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917150300436

* [고구려사 명장면 105] 는 없는 듯. 

당태종과 김춘추의 밀약을 공개하다.

[고구려사 명장면 106] 

임기환 입력 2020.09.17. 15:03 


648년 12월에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 사이에 맺은 밀약은 671년에 공식적으로 공개된다.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에 전쟁을 선포하고 백제 땅에서 당군을 격퇴시키고 이 지역을 장악해 갔다. 이에 당군 사령관 설인귀가 신라를 비난하는 문서를 보내자, 신라 문무왕이 당의 설인귀에게 보낸 문서에서 이 밀약의 내용을 거론하며 신라의 군사 행동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 밀약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왜냐하면 648년 당시 고구려 원정을 위한 당 태종의 의지가 얼마나 강하였는지, 또 이때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 연합이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왕(김춘추)이 정관(貞觀) 22년에 입조하여 태종문성황제(당 태종)를 만나 받은 은혜로운 칙명에서 '짐이 이제 고려(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나라(신라)가 두 나라(고구려, 백제)에 끼어서 매번 침입을 받아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보배(玉帛)와 자녀는 나도 갖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도록 하겠다(我平定兩國 平壤已南 百濟土地 騈乞?新羅 永爲安逸)'고 하고는 계책을 내리고 군사 기일(軍期)을 정해 주었다.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서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큰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문제(文帝)가 먼저 돌아갔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조)


위 밀약 내용은 당 측의 어떤 기록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신라 측이 자기변명을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중국학자의 주장도 있지만, 단지 신라에서만 전하고 있다는 점이 밀약 내용을 부정할 근거는 될 수 없다, 문무왕의 답서라는 일종의 공식 외교문서에 해당되는 글에서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이 밀약 내용은 사실로 보아야 한다.


더욱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661년에 백제 부흥군을 이끌던 도침이 "당이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를 격파하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죽인 후 백제를 신라에 넘겨주겠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항전의 명분을 내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당과 신라 사이에 밀약을 맺었음은 분명하고, 백제 땅을 신라에 넘긴다는 밀약의 내용도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밀약이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문서로 작성되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 구두로 약속한 내용을 김춘추가 귀국한 뒤 문서로 작성해서 보고하고, 이를 신라 왕실이 보관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당 태종과 김춘추 사이 협약이 문서로 작성되었든, 구두로 약속한 것이든 그리 문제는 아니다. 당과 신라 사이에 현격한 국력 차이가 있기 때문에 문서로 작성되었다고 해서 당 태종이 그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다. 어차피 이는 당 태종과 김춘추 두 사람 사이의 신뢰 문제이고, 당 태종 자신의 명성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위 밀약에서 중요한 점은 당과 신라 군사연합이 고구려와 백제 정벌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양측이 전쟁의 성과를 나눌 때 "평양이남 백제토지(平壤已南 百濟土地)"가 신라에 귀속된다고 합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현재 일부 학자들은 "평양이남 백제토지(平壤已南 百濟土地)"란 문구를 놓고 백제 영역만 신라에 귀속된다고 해석하면서, 이를 근거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의지가 없었고 단지 백제만을 병합하려고 하였다는 '백제병합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은 적잖은 논란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이를 소개할 수는 없고 추후를 기약한다. 필자 역시 위 문구를 "평양 이남에 있는 고구려 영토와 백제 영토"라는 통상의 해석에 동의한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 태종은 649년 고구려 원정을 목표로 모든 준비를 착착 갖추어 가고 있었다. 다만 이번 2차 원정에서도 고구려 요동 전선을 돌파하고 평양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이 말 그대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수양제는 물론, 당 태종 자신이 이미 지난 645년 원정에서 고구려 성곽을 공략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사실 요동을 가로질러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새로운 공격 전략이 필요함을 깨닫고 있었다. 이때 신라 김춘추가 당을 방문한 것이다.


당 태종은 이번 원정에 신라군을 동원하는 것이 새로운 전략의 핵심이라고 새삼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645년 원정 때에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군 3만명이 고구려 수구성(水口城)을 공격하다가 백제의 신라 공격으로 회군한 전례가 있었음을 당 태종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당 태종 자신이 고구려 원정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군 동향은 전쟁의 변수로 그리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재원정에서는 신라군의 역할이 원정 성공 여부를 가르는 새 전략의 하나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만 신라군을 동원하기 위해 백제를 먼저 정벌한 뒤 고구려를 정벌하는 시나리오는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위 밀약에 나타나 있다. 649년 고구려 재원정 계획은 신라와의 군사적 연합과 관계없이 647년부터 추진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춘추 입장은 백제 정벌이 1순위였다. 따라서 백제 공격을 선행하지 않은 군사 연합에서 신라군을 고구려 정벌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김춘추가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이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역'을 신라에 할양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양국이 백제를 공략하여 멸망시키고 '백제토지' 역시 신라에 할양한다는 추가 조건까지 함께 협의되었다. 이점에서도 648년 당시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얼마나 조급해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위 밀약 내용 중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보배(玉帛)와 자녀는 나도 갖고 있다"는 발언은 일면 당 태종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 태종은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고구려를 굴복시켜 645년 원정의 실패를 보상하고, 평양성에서 천하제패의 축배를 올리고 황제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더 우선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왜 영역 분할의 기준이 평양이었을까? 최종 공격 목표를 고구려 평양으로 설정하면 신라군에 평양 이남에서의 군사 활동을 전적으로 요구하였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된다. 실제로 667~668년의 평양성 공격 시에도 신라군이 평양 이남에서의 공세를 담당했다. 어쨌든 백제 정벌 이전에 고구려 원정에서 신라군의 적극적인 공세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함을 당 태종도 충분히 고려했다. 그것은 바로 평양 이남의 군사 작전을 담당할 신라에 신라가 획득한 고구려 영역을 할양하는 것이었다. 평양을 기준으로 그 이북의 고구려 영역을 당에 귀속하고, 평양 이남은 신라에 귀속한다는 점에서 이 밀약은 결국 "고구려 영역의 남북 분할"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밀약 내용에서 "계책을 내리고 군사 기일(軍期)을 정해 주었다"는 문구를 보면, 이 자리에서 649년 고구려 원정에서 양국의 군사 행동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 특히 군사 동원 기일까지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전쟁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당과 고구려 양국만이 아니라 여기에 신라까지 가세해 판이 더 커진 전쟁이었다. 어쩌면 645년 전쟁 때처럼 백제가 고구려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 태종 소릉(昭陵) 사진/ 바이두


김춘추는 당 태종과의 협약에서 나당 군사연합을 맺고, 전쟁 이후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과 백제 토지도 할양받기로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그때까지 신라가 당과의 외교에서 거둔 유례없는 성과였다. 아마 당시 신라가 기대한 대당 외교의 최고치는 백제 병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정벌이 시급했던 당 태종은 신라군을 동원하기 위해 평양이남의 땅까지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이 곧 사망함으로써 당태종이 준 군기(軍期)는 물 건너갔다. 649년 5월 당 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 원정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은 앞으로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바로 그해 원정 계획에 맞추어 그동안 준비를 갖추어왔고 이제 원정을 눈앞에 두고 있던 당 태종이 죽음을 맞게 되면서, 자신이 추진한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라는 뜻이다.


김춘추와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의 죽음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새로 즉위한 당 고종이 태종처럼 고구려 정벌에 관심을 쏟을지도, 또 태종과 김춘추의 약속을 지킬런지도 알 수 없었다. 당 태종과 협약 당사자였던 김춘추는 654년 왕위에 올랐다. 그에게 손에 쥘 듯 눈앞에 다가왔다가 당 태종의 죽음으로 사라졌던 '일통삼한'을 실현하기 위해 김춘추는 다시 당과의 군사 동맹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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