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8809421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2>후고려기(後高麗記)(15) -  광인"에서 이정기 관련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이정기 (3)

[甲申, 以平盧淄靑節度觀察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檢校工部尙書、靑州刺史李正己檢校尙書左仆射;前隴右節度副使、隴州刺史馬燧爲商州刺史, 充本州防禦使.]
갑신에 평로치청절도(平盧淄靑節度)ㆍ관찰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觀察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ㆍ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ㆍ청주자사(靑州刺史) 이정기를 검교상서(檢校尙書)ㆍ좌복야(左仆射)로, 전(前) 농우절도부사(隴右節度副使)ㆍ농주자사(隴州刺史) 마수(馬燧)를 상주자사(商州刺史)로 삼고 본주의 방어사(防禦使)로 채웠다.
《구당서》 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0년(775) 2월
 
보력 3년 정월, 이정기는 위박절도사 전승사 토벌의 상소를 올린 뒤 본격적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5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아마 그러한 이정기의 실상은 발해 조정에도 보고되었을 것이다ㅡ자신들과 같은 고려인이, 대당 안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틀어쥐고서 산동반도를 기반으로 당조를 위협하다시피하는 모습이 발해에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아마 그 사람들만 알겠지.

6월에 신라와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신라와 발해, 요하 동쪽의 두 나라에서 당에 사신을 보냈던 보력 3년 6월, 그 즈음 당조는 혼란스러웠다. 발해 사신의 숙소인 발해관이 있던 덩저우(登州)에 도착한 발해 사신들은 이곳에서 산동반도 전체를 아우르며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고려인 절도사의 모습을 보았다.
 
[六月戊戌, 以李靈耀爲汴州刺史, 充節度留後. 秋七月戊子夜, 暴澍雨, 平地水深盈尺, 溝渠漲溢, 壞坊民千二百家. 庚寅, 田承嗣兵寇滑州. 李勉拒戰而敗. 八月丙寅, 幽州節度使硃泚加同中書門下平章事. 李靈耀據汴叛. 甲申, 命淮西李忠臣、滑州李勉、河陽馬燧三鎭兵討之. 閏月丁酉, 太白經天. 九月乙丑, 李忠臣等兵進營鄭州. 靈耀之衆來薄戰. 淮西兵亂, 乃退軍於滎澤.]
6월 무술에 이영요(李靈耀)를 변주자사(汴州刺史)로 삼아 절도유후로 채웠다. 가을 7월 무자일 밤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평지에 고인 물이 깊은 곳은 한 자가 넘었고, 구거(溝渠)가 범람하니 방(坊)의 민가 1200여 가(家)가 무너졌다. 경인에 전승사의 병사들이 활주(滑州)를 약탈하였다. 이면(李勉)이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8월 병인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주차(硃泚)에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이영요가 변주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갑신에 회서(淮西)의 이충신(李忠臣)ㆍ활주의 이면ㆍ하양(河陽)의 마수(馬燧), 3진의 병사들에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윤월 정유에 태백성[太白]이 대낮에 나타났다. 9월 을축에 이충신 등의 병사들이 정주(鄭州)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영요의 무리가 와서 싸움이 벌어졌다[薄戰]. 회서(淮西)에 병란이 있어 영택(滎澤)으로 퇴군하였다.
《구당서》 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0년(775)
 
변주는 장강과 회수의 물산들이 모두 거쳐가는 대운하의 요충지였는데, 원래 이 땅을 차지하고 있던 변송절도사 전신옥이 죽은 뒤 새 주인을 놓고 파란에 휩싸였다. 당조에서 종친이었던 영평군절도사 이면을 변주자사와 변ㆍ송 2주를 비롯한 8주를 맡을 절도관찰유후로 삼아 당조의 직할지로 삼으려 했지만, 변주 군사들은 당조의 종친이 부임하는 것에 반발했고, 마침내 변주자사였던 이영요를 필두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면의 부임을 환영했던 복주자사 맹감을 죽이고, 당조로 이어지는 변주의 조운을 끊은 뒤 전승사에게 사람을 보내 동맹을 요청한 것이다.
 
《구당서》에 보니까 9월 을축에 당조에서 보낸 토벌군이 정주에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이영요의 군사들과 접전을 치렀는데, 토벌군 대장의 한 사람인 이충신이 다스리던 회서에 병란이 있어 이에 영택(滎澤)으로 퇴군하였다고 기록했다. 을축에서 무진까지는 사나흘 정도, 불과 사나흘 사이에 이정기라는 고려인 사내가 당 조정에 느닷없이 '운주와 복주를 내가 차지했습니다'하고 통보한다.
 
[戊辰, 淄靑李正己奏取鄆ㆍ濮二州.]
무진에 치청(淄靑) 이정기가 운(鄆), 복(濮) 2주를 차지했다고 아뢰었다.
《구당서》 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1년(776) 9월
 
사실 이영요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정기는 회남절도사 진소유와 함께 자신이 나서서 이영요의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토벌요청을 올렸지만, 이는 거절된다. 그에게 반란은 '기회'였다. 당조를 위해 반란을 진압해주겠다는 것을 구실로
변ㆍ송 토벌을 청하고, 그 땅을 아이템으로 획득하게 되면 평로치청에도 유리한 일. 잘하면 조운의 요충지인 변주를 차지할 기회였다. 당조라고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이정기나 진소유 대신 당조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는, 충성이 '보증'된 영평절도사 이면과 회서절도사 이충신, 하양삼성사 마수 세 사람에게 대신 토벌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정기가 누구야. 오는 기회 안 놓치고 가는 기회 안 만드는 이 눈치 빠른 남자는, 이충신이 회서번진의 병란 소식을 전해듣고 영택으로 퇴군한지 나흘에, 전격적으로 토벌전에 개입해 운주와 복주를 차지하는 센스를 보여주신다.
 
[及李靈曜之亂 諸道共攻其地, 得者爲己邑. 正己復得曹ㆍ濮ㆍ徐ㆍ兗ㆍ鄆. 共十有五州.]
이영요가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러 여러 도(道)에서 함께 그 땅을 공격하였는데. 각자 차지한 것을 자기 영토[己邑]로 삼았다. 정기도 다시 조(曺)ㆍ복(濮)ㆍ서(徐)ㆍ연(兗)ㆍ운(鄆)을 얻었다. 열 주에 다섯 주를 합쳐 함께 다스렸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74, 이정기
 
이정기의 열전에 기록된바 그가 이번 일을 구실로 토벌전에 개입해 얻은 땅은 산동반도 서부 5주. 비록 변주는 토벌에 참가했던 이충신이 당조로부터 변주자사로 임명되면서 그의 손에 들어갔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치청번진 관할 10주에 새로 다섯 주를 더 포함하게 되면서 산동반도 전역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 발해보다는 못하지만 신라보다는 훨씬 넓었고, 이정기와 같은 시기에 활약하던 당조의 어떤 절도사들도 그의 영지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위주에서 반란의 주역 전승사를 사로잡았지만, 나이든 노인인 것을 들어 예의를 갖추어 풀어주더니, 천자에게 수차례에 걸쳐 전승사 사면을 요청한다. '이랬다저랬다장난꾸러기'라는 가사처럼, 이정기가 전승사에게 갑자기 우호적으로 돌아선 것은 그의 자비심을 과시함으로서 주변 절도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것은 이정기라는 고려인 남자의 왕조를 지탱해주던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이 무렵 이정기가 당의 영토 내에서 독립왕국 '평로치청'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해준 배경은 지방번진의 많은 유력자들과의 정치적인 동맹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구당서》 양숭의열전에는 양숭의나 전승사ㆍ이정기ㆍ설숭ㆍ이보신 등 이 무렵 고위관직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유력한 지방번진 수장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뒤에 '보거지세(輔車之勢)'로 서로를 지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무렵 절도사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당조의 명령을 거부하며 조세도 바치지 않았는데, 당조의 견제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봉건시대 정치적동맹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은 유력한 두 집안 사이의 '정략혼인', 이정기 시대의 절도사들 사이에도 이러한 정략혼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이정기의 경우는 산남동도절도사로 있던 양숭의와 혼인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를테면 반당동맹인 셈이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차포 다 떼고 보면 동네 '계'하고 뭐가 다른지.
 
[大歷十一年十月, 檢校司空, 同中書門下平章事.]
대력(大曆) 11년(776) 10월에 검교사공(檢校司空)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이보다 한 달 전인 9월, 이영요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수세에 몰리던 이영요를 구원하기 위해서 전승사는 3만 병사를 내어 구원하려 했지만 이들은 회서ㆍ하양 두 번진 절도사에게 패하고, 이 소식을 들은 이영요는 변주성을 버린채 도망쳤다가 활주에서 온 두여강이라는 장수에게 붙들려 장안으로 압송되었던 것.
 
아무튼 운주와 복주를 점령하고 한 달만에 당조는 이정기를 검교사공 동중서문하평장사로 봉한다. 《구당서》열전에는 10월이라고 했지만 본기에는 겨울 12월 정해의 일이라고 해서 두 달 차이가 있는데, 날짜 차이를 차치하고 봐도 이정기가 받은 그 지위는 당의 재상직과 맞먹는 지위였다.

...

일본의 무녀를 헌상한 바로 다음달에 발해에서는 다시 당조에 사신을 파견해 매를 헌상한다. 매를 헌상하기 위해서 덩저우에 있는 발해관ㅡ평로치청번진의 관할령에 당도했을 발해의 사신들은, 산동 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단히 '기이'하고 '특기'할만한 상황을 목격한다. 자신들과 같은 고려인 번장(蕃將)이 이 산동 지역의 지배권을 틀어쥐고 있으면서 다른 절도사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거의 '독립국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강력한 통치력을 지니고 있는 상황을 말이다.
 
[二月戊子, 淄靑節度使李正己之子納爲靑州刺史, 充淄靑節度留後.] 
2월 무자에, 치청절도사 이정기의 아들 납(納)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고, 치청절도유후(淄靑節度留後)로 채웠다.
《구당서》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2년(777)
 
당조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을 청주자사로 삼은 것은 이정기의 요구에 따른 것도 있었다. 아들을 청주자사에 앉혀서 치소 청주의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대외팽창에 주력하는 구도를 짜려고 한 것인데, 훗날 이납의 아들이었던 이사고도 이납과 마찬가지로 청주자사의 관직을 제수받고 나서 이납의 대권을 물려받았다는 점을 보면 이정기의 나라에서 '청주자사'란 곧 '태자'에 준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발해의 '부왕(태자)'이 '부왕' 직위와 함께 발해의 '계루군왕'이라는 직책을 맡아봤던 것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구당서》이정기열전에 보면 평로치청 15주에 대한 그의 통치스타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爲政嚴酷, 所在不敢偶語. 初有淄ㆍ靑ㆍ齊ㆍ海ㆍ登ㆍ萊ㆍ沂ㆍ蜜ㆍ德ㆍ棣等州之地, 與田承嗣ㆍ令狐彰ㆍ薛嵩ㆍ李寶臣ㆍ梁崇義更相影響.]
정사를 다스림이 엄하고 가혹하여, 그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마주 보고 얘기하지도[偶語] 못했다. 처음 치(淄)ㆍ청(靑)ㆍ제(齊)ㆍ해(海)ㆍ등(登)ㆍ래(萊)ㆍ기(沂)ㆍ밀(蜜)ㆍ덕(德)ㆍ체주(棣州)의 땅을 관장하면서 전승사ㆍ영호창ㆍ설숭ㆍ이보신ㆍ양숭의 등과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74, 이정기
 
현종조 이후로 문란해진 정치질서는 대종 때까지도 지속되어 당조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었고, 공자가 말씀하신 바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오니, 제후로부터 그것이 나오면 대체로 10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은 일이 드물고, 대부로부터 나올 적에는 5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는 일이 드물며, 가신으로부터 나올 적에는 3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음이 드물다." 라고 하신 상황이 당조 안에서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실제로는 대종 이후 12대까지 갔지만)
 
당의 사가들은 대개 이정기의 통치스타일은 '가혹'에 가까운 엄격함이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안ㆍ사의 난이 막 끝난 혼란스러운 시대에 법령을 다소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으면 곧바로 소요와 반란이 일어나기 쉬웠다는 점에서 그들의 평가는 너무 지나친 점이 있다. 연개소문의 카리스마와 무력(武力)을 '잔악무도함'으로 비틀어버린 것처럼. 게다가 이정기가 무작정 '가혹함'으로 평로치청 15주에 대한 태도를 일관한 것은 아니다.
 
[內視同列. 貨市渤海名馬, 歲歲不絕, 法令齊一, 賦稅均輕, 最稱強大.]
내부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시장에서는 발해의 명마가 거래되는 것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법령은 하나같이 공평한데다 부세마저 균일하게 가벼웠으므로 제일 강대하다 칭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74, 이정기
 
평로치청 안에서 15주는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하나같이 공평한 법률'하에서 말이다. <중국 속 고구려왕국, 제(齊)>의 저자인 지배선 교수는 여기서의 '법령'이란 이미 유명무실해져버린 당조의 법령이 아니라 평로치청 내에서의 고유한 법령을 가리키며, 당시 문왕이 다스리던 발해의 법령을 들여와서 퍼뜨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평로치청의 모든 시장에서 발해의 명마가 거래되었고 등주에는 발해 사신들이 오가는 발해관이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조의 법령이 유명무실했다고 해서 구태여 무시할 필요까지 있었을지, 이정기가 정말 자신만의 법령을 제정했거나 이웃한 '동족' 발해의 법령을 받아들였다면 이정기를 '까기' 바빴던 중국 사가들이 그걸 빠뜨렸을까 의문이 간다. 법령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그걸 판결하고 집행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쇠퇴하기 때문이지 법령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잖아. 통제력만 회복되면 법령은 언제든지 다시 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더욱이 아직 평로치청에서 당조에 대놓고 반항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상, 괜히 당조에 흠잡힐 짓을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독자적인 법령을 제정한다는 자체에 이미 기존의 법령을 제정한 당조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당조의 법령ㅡ율령격식으로 대표되는ㅡ은 이 무렵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발해와 신라, 일본, 나아가 왕건이 세운 고려 때까지도 당의 법령을 모법으로 한 여러 법령이 제정될 정도로 당의 법령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선진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이정기는 이 법령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다. 원래 당조가 제공해야 할 통제력, 법령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가치'를 당조를 대신해 부여해준 것으로 당조가 행사하던 평로치청에 대한 통제력을 '법령'이라는 이름으로 이정기가 차지한 것, 그것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산동 지역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이정기의 백성이 되겠다며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부세가 가벼웠다는 것에 대해서 말인데, <이덕일 사랑(舍廊)> 칼럼에서 본 얘기로《맹자》고자장구편 '백규장'에 보면 조세에 대해서 맹자가 백규와 나눈 대화가 등장한다. 사마천의 《사기》화식열전에도 등장하는, 춘추전국시대 위(魏)의 거상(巨商)이자 재상이었던 백규(白圭)가 당시 백성들로부터 받아들이는 세금을 기존의 1/10이 아닌 1/20으로 받겠다고 하자 맹자가 "당신이 하려는 그건 맥(貊)의 방법이다[子之道貊道也]"라고 하며 반대한 것이다.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춘추》공양전(公洋傳)·곡량전(穀梁傳)을 인용해 "십일(什一)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맥(大貊)·소맥(小貊)이다[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 라고 한 말을 적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맥이란 곧 당시의 고조선 즉 조선을 의미한다. 십일조라는 말에서 보이듯 봉건사회의 세금,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서 거둬들이는 조세는 보통 피지배자가 거둬들이는 수입의 1/10으로 되어 있었다. 고조선 당시 중국에서는 5/10, 즉 피지배자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받아갔는데 고조선에서는 1/20으로 세금을 받았으니 중국보다도 더 선진적인 조세할인을 실시했던 나라가 우리나라임을 알겠고, 이러한 낮은 세금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다.
 
비록 맹자는 고조선에서 이토록 '축복받은' 조세를 내는 것에 대해서 "그 나라는 오곡이 안 나고 수수만 나며, 성곽이나 궁실도 없고 종묘에서 제사지낼 줄도 모르고 제후의 폐백이나 외국에서 온 빈객에게 잔치해줄 줄도 모르고, 관리도 없고 관청도 없는 나라라 1/20만 받아도 충분한 것"(한마디로 중국만큼의 행정체계가 못 갖춰진 미개하기 짝이 없는 나라라는 의미?) 이라고 했지만, 유가의 관점이 아닌 도가, 노자의 관점에서 이러한 상태는 굉장히 안정적인 태고의 상태, 무위(無爲)로서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그 자연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국가라는 것이 서서 백성들을 핍박하기 전의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 본연의 상태ㅡ모든 인류가 서로 동등한 상태로 하늘에 계신 신의 뜻에 따라 평화롭게 살아가던 나라, 그것이 옛 조선, 우리 나라의 원래 모습이었다. (이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발해의 말이라는 것은 솔빈부, 지금의 연해주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나던 명마를 말하는데, 《구당서》나 《신당서》 모두가 발해의 특산물로 꼽는 이 나라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다. 주로 등주를 거쳐가는 발해 사신단이 들여오거나 아니면 발해와 당 사이의 접경지에서 거래되던 명마 무역루트를 장악한 이정기는 여지껏 이루어져오던 상거래질서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었다.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던 당조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평로치청번진 안에서는 '엄격한 법률집행'이라는 이름의 확실한 치안유지에 힘입어 상거래 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용되면서 다른 번진에 비해 상업이 번성하고, 발해와의 지속적인 교역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거기다 여러 지역에 대해서 나중에 온 지역이다 처음부터 따랐던 지역이다 차별하는 일도 없이 다 똑같이 공평하게 대해주었댔으니 사람이 안 모이고 배길 수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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