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524146

[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46> 성균관
[중앙일보] 입력 2010.10.15 05:01 / 수정 2010.10.15 07:23  이한길 기자

비판 상소에 화난 연산군, 성균관을 기생 거처로 만든 적도 있어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인기입니다. 여장 남자인 김윤희가 ‘김윤식’이란 이름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뒤 겪는 사건을 다뤘습니다. 원작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인기의 비결이 뭘까요? ‘조선 최고의 엘리트’라는 근엄한 이미지로만 각인돼 온 성균관 유생들의 솔직하고 장난기 가득한 모습에 사람들이 반한 게 아닌가 합니다. 역사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일들이 실제로 있었을까?”라는 것입니다. 마침 이 질문에 답하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신 윤기가 쓴 『반중잡영(泮中雜詠)』입니다. 윤기는 성균관에서 보낸 20여 년을 220편의 시로 남겼습니다. 그럼 성균관 유생들의 실생활을 알아보겠습니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조선이 건국된 지 7년째가 되던 1398년, 태조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 캠퍼스 안에 성균관을 세웁니다. 올해로 612년째입니다. 600여 년 역사에 곡절이 없을 수 없겠죠. 연산군은 유생들이 자신의 사치와 향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화가 나서 성균관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성균관은 한동안 기생들의 거처로 쓰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건물이 대부분 불타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건물들은 선조 이후 복원된 것들이 많습니다.

성균관은 크게 학습 공간과 제사 공간으로 나눠진다. 학습 공간의 중심 건물이 명륜당이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오전에는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자습을 했다. 명륜당 앞의 넒은 마당은 과거시험장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성균관대 제공]

사실 성균관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992년 고려는 ‘태학’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세웁니다. 이 태학이 고려 말 성균관으로 명칭이 바뀌어 조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북한에선 성균관의 역사를 1000년으로 봅니다. 1992년 개성의 성균관에선 김일성이 참가한 설립 10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일종의 국가 장학생이었습니다. 학비·기숙사비·식비는 모두 국가가 부담했습니다. 대궐 다음으로 고기반찬이 자주 나오던 곳이 성균관이었다고 합니다. 학용품도 공짜였습니다. 많지는 않았지만 매달 술까지 나눠줬습니다. 책이 귀하던 시절, 도서관인 ‘존경각’도 자유롭게 이용했습니다. 요즘도 장학금을 많이 주는 대학의 경쟁률이 올라가 듯, 혜택이 많은 성균관의 입학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소과와 대과로 나눠져 있습니다.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진사가 되고 대과를 통과해야만 정식으로 관직에 나가게 됩니다. 소과는 예비시험, 대과는 본시험인 셈입니다. 바로 소과를 통과해야만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정원은 200명입니다. 아버지가 고위 관료일 경우 과거를 보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하재생’이라 불리며 무시당했습니다.

신입생 환영회부터 커닝까지


성균관 유생들의 운동회였던 대사례를 재연한 1940년대 사진. 유생들은 봄·가을이면 대사례를 열어 활 쏘기와 지금의 축구와 비슷한 경기인 ‘축국’을 즐겼다. TV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대사례가 매우 큰 행사로 그려진다.

유생들은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으며 ‘스파르타’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오전에는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그날 배운 것을 복습했습니다. 학교 안에선 장기 등 취미생활도 금지됐습니다. 한 달에 쉬는 날은 고작 이틀. 공식적인 이유는 ‘옷을 빨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쉬는 날에도 유생들은 바둑을 두거나 사냥·낚시를 하다 걸리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요즘의 재수 기숙학원을 연상시키는 빡빡한 일정입니다. 그러나 피 끓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 소동이 없을 수 없겠지요.

그 시작은 신입생 환영회입니다. 드라마에선 ‘신방례’라는 신입생 환영회가 등장합니다.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밀가루를 뿌리고 주인공 김윤희에게 “한양 최고 기생의 비단 속곳을 가져오라”는 등의 짓궂은 명령을 내립니다. 정말로 그런 명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드라마적 상상력이지요. 다만 중종 때 기록을 보면 성균관 선배들은 새로 생원이나 진사가 된 사람의 집에 찾아가서 거나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가난한 유생들은 이 때문에 성균관 입학을 그만두는 일도 있었습니다. 조정에선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해 주모자인 학생회 임원들이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처벌을 내립니다.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면책례’도 있습니다. 선배가 “누구누구를 면책한다!”고 선언하면 유생들과 시중 드는 노비들은 그 사람의 방으로 몰려갑니다. 욕을 하고 밀쳐 넘어뜨리며 당사자를 조롱했습니다. 면책례는 고려시대 건방진 권문세족 집안 출신 유생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생겼다고 합니다.

유생들은 원칙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성균관에는 기숙사 2동이 있습니다. ‘동재’와 ‘서재’로 각각 두 칸짜리 방 28개가 있습니다. 한 방에 2~4명이 지냅니다. 드라마에서도 김윤희와 이선준·문재신 셋이서 한 방을 쓰지요. 2005년까지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학생들도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조선 후기엔 기숙사도 같은 당파끼리 씁니다. 

당쟁의 여파가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미친 것이지요. 서재는 노론이 썼고 동재는 소론과 남인·북인들이 지냈습니다. 학생회 대표인 ‘장의’도 동재와 서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았습니다. 기숙사 생활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온돌이 없어 겨울엔 화로를 끼고 살거나 이불을 몇 겹씩 덮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균관 근처 반촌에서 하숙하는 유생들도 많았습니다. 서재 네 번째 방에선 개고기를 먹다 체해서 죽은 유생의 귀신이 나오기도 했다는군요.


성균관이 세워진 직후인 1400년께에 그려진 성균관 조감도.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지도의 가운데에 있는 큰 건물이 공자 등 성현에게 제사 지내던 대성전. 뒤쪽 가운데 건물이 강의실인 명륜당이다. 양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반수’로 하천 이름을 따 성균관을 ‘반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생들 역시 요즘 대학생들처럼 시험에 치여 살았습니다. 매일 유생 두 명을 골라 그날 배운 내용을 외우고 뜻을 풀게 하는 ‘일고’, 열흘마다 보는 작문시험 ‘순고’, 달마다 보는 ‘월고’, 일년에 두 번 보는 ‘연고’까지. 그 외에도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친시’도 있었습니다. 시험이 잦다 보니 시험 공포증에 걸린 유생도 있었습니다. 선조 때 유생 정사신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청심환 세 알을 먹고서야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정사신은 훗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됩니다.

커닝도 등장합니다. 1705년 명륜당 앞 과거시험장에선 땅에 묻힌 노끈 하나가 발견됩니다. 노끈은 땅속 15㎝ 깊이의 대나무 관을 통해 30여m 옆 정자까지 이어졌습니다. 방수를 위해 대나무 위에 기와까지 덮어뒀다고 합니다. 문제가 출제되면 대나무 관을 통해 문제를 시험장 바깥으로 내보내고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람이 답안을 대신 쓴 뒤 다시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내는 장치였던 겁니다. 누가 이런 대공사를 했을까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커닝 설비에 형조까지 나서 성균관 노비들을 고문했지만 결국 단서를 잡지 못했습니다. 범인은 300년이 지난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성균관의 대학로, 반촌


소과를 통과하고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명륜당에서 공부하며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는 동재와 서재로 나눠져 있었는데 각각 28개의 방이 있었다. 최근인 2005년까지도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학생들은 이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정문부터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까지는 조선의 대학로 ‘반촌’이었습니다. 반촌을 ‘조선의 게토(getto)’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습니다.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자 빈민가였습니다. 반촌엔 야간 통금도 없고 포졸이나 순라꾼이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신성한 성균관 근처였거든요. 이 때문에 유난히 강력 사건이 많았다고 합니다.

반촌의 주민인 ‘반인’들 중엔 천민인 백정들이 많았습니다. 조선 최고의 두뇌들이 공부하는 곳 바로 옆에 최하층 천민들이 살았다는 점에서 반촌은 독특한 동네였습니다. 유생들은 반촌에서 하숙도 하고 주전부리도 사먹으며 반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돈을 빌리기도 했지요. 실학자 정약용은 서학(천주교) 비밀 스터디 장소를 빌려 준 반인 김석태가 곤장을 맞아 죽자 제문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제문에서 정약용은 “내 잘못을 남이 지적하면 칼을 뽑아 크게 화내던 사람”이라고 슬퍼했습니다.

지금까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 유생들의 실생활을 살펴봤습니다. 그들 역시 지금의 대학생들처럼 시험을 앞두고 힘들어하고 때론 술을 먹고 싸우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상소문을 써 대궐까지 찾아간 의기 있는 청년들이기도 했습니다. 유생들이 상소가 든 함을 앞세우고 대궐로 향할 땐 대신이라도 말에서 내려야 했고 근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왕이 상소를 듣지 않으면 성균관을 비우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습니다. 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은 유생의 사명이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의 숨결을 맡고 싶다면 직접 성균관을 찾아가 보세요. 지금도 명륜당을 비롯한 성균관 일원을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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