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 돼 돌아온 원세훈의 성전 
[사회]대선 앞두고 ‘종북과의 전쟁, 1998년 권영해 전철 밟나… 
여권 내부 “국정원장 독대 부활시킨 MB도 조사해야” 여론 확산
▣ 송호균  [2013.05.13 제960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충성심’으로 살아가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게 주변의 대체적인 평가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인 1973년 14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진출한 뒤 서울시 보건사회국장과 행정관리국장, 상수도사업본부장 등을 거쳤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서울시장 취임 직후부터 시작됐다. 이 전 대통령은 같은 경북 출신인 원 전 원장을 서울시 기획예산실장과 행정1부시장 등으로 중용한다. 통상 부시장의 임기는 1년이지만, 그는 무려 3년6개월 동안 부시장으로서 ‘시장 이명박’을 보좌한다. 원 전 원장이 이른바 ‘S라인’의 대표주자로 급부상하게 된 계기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행정안전부(현재의 안전행정부) 장관과 국정원장으로 역시 임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대통령 이명박’의 곁을 지켰다. 인사 파동이 잦았던 이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5년 내내 장관급인 국무위원을 지낸 건 원 전 원장이 유일하다.

≫ 지난 4월30일 오전 국가정보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최악의 상급자, 충성심 하나로 승승장구

서울시 부시장 시절 공무원 사회의 평판은 ‘최악의 상사’라는 쪽에 가깝다. 사무실 밖에서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국·실장들에게 호통을 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친구나 측근도 별로 없다. 장관과 국정원장을 거치는 동안에도 공직사회에서 외톨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별명은 ‘원따로’였다. 과거 서울시에서 함께 일했던 한 관계자는 “원세훈은 ‘오로지 MB’인 사람”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이상득 전 의원에게 줄을 선 많은 정치권 인사들이나 정두언·정태근 라인으로 뭉친 당시 소장파와 달리 원 전 원장은 앞뒤 안 보고 이명박 전 대통령만 바라본 사람이다. 공무원으로서의 능력은 낙제 수준이라고 본다. 남들은 10분이면 알아들을 이야기가 1시간 넘게 걸리곤 했다. 한마디로 잘 이해를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작은 문제로 꼬투리를 잡아 아랫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하지만 충성심 하나로 정권 내내 승승장구했다. 그를 보면서 권력이 저런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더라.”

그를 두고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두 사람 모두 한 정권에서 장관과 국가 정보기관의 마지막 수장을 지냈고, 장로 대통령을 모셨다. 부정한 방법으로 불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국내 정치에 개입했고, 상대 진영의 대선 후보를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바뀌자 그 불법과 탈법의 민낯이 세상에 드러났다. 비참한 추락이다.

김영삼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과 안기부장 등 요직을 거친 권 전 부장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인 1998년 ‘총풍’과 ‘북풍’ 등 각종 공안사건 조작 및 안기부의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 등으로 감옥에 갔다. 권씨에게서 공작금을 받은 재미동포 유홍준씨는 1997년 대선 직전 기자회견을 열고 “김대중 후보가 김정일에게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허위사실을 유포한다. 권씨가 직접 정했다는 북풍공작의 작전명은 ‘아말렉’이었다. 아말렉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 일행을 공격한 이교도 부족이다. 권씨는 “비유하자면 내가 모세이고, 아말렉은 친북 세력”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2 대선, 원세훈의 성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권씨는 1998년 3월20일 성경과 간단한 소지품, 서류 등이 든 검은색 가방을 들고 검찰에 출두한다. 가방 안에는 10cm가량의 문구용 커터칼날이 함께 들어 있었다. 다음날 새벽 4시께 칼날을 숨긴 채 화장실에 간 권씨는 자신의 복부를 세 번에 걸쳐 자해했다. <한겨레>는 1998년 3월23일치 보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고통이 엄습하자 흥분 상태에 빠진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움켜쥔 채 변기 물통의 뚜껑을 세면대에 내리쳐 깨뜨리고 머리를 벽에 들이박으며 몸부림쳤다. 놀란 직원이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는 권씨의 몸은 물론 화장실 바닥까지도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권씨는 의료진을 통해 “선거에서 진 패장이니, 할 말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아말렉’이라는 작전명의 함의대로, 적어도 권씨에게 ‘김대중 정권의 탄생’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야 할 절대악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다.

대선을 앞두고 자신만의 성전을 펼친 건 원세훈 전 원장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활동 영역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지난 3월 공개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 따르면 상대 진영을 향한, 증오에 가까운 그의 적개심이 잘 드러난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2월18일 “외부의 적인 북한보다 오히려 더 다루기 힘든 문제가 국내 종북좌파들, 우리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에게 맡기기보다 지부장들이 유관 기관장에게 직접 업무를 협조하기 바람”이라는 주문을 국정원 내부에 전파했다. 2012년 5월18일의 ‘지시 말씀’은 “종북 세력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선전·선동하며 국정 운영을 방해, 좌시해서는 안 됨”이었다. 같은 해 11월23일에는 “종북 세력들은 사이버상에서 국정 폄훼 활동을 하는 만큼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함”이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물론 차이는 있다. 권영해는 실패했고, 원세훈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권씨에게는 김영삼 정권의 초대 국방장관으로서 하나회 척결을 진두지휘했다는 공이라도 있지만, 원 전 원장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권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며 자해 소동을 벌이는 결기라도 보였지만, 원 전 원장은 퇴임식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미국으로 출국을 시도했다.

≫ 1998년 ‘총풍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해 소동을 일으킨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병원에서 봉합 수술을 받은 뒤 입원실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젊은 여직원 불쌍하지 않냐”던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국정원의 대선 여론 조작 및 정치 개입 사건을 ‘야당에 의한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정도로 치부했다. 지난해 12월16일 열린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에서 박 대통령은 “2박3일 동안 감금을 당하고 고생한 젊은 여직원만 불쌍하게 되지 않았느냐”며 당시 야당과 민주통합당의 후보를 몰아세웠다. 경찰 역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졸속·편파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의혹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공작의 주체는 국정원 여직원 김아무개씨가 소속된 심리정보국이었다. 2011년 말 3차장 산하의 대북심리전단이 확대 개편되면서 출범한 70여 명 규모의 조직이다. 대규모로 민간인이 동원된 정황도 확인됐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은 국정원의 인터넷 게시글 및 댓글 활동에 동원된 민간인 수백 명의 휴대전화 번호와 전자우편 주소를 확보한 상태다. 그리고 이들이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활동한 내역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포털 업체로부터 넘겨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애초 문제가 됐던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서는 국정원 관련 아이디(ID) 이용자가 다른 이용자의 게시물에 단순히 ‘찬성’ 혹은 ‘반대’를 표시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박근혜 당시 후보를 지지하는 게시글을 올린 사실도 확인됐다. 지난 4월30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해당 사이트의 데이터 1400만여 건을 분석한 뒤 국정원과 연계된 아이디 73개의 활동 내역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국정원과 관계된 아이디 이용자들은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를 ‘종북’으로 낙인찍는 한편 박근혜 당시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의 게시글을 수백 건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수사도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원 전 원장은 지난 4월29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퇴임 39일 만의 일이다. 국정원 대선 여론 조작 및 정치 개입 의혹의 또 다른 주역인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정보국장과 이종명 전 3차장도 앞서 검찰 조사를 받았다. 4월30일에는 이례적으로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까지 이뤄졌다. 검찰은 또 이번 사건을 야권에 제보한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 전 직원 정아무개·김아무개씨와 민간인 장아무개씨의 집과 자동차 등을 5월2일 압수수색했다. 대선 직전 서둘러 ‘무혐의’를 골자로 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경찰의 부실·축소 수사 의혹을 제기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도 소환 조사키로 하는 등 검찰 수사의 방향은 전방위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게다가 이번 파장이 원 전 원장의 ‘개인 비리’ 의혹으로까지 번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앞서 <동아일보>는 최근 국정원 내부에 원 전 원장의 재임 시절 비리 의혹을 조사하는 전담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 문제와 함께 원 전 원장이 200만달러(약 22억원) 상당의 해외특수활동비를 자신의 유학 대비 자금으로 전용했다는 의혹, 관사의 가구를 국정원 예산으로 구입했고 퇴임 이후 가져갔다는 의혹 등이 조사 대상인 것으로 전해졌다.

원세훈 ‘윗선’으로 수사 확대?

‘원세훈 게이트’의 끝은 어디일까? 현재로선 가늠하기 쉽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사라졌던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다시 부활했다. 원 전 원장의 ‘윗선’까지 밝혀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보수 진영에서조차 나오는 이유다. 조순형 전 의원은 5월2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정원장이 일주일에 한 번씩 대통령을 독대해 보고를 한 것이 관행”이라며 “원 전 원장이 보고를 했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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