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355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7>후고려기(後高麗記)(10) - 광인"에서 안녹산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안녹산 / 안록산 (安祿山)

[秋七月乙卯, 洛水泛漲, 毀天津橋及上陽宮仗舍. 洛、渭之間, 廬舍壞, 溺死者千餘人. 突厥登利可汗死. 北州刺史王斛斯爲幽州節度使: 幽州節度副使安祿山爲營州刺史, 充平廬軍節度副使, 押兩番、渤海、黑水四府經略使.]
가을 7월 을묘에, 낙수(洛水)가 범람하여[泛漲] 천진교(天津橋)와 상양궁(上陽宮)의 장사(仗舍)가 무너졌다. 낙수와 위수 사이에 여사(廬舍)가 무너져, 익사한 자가 천 명이나 되었다. 돌궐의 등리카간[登利可汗]이 죽었다. 북주자사(北州刺史) 왕곡사(王斛斯)를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로 삼고, 유주절도부사(幽州節度副使) 안록산(安祿山)을 영주자사(營州刺史) 평로군절도부사(平廬軍節度副使) 압양번발해흑수사부경략사(押兩番渤海黑水四府經略使)로 삼았다.
《구당서》 현종본기, 개원 29년 신사(741)
 
안록산. 당조 역사에서 지울수 없는 한 획을 그은 남자. 이 자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703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라고만 짐작한다. 한인도 선비족도 아닌 소그드인과 돌궐(투르크)의 혼혈인으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음차한 이름이 '안녹산'이다.(혹 '전쟁의 신'이라는 뜻의 '알락산'을 음역한 것이라고도) 기록된 바 안록산의 아버지는 소그드인으로 당의 무장이 된 안연언(安延偃)인데 친아버지가 아니라 양아버지라는 설도 있고, 어머니는 돌궐족(투르크)의 무녀(巫女)였던 아사덕씨(阿史德氏). 원래는 지금의 베이징 동북쪽 영주ㅡ그러니까 대조영과 이정기 같은 고려 유민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호시아랑(互市牙朗), 중개무역상이었다.
 
소그드란 이란 지역에 걸쳐 살던 유목민족이다. 고대 파사국(페르시아) 속주 가운데 하나였던 소그디아나 출신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그냥 아랍인 정도로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중국에서는 그들을 '속특(束特)'이라고 적고 '소그드'라고 불렀는데, 신라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 5수 가운데
 
蓬頭藍面異人間   쑥대머리 남빛 얼굴 이 세상 것이 아닌데,
押隊來庭學舞鸞   떼지어 뜰에 와서 난새춤을 배우도다
打鼓冬冬風瑟瑟   둥둥거리는 북소리와 솔솔 부는 바람에
南奔北躍也無端   남북으로 뛰고 달리니 끝이 없어라.
 
라는, '속독(束毒)'이라는 무용 제목이 가리키는 종족이 곧 소그드다.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지역에 해당하는 소그디아나에서 살던 이들이 머나먼 신라 땅까지 와서 살게 된 것은 그들의 활발한 대외무역활동의 결과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장사하는 이민족[胡]'이라는 뜻의 '상호(商胡)'·'가호(賈胡)'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순전히 '이(利)'를 찾아 동쪽으로 통하는 비단길을 지나온 장사의 귀재들이었다. 신라인들이 당의 땅에 만든 신라방처럼, 전통적으로 나라와 나라를 누비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들은 그들이 장사하러 간 곳에다 집단거주지를 만들어 그곳을 기반으로 다시 또 장사를 했는데, 천산산맥 북쪽 기슭, 동투르키스탄, 몽골 고원 안에도 소그드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있었고, 중국의 경우는 지금의 감숙(甘肅) 성 북서부, 그리고 수도 장안(長安)의 서시(西市) 부근에도 많이 살았다.
 
당조가 한창 성당(成唐)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태평성대를 구가할 무렵, 수도 장안의 여러 술집에서는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푸른 이국의 무희(舞姬), 호희(胡姬)들이 모여서 추는 호선무(胡仙舞)라는 춤이 특히 인기였다.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 TV에 보면 유흥업소 같은데 나가는 러시아 댄서들, 소위 '백마'와 같은 이미지였을듯) 당조를 지나 고려에도 들어온 이들 무용은 고려기(高麗技)라는 이름으로 다시 당에 역수입되어 당의 궁중무용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워낙 이민족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다보니 이들 소그드인이 능력을 인정받아 정계에 등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안록산의 경우는 무려 6개국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하니(우리말도 포함되려나?) 이 정도면 거의 상인이 아니라 외교관이라고까지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을 때 나이가 30대쯤 되었는데, 당시 유주절도사였던 장수규(張守珪)에게 발탁되어 그의 양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무관으로서 지내다가 당 현종 개원 29년-천보 원년(741년)에 처음, 영주자사 겸 평로군절도부사 압양번발해흑수사부경략사라는 관직을 제수받은 것.
 
현종에게 뇌물까지 써가면서 평로절도사로 승진하는 것은 이듬해인 천보 2년(742)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이 자가 절정에 달한 당조의 태평성대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 못 하고 있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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