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4.htm
* "북한의 발해사 인식 - 대륙연구소" 중 "4. 연구 동향"에서 "(2) 지리 고증"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지리 고증
(2) 지리 고증

북한의 지리 고증의 배경에 대해서는 손영종이 잘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는 력사적 사건, 현상들이 일어났던 장소문제를 정확히 해명하는 것은 인민들의 투쟁무대, 활동무대를 밝히는것으로서 력사적사실들을 바로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들은 발해의 서쪽과 남쪽 경계, 그리고 남경남해부와 동경용원부 등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발해의 서변과 남변의 경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이러한 것은 발해의 강대성을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도 하나, 이것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 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발해의 서쪽 변경에 대한 연구는 북한만이 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손영종의 1980년 논문부터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요동반도는 7세기말이나 8세기초부터 이미 발해땅에 포괄되었으며 결코 당나라의 땅이거나 거란족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발해의 서변에 대해서는 당나라 연구에서 일부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당사에서의 요동은 한결같이 발해가 아닌 당이나 그 기미주로 생각되어 왔다. 즉, 일제의 야나이 와다루[箭內瓦]는 8-9세기에도 요동이 당나라 땅이었다고 하였는가 하면, 김육불(金毓)은 당의 기미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중국측의 역사지도에 그대로 반영되고, 이를 따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 견해는 당나라가 요동을 포함해서, 평안남북도 서해연안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영종은 926년경 발해가 거란과 싸울 때를 보거나, 732년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요동이 발해의 땅이 아니고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당나라는 고구려가 멸망 직후에 안동도호부를 옮겨갈 정도로 요동반도에서 세력이 약하였거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손영종의 생각은 박시형의 글에서 보다 강화한 것이다. 박시형은 처음부터 요동을 발해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즉, 그는 본래 {발해사}(1979)에서 압록강 하구까지 발해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부분을 이루고 있던 요동과 그 서남쪽으로 연결된 요동반도는 발해에서 계승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출판된 {조선전사}에서는 발해건국이후 이 지역은 발해령토안에 포괄되였다고 하면서, 박시형이 연해주로 비정하던 안원부(安遠府)의 위치를 요동으로 수정하기도 하였던 적이 있다. 그러나, 손영종(1980)은 이보다 체계적으로 요동의 발해 영역설을 논증하였고, 채태형(1992)이 이에 가세하고 있다.

발해의 서변과 관련된 것은 이른바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설이다. 즉, 소고구려국이 발해와 당사이에 있었다는 히노[日野開三郞]의 생각은 중국측 기록으로만 볼 것 같으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당나라가 발해건국과 함께 발해 견제와 고구려유민의 부흥을 막기 위해 친당적 소고구려를 건국하게 하였고, 이들은 일정하게 자주적 외교활동도 하였다는 것이다. 당나라가 699년에 보장왕(寶臧王)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임명하여 다른 고구려유민들을 통치케하였고, 그 이후 당의 기록에서 고구려(고려)가 등장한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698년에 이미 안동도호부가 없어진 상황이었기에 고덕무는 그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보장받게 된 셈이었고, 이른바 친당적 소고구려가 발해와 함께 세워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노태돈은 소고구려를 인정하면서도, 그 건국시기가 고덕무의 안동도독 임명시기가 아니라, 당에서 안사의 난(755-763)이 일어나고 안 이후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북한의 장국종은 소고구려를 고려후국이라 표현하고, 고덕무가 다스리던 지역은 없었으며, 고려후국의 중심지는 평남의 성천(成川)과 평북의 신의주(新義州)였다고 하며, 후루하타[古畑徹]는 고구려유민들의 요동거주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이것의 국가적 기능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아무튼, 소고구려국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여기서의 한가지 공통되는 견해는 적어도 요동반도는 당시에 당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고구려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당의 기미주로 생각하여 당 영역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손영종도 고려후국과 같은 고려국의 존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곳의 위치는 요동반도 남단과 평안북도 일대였다는 것이다. 요동반도의 발해 서변설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는 발해 건국 초창기에 이미 발해는 요동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한다. 발해가 고구려 본토를 완전히 수복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손영종의 생각은 장국종이 내놓은 고려후국의 성천과 신의주설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발해의 남변에 대한 연구는 북한에서 처음 나왔다. 이에 대해서 남한과 일본은 신라의 북변 경영과 니하의 위치문제와 관련하여 일부 언급한 적이 있으나, 발해사의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김영성(1992)이 처음이다. 김영성의 글이 기록의 한계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견해를 크게 보완수정한 것은 아니나, 발해사의 입장에서 양국의 국경을 전반적으로 획정해 보려 하였다는 것은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발해 남변을 서부와 중부 그리고 동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서부는 신라의 군현 설치기록에 근거하여 신라의 서북변을 추정하고, 군현설치 한계의 북쪽이 곧 발해 영역이었다고 추정하였다. 그 결론은 발해는 대동강을 기본계선으로 하여 그 북쪽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후기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지역(재령, 해주를 제외한 황해도 서쪽지역)은 발해의 후국인 후고구려국[필자:소고구려]의 강한 영향하에 있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중부는 수안, 곡산 등지를 경계로 하여 후기신라와 접경하고 있었으며, 강동, 양덕, 성천 이북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부는 양국이 니하(泥河)를 경계로 하였다고 하기에 니하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그 경계가 달라진다고 하면서, 그는 니하를 강릉의 연곡천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렇다면, 발해의 동부 남변은 멀리는 강릉까지 미쳤던 적이 있었다는 것인데, 니하를 강릉 근방으로 보았던 견해는 이미 서병국에 의해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의 주 경계는 일반적인 견해와 같이 함남의 원산과 덕원(새로 편제된 강원도)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발해의 두번째 수도로 알려진 중경현덕부에 대해서도 의견은 분분하다. 첫 도읍지인 구국(舊國)과 중경이 같은 곳이라는 정약용 설을 비롯해서,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토리야마[鳥山喜一] 설 등이 있다. 북한은 전자를 지지하며, 그 위치도 첫 도읍지인 구국인 돈화 오동성을 나중에 중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경현덕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후자가 더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1971년의 하남둔고분과 1980년의 정효공주묘의 발굴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북한의 동경용원부의 위치 비정은 매우 독특하다. 지금까지 토리야마[鳥山喜一]이래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동경용원부의 길림성 훈춘설을 부정하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설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태형은 팔련성이 동경용원부가 아니었음을 네가지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요사}[지리지]에 동경용원부가 돌로 쌓은 20리의 성이었다고 하는데 팔련성은 흙성이며 그 둘레도 2,800미터 즉, 7리밖에 안된다는 점, 둘째는, {신당서} [발해전]에 동경용원부는 동남으로 바다에 면했다고 하는데 팔련성은 바다로부터 약 200리 가량이 떨어졌다는, 세째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발해의 책성부와 신라 정천군사이에 39개의 역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의 시발역은 최북단의 덕원이 아니라 강릉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 네째는 발해와 일본의 교섭으로 볼 때 겨울철에도 사신들이 오고 갔는데, 훈춘의 항구 역할을 하였던 모구위(현 러시아 포시예트)는 겨울철에 어는 항구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동경용원부의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설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그 이유의 첫째는 부거에는 무엇보다 고구려, 발해시기의 성터가 있는데 그것은 흙성이 아니라, 돌성이라는 점, 둘째 그곳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면해 있다는 점, 세째 그곳은 얼지 않는 항구인 용제항과 여진항을 끼고 있다는 점, 네째 조선시대 역참제도를 중심으로 볼 때, 그곳은 강릉으로부터 39개의 역이 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채태형도 부분적으로 인정하였지만, 동경용원부의 청진설은 아직 가설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오경 터 중에서 보다 확실히 입증된 곳은 남경남해부이다. 종래 남경남해부는 정약용이래 함경남도 함흥설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힘입어 남경남해부는 함남 북청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먼저 북청은 삼수, 갑산 지방과 그 이북지역을 통하는 군사,교통,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그렇고, 문헌적으로는 {북청도호부신증읍지}와 {증보문헌비고}를 통해서도 확인되며, 최근 그곳에서 발굴된 발해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볼 때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청해토성(북청토성) 안에서 관청터가 발견되었고, 그 서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절터(신포시 오매리)가 발견되었는가 하면, 청해토성에서 동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평리에 큰 무덤떼가 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