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아래
고흠덕, 고원망
당 고종이 고구려 정복 의례를 행하다 ( 668년 12월(음) ) - 한국사DB
註 014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 고구려인으로 도독·자사·현령 등으로 임명된 사례로서 최근에 발견된 금석문으로서 「고흠덕묘지명(高欽德墓誌銘)」과 「고원망묘지명(高遠望墓誌銘)」을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부자 관계인데, 이들 묘지명에 기록된 이 가문 인물의 관직을 살펴보면 고원(高瑗)-고회(高懷)-고천(高千)-고흠덕(高欽德) 4대에 걸쳐 건안주도독(建安州都督)을 세습 역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흠덕의 출생년이 677년이므로 증조부인 고원은 6세기 말~7세기 초에 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고원이 활동했던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임이 분명하다. 조부인 고희도 고구려 멸망 전에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원과 고희가 역임하였다는 건안주도독은 실제로는 고구려 지방관인 건안성(建安城) 성주이다. 건안성이 9도독부의 하나로 편제된 것을 보면 고구려시기에 건안성은 욕살(褥薩)급 지방관으로 추정된다. 고흠덕 가문은 7세기에 들어 건안성의 성주로서 대를 이어 갔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당의 기미체제에 의해 건안주도독의 자리를 세습해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유력자를 기미부주 장관에 임명하고 그 직을 세습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남단덕묘지(南單德墓誌銘)」을 통해서도 남단덕의 조부가 기미부주 중 하나인 마미주(磨米州)의 도독을 역임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시기의 지방관 혹은 지방 유력자가 기미부주 장관에 임명된 사례의 하나이다.
건안성 - 나무위키
고구려 유민 고흠덕(高欽德), 고원망(高遠望) 부자의 묘지명에 따르면 고흠덕 가문은 고흠덕의 증조부인 고원(高瑗)대부터[4] 건안욕살을 세습한 가문이라고 한다.이에 고흠덕의 할아버지인 고회(高懷) 또한 건안욕살이었고 고흠덕의 아버지인 고천(高千) 대에 당나라에 투항했다고 추정되는데 고흠덕은 677년에 태어나 733년에, 고원망은 697년에 태어나 740년에 죽었으므로 고흠덕 부자는 완전한 유민 세대에 해당한다. 여담으로 묘지명에서 고흠덕 가문은 상나라의 충신 비간의 후손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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