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1015150312342
고구려와 당, 다시 전쟁을 시작하다.
[고구려사 명장면 108]
임기환 입력 2020. 10. 15. 15:03 수정 2020. 10. 19. 09:21
당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신라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김춘추와 당 태종의 협약은 당 태종의 죽음으로 물 건너 간 듯이 보였다. 당 태종의 유조를 받은 장손무기 정권이 대외적으로 유화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평양 이남의 한반도 영역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협약은 신라로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고구려 정벌이 다급했던 당 태종의 욕망을 적절하게 이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고구려와 당 사이의 대결 구도가 소강 상태로 바뀌었기에 이런 정세 변화에 대응하는 전략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다고 신라로서 별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라는 당과의 외교 관계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 고종 즉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650년 6월에는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파견하여 전해에 백제의 침공을 물리친 것을 알리는 동시에 진덕왕이 스스로 태평송을 짓고 이를 비단에 수를 놓아 당 고종에게 공헌하였다. 아마도 신라의 군사력에 당 고종이 관심을 갖고 다시 동맹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뜻이었을 게다. 이후에도 신라는 652년, 653년, 654년 매년 사신을 당에 보냈다. 당도 당장은 고구려와 전쟁햐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고 있지만 645년 고구려 원정 이후 신라를 동맹의 파트너로 점찍어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사망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당 고종은 윤5월에 사신을 보내 김춘추를 신라왕에 책봉하였고, 김춘추 역시 이에 화답하는 사신을 보냈다. 이제 왕위에 오른 김춘추에게는 당 고종이나 정권 담당자들에게 자신이 당 태종과 맺은 협약을 주지시키고, 다시금 양국 사이의 군사적 동맹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하지만 당의 대고구려, 대백제 정책이 신라 뜻대로 움직여질 리 만무했다.
그런데 김춘추는 참으로 운이 따르는 인물이었다. 때마침 당의 정계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655년 초부터 당 고종은 친정(親政) 체제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왕(王) 황후를 폐위시키고 무측천(武則天)을 황후로 책봉하기 위해 정계 재편을 시도했다. 당 태종의 유훈을 받은 보정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등이 왕 황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하자 이들을 물리치고, 무측천을 지지했던 허경종(許敬宗)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권을 성립시켰다. 장손무기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이세적도 고종을 지지했다. 게다가 658년에 저수량, 659년에 장손무기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장손무기 일파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온건 유화책을 취하던 장손무기 정권이 물러남에 따라 당의 대외정책도 크게 변화하였다. 655년부터 허경종 정권은 이세적 등과 더불어 대외 강경 정책을 시도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돌궐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였다. 당 태종이 죽은 후 650년에 서돌궐이 반기를 들자 652년에 서돌궐을 정벌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정벌을 지속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655년에 다시 서돌궐에 원정대를 파견하였고, 657년 윤1월에 소정방(蘇定方)이 출정하여 아사나하로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658년 2월에 아사나하로를 사로잡고 서돌궐을 궤멸시켰다.
당의 대고구려 정책도 강경한 입장으로 바뀌었다. 전회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구려는 654년을 전기로 당과 신라에 대해 보다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654년 10월에 요서 거란을 공격하였고, 655년 정월에는 백제와 함께 신라 북변을 공격하여 30여 성을 탈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655년 정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은 신라 김춘추는 다급하게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 고종은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655년 2월 25일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에게 고구려 원정을 명하였다. 물론 신라 구원은 신라 측에 생색을 내기 위한 명분일 뿐이고, 전해인 654년 고구려의 거란 공격에 자극을 받은 당은 이미 고구려 원정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후 당은 지속적으로 고구려 원정군을 출정시켰다. 중국 측 사서 기록으로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655년 5월 13일 정명진과 소정방 등은 요하를 건너 귀단수(貴端水: 지금의 혼하)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당군이 고구려 군사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공을 거두고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그 외성과 주변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657년에는 영주도독 정명진과 설인귀(薛仁貴)가 귀단수(貴端水)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3000여 급을 참수하고 신성(新城)을 붙태우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단수 전투와 신성을 불태운 전과는 앞서 655년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기록상 착오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영주도독 정명진이 주역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655년에는 소정방, 657년에는 설인귀가 등장하는 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단 별도의 전투로 본다. 그렇다면 이때 거듭 고구려 신성을 공략의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고구려 신성으로 비정되는 무순 고이산성 성문 성벽과 표지석
658년 6월에는 영주도독 정명진과 설인귀가 고구려 적봉진(赤烽鎭)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고구려 장수 두방루(豆方婁)가 군사 3만을 이끌고 맞서자 정명진이 거란을 거느리고 이를 격퇴했다고 한다. 적봉진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서 어디쯤에 비정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신성과 가까운 요동 어느 지역일 것이다.
659년 3월에 글필하력(契苾何力)이 요동을 공력하였는데, 구체적인 지점은 어디인지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에 다시 양건방(梁建方), 글필하력, 설인귀 등이 고구려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횡산을 서요하 중류 노합하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645년 당태종의 승리 조서에 보이는 당시 당군이 공취했다고 하는 10성 중 횡산과 동일한 곳으로 보인다. 필자는 10개 성의 기록 순서로 보아 횡산(橫山)성을 현도성과 개모성 사이에 위치한 성으로 비정한 바 있다.
즉 이상의 전황을 보면 655년부터 거의 매년 4차례나 고구려 요동 지역을 공격하고 있다. 특히 3차례 공격의 주역은 영주도독 정명진이었다. 정명진은 645년 당 태종의 친정 시에 수군 장량의 휘하에서 비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인물이다. 당시에는 장검(張儉)이 영주도독이었는데, 장검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정명진이 영주도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고구려를 공격한 당군의 군사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영주도독 정명진이 최고지휘관인 점을 보면 영주도독부의 군사와 영주도독이 통솔하는 거란과 해 등 주변 민족의 군사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658년 적봉진 전투에서 거란군이 고구려군 3만과 대결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소정방이나 설인귀가 일부 중앙군을 이끌고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645년 전쟁 시 영주도독 장검이 대략 4만~5만의 군사를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는데, 고구려군 3만과 대결한 점으로 보아 이 무렵도 대략 그 정도 군사력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주요 전투 지점인 귀단수와 신성, 적봉진, 횡산 중 적봉진과 횡산의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신성 일대와 신성의 방어권역으로 비정할 수 있겠다. 당측 입장에서 보변 요하 상로로 도하하여 공격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앞서 647년 5월 공격에서도 이세적(李世勣)이 신성도로 진군하여 신성 배후의 남소성, 목저성을 공격한 바 있다. 즉 645년 이후 당 육군이 주 공격 대상이 신성 일대라는 점은 주의를 끈다. 이 점은 신성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과 관련하여 앞으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659년 공격이다. 영주도독 정명진이 주역이 된 이전 공세와는 달리 양건방, 글필하력, 설인귀 등이 등장한다. 이는 대규모 군대 동원은 아닐지라도 중앙에서 동원된 군사력이 고구려 공격에 대거 참여했음을 뜻한다. 그 이전과는 다른 당군의 전략적 변화가 읽힌다.
게다가 3월 공격 후 다시 11월에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요동에서 겨울철 군사작전 가능성을 시험한 것이 아닌가 싶다. 645년 당 태종의 친정 시 겨울철이 다가오는 9월에 철수한 점과 관련하여 당군이 고구려 공격에 다양한 전술을 탐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에 대한 당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본격적인 려당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듬해 당의 대군은 다른 곳을 향했다. 바로 백제였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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