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210.110.162.98/palhae/bukbal1.htm
북한의 《발해사》 해제
1998년은 발해가 왕조를 개창한 지 13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장철수 대원 등 젊은 네 사람은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발해의 물길을 탐험하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에서는 학술대회, 논문집 발간 및 전시회 등도 열렸다.
그 중에서도 북한에서 이룩한 기념비적 사업은 발해사 연구에 길이 남을 만하다. 발해국의 역사를 집대성하여 발간한 7권의 《발해사》와 《발해사문답집(1)》, 발해사논문집 등이 그것이다. 이 저서들은 지금까지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던 방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서는 발해국의 성립과 주민 구성 문제와 정치·경제·문화·지리 등 발해사 전반을 정리·집대성하고 있다. 이들을 옮겨 놓은 《CD-ROM 발해사》(서울:누리미디어)는 발해사에 대해 선구적인 연구성과를 남긴 실학자들을 비롯한 각종 원사료와 희귀 발해 유적 슬라이드, 논저목록 등이 하이퍼링크 등의 컴퓨터 기술을 통해 통일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어, 자료에 목말라 하는 발해연구자들에게 한줄기 시원한 샘물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만인 698년에 세워져 926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229년간 만주와 연해주 및 북한 지역에서 번창하였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이었다. 그러나 발해의 주민이 어떤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이룩한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발해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발해사에 관해서는, 발해국이 있던 곳에 지금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각국의 의견차도 크다.
한국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이었다고 보는 반면에, 중국은 발해가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족이 세운 국가이고 그들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한다. 러시아는 발해가 중국과 같이 말갈 왕조라고 하면서 당의 지방정권이 아닌 독립국이었다고 한다. 다만, 일본 학계를 중심으로 발해는 한국사의 범주에서 언급되기도 하며,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로 구성된 왕조라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60년대와 70년대의 발해사 연구는 북한이 주도해 왔다. 1962년에 내놓은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는 한국사에서 발해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고, 그 이후 발해사 연구자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그 역사적 진실을 복원함에 다음 두 가지 논조에 중심이 놓여져 있다.
첫째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삼국과 남북국의 동등한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심을 단군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체계화하는 것이다. 특히, 1998년판 《발해사》부터는 발해를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잇는 왕조로 규정하여, 단군조선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CD-ROM 발해사》에 실린 글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발해사》 7권이다. 이것은 부족한 기록을 무릅쓰고 발해국의 역사를 정리·집대성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제1권과 제2권은 장국종이 집필한 (발해국의)‘성립과 주민' 그리고 '정치'에 관한 것이다. 제3권과 제4권은 채태형이 '경제'와 '문화'를, 제5권은 리대희가 '력사지리 1'을, 6권은 김혁철이 '력사지리 2'를, 그리고 7권은 또다시 채태형이 '력사지리 3'을 주제로 집필한 것이다. 이 저술들은 모두 위와 같이 대표 집필자을 드러내 놓고 있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북한 사회과학원의 공동 연구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의 역사 논문이란 서로 다른 주장이 같은 시기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일정 기간이 지나거나, 연구 집단이 바뀌었을 때 변화된 견해가 제시된 적은 있으나, 같은 주제를 같은 시기에 달리 보는 주장이 제기되지 않는 것이 남쪽과 다르다.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의 당나라에 대한 반침략 투쟁과정에서 대조영 등에 의해 소국이었던 진국(振國) 등을 통합하여 698년 '황제국'으로 '성립'하였다고 한다(1권).
위의 논저에서 변화된 대목은 진국 등을 통합하여 발해가 성립되었다는 것과 발해 건국을 종래와 같이 '창건'으로 표현치 않고 단지 '성립'으로 그 격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종래 《조선전사》는 발해 건국을 '창건'이라 하여 북한 정권의 '창건'과 견줄 정도로 의미를 크게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번 1998년판 《발해사》에서는 단지 '성립'으로만 언급하고 있다. 일부 집필자들은 본문 중에서 '창건'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고는 있으나, 크게는 '창건'에서 '성립'으로 발해국을 보는 시각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1998년판《발해사》부터 북한은 발해를 당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으로 표현한다. 이미 남북한은 발해가 당나라에 대하여 자주적이었고,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 등에 발해 임금이 '황상(皇上)'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근거로 '황제국'으로 생각하였으나, 이처럼 개설서에 '황제국'이라 표현한 것은 처음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대조영(大祚榮)이 맏아들 대무예(大武藝)에게 '계루군왕(桂婁郡王)'이라는 책봉을 내린 사실과(권부원귀冊府元龜), 큰 임금아래 '작은' 왕의 제후적 성격을 갖는 태사(太師)와 사도(司徒) 등의 3사(師)·3공(公)제도가 시행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점등을 들었다. 대무예의 '계루군왕' 책봉이 당으로부터 행해졌다는 종래의 해석을 비판하고, 발해 내부에서의 발해 황제의 역할로 인식한 것은 처음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시각이다(1권). 남한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 즉 소수의 고구려유민과 다수의 말갈인으로 발해국의 주민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일본에서 처음 주장되어, 북한의 박시형에 의해서도 수용되어 오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1990년 장국종으로부터 발해의 주민은 다수의 고구려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입장으로 바뀌어, 이번의 1998년판에서는 아예 북한의 검증된 의견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남한에서도 두 견해가 맞서 있다. 한규철은 1988년 발표한 논문에서 박시형과 남한학계의 이러한 주민구성설을 비판하고, 타칭(他稱)이자 비칭(卑稱)인 말갈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발해는 다수의 고구려유민의 국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발해사 연구상에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가 남북이 일치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적 황제국가였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한가지는 남북국의 역사 즉,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던 시대의 역사를 발해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학사에서 현대 한국인들이 '우리'라는 민족공동체 의식을 갖고 살게 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들고 있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신라의 '사대적' 외교행위를 비난한다. 1979년에 발간된 《조선전사》는 남쪽의 일반론인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후기신라'로 정리하였고, 그 순서에 있어서도 '발해와 후기신라'라 하여 발해를 앞세웠다. 1956년판 《조선통사》에서 '통일신라'를 인정하던 자세에 변화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신라 중심의 '한국사'를 고구려 중심의 '조선사'로 그 사학사적 인식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북한은 신라와 발해의 관계에서도 발해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다. 우선, 최치원의 편지에 근거해 발해 건국기에 대조영이 신라의 제5품 대아찬(大阿飡)을 받았다는 사실을, 황제국인 큰 나라 발해가 그럴 리가 없었다고 부정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에 근거해서 일본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습격해 와서 발해수군과 충돌하자, 신라군사와 합세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하는가 하면, 경문왕(景文王) 8년(869)에는 신라에서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는 사실을 발해에 통보했다고 한다. 발해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사실이 《삼국사기》에도 남아 있으나, '신라의 권위'와 '존엄'에 저촉된다고 생각한 김부식 등은 발해 관련 부분을 모두 누락시켰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발해사 연구에서 새롭게 제기한 것 중의 하나는 이른바 고려후국(高麗侯國)이다. 발해국이 있던 시기에 사료상에 나타나는 '고려(高麗)' 즉 고구려는 발해 황제국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 일본의 히노[日野開三郞]가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이라 주장하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장국종 등이 발해사적 시각에서 재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후국]은 발해국에서 고구려적 성격을 가장 많이 띤 지역으로 발해시대에도 고구려 문화를 가장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 지역 문화를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고려후국] 문화였다고 한다. [고려후국]의 역사상이 밝혀짐으로 인해, 지금까지 당나라 지역으로도 오해되고 있던 평안도를 비롯한 한반도 서북지역과 요동지역이 발해 지역이었음이 보다 확실하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고려후국]은 구체적으로 수도를 평안남도 성천(成川)의 흘골성(紇骨城; 졸본성)에서 평안북도 의주(義州) 야일포(野日浦) 지방의 국내성으로 옮기며 발전하였고, 영역은 북쪽으로 안원부(安遠府)를 접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동북쪽으로는 서경압록부(西京鴨 府)와 접하였다고 한다.
1998년판 《발해사》에서 가장 큰 정력을 쏟아 밝히고자 하였던 부분은 전 7권 중 3권이나 할애된 발해국의 지리문제이다. 주목되는 부분은 서경이 위치한 압록부의 수주(首州)인 신주(神州)를 통설인 길림성(吉林省) 임강시(臨江市)로 보지 않고 서쪽의 집안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또한, 서부와 서북부 변경지역에서 발해의 안원부(安遠府)와 회원부(懷遠府), 철리부(鐵利府)가 있었다고 하여, 이들의 동북변설을 부정하고 서변 지역의 발해사적 의미를 공고히 하였다. 특히 요동반도가 발해국이었음을 확인한 것은 중국 학계의 통설인 박작구(泊汋城)-개원(開原) 이동설(以東說) 즉 요동반도를 포함해서 일부 황해도 지역까지를 당나라 영역으로 보는 주장을 극복한 대표적 사례이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와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의 주현(州縣)이 북한 지역에도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즉, 중경현덕부 아래의 흥주와 철주, 노주는 함북 무산 등지에서 찾을 수 있고, 서경압록부 관할의 환주와 풍주는 자강도의 강계와 량강도의 풍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용원부(龍原府)의 동경(東京)의 위치에 있어서도 기존의 훈춘(琿春) 팔련성(八連城)설을 부정하고, 함경북도 청진의 부거(富居)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동항이고 주변에 봉수와 성곽 그리고 고분 등 발해 때의 유적 유물이 이 지역에 많다는 것이다. 남해부(南海府)의 남경(南京)도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로 생각하고 있다.
1998년판 《발해사》가 또 하나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러시아 지역 즉, 연해주의 발해사적 의미를 되새겨 지리 문제에 천착한 것이다. 정리부(定理府)와 안변부(安邊府), 솔빈부(率賓府)를 포함해서 흑수부(黑水部), 사모부(思慕部), 굴열부(窟說部), 군리부(群利部), 막예개부(莫曳皆部)가 모두 이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발해는 남쪽으로는 대동강(大同江)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북쪽으로는 오호쯔크해 연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발해의 경제에 대해서는 농업 및 수공업에 관한 연구가 깊은 러시아의 고고 발굴 업적을 많이 반영하여 정리하고 있다(제3권). 농업은 농경지의 확대와 농기구의 개선, 주요 알곡작물 재배, 남새[야채]와 과일 및 공예작물 재배, 집짐승 기르기를, 그리고 수공업은 직조·금속·배무이[조선造船]·도자기 수공업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교통운수는 도로망과 역참로에 대하여 영주도(營州道), 거란도(契丹道), 조공도(朝貢道), 신라도(新羅道), 일본도(日本道) 등 기존의 성과에 힘입어 정리하고 있다.
발해의 문화에 있어서도 사상과 종교, 과학기술, 말과 글, 력사편찬, 교육, 문학, 음악과 무용, 건축, 공예, 조각, 회화, 풍속 등으로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다(제4권). 발해는 45센티가 1자인 고구려척(高句麗尺)을 사용하였으며, 신라와 같이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들만이 쓰는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발해문자에 대한 부분은 쟁점 중의 하나인데, 북한은 출토되고 있는 일백 수십 개의 문자기와는 발해가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발해 시대에는 역사 편찬도 하였다고 하면서, 《단군봉장기년(檀君封臟紀年)》(대조영시기 편찬),《단기고사(檀奇古史)》(대조영의 동생 대야발 편찬),《조대기(朝代記)》(편자 미상) 등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두 《협계태씨족보》와 《규원사화(揆園史話)》,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남한에서 사료적 신뢰 문제로 인하여 근거로 삼기를 꺼리는 이러한 책들을 북한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원용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후대에 많이 개작된 부분은 있지만, 오히려 신라 중심적 《삼국사기》보다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좀더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조대기》가 다른 책에는 없는 대조영의 연호, 시호 등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 사건에서신라의 퇴각이 날씨 때문이 아니라, 발해에 패배한 것이라는 점을 전한 것들은 모두 사실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에 집대성된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국제 학계에 큰 자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의 발해사연구에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복원된 내용 중에는 앞으로도 많은 토론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특히 공동 연구가 갖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견만이 존재하는 학문의 경직성은 발해사 전체 내용에 대한 신뢰에 문제를 갖게 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록의 양이 턱없이 적은 가운데 이만큼 발해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역사를 알고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샘물과도 같으며, 한국사학사상에도 길이 남을 쾌거가 아니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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