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723172721844
중국인 기억 속의 려당 전쟁
[고구려사 명장면 101]
임기환 입력 2020. 07. 23. 17:27 수정 2020. 07. 23. 19:30
1488년 1월 조선 성종 때 제주에 부임하였다가 부친상으로 고향 나주로 가던 최부(崔溥)는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명나라 절강성 영파부(浙江省 寧波府) 해안에 표착하여 북경, 요동을 거쳐 귀국하였는데, 성종의 명으로 그 여정을 기록한 것이 <<표해록(漂海錄)>>이다. 이 책에 그가 소주(蘇州)에서 명나라 관리를 만나 나눈 대화에 이런 대목이 있다
(명 관리가) 묻기를,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내가 말했다. "지략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이 병사를 지휘하는데 도리가 있었고, 병졸들은 모두 윗사람에게 충성스럽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그때 명나라 관리가 최부에게 질문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는데 지금 그 후예는 있는지? 사당이나 무덤이 있어 제사를 받들고 있는지?"였다. 명나라 지방 관리가 조선에 대해 가장 궁금한 두 가지 중 하나가 고구려와 수, 당 전쟁이었다. 수양제와 당태종의 대군이 고구려에 당한 납득할 수 없는 패배가 얼마나 강렬하게 중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전승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화이다.
따지고 보면 기자와 고구려에 대한 이 두 궁금증은 심리적으로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조선이 중국 출신 기자의 봉지였다는 은근한 자만심 및 수, 당이 고구려에 패퇴했다는 지울 수 없는 굴욕감이 양면을 이루고 있는 심리적 기저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보다 앞서 원나라 때에도 고구려가 당태종을 물리친 기억을 다시 환기하는 유명한 예화가 있다. 고려사 권25, 원종(元宗) 원년(1260) 3월조에 기록되어 있다. 몽골과 오랫동안 전쟁을 치른 고려는 마침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하기로 하고 고종은 태자(원종이 됨)를 사절로 몽골에 보냈다. 마침 황제 헌종(憲宗)이 죽고 난 직후여서, 황제의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아릭부게 형제가 치열한 경쟁을 하며 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태자(원종)는 쿠빌라이의 승리를 예상하고 그를 찾아갔다.
고려 태자를 만난 쿠빌라이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나라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몽골의 오랜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던 고려 태자가 자신을 선택하였음을 쿠빌라이는 널리 선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실패에 대한 이런 인식은 쿠빌라이나 몽골인들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몽골지역에서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 대한 어떤 기억이 전승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당시 몽골 정권에 등용되어 있던 한족 관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몽골이 갖고 있던 고려에 대한 주요한 인식의 하나가 당태종을 물리친 고구려의 역사가 이어진 같은 나라라는 이미지이고, 더구나 몽골군의 오랜 침공에도 굳세게 저항하는 고려의 태도와 겹쳐져서 더욱 이런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 인식을 갖고 있던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항복을 당태종도 이루지 못한 큰 업적라고 생각했음직하다.
원에 앞선 송나라 때에도 연개소문과 당태종에 대한 기억이 환기된 예화가 있다. <<삼국사기>> 열전 개소문전에 덧붙인 사론(史論)에서 김부식은 송 신종과 왕안석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송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와 일을 논할 때 말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쳐서 어찌하여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개보가 말하기를 "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었다."
연개소문의 반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김부식도 당태종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와 연개소문에 대해 중국인의 기록을 인용하여 나름 평가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 기사의 전거를 필자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필자가 접하는 중국 측 역사서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혹 야사류의 전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라는 왕안석의 평가는 그 이전의 평가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표해록>>을 쓴 최부는 고구려가 당태종을 물리친 데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으면서도, 연개소문은 시역죄를 저지른 난신적자(亂臣賊子)인데, 그를 비범한 사람이라 평했던 왕안석까지 춘추의 도의를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왕안석의 평가와 관련해서 송나라 말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당태종의 치세를 다룬 연의소설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당태종이란 인물과 격동하는 그의 치세는 지배층이나 공식 역사서의 관심 대상만이 아니었다. 일반 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문학의 소재로도 매력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역사를 소재로 구성하는 여러 연의소설(演義小說)들이다. 중국 삼국시대를 다룬 <<삼국지연의>>를 떠올리면 연의소설이 무엇인지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연의소설 중에는 연개소문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럿이다. '설인귀정요사략(薛仁貴征遼事略)'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설당후전(說唐後傳)' 등이 대표적이다
송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설인귀정요사략(설인귀가 요동을 정벌한 이야기)'은 여당전쟁을 소재로 삼은 첫번째 소설로 보인다. 내용은 평민 출신인 설인귀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가장 상투적인 영웅 서사이다. 그 내용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설인귀의 맞수로서 연개소문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설인귀 대 연개소문의 갈등 구도에 머무르지 않고 연개소문 대 당태종의 대결 구도를 보조 소재로 삼아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 소설에서 당태종은 숱은 역사서에서 그려지는 현군(賢君)으로서의 영웅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고구려 연개소문 앞에서 당태종은 초라하다 못해 굴욕적이기도 하다. 연개소문은 뛰어난 무용으로 당태종을 시종 위험에 빠뜨리고, 당태종은 그런 위기를 설인귀의 등장으로 간신히 모면하게 된다.
명 선성왕 묘에서 발굴된 <신간전상당설인귀과해정료고사(新刊全相唐 薛仁貴跨海征遼 故事>의 삽화 : 연개소문에 쫓기는 당태종을 설인귀가 구하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악의 편에 서 있는 연개소문의 능력이 강력할수록, 그와 맞서 물리치는 설인귀의 영웅적 모습은 더욱 부각되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이미지는 상당히 강력하다. 하지만 결국 연개소문은 설인귀에게 사로잡혀 당태종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참형되고 고구려는 멸망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소설 속의 연개소문은 연개소문 개인이라기보다는 당태종을 물리친 고구려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역사상 당태종의 패배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가 투영되어 있다고 보인다.
명나라 말 웅대목(熊大木)의 작품인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서 양만춘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나를 살펴보면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소설은 다른 소설에 비하여 기본 줄거리는 역사서의 사실들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세부적인 내용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구성하였다. 양만춘을 비롯한 고구려 여러 등장 인물들이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도 연개소문은 주요한 등장 인물로서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그려지고 있다.
청나라 때 만들어진 '설당후전(說唐後傳)'에서는 이른바 소설적 상상력이 훨씬 커지는데, 연개소문의 캐릭터 역시 더욱 영웅적인 풍모로 더 큰 비중으로 그려지며, 상대적으로 당태종은 더욱 초라한 모습니다. 물론 이런 요소 역시 주인공인 설인귀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소설류에서 형성된 연개소문의 이미지는 "독목관(獨木關)"을 비롯한 여러 중국의 경극(京劇)에서도 재현되고 확산되었다.
중국 경극 속의 연개소문 /사진=바이두
이런 소설류의 주요 독자가 서민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영웅으로 그려지는 설인귀는 평민 출신이라는 점이 일반 서민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으게 되는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특히 『신당서』 설인귀 열전에는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뒤에 설인귀를 보고 "짐은 요동을 얻은 것보다 용맹한 장수를 얻어 기쁘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설인귀를 연개소문에 대적하는 '중국적 영웅'으로 떠받들게 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들 서민은 지배층들이 역사상 제일의 현군(賢君)으로 칭송하고 있는 당태종이라 할지라도,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곤궁에 빠뜨리는 다른 제왕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보고 당태종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당태종이 서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요인은 바로 소설에서 다루는 바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수양제의 패배에 이어서 중원세계에 커다란 '고구려 트라우마'가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여운이 결국 소설 속에서 초라한 당태종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던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병사들을 이국땅의 원혼으로 남기고 돌아왔다는 점에서 당나라 백성들에게는 당태종도 수양제와 진배없었다. 지배층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데 온갖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어떤 전쟁이든 가족의 생이별과 병사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제왕의 야망일 뿐이다.
중국 연의소설 속에 담겨 있는 이런 민중들의 시선을 읽지 않고, 이를 중국인들도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곤란하다. 중국의 정사 못지않게 이 연의소설 또한 중국인의 의해 만들어진 연개소문에 대한 또 다른 왜곡된 허상이기 때문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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