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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들의 디아스포라… 20여만명 끌려가
김인영 기자 승인 2018.03.24 15:41 
 
끊임없는 반란과 유랑…대조영은 발해 세우고, 왕모중, 고선지, 이정기등 배출
 
나라가 망하면 백성들도 사라진다. 고대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가 망하고 고구려 백성들은 어디로 갔는가.
 
정복자들은 백성도 남겨두지 않는다. 이른바 사민(徙民) 정책을 취한다. 살던 곳에 그대로 놓아 두면 지도자가 생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정복자들은 굴복시킨 나라의 왕과 지배계급만 떼어 내지 않고, 백성들도 살던 땅으로부터 유리시키다. 그리고 낯 설은 고장으로 이주시킨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그러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668년 9월 21일 당나라군대가 평양을 포위했다. 고구려 보장왕이 항복을 청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는 “당나라 장군 이세적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ㆍ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며 한줄 문장으로 피눈물 나는 역사적 사실을 적어 놓았다.
 
20여만명은 그 당시로는 엄청난 인구다. 고구려 멸망 당시 전체 인구가 69만호였는데, 1호를 5명으로 잡으면 350만명 정도가 된다. 이중 20여만명은 전체인구의 5~6%로 지배계급 전부를 데려 갔다고 볼수 있다. 당나라는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동북의 강자 고구려의 씨를 말리자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은 항복후 수모를 당한다. 이세적이 귀국하면서 보장왕에게 당태종의 묘인 소릉(昭陵)에 참배케 했다. 당 태종은 앞서 고구려 정벌전에 참여했다가 안시성에서 화살을 맞아 죽은 황제였다.
 
당군은 개선가를 부르며 당나라 수도로 들어가 보장왕에게 다시 당나라 황제들의 무덤인 대묘(大廟)에 참배토록 했다.
 
그리고 당 고종이 항복한 고구려왕과 포로들을 접견했다. 보장왕은 비겁하게도 “자신이 정치를 한 것이 아니다”며 연개소문의 아들들에게 죄를 미루고 목숨을 건졌다.
 
항복한 임금이야 외교 관례상 목숨을 살려준다 치더라도 나머지 고구려 귀족과 백성들은 어디로 갔을까.
 
고구려인들은 나라가 망했어도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다. 멸망 이듬해인 669년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이 4,000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했다.
 
고구려인들의 반란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당나라는 유민 2만8,300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과 경서(京西) 등지로 이주시켰다. 그 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했다. 고구려인들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척해 당나라의 영토를 넓히고 세수를 확대하자는 취지다.
 

▲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도 /위키피디아
 
이후에도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삼국사기」 보장왕조의 기록이다.
 
① (당나라 장수) 고간이 안시성에서 남은 무리를 물리쳤다. (671년)
 
② 고간이 남은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쳐부수었다. 신라가 병사를 보내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이를 다시 물리쳐서 2,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672년)
 
③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호로하(瓠瀘河)에서 백성들을 쳐부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673년)
 
그러면 끌려간 20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은 왜 중국 각지로 흩어 놓았을까. 근처에 모아두었다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연락조차 되지 않는 먼 곳으로 뿌려 놓았던 것이다.
 
중국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성 중 다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조칙으로 고구려인 3만8,200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 및 장안 서쪽 여러주의 광활한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삼국사기 보장왕조 669년의 기록과 대략 일치한다. 20여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이 끌려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중 상당수는 당나라군에 의해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남은 3만8,200호, 즉 5인 가구로 치면 19만명 정도가 중국 대륙 곳곳에 분산배치 되었던 것이다.
 
강제 이주당한 곳은 만주 서쪽의 영주와 산동반도, 심지어는 사막 서쪽이었다.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중국 사서에는 “고구려 포로를 사막 서쪽으로 배치했다. 또 고구려인들을 청주(靑州)와 서주(徐州) 지역에 흩어 놓았는데 감시하기가 쉽고 농장을 확장시키기 위한 조치였다.”고 기록했다.
 
일부는 요동 지역에 남아 있었다. 당나라가 고구려 멸망 9년후(677년)에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책봉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는데,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요동지역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 고종은 동방에서 온 사람으로 여러 주에 흩어 놓았던 고구려 유민들을 보장왕과 함께 요동지역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했다.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책봉한 것은 요동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무마하기 위한 조처다. 하지만 보장왕도 요동에 도착해 몰래 말갈과 내통하며 당나라에 대항할 것을 도모했다. 681년 당나라는 보장왕을 소환하고, 보장왕을 따르던 고구려인들을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에 분산하여 거주하게 했다. 그 중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의 옛날 성에 머물게 했다. 요동지역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로 도주하거나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삼국사기」는 이로써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고 전한다.

▲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고구려 장군총 /위키피디아
 
고씨 왕통은 끊어졌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나라는 왜 고구려 유민들을 머나먼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을까.
 
「구당서」에는 “669년 5월 고려 2만8,200호와 수레 1,080대, 소 3,00두, 말 2,900필, 낙타 60두를 장치 내지로 옮기기 위해 내주와 영주에서 차례로 발진해 강회(江淮) 지역의 남쪽과 산남(山南), 변주(汴州), 양주(凉州) 등 서쪽 여러 주의 광활한 지역에 인치했다”고 했다. 강회 지역은 지금의 안휘성·강소성 지역이고, 산남은 섬서·하남·호북성 일대, 변주는 하남성 개봉, 양주는 감숙성이다. 기나긴 고구려 유민 대열이 소와 말을 끌고 중국 전역으로 흩뿌려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라를 잃은 유태인들처럼 고구려 유민들도 디아스포라의 비극을 겪게 된 것이다.
 
고구려 옛땅에 남은 이 가운데 대조영(大祚榮)은 발해를 세웠다. 당나라 곳곳에 떠돌던 유민 가운데 당나라 명장들이 나왔으니, 왕모중(王毛仲)과 고선지(高仙芝)장군이다. 산동성 일대에 별도의 독립 국가를 세운 이도 있었으니, 이정기(李正己)다.
 
김인영 기자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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