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oskhouse.blogspot.kr/2010/10/blog-post_08.html

반촌 반인(泮村 泮人)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주변 지역을 성균관이 있다하여 관동(館洞)이라 불렀다. 관동은 성균관 일을 도맡아 하는 노비들이 많이 사는 마을로 반촌(泮村)이라고도 하였다. 그곳 마을 사람의 대부분인 노비들은 고려의 유학자 회헌(晦軒) 안유(安裕)가 개성 성균관에 바친 노비 100명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성균관도 한양으로 옮길 때 이들도 함께 따라와 자리잡고 산 곳이 관동이고 반촌이라는 것이다. 수백년이 지난 조선 말이 되면 그곳 마을에 사는 사람의 분포가 많이 달라졌을 만도 한데, 그때까지도 그곳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신들이 다 안유 노비 후손인 것으로 알고있다고 전해져 오고있다.

반촌 사람들은 어떻게 수백년 동안 그곳 한 곳에만 모여서 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왜 들어가 살 수 없었는지, 이들은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이들이 살고 있던 반촌이라는 곳은 정확히 '성균관 주변' 어디이고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관동이라는 곳과 정말로 같은 곳인지, 이 모든 것이 다 무척 궁금하다. 하나하나 알아보도록 하겠다.

관동이라는 이름이 성균관에서 비롯되었듯이 반촌도 성균관의 다른 이름인 반궁에서 비롯되었다. 옛 중국 주(周)나라 시절에 천자국에는 모양이 둥글고 사방이 물에 둘러싸인 학교를 지어 벽옹(辟雍)이라 하고 제후국에는 격을 낮춰 반쪽만 물로 싸인 학교를 지어 반궁(泮宮)이라 했는데, 조선의 성균관도 이를 따라 반궁이라 한 것이다. 성종 때에는 성균관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키우고 다듬은 후  동서로 내를 만들어 정문에서 모은 후 남쪽으로 흐르게 하여 반수(泮水)의 구색을 어느정도 갖추어 놓기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반궁의 시작이고, 이를 따라 반수를 비롯해 반교, 반촌, 반민, 반인, 반와(泮蛙), 반주인등 여러가지 반궁과 관련된 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 반수는 복개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인조 6년인 1628년에 영의정을 지낸 추탄 오윤겸이나 함께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의 어릴 때 집이 우연히도 같이 관동에 있었다. 관동은 노비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추탄은 선대에도 이곳에서 살았지만 월사는 연건동에서 살다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무조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곳도 아닌 것 같다. 관동에는 사대부가 사는 지역이나 평민들이 사는 지역이 있고 노비들이 사는 지역도 있으면서 서로 어느 정도 구분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분제도가 확실한 조선시대에 사대부와 노비가 이웃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울려 산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반촌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반촌이란 이름이 등장하면서 이 지역에서 관동이라는 이름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던 마을이 후에 재정비 되면서 지역의 범위나 위치가 다소 달라진 것은 아닌지 궁금증이 생긴다. 지역을 가르는 정확한 경계 표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洞)이나 골이라 하여도 어디가 어디인지 뚜렷이 알 수 없었던 것이 그 시절이었는데, 이 지역에 와서는 지역 경계가 더 불분명하고 규모도 다른, 촌(村)이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균관 앞 반수 주위에 모여 살았다' 라든가 '반촌 북쪽에 제단을 세우고 문성공의 기일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반촌의 북쪽 경계가 어느정도 짐작은 된다. 일단 성균관을 넘어 북쪽으로는 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반수 주위'라 하였으니 이곳은 동반동이나 서반동으로 부르던 지역과 겹치는 지역으로 이미 '반촌이 관동'이라는 말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쪽 경계는 북쪽보다 비교적 상세히 기록에 나타나 있다. 관현(館峴)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을 경계로 삼았다가, 점점 남쪽으로 내려와서 정조 때 경모궁 앞에 연지(蓮池)를 파고 응란교(凝鸞橋)라는 다리를 놓고 비를 세우면서 이곳을 반촌의 경계로 하였다고 하였다. 관현은 창경궁 월근문 쪽에서 성균관으로 넘어가는 작은 언덕을 말하는 것으로 이 언덕과 현재 삼선교로 넘어가는 큰 언덕길을 경계로 그 북쪽이 초기의 반촌 지역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현재 동숭동이나 연건동 부근까지 확대되었다는 의미이다.

반촌의 추정 범위

결국 반촌은 명륜 3가 성균관 남쪽부터 시작해서 명륜 2가를 지나 최소 명륜 4가까지였다는 말이 된다. 이곳에는 이미 여러 이름의 많은 동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반촌은 관동 하나로 단정하기 보다는 여러 동이 포함되어 있는 좀 더 큰 구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지대가 높고 산이 있는 지역은 돈 많고 권세있는 사람들이 한가로운 주택가로 차지하고, 지대가 낮고 물이 있는 지역은 반대의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한 장소로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 통념이 이곳에도 적용된 것인지 반촌 사람들은 지대가 높고 산이 있어 외진 성균관 북쪽보다는 지대가 낮고 물이 모여 번잡한 남쪽으로 계속 영역을 넓히면서 살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촌의 노른자위 업소인 현방이 현재의 대명거리인 반촌길 주위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이곳이 당시에는 반촌 내에서 제법 번화한 거리였다. 지금의 대명거리도 제법 번잡한 편인데 옛 반촌길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리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반촌은 성균관 재(기숙사)에 들지 못한 유생들의 하숙촌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과거 보러온 유생들의 여관촌이 되기도 하였다. 성균관 내에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학문이나 이념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의 천주교 학습 사건은 특히 잘 알려져있다. 이런 것을 보면 반촌이 무척 개방적인 곳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폐쇄성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고 외부 사람들은 이곳으로 들어와 살지 못하였다. 18세기이후에는 특히 이 성격이 강해져 아무리 권세 있는 사대부 집안이라 하여도 이곳에 거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 도시 속 섬이었다. 또한 이곳은 성현을 모시는 문묘가 있는 곳이라 성역으로 인식되어 죄 짓고 도망해 들어와도 체포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관례가 무너지면 성균관 유생들이 내버려두지 않고 시위를 하였고 결국은 임금이 직접 나서서 해결 할 정도였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으면서 치외법권적 특권까지 누리는 지역이었다.

반촌 사람들은 반인(泮人) 또는 반민(泮民)이라 불렸다. 안유 노비의 후손들인 이들 반인은 따지고 보면 개성(開城)에서 이사 와 한성 사람들과 잘 섞이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말도 한성 말이 아닌 개성 말을 쓰고 사물에 대한 명칭도 한성 사람과 다르게 하였다. 옷도 '개성 스타일'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입었다. 협기(俠氣)가 있어 싸움을 잘 하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다. 이런 것들이 일반 한성 사람과 구별 되는 내용이고, 반인들의 특성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반촌이 해체될 때까지 조선 개국 이래 수백년을 반촌에서만 살면서 성균관 내의 힘든 잡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성균관의 제사에서부터 성균관 유생들 시중까지 모든 일을 하였다. 힘든 성균관 일을 하면서 이들은 적절한 생계 수단도 마련하여야 했다. 신역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공을 바쳐야 했으니 수입이 있어야 했다. 수입이 있어야 하니 유생들을 위한 하숙집도 내고 식당도 차렸다. 반촌 독점 음식인 설렁탕도 만들어 팔았다. 수입에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 여러가지로 했음이 당연하다.

반인들 숫자가 늘어나고 성균관에 대한 나라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나라에서는 이들에 대한 생계대책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식단에 오르는 소고기 공급이 원할히 되도록 나라에서는 이들이 현방이라는 푸주간을 독점적으로 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들이 현방에서 소고기를 팔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로서는 커다란 특혜였다. 현방에서 얻어진 수입의 일부는 국가에 세금으로 되돌려지기도 하였다. 양자간에 일종의 '윈-윈'전략이 성공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들은 현방에서 직접 소 도살을 할 수 있는 허가까지도 받았다. 도살을 하고 소고기를 팔아서 생계에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지만, 노비의 신분에 더하여 백정들이나 하는 도살을 한다는 것으로 인하여 세인(世人)들로 부터 많은 천시를 받아야 했다. 이들을 백정들처럼 천하게 여기다 보니 세인들은 이들과 교제나 혼인 하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고, 이들은 자연히 세인의 천대에 열등감이나 모욕감과 아울러 적개심도 갖게 되었다. 혼인도 반인끼리만 하였고 서로를 위하여 단결력을 키우고 의리를 내세워 죽기를 불사하는 기백까지 키워가면서도 더욱 더 자기 자신들을 반촌 속에 가두어놓게 되었다. 성현을 모신다는 자부심도 점차 없어져 반촌 거리에서는 투전이나 칼부림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에 들어 새 교육제도가 시행되면서 성균관이 무너지고 반촌도 해체되었다. 신분제도가 붕괴되면서 반인에 대한 차별 대우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반촌이 없어지고 노비에서 벗어났어도 많은 반인들은 여전히 도살을 하고 푸주간을 운영하면서 살았다. 아울러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멸시나 모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손들에 대한 교육사업에 매우 헌신적이었다. 자금을 모아 학교를 세워 자신들의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낌없이 자금을 출연해 학교 재정이 전혀 곤란하지 않게 하였다. 이때 이들이 세운 학교가 숭정의숙(1910)으로 숭정학교를 거쳐 지금은 혜화초등학교가 되어있다.

개성에 있던 안유 노비의 후손들이 한성으로 이주해 와 5백여년간 자리잡고 살던 반촌. 이곳에서 주위와 격리되어 폐쇄된 삶을 살면서 독특한 일을 하던 반인. 지금은 이 마을의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들이 누구이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난 100년사이에 이들은 이렇게 우리들한테서 잊혀져 있었다. 반인의 신분으로 병자호란 후 나라로부터 정문을 받았고 호성사라는 사당에도 들게된 성균관 수복 정신국의 후손이 지금 성균관에서 30년째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최근에 우연히 듣게 되었다. 정문도 없어지고 사당도 없어진 지금이지만 그 후손은 언제 시간을 내어 꼭 한번 만나보고싶다.

20101008/20120103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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