가 알려진 인물로, 한국의 발해사 연구자인 임상선 박사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어졌다. 최근에는 그의 저서가 번역ㆍ출간되기도 했다. 이광현은 발해 인물 가운데 최초로 자신의 기록을 남긴 인물이며, 우리나라 도교사에서도 가장 오래된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물론 그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연단술을 익힌 사람은 아니다. 양(梁)나라 사람 도홍경(陶弘景, 456~536)은 금(金)가루는 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잘 연단하지 않은 것을 복용하면 죽게 되지만, 고구려에서 연단한 금은 복용해도 좋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고구려는 연단술이 발전하고, 신선이 되고자 하는 수련자들이 많았다. 늙지 않고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선은 당시 사람들이 선망하던 장생불사가 가능한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선약(仙藥)을 든 신선의 모습은 오래 살고자 하는 고구려인의 소망을 담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때 살았던 스님인 노힐부득(努肸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이 금액(金液)의 물에 목욕을 하여 미륵불로 변신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황남대총, 천마총 등에서도 주사(朱砂)와 운모(雲母)와 같은 단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가 대거 발견되는 등, 삼국시대에는 신선사상이 크게 퍼져 있었다. 발해에서도 마찬가지로 도교를 신봉했었다. 따라서 이광현이 어린 시절부터 장생불사와 신선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광현은 발해 도교사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9세기 발해 상인들의 활발한 해외 무역 활동을 알려주는 인물로, 앞으로 더 연구되고 주목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임상선, <발해인 이광현과 그의 도교서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20집, 2000; 임상선, <8〜10세기 동아시아 역사 속의 발해인>, [삼국시대연구] 2집, 2002; 임상선, <[금액환단백문결]의 저자 이광현과 그의 행적>, [경성대학교 인문학논총] 13-2집, 2008; 이봉호, <발해인 이광현의 연단 이론>, [도교문화연구] 32집, 2010; 이광현 저, 이봉호 외 역주, [발해인 이광현 도교저술 역주], 한국학술정보, 2011.
글 :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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