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몽 - 광인

발해/인물 2013. 7. 15. 13:09
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8809421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881041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2>후고려기(後高麗記)(15),(17) -  광인"에서 사도몽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사도몽

[壬寅, 召渤海使史都蒙等卅人. 入朝時, 都蒙言曰 "都蒙等一百六十餘人, 遠賀皇祚, 航海來朝, 忽被風漂, 致死一百廿. 幸得存活, 纔■六人. 旣是險浪之下, 万死一生, 自非聖朝至德, 何以獨得存生? 况復殊蒙進入, 將拜天闕. 天下幸民, 何處亦有. 然死餘都蒙等■餘人, 心同骨完. 期共苦樂. 今承, 十六人別被處置, 分留海岸, 譬猶割一身而分背. 失四體而匍匐? 仰望. 宸輝曲照, 聽同入朝." 許之.]
임인(20일)에 발해의 사신 사도몽 등 30인을 불렀다. 입조할 때에 도몽이 말하였다. “도몽 등 160여 인은 멀리서 천황(미카도)의 즉위[皇祚]를 축하하러 항해하여 내조하였으나 갑작스레 풍랑을 만나 120명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행히도 목숨을 건진 것은 겨우 서른여섯 명이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험한 파도 아래서,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에서 성조(聖朝)의 지덕(至德)이 아니었던들 어찌 홀로 목숨을 부지하였겠습니까. 하물며 또한번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서 장차 천궐(天闕)에 배하려 하였습니다. 천하에 요행만 바라는 백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남은 도몽 등 서른 명의 마음은 한 뼈처럼 완전하여 고락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제와서 열여섯 명을 다른 곳에 안치시켜 따로 해안에 머무르게 하시니 한 몸을 갈라 나누려는 것과 같습니다. 팔다리가 없이 기어갈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옵니다. 은혜로운 빛을 구석까지 비춰주소서. 함께 입조하기를 청합니다.” 이를 허락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2월
 
온갖 풍파를 겪고 백 명이 가까운 인원을 잃어가며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 서른여섯 명의 결속력은 형제 이상의 그것처럼 끈끈하고 굳건하게 다져져 있었다. 죽음은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는데 저 살아남은 서른여섯 명이 모두 귀척이었을 리도 없고, 풍파가 종족을 가려서 죽이지 않는 이상 고려인과 말갈인이 온통 뒤섞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여담으로 사도몽은 고려인도 말갈인도 아닌 중국계의 귀화인은 아니었을지. 사史씨라는 성에서 불현듯 사사명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왕명'이었다. 가독부(천자)가 자신들을 이 일본 땅으로 보내 사신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올 것을 명령했고, 신하로서 군주의 명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유가에서도 말한 당연한 충의 도리이며, 사신단의 수장인 자신이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사신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죽은 사람들을 향한 예의라고 사도몽은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명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남으라는 일본 조정의 처우 앞에서, 풍파를 헤치고 살아남은 이상 모두 다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일본 조정을 향해서 소리친다. 그때의 사도몽과 함께 살아남은 다른 발해 사신단에게 서로가 고려인인가 말갈인인가, 관위가 높은가 낮은가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발해'라는 거대한 나라와 그 나라를 다스리는 '가독부(천자)' 아래 '발해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그들은 이어져 있었다.

[庚寅, 渤海使史都蒙等入京. 辛卯, 太政官遣使慰問史都蒙等.]
경인(9일)에 발해 사신 사도몽 등이 입경하였다. 신묘(10일)에 태정관(타이죠칸)이 사신을 보내어 사도몽 등이 온 이유를 물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4월
 
사도몽의 소원대로 살아남은 서른여섯 명 모두가 수도로 입성했고, 발해 사신으로서 그들은 이 이국 땅에서 맡은바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절차 수속을 밟았다.

[癸夘, 渤海使史都蒙等貢方物. 奏曰 "渤海國王, 始自遠世供奉不絶. 又國使壹萬福歸來, 承聞聖皇新臨天下, 不勝歡慶, 登時遣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史都蒙入朝, 并戴荷國信, 拜奉天闕."]
계묘(22일)에 발해사 사도몽 등이 방물을 바치고 아뢰어 말하였다. “발해국왕께서는 원세(遠世)부터 공봉(供奉)하기 시작한 이래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국사 일만복이 돌아와서 성황(聖皇)께서 새로이 천하에 임하셨다고 한 말을 전해듣고 기쁘고도 경사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시고, 곧바로 헌가대부ㆍ사빈소경ㆍ개국남 사도몽을 보내어 입조하고 아울러 하찮은 국신(國信)을 싣고 천궐(天闕)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4월
 
사도몽은 일단 명문화된 국서는 갖고 있지 않았다. 한 무제의 사신으로 흉노에 갔다가 억류당해 시베리아 바이칼 호까지 유배당했던 소무도 자신이 사신으로 올때 갖고 있었던 부절을 구출되는 순간까지 놓지 않고 있었다고 했지만, 일단 《속일본기》에 기록된 사도몽의 알현장면에서 그는 국서를 바치지 않고 발해국왕의 말을 '구두'로만 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숨을 위협하는 파도 앞에서도 그가 차마 버릴수 없었던, 가독부로부터 수여된 임무, 그것은 문왕의 황후가 사망한 것을 고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고닌(홍인) 왜황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도 말이다. (사실 사도몽이 왔을 때는 이미 즉위한지 7년이나 지난 뒤였지만)

[戊申, 天皇臨軒, 授渤海大使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史都蒙正三位, 大判官高祿思, 少判官高鬱琳並正五位上, 大錄事史遒仙正五位下, 少錄事高珪宣從五位下, 餘皆有差. 賜國王祿, 具載勅書. 史都蒙已下亦各有差.]
무신(27일)에 천황(미카도)이 대(臺)에 나와 앉았다[臨軒]. 발해대사(渤海大使) 헌가대부ㆍ사빈소령ㆍ개국남 사도몽에게 정3위, 대판관(大判官) 고록사(高祿思), 소판관(少判官) 고울림(高鬱琳)에게는 나란히 정5위상를 내리고 대록사(大錄事) 사주선(史遒仙)에게는 정5위하, 소록사(少錄事) 고규선(高珪宣)에게는 종5위하를 내리고 나머지는 모두 차등이 있었다. 국왕에게 녹을 내리고 칙서를 갖추어 내렸다[具載]. 사도몽 이하 역시 각기 차등이 있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4월
 
사도몽의 작위는 개국남, 봉호는 헌가대부였고, 실직(實職)은 사빈시의 소령(少令)이었다. 사빈시는 원래 홍려시(鴻臚寺)라 해서 사신 접대와 같은 외교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당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사빈시'라는 이름은 당조 개국 초년에 '홍려시'라고 부르던 것을 측천무후가 여러 관직들의 이름에 대해 개정하면서 바꾼 것으로, 측천무후 실각 이후 원래의 이름대로 '홍려시'로 되돌렸으나 그걸 채택한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그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발해도 그러했다.
 
《발해고》나 《발해국지장편》에는 발해의 사빈시에는 장관격인 경(卿)이 있었고(사빈경) 이것은 당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경 바로 아래에 소감(少監)이 두 명 있었으며(사빈소감) 경과 소감의 관직은 각자 종3품과 종4품상. 소령(少令)이란 관직은 일단 《쇼쿠니혼키》에서만 확인되는 관직이다. 《신당서》에는 홍려시(사빈시)에 경ㅡ소경ㅡ승ㅡ주부ㅡ녹사의 관직이 있었고 사빈시로 이름을 고친 광택 원년(684)에는 사(史)가 열 명에 정장(亭長)이 네 명, 장고(掌固) 여섯 명이 있었던 것이 보인다.
 
사도몽이 정3위, 대판관 고녹사와 소판관 고울림이 정5위상, 대녹사 사주선이 정5위하, 소녹사 고규선이 종5위하. 일본으로부터 수여받은 관위만 놓고 보면 사도몽은 왕신복과 같은 등급으로 대우받았다.(작위도 왕신복과 사도몽이 똑같이 '개국남'이다)

[丁巳, 天皇御重閣門, 觀射騎. 召渤海使史都蒙等, 亦會射場. 令五位已上進裝馬及走馬. 作田舞於舞臺, 蕃客亦奏本國之樂. 事畢賜大使都蒙已下綵帛各有差.]
정사(7일)에 천황(미카도)이 중각문에 행차하여 사기(射騎)를 보았다. 발해의 사신 사도몽 등도 불러 활터에 모였다. 영하여 5위 이상은 나아가 장마(裝馬)와 주마(走馬)를 하도록 하였다. 전무(田舞)를 무대(舞臺)에서 연주하고, 번객들 역시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일이 끝난 뒤 대사 도몽 이하에게 채백을 차등 있게 내렸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5월
 
사도몽 이 사람은 관상에 능한 사람이었다 했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니혼잔다이지로쿠)》에 보면 교토에 머무르면서 만난 스무 살의 관인 귤청우(橘淸友, 다치바나노 기요토모)의 관상을 봐줬는데, "자손은 번영하겠지만, 정작 본인이 서른두 살에 액이 끼어 있구려. 그것만 넘기면 편안할 것을."이라 말했던 점괘는 딱 들어맞았다. 실제로 청우(기요토모)의 딸 가지자(嘉智子, 카치코)가 52대 차아(嵯峨, 사가) 왜황의 황후가 되었고, 청우(기요토모) 본인은
내사인(內舍人)이 된지 3년만인 연력(엔랴쿠) 8년(789)에 서른두 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그의 딸 카치코가 낳은 외손자는 제54대 왜황 닌메이仁明로 즉위)
 
평안(헤이안) 시대의 궁녀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초반 도입부에는,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운명을 점쳐주는 '고려인' 관상쟁이가 등장한다. 황족으로서 외국 사람을 직접 만나서는 안 된다는 선황 우다(宇多)의 유명 때문에 궁 안으로 부를 수가 없었던 사정상 몰래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처소로 찾아가 관상을 봐달라고 했더니, 한다는 말이 "나라의 어버이가 되시어 제왕이 될 상이 있기는 하오나, 그리되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을 고생시키게 될 지도 모릅니다. 허나 조정의 동량으로서 제왕을 보좌할 상도 아닌 듯 싶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주상은 그를 황족에서 신하의 지위로 내려서(신적강하臣籍降下) '히카루 겐지'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ㅡ고 말이다.
 
훗날 일본을 막론하고 전 세계의 '플레이보이'라 불리게 되며 숱한 여자들과의 염문을 뿌리고 다닌 그의 운명을 점쳐준 사람이 '고려인', 즉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지만, 무라사키 시키부가 태어난 것이 대략 978년경이고 죽은 것이 1016년경, 《겐지모노가타리》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은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의 일로 우리나라에 고려라는 이름과 어떻게어떻게 연결된 나라는 발해밖에 없던 시대다.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모델에 대해 일본 내에서도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왜황 차아(사가)에게서 분파된 차아원씨(嵯峨源氏, 사가겐지)이자 하원좌대신(河原左大臣, 카와바라노사다이진)이라 불렸던 실존인물 원륭(源融, 미나모토노 토오루. 822~895)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도몽과는 백년 정도 후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발해라는 나라가 멸망하기 전의 사람이고 보면
본의아니게 사도몽의 관상담이 《겐지모노가타리》에 끼어들어가서 '고려인 관상쟁이'의 모델이 되어준 셈이다.
 
여담이지만 교고쿠 나츠히코(京極夏彦)의 《항설백물어》에도 그녀와 관련해 '가타비라가쓰지(帷子辻)'라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가지자(카치코)의 칭호이기도 한 '단림황후(檀林皇后, 단린 오오키사키)'와도 관련이 있다. 살아 생전에 일족 귤씨(다치바나우지) 집안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학관원(學館院, 가칸인)을 짓고, 일본 최초의 선원(禪院)인 단림사(檀林寺, 단린지)를 남편이자 왜황인 차아(사가)의 별궁이 있던 차아야(嵯峨野, 사가노)에 지을 정도로 불심이 두터웠던 그녀는 뭐랄까...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수행중인 승려들조차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고, 그것을 황후 자신은 몹시 슬퍼했다고.(어찌보면 공주병 같긴 하지만) 가양(嘉祥, 가쇼) 3년(850) 5월 4일(양력 6월 17일), 죽기 직전 황후는 자신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수도 평안경(헤이안쿄)의 서쪽 변두리에 내다버릴 것이며, 그 시신의 살이 썩어 구더기가 끓고 결국 뼈만 남게 되는 과정을 빠짐없이 그려 보이라는 엽기적인 유언을 남겼다. 개나 까마귀가 자신의 시신으로 굶주림을 채우게 해주고, 또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다 소멸하게 되어 있으며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현해보임으로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거리는 '가타비라노츠지'라는 지명으로 교토 북서부에 남아있으며, 그녀의 시신이 썩어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은 《단림황후구상도회(檀林皇后九相圖會)》라는 제목으로 전해진다. 사도몽과는 그닥 관련이 없지만 그녀가 한 나라의 황후가 되고 그 아버지 청우(기요토모)의 운명까지도 함께 점쳐주었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잠시 소개해봤다. (자세한 이야기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을 한번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庚申, 先是渤海判官高淑源及少錄事一人, 比着我岸, 船漂溺死. 至是贈淑源正五位上, 少錄事從五位下, 並賻物如令.]
경신(10일)에 처음 발해의 판관 고숙원(高淑源) 및 소록사 한 사람이 우리 해안에 왔을 때에 배가 가라앉아 익사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숙원에게 정5위상을, 소록사에게는 종5위하를 내리고, 아울러 물품을 내려 부조하되 율령과 같게 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5월
 
처음 사도몽을 따라 발해에서 건너오다가 결국 동해 바다 위에서 불귀(不歸)의 객이 된 판관 고숙원과 소록사에게도 일본 조정으로부터 관직이 추증되었는데, 기록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사도몽의 요청에 의한 것도 있었다고 보인다.(아니면 말고)
 
[癸酉, 渤海使史都蒙等歸蕃. 以大學少允正六位上高麗朝臣殿繼爲送使. 賜渤海王書曰 "天皇敬問渤海國王. 使史都蒙等。遠渡滄溟。來賀踐祚。顧慙寡徳叨嗣洪基, 若渉大川. 罔知攸濟, 王修朝聘於典故, 慶寳暦於惟新. 懃懇之誠, 實有嘉尚. 但都蒙等比及此岸, 忽遇悪風, 有損人物, 無船駕去. 想彼聞此, 復以傷懷. 言念越郷, 倍加軫悼. 故造舟差使, 送至本郷. 并附絹五十疋, ■五十疋, 絲二百■, 綿三百屯. 又縁都蒙請, 加附黄金小一百兩, 水銀大一百兩, 金漆一缶, 漆一缶, 海石榴油一缶, 水精念珠四貫, 檳榔扇十枝, 至宜領之. 夏景炎熱, 想平安和." 又弔彼國王后喪曰 "禍故無常, 賢室殞逝. 聞以惻怛. 不淑如何. 雖松■未茂, 而居諸稍改, 吉凶有制, 存之而已. 今因還使, 贈絹二十疋, ■二十疋, 綿二百屯, 宜領之."]
계유(23일)에 발해사 사도몽 등이 귀국하였다[歸蕃]. 대학소윤(大學少允) 정6위상 고려조신(高麗朝臣, 고마노아손) 전계(殿繼, 도노츠구)를 송사(送使)로 삼았다. 발해왕에게 글을 내려 말하였다. “천황(미카도)는 삼가 발해국왕에게 묻소이다. 사신 사도몽 등이 멀리서 창명(滄溟)를 건너 와서 즉위[踐祚]를 축하해 주셨소. 돌아보면 덕이 없는[寡徳] 부끄러운 몸으로 대통을 이어받아, 마치 밭은 지식으로 큰 강을 건너는 것만 같았소. 왕은 전례에 따라 조빙을 닦아 스스로를 일신하고 보력(寳暦)을 하례하였소. 그 은근한 정성은 실로 가상할 따름이오. 다만 도몽 등이 이곳 해안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악풍을 만나 사람과 물건을 잃고 돌아갈 배와 수레도 없었소. 이것을 듣고 생각하니 또 한번 애통하였소. 언념(言念)이 국경을 초월하여 슬퍼함이 더 늘어나는구려. 때문에 배를 만들어 사신을 태워 본향(本鄕)까지 보내오. 아울러 견(絹) 쉰 정, ■ 쉰 정, 실 2백 ■, 綿 3백 둔을 부쳐 보내오. 또한 녹(縁)은 도몽의 청에 따라 더하여 황금 소(小) 백 냥, 수은(水銀) 대(大) 백 냥, 금칠(金漆) 한 관(缶), 칠(漆) 한 관, 동백기름[海石榴油] 한 관, 수정염주(水精念珠) 네 관, 빈랑나무 부채[檳榔扇] 열 매를 부쳐 보내니 마땅히 받아주시오. 여름[夏景]이 점점 더워지는데 별탈이 없으시기를." 또한 그 나라 왕후의 상을 조문하여 말하였다. "화(禍)가 무상(無常)하여 왕후께서 돌아가셨구료. 슬퍼하신다는 말을 들었소. 길하지 못한 일이라 한들 어쩌겠소. 무성하게 뻗어 나가지 못한 솔가지라 해도 쉼없이 흘러만 가는 세월 속에서 조금씩 나아질 것이오. 길흉에는 다 때가 있으니 이것으로 조문하고자 하오. 지금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견 스무 필과 명주[■] 스무 필, 솜[綿] 2백 둔을 내리니 마땅히 받아주시기 바라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호키(寶龜, 보귀) 8년(777)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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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8810416


[丙午, 先是寶龜七年, 高麗使輩卅人溺死, 漂着越前國江沼加賀二郡. 至是, 仰當國令加葬埋焉.]
병오(30일), 앞서 보귀(寶龜, 호키) 7년(775)에 고려의 사신단 30인이 익사하여 월전국(越前國, 에치젠노쿠니)의 강소(江沼, 에누마)ㆍ가하(加賀, 카가) 두 군(郡)에 표류해왔다. 이때에 이르러 그 국(國, 쿠니)에서 받들어 장사지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9년(778) 4월
 
월전국 해안에 떠밀려온 것은 끔찍하게도 익사해서 불은 시체ㅡ그것도 앞서 갔던 사도몽의 사신단 일행들이었다. 하마다 고사쿠는 이 익사체가 2년 전인 보력 3년(776) 12월에 사도몽을 따라 사신으로 오다가 에치젠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141명 가운데 일부라면 1년이나 지난 뒤에야 발견된 것으로 시간차가 상당하며,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한 생존자 46명 가운데 일부라면 일본으로 귀국하는 중에 또다시 조난을 당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사도몽의 사신단은 처음 출발했던 187명 가운데 겨우 16명만이 살아 돌아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사도몽의 사신단과는 아무 상관없는 발해인 항해자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밝혀놨지만) 이런 지경이라면 사도몽 본인은 도대체 무사히 살아 돌아가기나 할수 있었던지 심히 의문스럽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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