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820150315920


당태종은 설연타 때문에 안시성에서 철군하였나?

[고구려사 명장면 103] 

임기환 입력 2020. 08. 20. 15:03 


당태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때는 646년 3월 7일이었다. 요하를 건넌 645년 10월 1일로부터도 6개월 가까운 시일이 흐른 뒤였다. 그런데 '신당서' 태종본기에는 이를 "고구려로부터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도 "요동에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연타(薛延陀)와의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병주(幷州)에 들른 행로는 애초의 출정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장안으로 돌아오는 태종의 행로를 고구려 원정으로부터의 귀환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를 왜 따져보냐 하면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철군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 당 북방에 있는 설연타가 당 하주(夏州)를 침공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어서다. 고구려군이 주필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연개소문이 말갈을 통해 설연타와 연결하여 당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에 당태종의 철군과 설연타의 당 공격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에도 논의가 없지 않았다.


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점은 설연타가 언제 당의 하주를 침공했느냐다. 당태종의 철군 명령 이전에 설연타의 침공이 있었다면, 당 철군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설연타의 침공을 거론할 수 있지만, 설연타의 침공이 철군 이후라면 이를 철군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상 설연타의 침공 시점이 다소 애매한 점이 없지 않다.


설연타의 최초 침공을 진주가한(眞珠可汗)에 의해 645년 7~8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떠나면서 돌궐 출신인 번장(蕃將) 집실사력(執失思力)에게 금산도에 주둔하여 설연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신당서' 집실사력 열전에 의하면, 설연타의 수만 기병이 하남(河南·오르도스) 지역에 침공하였고, 집실사력이 이를 격퇴하고 600여 리를 추격하였는데, 이 무렵(8월경) 설연타의 진주가한이 죽어서 설연타군이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다수의 기록은 이와는 다른 양상을 전하고 있다. 즉 연개소문이 설연타와의 연계를 시도했지만 "진주가한이 두려워해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앞서 집실사력 열전의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집실사력 열전의 내용은 '신당서' 회홀(回?)전의 기사와도 시간 흐름이 맞지 않는다. 역시 다수의 기록에서 보이는 위 기사를 부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는 없기 때문에 7~8월의 설연타 침공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설사 7~8월의 설연타 침공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때는 안시성 전투가 한참 진행 중이었는데 당시 당태종이 설연타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는 흔적은 사료상으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해 8월경에 진주가한이 죽고 적자이지만 둘째인 발작(拔灼)이 이복형인 예망(曳莽)을 죽이고 다미가한(多彌可汗)으로 즉위하였다. 당은 내심 설연타가 후계자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에 빠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다미가한이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 갔다. 새로 다미가한이 등장하여 이전 진주가한과는 다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연타 내부에서 가한의 교체가 새삼스레 9월 당군의 철군 배경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7~8월 설연타의 하남 공격을 인정한다면 이때에도 꿈적하지 않았던 당태종이 가한이 바뀌었다고 철군했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다미가한은 당의 하주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 시점이 불분명한데, 여러 사서에 "태종이 아직 요동에 있을 때"라고 막연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점을 당군이 요하를 건넌 10월 1일 이전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당태종이 철군 조서를 내린 9월 18일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따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태종이 아직 요동에 있을 때"라는 사서의 기록을 요하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기사의 '요동'을 지리적 관점에서만 파악한 잘못이다. "태종이 아직 요동에 있을 때"란 문구는 아직 당태종이 요동 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함이 합리적이다. 즉 앞의 기사에서 보듯이 당태종이 장안에 도착한 646년 3월 7일 이전에는 아직 고구려나 요동에서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설연타의 당 공격 시점을 당태종이 요하를 건넌 10월 1일 이전으로 상정하는 것은 맥락상 타당하지 않다.


당시 설연타의 동향과 당의 대응을 보여주는 여러 기록을 종합해볼 때 설연타 다미가한이 당 하주를 공격한 시점은 645년 11월~12월 초 무렵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는 지난 회에서도 언급한 당태종의 귀환 과정을 보아도 짐작된다. 10월 1일 요하를 건넌 당태종은 10월 21일에 임유관에 도착해 마중 나온 태자와 만났고, 11월 7일에 유주(幽州)에 도착하였다.


당태종의 철군, 귀환 경로 /지도=바이두


당태종의 본군이 고구려로 출정할 때에는 4월 10일에 유주를 출발하여 5월 3일에 요택(遼澤)에 도착하였다. 대략 22~23일이 걸린 것이다. 귀환길은 21일 만에 임유관에 도착하고, 36~7일 만에 유주에 도착하였으니 거의 보름 가까이 더 걸릴 정도로 행군 속도가 많이 느렸다고 볼 수 있다. 군사들의 피로를 고려하면 당연한 행군 일정이다. 이러한 귀환길을 보면 당태종이 설연타의 침공을 의식해서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다. 더욱 10월 이전에 설연타가 침공했다면, 당태종의 원정 시에 국내 통치를 위임받은 태자가 10월 21일에 임유관으로 당태종을 마중 나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적어도 당태종이 유주에 도착할 때까지는 설연타의 침공이 없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즉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철군하게 된 배경은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반사(班師) 조서에서도 나오듯이 겨울철 추위가 다가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곽 중심의 고구려 요동 방어체계 및 산성의 험준함, 고구려군의 수성 능력 등이 결합하여 당군의 진격을 최전선에서 가로막았던 결과였다. 전적으로 안시성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방어력이 당태종의 철군을 초래한 것이지, 설연타 동향 등 어떤 외적 변수가 철군의 요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나서기 전부터 설연타의 침공에 대비책을 따로 마련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진주가한의 사망과 다미가한의 등장이 가져올 새로운 여파에 대해 당태종이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당태종은 12월 14일 병주(幷州·지금의 태원 일대)에 도착하였다. 설연타와의 전쟁을 후방에서 지휘·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고구려 원정을 나설 때 당태종의 여정을 고려하면 귀환길에서도 낙양을 거칠 예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주에서 정주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갈 때, 설연타의 침공 소식을 듣고 병주로 길을 바꾼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지난 회에 언급한 바와 같이 당태종은 설연타의 침공을 물리치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비로소 고구려 원정으로부터 귀환한 것이다.


그리고 3개월 뒤인 6월에 당은 철륵(鐵勒)·복골(僕骨)·동라(同羅) 부족과 연대하여 함께 설연타에 대한 대공세를 펼쳐서 결국 궤멸시켰다. 그리고 8~10월에는 당태종이 직접 영주(靈州)에 가서 철륵 여러 부족들의 투항을 받았다. 한때 초원지대를 호령하던 설연타를 당이 패망함시킴으로써 다시금 주변 국가들에 당의 위력을 과시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646년 8~10월 당 태종의 북방 순행 경로 / 지도=바이두


646년 7월에 토번(吐藩)은 대신 녹동찬(祿東贊)을 사신으로 보내 표문을 올려 이렇게 당태종에 아부하였다.


"성스러운 천자가 사방을 평정하니, 해와 달이 비추는 나라는 모두 신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멀다는 것을 믿고 신하의 예절을 빠뜨리니, 천자가 직접 백만을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 토벌하기에 이르니, 성을 무너뜨리고 진영을 함락시키며 지정된 날에 개선하였습니다. 이적(夷狄)이 겨우 천자의 거가가 출발하였다는 것을 들었는데, 잠깐 사이에 이미 귀국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기러기가 날아서 빠르게 넘어도 폐하가 빠르게 달리는 것에 미치지 못하니, 제가 외람되게 아들과 사위로 참여하여 이보다 기쁠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거위는 기러기와 같으므로, 금거위를 만들어서 바칩니다."('구당서' 토번전)


645~646년 불과 2년 사이에 당의 주변 국가들은 두 번의 극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다. 먼저 645년에는 그동안 천하무적으로 사방을 평정한 당태종이 거느린 당군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5개월에 걸친 전쟁에서 겨우 몇몇 성을 함락시켰을 뿐 결국 패전과 다름없는 철군을 했다는 점이다.


주변 국가들은 이런 결과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당태종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설연타의 다미가한이 진주가한과는 달리 당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배경에는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데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인 듯싶다.


그런데 그런 당군이 곧이어 646년에는 북방의 주인공인 설연타를 단숨에 궤멸시켜 멸망시킨 장면을 또 목격하게 된 것이다. 당이 여전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두려운 존재임을 다시 환기하게 되고, 당태종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서 토번의 표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만큼, 그런 당태종을 패퇴시킨 고구려의 명성은 그보다 더 높아졌을 것이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궁전벽화에 고구려 사신도가 그려지게 된 배경이 바로 그러했다.


이런 사정을 당태종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다른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름을 날릴수록, 그런 자신을 패퇴시킨 고구려의 명성 또한 그만큼 더 높아지고 있음을. 당태종의 선택지는 분명해졌다. 바로 고구려 재원정이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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