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4291504415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13) 기마문화의 남북통로 마역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4.29 15:04 수정 : 2009.08.19 11:36
‘초원고마’ 달리던 소통의 길 사라지고 문명의 검은 띠만 남아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207국도(고대의 마역로로 추정).
* 주 : 정란-우란하오터 G027, 우란하오터-퉁라오 G111
바타르 일가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초원길로 들어섰다. 늦가을 초원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날씨가 갑자기 을씨년스러워진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며 빗방울이 차창을 적시고, 기온도 뚝 떨어진다.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바오에서 새어나오는 전깃불이 마냥 반딧불처럼 깜박일 뿐, 드넓은 시링고르 대초원의 밤은 호젓한 정적만이 감돈다. 풀도 길도, 지평선도 모두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그토록 훗훗하던 초원의 온정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듯 조금 허전하다. 3시간 넘게 달려 시린고르맹의 소재지 시린하오터(錫林浩特)에 도착했다.
인구 15만명의 시린하오터는 몽골 6대 초원 가운데서도 가장 기름진 초전(草甸) 초원인 시린고르 대초원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초원의 명주(明珠)’다. 중국 한 대부터 이곳에는 흉노와 유연, 탁발 선비, 돌궐 등 북방계 유목민들이 살아 왔으며, 원대에는 칭기즈칸 일족의 본향이기도 하여 줄곧 그 후손들의 영지나 방목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시내에는 베이쯔묘(貝子廟)와 내몽골에서 가장 큰 광장인 시린 광장과 칭기즈칸 문화광장 등 유적과 문화시설이 즐비하며, 근교에는 시린구곡(錫林九曲)을 비롯한 멋진 8경(景)이 펼쳐져 있다.
시에서 동남쪽으로 13㎞ 지점에 있는 시린구곡은 칭기즈칸 부부의 전설로 유명하다. 어느 날 부부가 이곳 시린강(錫林江)변에 이르러 말을 타고 질주하는데, 그만 부인의 머릿수건이 땅에 떨어졌다. 그것도 모른 채 달리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 머릿수건이 곧게 흐르던 강줄기를 아흔아홉 굽이나 되는 곡류(曲流)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파란 주단 위에 한 오리 금실을 고불고불하게 수놓은 것처럼 보이는 그 놀라운 광경 앞에서 칭기즈칸은 “이것이야말로 신의 조화이니 이곳은 기필코 번성하리라”라는 감탄사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절경에 도취된 환각일 따름인데, 그만 환각이 기적으로 둔갑한 것이다. 기적은 전설의 중요한 전승소(傳承素)이기에 오늘까지 면면히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일정은 시린하오터에서 남행으로 207국도를 타고 약 600㎞ 떨어진 베이징까지 가는 만만찮은 여정이다. 자고로 이 길은 북방 기마문화의 남북통로 역할을 해옴으로써 실크로드의 당당한 일익을 담당해 온 ‘마역로(馬易路)’다. 이 길을 처음 밟아보는 터라 아침부터 가슴이 설렌다. 밤새 기온이 뚝 떨어져 내린 빗물은 살얼음으로 변하고 칼바람이 몰아치면서 낙엽이 사방으로 우수수 흩날린다. 이윽고 싸락눈이 내린다.
시린하오터 빈관을 나서서 향한 곳은 시 북쪽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한 베이쯔묘다. 가는 길에 신화서점에 들러 내몽골대학 출판사가 펴낸 <몽고민족통사(蒙古民族通史)>전 6권을 343위안에 구입했다. 책 목차만 훑어봐도 이른바 ‘다민족 통일국가론’에 입각해 중국이 끈질기게 추진하고 있는 ‘역사공정’의 일환으로 몽골 민족사도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음을 쉬이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대로 연구에 참고가 될 성싶어 얼른 손에 넣었다. 베이쯔묘당은 넓은 베이쯔묘 광장의 변두리를 장식하고 있다.
짓궂은 날씨인데도 광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묘당은 면적만도 1.2㎢나 되니 꽤 큰 규모다. 청나라 건륭제 8년(1743)에 티베트 라마교 불당 형식으로 지은 이 묘당은 40년 후의 확충을 거쳐 7개의 대전과 10여개의 소전, 2000여 승방을 갖춘 대형 묘당으로 변모했다. 이때 ‘숭선사(崇善寺)’로 개명했으나 통상 ‘베이쯔묘’로 불리고 있다. 전성기에는 라마승 1500여명이 주석했으며, 제1대의 ‘반지달(班智達)’을 비롯해 모두 4명의 활불을 배출했다고 하니 이 묘당의 높은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지막지한 ‘문화대혁명’ 때 유물은 여지없이 파괴당했다.
207국도는 말이 국도이지 고속도로나 다름없이 폭이 넓고 곧으며, 게다가 지금은 한창 나란히 새 길을 내고 있다. 한참 달리니 일망무제했던 초원은 차츰 사지(沙地)나 언덕, 협곡으로 바뀌면서 지세와 날씨가 요동친다. 내리던 눈이 갑자기 짓눈깨비로 바뀌는가 하면, 이윽고 폭설로 변해 세상을 온통 희뿌옇게 만들어 한 치의 앞길도 분간할 수 없게 한다. 실로 변화무상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그러다 보니, 빙판길에 미끄러져 나뒹군 차량의 처참한 모습이 눈에 띄는가하면, 정오를 좀 지나 차오자잉쯔(喬家營子)에 이르니 길이 꽉 막혀 마을 흙탕길로 우회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풍력발전소의 동력 날개가 어떤 곳에는 밀집해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알고 보니 지형의 막힘과 열림, 높낮음에 따라 풍향과 풍력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덕스러운 지역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얼마쯤 달리니 다시 평온한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바로 원제국의 첫 수도였던 상도(上都)가 자리한 곳이다. 궁성은 지금의 정란기(正藍旗)에서 동쪽 20㎞ 지점인 산뎬허(閃電河, 일명 金蓮川) 북안에 있었다. 1251년 몽케가 대칸에 오르자 동생인 쿠빌라이는 막남(漠南), 즉 고비사막 이남의 중국 지역을 총괄하는 군국서사(軍國庶事)에 임명된다. 미래의 중국 통치에 대한 야망을 품은 그는 이곳에 사방 2200m에 달하는 정방형 성을 쌓아 개평부(開平府)라 이름 짓고 권력기반을 다져나간다. 1259년 몽케가 죽자 이듬해에 쿠빌라이는 바로 이곳 개평에서 대칸에 등극한다. 그리고는 당시 수도였던 하라허린(哈剌和林)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 아리부거(阿里不哥)와의 4년간에 걸친 대칸위 쟁탈전에서 승리하고 나서는 1263년에 개평을 상도로 선포한다. 이어 연경(燕京, 오늘의 베이징)을 중도(中都)로 삼았다가 10년 만인 1273년에 대도(大都)로 승격시켜 정식 국도로 정한다. 그러나 상도를 여름 수도로 남겨놓은 채 황제들은 해마다 4월이면 이곳에 와 피서하다가 8~9월에 귀경함으로써 사실상 이원국도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 멀리 서역의 색목(色目) 상인들이 상도에 폭주해 상도는 국제무역도시를 방불케 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총애 속에 이곳에서 무려 17년간이나 지냈다.
직선거리가 180㎞밖에 안 되는 상도와 대도 사이에는 4갈래의 역도(驛道)가 있어 수시로 내왕이 가능했다. 그리고 상도와 하라허린과는 차도와 마도, 산도의 3갈래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외몽골 오르혼강 유역의 하라허린에서 출발해 이 상도 개평을 지나 대도에 이르는 길은 고대 북방 유목문화와 남방 농경문화의 교류를 소통시켜주는 중요한 길, 즉 마역로의 한 구간으로서 실크로드의 남북 5대 지선의 동단길이다. 이 길은 상도에서 북상해 시린하오터를 지나 디더우위(地豆于, 오늘의 우주무친)로 이어져 외몽골 초원로와 연결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실크로드라는 범칭 아래 문명교류의 통로라고 하면 주로 동서를 횡단하는 초원로와 오아시스로, 해로의 3대로만을 염두에 두었지 남북을 잇는 여러 길은 도외시했다. 그런데 이번 현장 답사에서도 확인되다시피, 문명교류는 마역로와 같은 남북 통로를 통해서도 실현되었던 것이다. 문명교류의 동서 통로를 간선이라고 한다면, 남북 통로는 지선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인류 문명교류의 통로를 동서 횡단의 3대 간선에만 국한시킨 통념에서 벗어나 남북 간의 여러 지선을 망라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망상적(網狀的) 교통망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눈속에서 풀을 뜯는 몽골말 떼.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남북 통로는 대체로 5갈래의 지선이 있어 왔다. 아직까지 연구가 미흡해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의 남북 통로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동서 3대 간선은 주로 같은 위도 상에 나타나는 지형적 특징을 반영해서 초원로 오아시스로 해로라고 명명하지만, 남북 지선에 한해서는 이런 지형적 공통성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주로 교류나 교역의 내역상 특징을 살려 각 지선의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 그 하나가 바로 남북로의 동단에 있는 마역로다. 이 길은 외몽골의 하라허린에서 상도와 대도를 지나 화남의 항저우(杭州)나 광저우(廣州)에 닿아 해로와 접한다. 이 길은 일찍부터 북방 유목민족과 한민족 간의 동아시아 쟁탈전을 위한 전로(戰路)였으며, 이 길을 따라 이 양대 민족 간에는 군사적 및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한 말이 교역되고 북방 기마유목문화와 남방 농경문화가 교류되었다. 이 초원로의 갓길이기도 한 마역로를 통해 북방 유목문화가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일원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길의 주역을 담당한 말은 주로 몽골말이다. 몽골말의 조상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만년 전에 살았던 ‘초원고마(草原古馬)’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초원의 마종으로서 평균 어깨 높이가 120~135㎝인 작달막한 체구이나 사지가 발달하고 털이 길며 내한성이 강하다. 18년간 사역할 수 있는 생명력과 지구력이 강하고 용감하며 다른 동물에 대한 저항력도 강해 축력은 물론, 전마로서 각광을 받아왔다. 하루 8시간 동안에 약 60㎞의 속도로 연속 10여일간 걸을 수 있으며, 질주의 경우 1600m를 2분 남짓하게 주파하는 쾌속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내몽골 지대의 몽골말로는 최상을 자랑하는 우주무친마(烏珠穆沁馬)와 산악지대에 강한 바이차톄티마(百鐵蹄馬, 철 말굽 말), 사막을 잘 달리는 우선마(烏審馬) 등 마종이 있다. 중국은 물론, 한국이나 일본의 재래종 말에는 몽골말 혈통이 많이 섞여 있다.
고대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전마가 일국의 군사력을 가늠하는 징표였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각종 수단을 동원해 전마를 얻는 데 급급해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 마역로를 통해 북방의 우수한 말을 대량 수입했다. 대체로 송대 이전 시기에는 몽골초원을 비롯해 중원 이북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을 거의 상실하고 랴오(遼)나 시샤(西夏)가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3국이 각축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말을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 고육지책으로 찾아낸 것이 이른바 ‘차마교역(茶馬交易)’이다. 원래 중국은 동전 같은 금속 화폐를 주고 변방 소수민족으로부터 말을 구입했다. 그런데 이들 소수민족이 이런 금속으로 중국에 저항하는 무기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챈 중국은 더 이상 돈으로 구입하지 않고 차나 직물, 소금 같은 문물로 교환하는 형식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차마교역이다.
송대에는 전국 각지, 특히 변방 지역에 차마교역을 전담하는 차마사(茶馬司)란 전문기구를 설치하고 교역장을 개설해 차마교역을 국가가 관장했다. 차 생산의 증가와 더불어 차마교역은 날로 번성해갔다. 차 100근에 준마 1필씩 교환해 1년에 2만필 이상의 말을 수입해 축력과 전마를 충당했다. 차마고도 마방(馬幇)의 방울소리가 티베트 고원의 정적을 깨뜨릴 때, 여기 마역로 마방의 방울소리는 몽골 고원의 정막을 거둬내고 있었다.
역사를 더듬는 길이란 늘 감개무량하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바오창전(寶昌鎭)에 들러 초원삼미쇄부(草原三味府)란 몽골식 식당에서 푸짐한 양고기 샤부샤부로 늦점심을 때웠다. 오후 5시쯤에 내몽골과 허베이성 경계인 쌍호지(三號地)를 넘어 30분쯤 달리니 베이징으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2시간쯤 걸려서 바다링(八達嶺) 만리장성을 지나 드디어 여정의 종점 베이징에 입성했다. 9일간(2008년 10월 16~24일) 장장 4000여㎞의 험로를 답파한 뜻 깊은 대흥안령 초원로 답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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