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50726190730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8>
김운회 동양대 교수 기사입력 2005-07-27 오전 10:20:46                    

백제와 왜, 영원한 부여의 아들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시미즈 기요시(淸水紀佳)·박명미 교수의 노작(勞作)『아나타(あなた)는 한국인』(정신세계사 : 2004)을 읽어보셨습니까?
  
두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어가 일본어의 뿌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어근이 같은 한국어와 일본어 어휘 5000여개를 찾아내고 1500개 어휘를 그 예로 제시하였습니다.
  
두 교수의 저서는 실증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반도인이 청동기시대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국가를 형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연구자들은 고대 한국어를 한어(韓語)라고 부르고 한국어를 반도한어(半島韓語), 일본어를 열도한어(列島韓語)로 구별하였습니다.
  
비교언어학의 권위자인 시미즈 교수는 "영어와 독일어가 자매어이듯 한국어와 일본어도 한어(韓語)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람스테드와 포페라의 견해에 의하면 한국은 알타이어에 속한다고 합니다. 물론 문화의 융합과정에서 고아시아어도 섞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답니다. 분명한 것은 중국이나 티베트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중국어나 티베트어는 인도 유럽어와 문법체계가 더 가까우니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인도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는 겁니다.
  
람스테드는 알타이 조어(祖語)에서 투르크·몽골·퉁구스·한국어가 동시에 분화된 것으로 본 반면, 포페는 한국어는 투르크·몽고·퉁구스보다 먼저 분화되었다고 봅니다. 다만 이들 한어(韓語)가 어휘면에서는 남방계의 영향도 깊이 받았다는 점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한국과 일본은 동족(同族)이고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에 정착했으며 일부는 원주민과 융합하여 오늘의 일본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시미즈 기요시(淸水紀佳)·박명미 교수의 견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일본인은 약 2천 년 전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가 정착한 이주민들의 후손이라는 유전자 분석 결과가 잇달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일본인들은 중국 남부지방에서 이주해 온 단일 조상으로부터 점차 진화해 왔다고 믿어왔습니다. 이것을 흔히 '변형 이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야요이 시대(2천3백 년∼1천7백 년 전) 때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갔지만 이들은 문화적 영향만을 주었을 뿐이지 생물학적 특성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이주 정착했는데 문화적 영향만 있고 생물학적인 영향이 없다니? 세상에 이렇게 무식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일본의 학자, 교수들은 왜 이런 말이 나오는 환경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답답한 일입니다.
  
1996년 아시아 4개국 분자 유전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조사한 결과, 현대 일본인들은 중국계통과는 거리가 멀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가 영(0)이라고 할 만큼 높은 유사성을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1996)] 이것은 "한반도를 통해 많은 한반도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한 결과"라는 것이지요(미토콘드리아는 핵 속 DNA와 달리 어머니에서 딸에게만 유전되는 특성이 있답니다. 그래서 이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를 추적해 올라가면 원래의 조상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까지도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다고 하는군요)
  
또 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 DNA의 특이성을 분석하여 한반도 이주민이 일본인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도 조사해 추정해보니 현대 일본인에게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야요이)이 끼친 영향은 무려 65%에 달했고, 원주민인 아이누 족과 오키나와인 영향은 35%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야요이 시대를 기원전 3세기경으로 볼 때 가야를 중심으로 반도 쥬신들이 일본 서부 규슈지방으로 가서 먼저 정착하고 중부 혼슈 지방으로 넘어가 원주민들과 인종적으로 융합하기 시작하여 현대 일본인들을 형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이론을 '변형이론'과 구별하여 '융합이론'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민족형성이론이죠.
  
1996년 카츠시 도쿠나가 교수(도쿄대학 : 분자유전학)가 '조직적합성 항원(HLA) 유형으로 본 동아시아 민족들의 기원과 확산'을 발표했습니다. 한반도에서 기원해서, 한국인 가운데 가장 우세한 분포율(7%)을 보이는 조직적합성 항원의 특정 유형이 일본에서도 중부지방, 특히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5∼7%의 높은 분포를 보였는데 반하여 원주민들이 사는 오키나와와 아오모리 등 일본의 동부지방에서는 이 유형이 1∼2%의 낮은 분포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이것은 특정 항원 유형을 갖고 일본에 이주한 한국인들이 주로 일본 중부지방에 정착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1) 이상한 기록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상한 기록이 있습니다. 다음을 보시죠.
  
"처음에 부여는 ① 녹산(鹿山)에 자리를 잡았는데, ② 백제(百濟)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져서 서쪽으로 연나라 가까이 옮겼으나, ③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에 연나라왕은 세자인 준[雋(儁)]을 보내어 모용군(慕容軍)·모용락(慕容恪)·모용근(慕與根) 등에 군사를 이끌게 하고 부여를 공략하니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갔다.[『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 (* 번호는 제가 붙인 것입니다)
  
이 기록은 그 동안 여러 가지 억측을 낳기도 했습니다. (한반도의) 백제가 (송화강변의) 부여를 공격했으니 지리적으로 맞지 않죠. 그래서 많은 재야사가들은 백제가 요동(遼東)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백제가 엄청 대국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지요.
  
만약 백제가 346년 즉 근초고왕 이전에 부여를 공격했다면 그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어야겠죠?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녹산(鹿山)은 현재의 농안·장춘, 또는 길림(吉林)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어느 곳이든 만주의 내륙 지대이기 때문에 설령 백제가 다른 나라라 해도 한반도 남부에서는 공격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림①]을 보시죠.
  

[그림 ①] 부여 위치도. ⓒ김운회  
 
그래서 이 기록에서 백제는 고구려로 바꾸어야 맞는 기록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백제가 부여를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져서 서쪽 연나라 부근으로 옮겼으나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고치고 보니 상당히 타당해집니다. 왜 그런지 조목조목 살펴봅시다.
  
위의 글은 346년 이전의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즉 3세기~4세기에 걸쳐 고구려와 선비의 침략을 지속적으로 받아 부여의 국력이 많이 약해졌음을 나타내고 있지요. 그래서 그 중심지인 녹산(鹿山)에서 후퇴하여 연(燕)나라 방면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346년 부여는 전연(前燕)을 세운(337) 모용선비의 침입을 받아서 사실상 패망의 길을 갑니다. 5세기 말 이름만 남은 부여는 고구려에 흡수되고 맙니다.
  
이제 다시 이 글을 봅시다. 위의 기록대로라면 부여는 처음에는 송화강 유역(길림·농안)에서 자리를 잡았다가 고구려의 잦은 침공으로 큰 타격을 입어서 새로운 터전으로 현재의 요동 방면으로 이동하여 국가부흥을 도모하려 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죠. 위구태(尉仇台)나 울구태(蔚仇台)가 공손씨(公孫氏)의 연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고구려를 협공하려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시기 요동 지역의 연나라도 과거 공손씨의 연나라가 아니죠. 선비의 연나라입니다. 선비의 연나라는 과거와 달리 부여에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부여가 자기 나라 옆에 터를 잡으려하자 오히려 부여를 공격하여 대패시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제가 볼 때, 이 과정에서 상당수 주류 부여계는 바로 한반도 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이 바로 근초고왕 이후 새로운 남부여(백제)의 주류 세력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이들이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돌아갈 곳이라고는 이미 초토화된 북부여(원부여) 지역밖에는 없고 그나마도 선비와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죠.
  
  잘 보세요. 이 346년 즉 부여가 '사실상 망한' 때가 바로 근초고왕(346~375), 즉위 원년이죠. 그리고 이 때 남부여(백제)는 계왕(契王 : 344~346)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왕이 있고 그는 "천품이 굳세고 용감하며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는 사람"인데도 "(즉위한 지) 3년 왕이 돌아갔다(『三國史記』百濟本紀 契王)."고만 짧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구절은 계왕이 암살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정치적 격변이 백제에 있었던 것이지요.
  
(2) 험난한 부여의 여정(旅程)
  
  초기의 부여는 현재의 길림(吉林)시 일대에 터전을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삼국지』). 이것을 알기 쉽게 북부여(北夫餘)라고 합시다. 그런데 285년 모용선비(貌容鮮卑, 또는 慕容鮮卑)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 왕이 자살하는 등의 큰 타격을 받습니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부여의 왕족과 일부의 무리가 북옥저쪽으로 피난을 갑니다. 지금으로 치면 태백산(장백산 : 백두산) 지역까지 갔다는 말이지요. 이런 가운데 중국의 진(晉)나라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길림지역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렇지만 일부의 세력들은 계속 두만강 유역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원인이 있죠. 부여는 이후에도 계속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서서히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것이죠(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1951).
  
  이 같은 변화에 대해서 국외자들이 보면 마치 두 개의 부여, 즉 동부여와 북부여가 존재하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하나의 나라지요. 쉽게 말하면 만성적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일종의 임시정부(피난정부), 또는 새도우 캐비닛(shadow cabinet)을 유지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이 피난정부와 본국정부와의 사이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는 점은 알아둡시다. 어차피 정치 아닙니까? 그리고 부여는 부족연맹(제가)의 성격이 강하고 왕권은 미약했으니 어느 곳에서든지 주요 부족이 있으면 국가는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연구자들도 동부여가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그저 부여의 동부지방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쓰다 고키치(津田左右吉)가 이 같은 견해를 제창(1924)한 이후 이께우찌히로시(池內宏)는 이를 분석하여 동부여(285)는 부여왕 의려의 동생과 아들이 북옥저(간도지방)에 세운 별국이며 125년 후 410년 광개토 대왕에 의해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었다는 것이죠(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1951). 이것을 대부분 정설로 보고 있습니다.
  
  부여는 이후에도 고구려로부터 지속적으로 시달립니다. 즉 고구려가 북으로 녹산(鹿山), 즉 길림지역을 장악하자 부여는 다시 북서쪽인 농안(農安)지역으로 피난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동부여와 북부여는 서로 떨어지게 되어 독자적으로 국가를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노태돈,『高句麗史 硏究』(사계절 : 1999), 511쪽].
  
  그렇지만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이 있죠. 이 동부여라는 나라명칭이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말은 사관(史官)들이 볼 때 동부여는 부여와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분국(分國), 또는 하나의 지방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나라들을 한번 모아봅시다. 사서(史書)에서 나오는 것만 보면 북부여(北扶餘)·동부여(東扶餘)·졸본부여(卒本扶餘 : 고구려?)·남부여(南扶餘 : 백제)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탁리(고리·색리)에서 나와 남하하여 세웠다는 북부여와 다시 갈라진 졸본부여 및 동부여 문제는 아직도 뚜렷한 정설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부여는 근거지를 자꾸 옮겨야 했을까요?
  
  부여는 양쪽에서 강성해지는 선비(서쪽)와 고구려(동쪽)를 맞이하여 지속적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① 요동 지방(남부여), ② 태백산지역(동부여), ③ 반도 남부(반도부여), ④ 일본 열도(열도부여) 등으로 끊임없이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부여의 분국(分國)이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물론 남부여를 바탕으로 반도부여를 건설하기가 용이했을 것이고 반도부여가 있음으로 열도부여를 건설하기가 쉬웠겠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일본은 무조건 백제만을 모태로 건설된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본과 백제는 오직 부여와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서 헤게모니는 요동부여(남부여) → 반도부여(남부여) → 열도부여 등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부여가 요동으로 간 전략적 이유는 크게 ① 상존하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보다 안전한 국가영역의 확보"에 대한 국가적 의지가 있었고, ② 부여의 주적(主敵)인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한 기지의 확보라는 군사적 이유, ③ 중국과의 연계를 통한 국가 안전망의 확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림 ②] 부여의 개략적 위치. ⓒ김운회

  그러나 부여는 이 같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선비의 연나라에게 대패하여 부여의 중심 세력이 한반도 남부로 밀려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는 이 세력이 바로 근초고왕 이후의 백제를 변화시키는 세력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근초고왕 시기에 뭔가 석연치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즉 근초고왕은 『삼국사기』에서 20여 년간 사라지는데 이 시기(349~363)에는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① (4세기 중반 이후)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고(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102쪽), ② 백제는 한반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하며(전라도·낙동강·황해도), ③ 일본에서도 활발한 정복사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④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이 출현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의 사학자들은 ⑤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야마도 정부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고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 운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이 부분은 조금 사실과 차이가 있죠. 『삼국사기』에는 364년 신라를 정벌하러 왔다가 대패하고 돌아갔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나아가 ⑥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비족이 진씨(眞氏)가 되고 이 진씨(眞氏)가 일본의 황족이 된다는 것이지요(뒤에 설명). 즉 진씨는 일본을 지배하고 부여씨(夫餘氏 : 당시에는 그냥 餘氏로 기록)는 한반도의 남부(남부여)를 지배하고 이들은 결혼을 통해서 굳게 결합되어있더라는 얘기입니다.
  
  만약 부여계가 일본을 진출하려 했다면 가야를 정벌하거나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즉 백제에서 바로 일본으로 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가야를 교두보로 하여 일본으로 가야한단 말입니다. 당시 근초고왕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닦아놓기 위해서 마한을 경략하고 가야를 정벌합니다. 이 때 함께했던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 목만치(木滿致)는 백제가 정복한 가야 땅의 지배자이기도 합니다.
  
  어떤가요? 기록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무엇인가가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의 부여계의 움직임에는 분명하고 뚜렷한 함수관계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부여 - 요동 - 백제 - 가야(친백제계 가야) - 일본을 전체적으로 묶을 수 있는 적합한 용어는 없지만 가장 적합한 말은 범부여공동체(凡夫餘共同體), 또는 범부여연합국가(凡夫餘聯合國家 : United States of Buyou : USB)일 것 같습니다. 참고로 부여를 중국식으로 푸요우(Fuyou)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부여는 불[火 : bul]에서 나온 말이지 중국어의 부(扶[fú])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3) 부여의 분국들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부여의 요동(남부여), 한반도(백제), 일본 분국설(야마도 : 大和)을 주장하는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분석에 앞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사가들은 백제 → 일본(한국사학계의 입장) 이라든가 일본 → 백제(일본 사학계의 입장)라는 식의 '자국 중심의 편집적 논리'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소아적(小我的)인 태도를 버리고 보다 사실에 접근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학문이 아닙니까?
  
  때에 따라서 일본에서 백제에 의존한 경우도 있고, 또 때에 따라서는 백제가 일본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을 일방적으로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중지해야 합니다. 쥬신의 역사를 그것도 쥬신이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우리는 배척해야 합니다. 그저 사실을 먼저 봐야합니다. 무엇보다도 백제는 반도 부여로, 일본은 열도부여로, 크게 보면 부여의 계통을 이으려고 처절히 몸부림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무슨 선후(先後)가 있겠습니까?
  
  슬픈 일은 한국(반도쥬신)과 일본(열도쥬신)에는 학문을 정치에 악용하려는 '정치꾼'이 너무 많고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정치지향적인 학자'들과 언론 기관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도 쥬신의 역사를 찾아가고 회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바로 전형적인 '마녀 사냥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신 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백제(남부여)와 일본은 부여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라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장에서도 많이 분석을 했지만 몇 가지 주요 부분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먼저 백제가 부여의 분국이라는 점을 한 번 더 살펴봅시다.
  
  첫째, 백제왕들은 일관되게 부여의 시조이신 동명왕에 제사를 지낼 뿐만 아니라 스스로 부여의 후예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북위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473)에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 및 『魏書』「百濟」). 그리고 『구당서(舊唐書)』의 기록("백제는 부여의 종족 가운데 하나")이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라고 하나의 항목으로 처리하여 '백제 = 남부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6세기 중엽 아예 남부여(南夫餘)로 국호를 바꾸는가 하면 『주서(周書)』에 "백제왕의 성씨는 부여씨(夫餘氏)인데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고 백성들은 왕을 건질지(鞬吉支)라고 부른다.(『周書』「百濟」)" 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어라하(於羅瑕)는 부여에서 왕을 일컫는 보통명사에서 나온 말로 추정하고 있으며 건길지(鞬吉支), 즉 '코니키시'·'코키시'는 돌궐에서 천자(天子)를 가리키는 '쾩키시'와 통한다고 합니다. 백제 왕실의 근원이 유목민이었음을 암시해 주죠. 이것은 백제가 분명히 부여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동시대의 역사서들에는 백제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요동 만주지역에서 부여 세력이 "사실상 와해된 이후" 백제라는 말이 사서에 등장합니다. 즉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 가운데 백제와 동시대에 가까운 기록들인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晋書)』등에는 백제(百濟)라는 말이 없고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에서 비로소 백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최소한 송나라(420~478) 때까지도 백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실제로도 3세기 이전에 백제는 마한의 속국으로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周書』「百濟」). 그러다 보니 여러 사서들에서 백제를 건국한 지역을 대방 지역 즉 구태의 남부여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죠(『북사(北史)』; 『수서(隋書)』).
  
  세째, 사서들에 나타나는 백제의 위치가 부여(夫餘)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송서(宋書)』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 리에 있었다(百濟國本與高麗俱左遼東之東千餘里 : 『宋書』97卷「百濟」)."고 합니다. 이 기록은 그대로 『양서(梁書)』에 있습니다.
  
  우선 이 말을 기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죠. 백제가 왜 고구려와 같이 요동에서 1천 리 떨어져 있습니까?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추정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요동에서 1천리 떨어져 고구려와 백제가 하나의 장소에서 나왔다고 본다면 쉽게 알 수 있죠. 고구려는 동부여에서부터 나왔지요? 그러면 그 곳은 바로 어디입니까? 부여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동·요서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대략 천리 길에 부여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백제는 분명히 부여의 대칭으로 사용된 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네째, 백제 왕실의 계보가 고이왕과 근초고왕 대에서 부여의 영향을 크게 받은 흔적이 있습니다. 고이왕의 경우는 앞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으니 여기서는 근초고왕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먼저 분서왕(298~304) - 비류왕(304~344) - 계왕(契王 : 344~346) - ⑨ 근초고왕(近肖古王 : 346~375)에 이르는 계보를 보세요. 이상한 사람이 있죠. 계왕(契王)이라는 이상한 표현이 있는데 재위는 겨우 3년입니다. 이상하죠. 즉 근초고왕을 즉위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 같습니다. 마치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제5공화국 당시 최규하 대통령처럼 말이지요. 무언가 엄청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는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재위 : 346~375) 때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가 워낙 다르기 때문입니다.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짧은 기간 동안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왕을 죽이고 마한과 가야 세력들을 모두 제압합니다. 백제전문가인 이도학교수도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백제의 역사상 유례없는 영역확장과 정치적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남북조 시대의 개막과 요동과 북중국의 혼란이 한강 주변의 소국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49쪽].
  
  그러나 제가 보기엔 다릅니다. 공손씨의 연나라의 멸망과 고구려와 선비의 침입으로 부여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부여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한반도로 내려옴으로써 백제가 강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고이왕이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시기나 근초고왕의 정복 시기는 요동에서 부여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이것은 무얼 말할까요? 요동에서의 부여세력의 약화는 한반도 남부의 부여세력 증대와 함수관계에 있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이 점은 나타납니다.
  
  부여 세력이 반도부여(백제)화되는 과정은 고분의 변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박순발 교수(충남대)는 "서울의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전에 나타나던 묘제 양식으로 묘를 조성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묘제 양식을 지닌 세력이 돌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백제가 갑자기 강력한 정복국가로 변신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근초고왕 때부터는 확실히 왕성이 부여씨(夫餘氏)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서(晉書)』를 포함한 여러 중국 사서들에서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여영(餘暎), 전지왕(典支王)은 여비(餘毗), 반유왕(畔有王)은 여경(餘慶), 개로왕(蓋鹵王)은 여융(餘隆), 무령왕(武寧王)은 여명(餘明), 성왕(聖王)은 여창(餘昌)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 29대 무왕(武王)부터는 부여장(扶餘璋)으로 부여(扶餘)씨로 기록합니다[『수서(隋書)』『당서(唐書)』].
  
  참고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해씨(解氏)로 삼았다"고 합니다(『三國遺事』「南夫余 前百濟」).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볼 때, 백제의 왕 중 부여씨임이 비교적 분명하게 입증되는 최초의 왕은 근초고왕이라는 것이죠. 물론 그 이전의 왕실의 성씨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백제 관련 연구자들은 "이와 함께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지요. 부여 세력이 반도로 이전해온 것이지요.
  
  이상의 논의를 보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4) 왜(일본)가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
  
  이제는 시각을 달리하여 왜가 부여의 분국인 이유들을 한번 봅시다.
  
  첫째, 백제의 영역이 일본 열도까지 연장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百濟國 …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 『舊唐書』卷 199 上 列傳 第149 東夷)"라고 하고 있습니다.
  
  둘째, 백제와 일본의 지배층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 통치세력은 남부여계라는 것입니다. 즉 야마도 조정의 통치자들이 대부분 백제계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혼을 통해 관계가 공고화됩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4세기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인데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입니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합니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1967). 따라서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심한 말은 아니지요.
  
  그러면 그 이전은 어떠했을까요? 일반적으로 일본의 청동기·철기 야요이(彌生, 300 B. C.-300 A. D.) 문화는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 신들의 고향, 경상남도 거창' 편에서 충분히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우진 천황과 그의 아들인 닌토쿠 천황은 백제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즈노유우(水野 祐) 교수는 오우진·닌토쿠(오우진의 아드님) 왕조(카와치왕조)는 외래 민족의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왕조로 기본적으로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부여)으로 대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대륙의 사정에 대해서도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1978).
  
  여기서 말하는 대륙이란 단순히 한반도의 상황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 지적은 오우진·닌토쿠 부자가 요동, 또는 요서 지역과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고 있죠. 다시 말해서 4세기 말경에 부여계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와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는 말이죠.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오우진 천황이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眞氏)라는 것입니다. 야마도 조정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오우진계의 씨족 이름이 진[眞, 眞人(마히토 : マヒト)]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백제의 친왕(親王)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息長眞人 出自譽田天皇 謚應神 … 島根眞人 大原眞人同祖 百濟親王之後也).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던 사람들은 오우진계의 천황들의 성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라고 합니다[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 : 1982) 204쪽]. 특히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함으로써 진씨 왕후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죠[이기백·이기동『韓國史講座Ⅰ : 古代篇 』(일조각 : 1983) 37쪽]. 아마 근초고왕과 진씨 집안은 대규모 동아시아 공정(프로젝트)을 계획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의 선조인 울구태는 원래 중국을 정벌하려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칸무(桓武) 천황의 다섯째 왕자인 만다친왕(萬多親王 : 788~830)이 편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따르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가운데 마히토(眞人)가 있는데 그 기원이 오오진천황(應神天皇)부터 라고 합니다. 백제가 멸망(660)한 후 텐무 천황(天武天皇)은 천황가의 절대성을 드높이고 일부 호족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신분제도를 마련합니다(684). 그런데 이 때 8대 성씨(八色之姓) 중에서 가장 높은 성이 마히토(眞人)인데 이 성은 일본 황족의 실제적 창시자인 오오진천황(應神天皇)을 비롯하여 케이타이천황(繼體天皇 : 507∼531), 센카천황(宣化天皇 : 535∼539), 비다쯔천황(敏達天皇 : 572∼585), 요메이천황(用明天皇 : 585∼587) 대까지 소급하여 황족들에게만 주어졌다고 합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헌 사학자인 사에끼 아리기요(佐伯有淸)는 대표적인 『신찬성씨록』연구가인데 그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케이타이(繼體) 천황, 비다쯔(敏達) 천황 등은 모두 백제왕의 직계 후손이고 죠메이(舒明) 천황은 '백제 천황'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비다즈 천황의 아내이자 일본의 자랑인 찬란한 아스카(飛鳥) 문화를 일으킨 일본 최초의 여왕 스이코(推古) 천황도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분이라고 합니다[佐伯有淸,『新撰姓氏錄の硏究』本文篇,「新撰姓氏錄 第1帙」(吉川弘文館 : 1962)].
  
  셋째, 형제국으로서 존재뿐만 아니라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를 묶어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것이 공동의 적, 즉 주적(主敵)에 대한 개념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제와 일본이 하나의 연맹국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간의 논쟁거리 중의 하나인 칠지도(七枝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칼의 존재는 확실히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가 하나의 부여 범주에 들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에서는 "백제왕이 왜왕(倭王)에게 칼을 하사(下賜)했다"고 하고 일본에서는 "백제왕이 천황(天皇)에게 칼을 헌상(獻上)했다."고 합니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부질없는 말싸움으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죠.
  
  이들 모두가 부여의 세력들인데 누가 누구에게 준 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이 칼은 372년 백제 조정이 오오진(應神) 천황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日本書紀』). 이 칼의 앞면에 새겨진 말은 "태화(泰和) 4년 백번을 두들겨 단련한 철로 이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어떤 군대도 무찌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후왕께 주노라(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辟百兵宜□供侯王□□□□作)"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키포인트는 '辟百兵'이라는 말 속에 숨어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군대라도 물리칠 수 있는 최고의 병기를 준다? 순수하게 자기의 속국에 준다고 보기도 어렵고 힘센 나라에 주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속국에게 준다면 언제 이들이 무장하여 본국을 공격할지 누가 압니까? 그리고 이 칼을 고구려와 같은 강국에게 준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죠. 속국이나 종주국, 또는 강대국은 현실정치에서는 잠재적 적이지요. 특히 변화무쌍한 국제정치의 논리에서 이들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속국에 준다고 하면 그 속국은 자기의 자식만큼 믿을만한 속국이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 이 칠지도는 혈맹, 또는 거의 하나의 나라에 가까운 존재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의 나라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이 가지는 뉘앙스는 공동의 적을 섬멸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천년의 숙적 고구려지요. 이 동족상잔(同族相殘)은 쥬신의 역사에서 최대의 비극입니다.
  

[그림 ③] 칠지도[일본의 가장 유서 깊은 신사인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소장]. ⓒ김운회  

 
  우리가 칠지도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세대를 넘어선 적군(敵軍)', 즉 천년의 숙적 고구려이지요. 즉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가 공동의 적을 위해 강력히 연합해야한다는 의지의 표현이 바로 칠지도로 구현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넷째,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정치적 교환관계가 단순히 본국-지방정권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매우 가까운 연맹왕국(형제국) 이상의 특성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특히 두 나라 왕실 사이의 관계를 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국의 왕가가 긴밀함은 물론, 열도부여(일본)에 있다가 반도부여(백제)로 와서 왕이 되고 반도 부여왕이 열도부여의 제청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왕은 백제의 왕위 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것은 일본과 백제를 묶어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레짐(political regime)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레짐 개념은 '중국이 미국의 지방정권이라니' 참고).
  
  나아가 이 두 세력은 서로가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정권도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백 년을 한결같이 이 같은 노력을 한 예는 찾아볼 수 없지요.
  
  먼저 신라 - 백제 - 왜(倭)의 관계를 보면 백제와 왜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반면, 신라와 왜·백제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못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삼국사기』「신라본기」를 보면 서기 500년 이전까지 왜가 49회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37회가 주로 해안지대의 침입에 관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경우, 397년부터 427년까지 백제와 왜는 일곱 차례 사절단을 교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근초고왕은 마한을 경략하고 가야를 정벌할 때 백제 명장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일본에서 온 장군 아라다와께(荒田別) 등과 함께 했으며 치구마나히코(千熊長彦)는 근초고왕과 벽지산(현재 전북 김제로 추정)에 함께 올라 (한마음으로) 맹세하였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功 49年). 여기에 나오는 목라근자의 아들인 목만치(木滿致)는 구이신왕(久爾辛王 : 420~427) 때 전권을 장악한 사람입니다. 목만치는 백제가 정복한 가야 땅의 지배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일본 정계를 오랫동안 장악하여 세도정치를 했던 소가가(蘇我家)의 선조인 소가노만치(蘇我滿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당시 전라도 지역에 왜(倭)의 군대가 활동한 것(『日本書紀』神功 49年)도 사실은 근초고왕이 주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근초고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군대가 이동한 것이라는 얘기지요.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가깝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죠.
  
  『일본서기』에 "백제의 진사왕이 (일본의) 천황에게 예의를 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노쓰노노쓰쿠네(紀角宿禰) 등을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힐책하였다. 그로 인해 백제국은 진사왕(辰斯王 : 385~392)을 죽이고 사죄하였다. 기노쓰노노쓰쿠네(紀角宿禰) 등은 아화(阿花 : 아신왕)를 세워 왕으로 삼고 돌아왔다(『日本書紀』應神 2年)."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일본서기』의 기록이 일방적으로 매사를 일본이 주관한 듯이 묘사하고 있어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삼국사기』는 진사왕이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음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신왕 6년 왜국과 우호를 맺으면서 태자(후일 전지왕)를 볼모로 보내고 있습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
  
  아마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의 눈이나 광개토대왕비 제작자들의 눈에는 이것이 볼모를 보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파악해보면 볼모가 아니라 정치적 동질성을 견고히 하고 혈맹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에 불과합니다.
  
  이후 아신왕은 열도부여(일본)와의 관계를 매우 돈독히 하고 열도 부여의 지원에 힘입어서 신라를 공격(407)하기도 합니다. 전지왕(腆支王)의 경우, 자기 삼촌(혈례)이 왕위를 찬탈하자 일본왕은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여 전지왕이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腆支王).
  
  이를 보면 일본과 백제는 하나의 나라 즉 보다 큰 차원의 부여의 분국, 또는 연맹왕국으로 볼 수밖에 없지요. 하나의 나라가 아니고서야 국가원수를 죽이거나 교체하는 일에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다섯째, 반도부여(백제)의 왕실과 열도부여(일본)의 왕실은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입니다(이 점은 다음 장에서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왕자들이나 왕족들은 거의 일본과 백제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권력이라는 것은 항상 분리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부여의 세력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판단됩니다. 그러니 일본은 '또 다른 남부여'인 셈이지요. 이런 종류의 기록들은 『일본서기』도처에 나옵니다.
  
  여섯째, 백제 - 가야 - 일본의 관계를 보여주는 실제 기록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 국가들은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며 그것을 묶어줄 수 있는 보다 큰 차원의 이데올로기가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부여이고요.
  
  예를 들면 『일본서기』긴메이(欽明 : 531~71) 천황 2년에 백제의 성명왕(523~554)이 가야에서 온 여러 사람들에게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好 以爲子弟)"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부분에서 다시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가야와 백제의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백제와 가야는 마치 형제처럼 가까우니 가야사람들도 백제에 대하여 아버지나 형처럼 대하세요."라고 합니다.(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 : 『日本書紀』)
  
  이것을 보면 백제와 가야의 관계를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백제와 가야는 매우 긴밀하여 형님-아우의 관계, 또는 아버지-아들의 관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창 국력이 강할 때 백제는 가야를 범부여 연맹의 일원으로 두고 마치 자식이나 아우의 나라로 대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기록들이 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것도 이상하죠? 그러나 일본과 백제를 관계를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뒷받침할만한 기록이 역시 『일본서기』에 있습니다. 즉 긴메이(欽明) 천황이 죽음을 앞두고 태자의 손을 잡으며 "가야연맹(임나)을 회복시켜 예전처럼 부부(夫婦)와 같은 관계를 회복하라"고 유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을 일부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속국이니 하는 말들을 씁니다만, 이 말은 의미 그대로 긴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封建任那 更造夫婦 惟如舊日 : 『日本書紀』欽明天皇)
  
  굳이 말을 하자면 백제-가야의 관계는 부모-자식의 관계인데 반하여 일본-가야는 부부의 관계로 묘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열도부여(일본)는 범부여연맹의 맹주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같은 관계를 보여주는 많은 기록들이 긴메이(欽明) 천황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곱째, 연맹국가 이상, 또는 같은 나라 수준이 아니면 곤란할 정도의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나 국가자원(national resources)의 이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동력의 이동 면에서 두드러집니다. 쉽게 말해서 반도부여로부터 전문가들을 포함하여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열도부여로 이주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이시다 에이찌로(石田英一郞)의 지적처럼 야마도 조정과 백제가 아무런 연관이 없이 성립되었다면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 됩니다[Ishida, 『Japanese Culture : A Study of Origins and Characteristics』(Univ. of Tokyo Press 1974)].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이 수립된 직후에, 한반도에서 사람들(백제인 : 반도부여인)이 야마도 지역(나라 현에 속하는 야마도 분지로 추정됨)으로 대량 이주해 온 사실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5세기 초인 오우진(應神) 천황 시기에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가 건너갔고 백제는 대장장이·토목공사전문가·양조업자·의복재단사 등의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보냈습니다. 특히『일본서기』에는 403년 궁월군[弓月君 : 하다씨(秦氏) 씨족의 시조]이 무려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 아지사주(阿知使主 : 아야족의 시조)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따르면 야마도 왕국의 중심부에는 아야 씨족이 너무 많아서 다른 씨족은 열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합니다(阿智使主 … 率十七縣人夫歸化 詔高市郡檜前村而居焉 凡高市郡內者 檜前忌寸及十七縣人夫 滿地而居 他姓者十而一二焉).
  
  『일본서기』에 따르면 463년(유략쿠 7년)에 대규모의 기능공들이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이주해왔는데 이들을 이전에 이주했던 사람들과 구별하여 '이마끼 아야(今來漢, 新漢)'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마끼'는 이제 막 건너온 사람(막 건너온 치)이라는 의미입니다(雄略 七年 西漢才伎歡因知利 … 取道於百濟 … 集聚百濟所貢今來才伎 … 天皇 … 命東漢直 以新漢陶部 … 鞍部.畵部.錦部.譯語.等 遷居于 或本云 吉備臣 … 還自百濟 獻漢手人部 衣縫部 宏人部)
  
  이 시기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하기 2백여 년 전입니다. 그러니까 백제와 일본 이 두 나라는 사실상 부여의 분국, 또는 '하나의 나라'로 보지 않고서는 민족교류가 해명이 되지 않는 것이죠.
  
  결국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열도로 이주해간 사실은 반도부여와 열도부여의 나라의 성격이 별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그 현실적인 정치세력들에 의한 갈등은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부여계(夫餘系)라는 왕조의 본질적 성격은 다르지 않다는 애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갑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반도 부여인들이 열도로 건너갔을까요?
  
  이것은 『삼국사기』와 비교해 보면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5세기 초는 고구려가 극성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백제는 아신왕(阿莘王 : 392~405)과 전지왕(腆支王 : 405~420) 시기에 해당합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격렬하게 전쟁을 하는데 지속적으로 백제가 밀리는 상황입니다. 특히 아신왕 4년(396) 백제군은 고구려군에 대패하여 8천명 이상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이를 설욕하기 위해 겨울 11월에 군대를 보냈으나 큰 눈이 내려 상당수의 병사들이 얼어 죽고 맙니다(四年 …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 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 次於靑木嶺下. 會, 大雪, 士卒多凍死 :『三國史記』「百濟本紀」) 당시의 사정을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에서는 "왕께서 친히 해군[水軍]을 거느리고 58성·7백 촌을 함락하고 인질로 왕의 동생과 십여 명의 대신을 데리고 환도하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끌려간 사람들은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을 고수했던 진씨(眞氏) 귀족들로 추정됩니다. 바로 일본의 황족이죠. 결국 진씨 세력이 반도에서는 크게 약화되었겠지요.
  
  이어 전지왕은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열도부여(일본)와의 긴밀한 협력을 위해 일본에 머물러 있다가 아신왕이 죽은 후 해씨(解氏) 세력과 왜왕(倭王)의 도움으로 즉위하게 됩니다(405). 전지왕은 419년 여름 일본(왜국)에 사신을 보내 흰색 비단 10필을 보냅니다(遣使倭國, 送白綿[錦]十匹).
  
  이런 과정에서 장수왕은 평양천도(427)를 단행하게 됩니다. 장수왕은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의 해상교통로를 차단함으로써 백제는 중국으로 가는 길이 묶이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적대관계였던 반도부여(남부여 : 백제)가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다가 옵니다. 여기에 고구려와 대치하던 북연(北燕)이 멸망(436)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도부여(백제)는 너무 오랫동안 고구려와 대치한 결과 극심한 국력소모현상이 나타납니다. 개로왕(蓋鹵王 : 455~475)은 무너져 내리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다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개로왕[부여경(夫餘慶)]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재물이 다하고 힘도 다하여 나라가 저절로 쇠약해지고 있다(『三國史記』「百濟本紀」)."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맙니다. 475년 장수왕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 돌아갑니다. 이 사건은 반도 부여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이죠. 더 이상 반도부여(백제)는 존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즈음 많은 반도 부여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여덟째, 반도부여(백제)에서 열도부여(일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반도부여의 수준에 준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즉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해 갔으며 그들에게도 백제에서 가졌던 지위에 따라 일본에서도 일정한 직위가 주어집니다.
  
  반도부여의 멸망 후 일본으로 간 인물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을 추려도 지면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약합니다. 지위에 따라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은 지토(持統) 천황때 백제왕이란 호를 받았고, 이후 정광삼(正廣參)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본 조정의 고위인사들이었습니다.(『續日本記』) 여기서 백제왕이란 일종의 새도우 캐비닛과 같은 종류지요.
  
  귀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신[餘自信 : 다카노미야꼬(高野造)의 시조], 귀실집사(鬼室集斯 : 복신의 아들), 사택소명(沙宅紹明), 사비복부(四比福夫)등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습니다. 사택소명은 반도부여의 최고위직인 대좌평의 위계에 추증이 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달솔(達率)이었던 곡나진수(谷那晋首)·목소귀자(木素貴子)·억례복류(憶禮福留) 등은 671년 열도부여(왜) 조정으로부터 대산하(大山下 : 종6위)의 관위를 제수 받았는데 그 가운데서 억례복류는 신라의 일본 침공에 대비할 목적으로 단행된 산성축조를 지휘하였습니다. 억례복류는 북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를 방어하기 위해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와 함께 현재의 오노성(大平野城)과 기성(椽城)을 축조하는데 오노성은 전형적인 백제산성으로 둘레가 5 km에 달합니다[이도학, 『새로쓰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263쪽].
  
  백제 전문가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대략 60여명 정도의 백제 유민이 일본의 조정에 참여했으며 일본의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681~620)의 편찬에 깊이 개입한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본 고대 역사서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이때 고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도학,『새로 쓰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260~264쪽]. 어떤 방식으로 고착이 되었는지는 다음 장에서 생각해보기로 하고 일단 넘어갑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일본서기』 텐지 천황(天智天皇) 부분에서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귤은 저마다 가지가지에 달려있지만
  (多致播那播 於能我曳多曳多 那例例騰母)
  구슬을 꿴다면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지
  (陀痲爾農矩騰岐 於野兒弘儞農俱)"
  
  (『日本書紀』 天智天皇 十年)
  
  위의 동요는 한문시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두문처럼 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귤은 다찌바나(多致播那播)로 되어있고 구슬은 다마(陀痲)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마는 잘 아실테고, 다찌바나는 고생종 귤을 말하는데 아직도 일본에서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고대 한반도 남부의 말인 것 같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위의 글들이 중국식으로 발음해서는 안 되고 지금 우리가 읽는 한자 발음으로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귤(多致播那播)을 읽을 때 중국어 발음인 '뚜오치뿌나아뿌'가 아니라 그저 다치파나(파)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제가 보기엔 播는 주격조사 은(는)으로, 爾는 목적격조사 을(를)로 사용된 말인 듯하고, 於能은 어능, 즉 '어느(어떤)'라는 한국 남부 사투리로 보입니다].
  
  신기하죠? 이 노래는 무려 1334년 전에 불려진 노래인데 지금 우리가 읽는 한국식 발음으로 알아낼 수가 있다니 말입니다. 이것은 일본어가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일본의 고대 노래는 한국인과 같이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동요는 반도부여(백제)의 지배 계층과 열도부여(일본)의 지배계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일본서기』에서 수많은 반도 부여인(백제인)들이 일본으로 오자 그들에게 관직을 주었다는 말 다음에 바로 나오는 노래거든요. 이것은 열도부여(일본)의 지배층과 반도부여(백제)의 지배층의 관계가 하나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본에로의 대량 이주는 최근까지도 연구의 대상입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하나하라(埴原和郎)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渡來人)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 지방의 대부분 사람들이 도래인이다"라고 합니다. 그는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한반도)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東京大學人類學雜紙 1987년 英文版「고대일본 이주자 수 추정」)
  
  참고로 지금도 일본에는 백제, 즉 '구다라(くだら)'라는 이름들이 일본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긴키(近畿)지방의 히라가타(枚方)시 동북쪽 나카미야(中宮)에 있는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 백제사(百濟寺)가 제일 유명하지요. 이 나카미야의 옛 이름도 백제야(百濟野)라고 합니다. 이 백제왕신사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 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오사카(大阪)에는 백제역(百濟驛)·백제천(百濟川)·백제교(百濟橋)·백제대교(百濟大橋) 등이 있으며 나라(奈良)에도 백제촌(百濟村)이 있습니다.
  아홉째, 일본 고분문화의 특성이 반도부여가 한반도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4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그 고분의 성격이 쥬신, 즉 만주와 몽골 지역 등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실용적이며 군사적이고 귀족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근초고왕이 백제를 지배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근초고왕의 행적은 20여 년이 나타나지를 않아서 일본 열도의 정벌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림 ④] 일본 내의 백제 관련 유적지. ⓒ김운회

  이 고분 문화는 선비나 흉노·부여·고구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반도부여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즉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는 이 세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얼버무렸는데 당시 고구려는 위나라의 전쟁 후유증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그러니 근초고왕에게 크게 당하여 국왕이 전사하는 일이 벌어지지요), 한반도 남부에 세력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열도로 옮겨 올만한 세력은 반도부여가 유일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4세기 후반에 대한 일본 역사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에키아리끼요(佐伯有淸)는 "신비의 4세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고분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는 전기[300년경~375 : 비교 근초고왕(346~375)]·중기[375~475 : 비교 근구수왕-개로왕(375~475) - 백제는 한성 시대]·후기[375~650 : 비교 문주왕 - 의자왕(475~660) - 백제는 웅진·사비시대] 등으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백제의 시대구분과 명확히 일치하고 있지요. 즉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하여 한 차례 고분의 변화가 일본에서 일어나고 문주왕과 더불어 웅진시대가 시작되고 일본에서도 후기 고분시대로 접어든다는 말입니다. 마치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의 사실상 건국자인 오오진(應神 : 호무다) 천황(실질적인 초대천황)의 아버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기 문화의 특징은 이전시대부터 지속되어온 것과 같이 소박하고 주술적이고 평화롭고 동남아시아적인 성격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즉 3세기~4세기에 나타나는 지배자들의 성격은 종교적 지배자의 성격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분에 나타나는 청동제 무기조차도 무기 본래의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에가미 교수에 따르면 전기 고분시대에는 정복전쟁을 수행할 군사적 용도인 부장품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에 반하여 4세기 후반, 즉 중기와 후기 문화는 실용적이며 군사적이고 귀족적인 북아시아적인 성격이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3~5세기 몽골과 만주지방의 호족(胡族)이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종류라는 것입니다. 즉 범쥬신의 문화가 그대로 이식되어있더라 그 말입니다. 더더욱 북아시아의 기만민족, 즉 범쥬신의 기마민족 문화가 문화적인 변용과정이나 수정을 그치지 않고 원래의 모습 그대로 일본에 전하여 졌다는 것이지요[홍원탁,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구다라 인터내셔널 : 1994) 41~48쪽 참고].
  
  에가미 나미오는 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을 침공한 뒤 북 규슈나 서부 혼슈에 상륙한 후 4세기 말에 긴끼(近畿) 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력한 야마도 조정을 세운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한국인형의 체격이 세토나이카이 해안과 혼슈와 긴끼 지방의 일본인들 사이에 매우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고분문화의 특성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 측의 연구자들도 4세기 후반 일본의 고분군들이 한국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하면서 그 지도자들은 기마민족의 무사들로서 투구를 쓰고 긴 칼을 찼으며 철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한국과 만주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Reischauer and Fairbank, 『East Asia The Great Tradition, Boston (Houghton Mifflin : 1973) 327~328쪽] 따라서 일본에서 수립된 야마도 조정은 남부여(백제)로부터 이식된 실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많은 연구자들이 부여(백제 포함)·고구려 세력의 일본 이주라고 보고 있는데 당시의 국제정세나 사료를 보면 부여 세력의 일본 이주가 가장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죠. 당시의 정세를 보면 고구려는 이동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에 의하면, 진무(神武) 천황이 규슈에서 일본본토로 동정(東征)했다고 쓴 『일본서기』의 내용은 사실은 4세기 부여족들이 규슈에서 일본 본토로 정복해 들어간 노선을 말하는 것이라는 얘기지요.
  
  20세기 초, 와세다 대학의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오우진 (호무다) 이전의 천황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쯔다 소오끼치교수가 주장하는 것 가운데 의미가 있는 부분은 오오진(應神 : 호무다) 천황 이후 7세기 후반의 덴지(天智, 626~672) 천황 이전의 왕위 승계는 대부분 부자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투르코-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처럼 형제간에 왕위의 계승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井上 等 編, 『日本歷史大系 1』1984).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오오진(應神)과 진무(神武)는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일인을 굳이 둘로 나눈 이유는 당시 오오진이 너무 잔인하게 열도를 정벌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오진(아마테라스)은 초기에는 강경하게 열도를 진압하여 과거 신라·가야 마이너 그룹(스사노오 계열) 및 원주민들을 철저히 탄압하여 죽입니다. 그리고 난 뒤 후기에는 평화의 시대를 열어 가는데 이것을 초기 야만적인 진압을 진무의 열도 정벌로 설명하고 후기를 오오진에 맞추었다는 것이죠.
  
  『일본서기』에 따라 이 과정을 간단히 봅시다. 오오진은 일본으로 들어간 3년 정도는 준비를 하고 동진하여 내륙인 야마토로 들어갑니다. 그 때 현지인들이 이미 천신(天神)의 아들(스사노오 계열)이 있다고 하자 진무 천황(오오진?)은 "천신의 자식은 여러 명"이라고 하고 그를 죽입니다. 그리고 일체 복종을 거부하는 자는 모두 죽이고 6년 동안 원정에서 "사악한 무리를 모두 죽였다"라고 표현합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끊임없이 싸워대는 2백여 명의 추장들을 호무다 왕자(오오진)는 모두 마을에 몰아넣은 후 처형했는데 시체에서는 무서운 악취가 풍기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오진은 와키카무 언덕에 올라 "아,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를 우리가 얻었는가?"라고 감탄합니다.
  
 
[그림 ⑤] 절대 권력의 상징 오오진(應神) 능. ⓒ김운회  
 
  이 일은 일본에서 두고두고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의 무의식 속에 외부 세력, 그것도 철기 세력에 의한 일본의 파괴라는 어떤 코드가 각인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즉 일본의 소설이나 영화들을 보면 외부의 침입에 의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잠재되어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주로 철(鐵)로 표현되는 문명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유명 영화인 『원령공주[怨靈公主 :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ひめ)]』에 보면 타타라 제철 마을이 나오죠? 이 마을은 에보시고젠이라는 여자가 다스리는데, 그녀는 숲에서 신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인간중심의 비옥한 땅으로 바꾸어보려고 생각하죠? 그래서 그녀는 팔려온 여자들과 학대 받아온 남자들을 모아 철을 만듭니다. 이 영화의 주된 테마는 바로 문명인에 의한 무자비한 자연의 파괴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일본 문화의 기저에는 고도의 문명이 자신의 생존의 터전을 파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듯합니다. 일본과 같이 심하게 문명화된 나라에는 어울리지가 않죠. 세계 최첨단 로봇을 만드는 나라의 집단 무의식 속에 철기에 대한 공포가 있다니 말입니다.
  
  열째, 일본 열도에서 야마도 조정의 수립 후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 들 가운데 쥬신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은 금속 가공에 관한 특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이 분야의 연구자에 따르면 일본으로 유입된 기마민족들이 야마도의 원주민과 다른 점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금속합금에 관한 지식이라고 합니다[Aoki, Michiko 『Ancient Myths and Early History of Japan : A Cultural Foundation』(Exposition Press : 1974) 39~40쪽].
  
  오오진능(應神陵)의 배총(陪冢)의 하나인 아리야마 고분 하나에서만도 3천 점 이상의 철제 검과 철제 도구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고분들에 대하여 번즈(Barnes) 교수는 ① 국가자원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통치 권력의 존재, ② 한반도와의 새로운 형태의 접촉 등을 지적합니다[홍원탁,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구다라 인터내셔널 : 1994) 59쪽 참고]. 전문 연구자들에 따르면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후지노키(藤木) 고분은 그 부장품들이 대부분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열한째, 요동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요동의 부여 세력들은 한반도로 지속적으로 이주했으며 이들 세력이 결국 열도부여(일본)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이 부분을 짐작할 만한 내용이 『일본서기』에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근초고왕 때, 남가라(南加羅 : 김해), 안라(安羅 : 함안), 녹국(㖨國) 등 가야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서쪽으로 몰아서 고해진(古奚津 : 강진?)을 무찌르고 비리(比利) 등 네 개의 읍이 항복했다는 등의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日本書紀』神功 49年). 이것은 세력이 약화되고 있는 요동부여가 반도부여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되어 이미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그 세력권을 더욱 확대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매우 짧다는 것이지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보병전(步兵戰)으로는 불가능하지요. 여러 지역에서 신속하게 정벌전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의 북방 기병(騎兵)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호남지역과 경상도 남부지역은 경상도 북부 지역과는 달리 넓은 평원이 있어 기병전(騎兵戰)에도 적합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황태후와 태자가 당시의 백제왕의 신하들을 보면서 "(돌아가신) 선왕께서 소망하시던 사람들이 내조하였습니다. 선왕께서 이를 보지 못하시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日本書紀』神功 47年)"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남부여(백제)는 요동에서 약화된 세력을 한반도와 일본의 정벌을 통해 회복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실제로 백제가 부여의 시조묘인 동명묘를 설치한 것은 4세기 중엽의 일이라고 합니다[이도학, 『새로 읽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117쪽].
  
  결국 요동부여 지역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근초고왕(부여계)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고(『日本書紀』神功 49年), 37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입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 近肖古王).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반도 부여인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이지요. 즉 4~5세기 경 대륙의 부여인들이 한반도로 거쳐 바다를 건너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4세기 전반에 규슈로 갔고, 이 지역을 정벌하고 야마도 왕조를 건설하는데 대략 1세기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열두째, 5~6세기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무덤양식이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의 문화 교류의 긴밀도를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입니다. 특히 이 시기는 웅진시대이기 때문에 백제의 국가적 위기에서 일본과의 교류가 왕성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마지막 휴식처는 아무 곳에나 두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것은 일본과 백제가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2004년 4월, 5~6세기 일본 규슈 지역 특유의 무덤양식으로 알려진 횡혈묘(橫穴墓)가 공주 지역(우성면 단지리)에서 15기 정도가 무더기로 발굴되었습니다. 이 횡혈묘는 언덕이나 암반에 마치 두더지처럼 구멍을 뚫고 현실(玄室 : 무덤방)을 만든 무덤으로 일본의 규슈 지역에 주로 나타났으며 출현 시기는 대체로 5세기 말 이후로 보고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런 횡혈묘는 그동안 중국이나 한반도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공주에 나타난 횡혈묘들은 그 동안 사서(史書)에는 나타나지 않던 백제와 일본 사이의 교류를 입증하는 대표적 유적으로 보입니다. 이 묘들은 짧은 연도(羨道 : 무덤 입구에서 현실까지의 통로)라든가 판석·목판이나 자갈로 무덤을 폐쇄한 점에서 후쿠오카(福岡)·오이타(大分) 등 북부 규슈(九州) 일대에 집중 분포된 일본 횡혈묘들과 흡사합니다.
  
  일본의 횡혈묘들의 조성 시기는 공주의 그것과 시기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특히 일본 횡혈묘 중에서 한반도계 유물이 부장된 예가 적지 않지요. 이것은 웅진(공주) 시대를 돕기 위해서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재건 세력이 백제방면으로 유입되었거나 백제에서 일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갔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백제의 웅진(공주) 시대죠. 한강유역을 거점으로 했던 남부여 즉 한성 백제가 사멸한 시점이지요.
  
  열세 째, 일본은 쥬신의 일반적인 특성인 천손족(天孫族)에 의한 통치를 공식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열도부여(진씨)에서 권력이 안정되는 과정을 면밀히 보면 반도부여(부여씨)와의 밀접한 관계가 파악이 될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백제) 세력의 약화와 열도부여(일본)의 강화가 하나의 함수관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축은 반도부여(백제) 왕실이라는 얘기지요.
  
  일본의 통치계급의 족보를 기록한 『신찬성씨록』서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의 자손[천손(天孫)]이 소(襲) 땅에 내려와 서쪽으로 그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신세(神世)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진무(神武)천황께서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하시고 동정(東征)하자 수많은 수장들이 항복하고, 반도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 공적에 따라 덕이 있는 사람들에게 땅이 주어졌다."라고 합니다.
  
  일본은 (ㄱ) 3~4세기에 걸쳐서 주술적인 지배자들이 통치하는 단계(신라·가야) → (ㄴ) 4세기 말~5세기에 걸쳐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통치자 계층의 일본열도 진출(남부여·가야) → (ㄷ) 6세기경에 새로운 왕조의 탄생(남부여계) 등의 형태로 전개됩니다. 현재의 천황도 이 새 왕조의 계보를 그대로 유지하죠. 그런데 이 새 왕조는 바로 부여계라는 것입니다(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상세히 봅시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가[미즈노유(水野祐), 에가미(江上波夫)]들은 4세기 초기 일본을 통치한 사람은 스진(崇神) 천황이며 그는 반도부여(백제)로부터 왔으며 규슈를 통치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반도부여(백제)의 약화와 열도부여(일본)의 강화가 서로 함수관계가 있다는 측면을 살펴봅시다.
  
  7세기 초 『수서(隋書)』「왜인전」의 기록에는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왜국을 대국으로 여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열도부여와 반도부여 사이에 헤게모니가 이전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크게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상당수의 반도부여인들이 열도부여(일본)로 이주해감으로써, 반도부여와 열도부여는 그 지위와 역할이 전환된 듯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7세기 초에는 열도부여의 인구가 반도부여인구보다도 많습니다.
  
  ② 초기에는 반도부여가 열도부여에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동 부여가 사실상 멸망한 이후 반도부여로 이동해온 세력들은 원래 부여 세력보다는 서열이 낮았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열도부여의 중심세력도 반도부여의 세력보다도 서열이 낮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초기에는 백제(남부여)왕의 지휘 하에 진씨(眞氏)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 열도를 개척하는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죠.
  
  ③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열도부여는 반도부여와 협력을 하되 독자적인 여러 가지 세력들이 형성이 되고 독립적인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두 나라는 서서히 차별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수백 년 간 모범적인 우의(友誼)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이 부분을 해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반도부여의 영향력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고고학적인 측면에도 나타납니다. 즉 6~7세기에 이르면 백제식 후기고분이 일본에서 잘 나타나지가 않죠.
  
  그리고 『삼국사기』는 왜국 건국연도 397년에 왜(倭)를 처음으로 거론하다가 닌도꾸(仁德) 천황계에서 한제이(反正) 천황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428년경에는 왜(倭)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다가 이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후 7세기 초에 이르러 '왜국(倭國)'이라 하여 국가로 부르고 있습니다( 『三國史記』「百濟本紀」武王 9年).
  
  이것은 왜 그럴까요? 반도부여의 주요세력들이 열도부여에서 정권을 상실해갔거나 반도부여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나 고구려의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아오고 있는 반도부여와 대비하여 열도부여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에서 경제적 성장을 착실히 다져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열도부여는 일방적으로 반도부여를 지원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독자성이나 정체성에 대한 회의가 나타날 수밖에 없지요. 특히 부여에 대한 계승의식이 반도부여(백제)처럼 강하게 나타나지는 못합니다. 일방적인 지원관계에서는 불가피하게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죠.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반도부여가 눈치를 보게 되겠지요.
  
  『삼국사기』를 분석해보면 의자왕 때에는 반도부여가 열도부여와의 사이가 원만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주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武王). 하기야 권력은 부자(父子)도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에서 수백 년을 공동 정부처럼 운영한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요. '부여'라는 공통성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봐야지요.
  
  참고로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교토꾸(孝德) 천황 원년(645) 고구려에 보낸 일본 왕의 교서에 "명신(明神)인 천하를 다스리는 일본천황(明神御宇 日本天皇)"이라고 지칭한 곳에 처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열네 째, 백제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일본의 의지가 연맹국가의 수준을 넘어서 마치 한 나라처럼 느껴집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일본은 마치 국운(國運)을 걸고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지키려는 듯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방(友邦)이라서 돕는 수준이 아닙니다. 한번 볼까요?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나카 왕자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백제를 원조하게 했고, 풍왕자는 5천명이 넘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고, 6명의 장군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갑니다. 그리고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좌평 복신(福信)에게는 화살 십만 척, 실 5백 근, 솜 1천 근, 피륙 1천단, 다룬 가죽 1천 장, 종자 벼 3천 석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내 다시 피륙 3백단을 백제왕(풍)에 주었다고 합니다. (『日本書紀』「天智天皇」).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나당연합군에 패배합니다. 그래서 왜(일본)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강은 금강 하구 부근의 기벌포(伎伐浦)라고 합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
  
  그리고『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 『日本書紀』「齊明天皇」)"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 서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당시 열도부여인(일본인)들이 백제의 멸망을 얼마나 처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은 이내 당나라와 신라연합군이 대군을 몰아서 일본으로 침공해올 것이라는 위기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엄청난 준비를 하게 됩니다. 다행스럽게 당나라는 일본을 침공하지는 않죠.
  
  따라서 백제와 일본은 두 개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夫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요동에서는 공손씨와 연합하고 한반도에서는 가야와 연합하기도 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부여라는 하나의 공통성으로 이들은 뭉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미즈노 유우(水野祐)교수는 『일본고대의 국가형성(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에서, "상고시대 일본의 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라고 요약합니다. 물론 미즈노 유우는 공동의 적이 신라라고 보는 것은 백제와 야마도 왕조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라고 봐야합니다. 백제의 적은 고구려였지 신라가 아니었습니다.
  
  백제는 긴 세월동안 고구려를 철천지원수로 보고 대립해왔습니다. 서로의 왕을 죽이고 보복하는 악순환을 수백 년 이상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반도 부여(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열도부여(일본)는 긴 세월을 다시 신라를 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에는 국내의 문제가 있을 경우 국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반도를 이용하는 나쁜 정치 관행이 형성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당(唐)나라와 야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나중에는 일본 국내에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하면 으레 한반도를 침략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죠.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여가 고구려 - 신라와 끝없는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오늘날에도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상의 논의들을 본다면 부여는 ① 요동, 또는 요서 지방, ② 백두산·두만강 지역, ③ 한반도, ④ 일본 열도 등으로 끊임없이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으며 실제로 이 지역에서 쉼 없이 분국을 건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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