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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내용인지라 제목을 좀 바꿔 봤습니다.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5>후고려기(後高麗記)(18)
2009/06/06 04:01 광인

이정기의 뒤를 이어 평로치청의 2대 수장이 된 이납은 일단 758년생이다. 이정기의 나이 26세 때에 본 첫아들인데, 중국 정사에서 이납 이후 이사고와 이사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들은 모두 이정기 한 사람의 부기 즉 '떨이'로 뭉뚱그려져 있다.
 
[納少时, 正己遣將兵备秋. 代宗召見, 嘉之.]
이납이 어렸을 때, 이정기는 가을에 대비하고자 휘하 군사를 파견하였다. 대종이 불러서 만나보고 칭찬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가을에 대비한다'는 말은 곧 토번(티벳)이나 회골(위구르)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침공을 막기 위한 방추병으로서 이정기가 군사를 장안 서쪽으로 파견할 때, 활호절도사 영호창의 아들 영호창과 함께 치청번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찾아가 당의 천자 대종을 알현한 것인데,《책부원귀》에 보면 이납이 대종을 만난 것은 대력 4년(769) 11월, 그의 나이 겨우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열한 살은 지금으로 따지면 몹시 어린 나이지만, 당시 유목민들에게는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었던 듯. 흉노족의 경우에도 보이듯 유목민족의 사내는 '활을 당길 힘'만 있으면 모두 병사로 차출되었으며, 철륵족의 혼감이라는 사람 역시 11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력 4년(769) 11월에 활호절도사(滑毫節道使) 영호창과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아들들을 조정에 보내어 상(上)을 배알하였다. 이때 조서를 내려 영호창의 아들 영호건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이정기의 아들 이납을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하고 함께 금인과 자색 허리띠를 내렸다.
《책부원귀》 제왕부
 
여기서 이납은 당 대종으로부터 시어사라는 벼슬을 받게 되는데, 이미 아버지의 후광으로 종9품하 봉예랑이라는 관직을 열 살도 되기 전에 지니고 있던 상황에서, 종6품하 시어사로 3등급이나 승진한다. 함께 갔던 영호건이 받은 어사중승(종5품상)보다 품계가 하나 낮은 것은 이납이 영호건보다 나이가 좀 어렸기 때문이다.
 
[自奉礼郎超拜殿中丞、兼侍御史,赐紫金鱼袋. 历检校仓部郎中,兼总父兵,奏署淄州刺史.]
봉예랑에서 전중승과 시어사로 파격승진시키면서 자금어대를 하사하였다. 검교창부낭중을 지냈고 총부병(總父兵)을 겸직하였다. 또한 상주에 의해 치주자사로 임명되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이납은 종5품상 검교창부낭중 겸 총부병을 거쳐, 아버지 이정기의 치청번진 관할에 있던 치주의 자사로 임명된다. 그가 치주자사로 봉해진 것은 아버지의 입김이 컸다. 전승사 토벌에 공을 세운 이정기의 요구를 당 조정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
 
[正己将兵击田承嗣,奏署节度观察留后。寻迁青州刺史,又奏署行军司马,兼曹州刺史、曹濮徐兖沂海留后.]
정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전승사를 공격할 때 절도관찰유후로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주자사로 옮겼으며, 행군사마와 조주자사를 겸직하면서 조ㆍ복ㆍ서ㆍ연ㆍ기ㆍ해주 유후가 되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무중은 방(防) 고을을 근거지로 삼고서 노(魯)에 후사를 세워주기 청하였다. 비록 임금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노라."
ㅡ이상 《논어》헌문편 15장.
 
장무중은 당시 노나라의 대부였던 장손흘을 가리킨다. 헌문편 13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완성된 인간'에 대해 물어보는 자로에 대한 대답으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미덕 가운데 '장무중의 지혜'가 가장 첫머리에 거론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그가 지혜롭다고 칭찬해놓고 이제와서 그를 비난하는 이유는 그가 '분수에 넘치는 짓', 즉 신하로서 신하답지 못한 참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 했다. 자신의 영지였던 '방(防)' 땅을 영원히 다스릴 마음에 자신의 직계를 그 땅의 책임자로 봉해줄 것을 '중앙정부'인 노나라에 '강요'했다는 것이 공자가 비판하신 점이다.
 
이정기에 대해서도 공자께서는 장무중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판하셨을 것이다. 평로치청의 전권을 틀어쥔 그가 자신의 아들을 청주자사로 봉해달라는 요청을 당조에 올린 저의가 뭐겠어.
 
[又加御史大夫.]
다시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이납이 받은 행군사마 벼슬은 전쟁 때 장군과 절도사를 보좌하는 요직인데, '유후(留候)'로 봉해진 사실부터가 이미 이정기가 자신이 갖고 있던 평로치청번진의 영토를 아들 이납에게 세습시키기 위한 사전조치였고, 그 요구에 당 조정이 추인을 한 구체적인 기록이라 하겠지만, 결정적으로 당의 최고 관직의 하나인 '어사대부'에 봉해지면서 당조의 공식인정을 받고, 절도사라는 이름만 안 붙었을 뿐 절도사와 동일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실 당조의 신하를 자처하던 이정기가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시킬 준비를 다 해놓고 당조에게 가서 관직임명을 허락해달라고 말한 것은 뭐, 속된 말로 뒤로 호박씨 깐다고 하는 것으로 공자께서 크게 비판하실 일이었지만, 사실 당조가 그만큼 힘이 약해져 있었던 반증이기도 하다. 당시의 다른 절도사들도 이정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직위를 세습시키려 했다. 봉건시대의 제후처럼 말이다. 전승사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절도사가 된 것도 그의 조카 전열, 성덕절도사 이보신의 아들인 이유악은 자신이 아버지의 지위를 세습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이정기와 연합해 당조에 반기까지 들었다. 상위절도사 설숭의 아우 설악 역시 마찬가지로 형의 절도사 자리를 잇게 해달라며 당조에 반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8월 신묘일에 이정기가 죽자(사실 한달 전에 죽었지만) 이납은 당조로부터 평로치청절도사 세습을 인정해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같은 처지에 있던 전열ㆍ양숭의ㆍ장유악(이유악) 등과 함께 반기를 들었다. 단순한 권력세습의 문제가 당조라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역으로까지 변질된 것인데, 이정기가 죽었을 때 이납의 나이는 스물셋, 이미 성덕절도사 이보신의 처제와 혼인해 혼인동맹까지 맺은 상태에서 당조와 대치한 것은 굳이 당조와의 정면대결보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칫 흔들릴수 있는 치청번진 안의 지배력을 굳건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차라리 거기를 거점으로 반기를 들고 독립왕국을 선포해도 상관없지 않나 싶지만, '명분'이라는 것은 때로는 '실리'만큼이나 중요하고 또 영향력있는 변수로 적용하곤 한다. 무엇보다 '도덕성'의 문제니까. 대외적으로 명분을 얻기 위해서 당조로부터 절도사직을 '승인해주마'라는 한 마디라도 받아내야 했다.
 
[冬十月乙酉, 尚書左仆射楊炎貶崖州司馬, 尋賜死. 戊申, 加宣武軍節度使劉洽御史大夫. 徐州刺史李洧棄其帥李納, 以州來降.]
겨울 10월 을유에 상서좌복야(尚書左仆射) 양염(楊炎)을 애주사마(崖州司馬)로 깎아내리고, 심(尋)에게는 사약을 내렸다[賜死]. 무신에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 유흡(劉洽)에게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더해주었다. 서주자사(徐州刺史) 이유(李洧)가 그 우두머리 이납(李納)을 버리고 주를 들어 항복해 왔다.
《구당서》 권제12, 본기제12, 덕종 이괄 상(上), 덕종 건중 2년(781) 11월
 
서주자사 이유는 《구당서》에 기록된바 이납의 종숙부(從叔父). 국어사전 찾아보니까 아버지 사촌형제 중에서 작은아버지뻘 되는 항렬이 종숙부란다. 이정기 사후 그의 집안에서조차 당조에 계속해 싸울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이납의 5촌 당숙이 되는 이유의 항복ㅡ그리고 그것은 이납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당조가 서주를 장악하게 되면서 평로치청번진의 남쪽 방어선이 무너지게 된 것.
 
[納以彭城險厄, 又怒洧背宗, 乃悉兵圍之.]
납은 팽성(彭城)이 지세가 험하고[險厄] 또 유(洧)가 집안을 배신한[背宗] 것에 노하였다. 이에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悉兵] 에워쌌다[圍之].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이납은 다급히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공격했다. 《자치통감》에 기록된바 휘하 장수 왕온(王溫)이 위박의 도숭경과 연합해서 서주를 노렸고, 목표지는 서주의 치소인 팽성(彭城)이었다. 《사기》에 나오는 영웅 항우가 신흥 초(楚)의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지금의 강소성 서북부에 있는 서주시에 해당하는 곳. 멀지 않은 곳에 황하가 있다.
 
팽성은 지형이 몹시 험한 천연요새였고 이곳을 치기 위해서는 많은 군사가 필요했지만, '배신자를 응징하기 위해서'라는 것 말고도 평로치청 번진 안의 다른 주들이 당조에 항복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더욱이 서주는 운하를 확보하기 위한 요충지였다. 이곳을 되찾는 일은 이납으로서도 시급한 현안이었다... 만,
 
[十一月辛未, 宣武節度劉洽與神策將曲環大破李納之衆於徐州.]
11월 신미에 선무절도(宣武節度) 유흡과 신책장(神策將) 곡환이 이납의 무리들을 서주에서 크게 깨뜨렸다.
《구당서》 권제12, 본기제12, 덕종 이괄 상(上), 덕종 건중 2년(781) 11월
 
《자치통감》에 보면 이납이 서주 팽성을 공격했을 때, 자사 이유는 다급히 자신의 휘하 장수 가운데 가장 발이 빠른 사진장(四鎭將) 왕지흥(王知興)이라는 자를 장안으로 보내 구원요청을 했다고 한다. 서주에서 장안까지는 직선거리로 800km. 이 거리를 닷새 만에 달려가 이납의 침공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고 하니 참.... 마라톤의 원조를 다른 데서 찾아야 되려나. 서주자사 이유가 항복할 즈음부터, 변주에 동서수륙운양세염철사라는 관직을 신설해서 물길 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당조는 곧장 선무절도사 유흡과 신책장 곡환을 파견해 서주를 구원하게 했고, 11월 신미에 팽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납은 참패를 겪었다.
 
[崇慶ㆍ溫攻彭城, 二旬不能下, 請益兵於納. 納遣其將石隱金將萬人助之, 與劉洽等相拒於七里溝. 日向暮, 洽引軍稍卻. 朔方馬軍使楊朝晟, 言於唐朝臣曰 "公以步兵負山而陳, 以待兩軍, 我以騎兵伏於山曲, 賊見懸軍勢孤, 必搏之. 我以伏兵絕其腰, 必敗之." 朝臣從之. 崇慶等果將騎二千逾橋而西, 追擊官軍, 伏兵發, 橫擊之. 崇慶等兵中斷狼狽, 而返阻橋以拒官軍. 其兵有爭橋不得, 涉水而度者. 朝晟指之曰 "彼可涉, 吾何為不涉?" 遂涉水擊, 據橋者皆走. 崇慶等兵大潰, 洽等乘之, 斬首八千級, 溺死過半. 朔方軍士盡得其輜重, 旗服鮮華. 乃謂宣武人曰 "乞子之功, 孰與宋多?" 宣武人皆慚. 官軍乘勝逐北, 至徐州城下, 魏博ㆍ淄青軍解圍走. 江ㆍ淮漕運始通.]
숭경과 온(溫)이 팽성(彭城)을 공격하였으나 두 순(旬)이 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납에게 병사를 늘려줄 것을 청했다. 납은 그 장수 석은금(石隱金)을 보내 1만 명으로 돕게 했는데, 유흡 등과 칠리구(七里溝)에서 서로 거하였다. 해질 무렵에 흡은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引軍稍卻]. 삭방마군사(朔方馬軍使) 양조성(楊朝晟)이 당조신에게 말하였다. “공이 보병으로 산을 등지고 진을 쳐서 양군(兩軍)을 기다리고 우리는 기병으로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면 적은 현군(懸軍)의 세가 외로운 것을 보고 반드시 쫓아올 것이다. 우리가 복병으로 그 허리를 끊으면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조신이 그것을 따랐다. 숭경 등은 과연 기병 2천을 거느리고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관군을 추격했고 복병이 발하여 측면에서 쳤다[橫擊]. 숭경 등의 병사들은 가운데가 끊어져 낭패를 당했으나 돌아와 다리 멀리서 관군을 막았다. 그 병사들은 다투어 다리를 건너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맨발로 물에 들어가 건넜다. 조성이 그것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들도 건너는데 우리라고 못 건너겠는가!” 마침내 강을 건너 쳐서 다리를 지키던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숭경 등의 병사는 크게 궤멸되었으며 흡은 승기를 몰아 8천 급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을 넘었다. 삭방의 군사들은 그들의 군수물자[輜重]를 모두 차지하여[盡得] 깃발과 복장이 눈부시고 화려하였다[鮮華]. 이에 선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걸자(乞子)의 공로를 어찌 송다(宋多)에 비길수 있으랴?” 선무 사람이 모두 부끄럽게 여겼다. 관군이 승기를 타고 북쪽으로 쫓아가 서주성(徐州城) 아래에 이르렀는데,위박(魏博)과 치청(淄青)의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갔다[圍走]. 강회(江淮)의 조운(漕運)이 비로소 통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2년 신유(781)
 
한문을 잘 몰라서 '송다(宋多)'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를 인용해서 '물을 다 건널 때까지 보고만 있는 너희와 물을 건너기도 전에 먼저 가서 치는 우리 중에 누가 더 나으냐'하고, 삭방군이 선무군에게 약올리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 있잖아. 강가에 진 치고 있는데 적군이 강을 넘어오는 것을 보고도 '군자가 비열하게 적들이 강 건너는 중에 치면 안 되지'하고 턱하니 넋놓고 있더니, 강을 다 건너온 뒤 아직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때에 치자고 해도 '쟤네들이 준비 다 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군자지'하고, 그 망할 놈의 군자 타령만 하다가
결국 전쟁에서 대패하고 자기 목숨도 잃었다는 춘추시대 '양공'이라는 멍청한 군주의 이야기.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겉껍데기만 내세우는 것들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서 쓸데없이 체면 내세워서 인정만 베풀다가는 망할 수도 있음을 여실히 가르쳐준 《십팔사략》속의 일화이다.
 
[己巳, 詔成德軍節度都知兵馬使, 恆州刺史, 襲隴西郡王李惟嶽  “以其父寶臣有忠勞於王室, 惟嶽隳墜父業, 蔑棄國恩, 縗絰之中, 擅掌戎務. 外結凶黨, 益固姦謀, 不孝不忠, 宜肆原野. 削爾在身官爵.” 乙亥, 貶戶部侍郎判度支韓洄蜀州刺史, 以江淮轉運使, 度支郎中杜佑代判度支, 戶部事. 丁丑, 以陝州長史李齊爲河中尹, 充河中晉絳防禦觀察使. 以商州刺史姚明揚爲陝州長史本州防禦陸運使. 以權鹽鐵使戶部郎中包佶充江淮水陸運使. 李納將海州刺史王涉以州降. 十二月庚寅, 河中節度使馬燧檢校左仆射, 澤潞節度使李抱真檢校兵部尚書, 賞破田悅之功也.]
기사에 성덕군절도(成德軍節度)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긍주자사(恆州刺史)로서 농서군왕(隴西郡王)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유악(李惟嶽)에게 조하였다. “그 아비 보신(寶臣)은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건만[忠勞] 유악은 부업(父業)을 실추시키고[隳墜] 나라의 은혜를 무시했으며[蔑棄], 상을 당한 와중에[縗絰之中] 제멋대로 융무(戎務)을 주관하여 바깥으로는 흉당(凶黨)과 결탁해 간사한 모의를 더욱 굳히니, 불효와 불충은 마땅히 원야(原野)에서 사(肆)하고 너의 몸에 지닌 관작을 깎아버릴 것이다.” 을해에 호부시랑(戶部侍郎)ㆍ판도지(判度支) 한회(韓洄)를 촉주자사(蜀州刺史)로 깎고, 강회전운사(江淮轉運使)ㆍ도지낭중(度支郎中) 두우(杜佑)를 대신 판도지호부사(判度支戶部事)로 임명하였다. 정축에 섬주장사(陝州長史) 이제를 하남윤(河中尹)으로 삼아 하중진강방어관찰사(河中晉絳防禦觀察使)로 채웠다. 상주자사(商州刺史) 요명량을 섬주장사(陝州長史)ㆍ본주방어륙운사(本州防禦陸運使)로 삼았다. 권염철사(權鹽鐵使)ㆍ호부낭중(戶部郎中) 포길(包佶)을 강회수륙운사(江淮水陸運使)로 채웠다. 이납의 장수인 해주자사(海州刺史) 왕섭(王涉)이 주를 들어 항복하였다. 12월 경인에,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마수(馬燧)를 검교좌복야(檢校左仆射), 택로절도사(澤潞節度使) 이포진(李抱真)을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尚書)로 삼았다. 전열을 깨뜨린 공으로 포상하였다.
《구당서》 권제12, 본기제12, 덕종 이괄 상(上), 덕종 건중 2년(781) 11월
 
서주성의 패배는 비단 남쪽 방어선이 뚫린 위협으로 그치지 않았다. 평로치청번진의 치하에 있던 해주자사 왕섭까지 주를 들어 당조에 투항해버렸던 것.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2월에는 밀주자사 마만통까지 당조에 투항해버린다. 졸지에 해주와 밀주 2개의 주가 당조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더욱이 당조에서는 항복해온 마만통을 밀주자사로 명하는가 하면 어사중승이라는 벼슬까지 주어 치청 군사들의 투항을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甲申, 淮南節度使陳少游遣兵擊海州, 其刺史王涉以州降. 十二月,李納密州刺史馬萬通乞降, 丁酉, 以為密州刺史.]
갑신에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진소유(陳少游)가 군사를 내어 해주를 치니 그 자사 왕섭이 주를 들어 항복하였다. 12월에 이납의 밀주자사(密州刺史) 마만통(馬萬通)이 항복을 청하여 정유에 밀주자사로 삼았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2년 신유(781) 11월
 
해주와 밀주가 넘어가고 이듬해인 782년 1월, 이납은 진소유에게 빼앗겼던 해주와 밀주의 땅을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癸未, 蜀王遂更名溯. 淮南節度使陳少游拔海ㆍ密二州, 李納復攻陷之.]
계미에 촉왕(蜀王) 수(遂)가 이름을 소(溯)로 고쳤다.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진소유(陳少游)가 해(海)ㆍ밀(密) 2주를 차지하니[拔] 이납은 다시 쳐서 함락시켰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3년 임술(781) 정월
 
이납에게 2주의 땅을 빼앗긴 진소유는 곧바로 서주와 해주 사이에 있던 사주(泗州) 최남단의 우이(旴貽)라는 곳으로 도망갔다. 상황은 다시 역전됐다. 당조에 충성하는 듯 보이던 진소유가 이납이나 이희열 등과 제휴를 모색하며 당조에 등을 돌린 것이다.
 
《구당서》에 보면 진소유는 변주를 점령한 이희열이 양자강과 회수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에 놀라 자신의 행군참모였던 온술을 이희열에게 보내 이희열에게 '폐하'라고 부르면서 부하로 거둬달라고 빌고, 순관 조선을 운주로 보내어 이납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납을 토벌하겠다고 군사를 일으킨 진소유조차도 당조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ㅡ즉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당조에 반기를 들고 등을 돌릴 수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이 시기 당조의 절도사들이 겉으로 내세운 당조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명분보다 철저히 실리에 의해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상황을 보여준다.
 
[庚戌, 馬燧ㆍ李芃破田悅兵於洹水, 進攻魏州.]
경술에 마수(馬燧)와 이봉(李芃)이 전열(田悅)의 병사들을 원수(洹水)에서 깨뜨리고 위주(魏州)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구당서》 권제12, 본기제12, 덕종 이괄 상(上), 3년(782) 윤1월
 
윤1월, 전열과 위준의 연합군은 원수에서 당조에서 보낸 군사들과 충돌했지만, 이것이 깨지면서 복양의 북방 방어선까지 붕괴되었다. 《구당서》에 입전된 이정기의 열전이 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드는게, 원수 강가에서 벌어진 싸움과 서주자사 이유의 당조 항복이 서로 순서가 바뀌어 실려있더라. 게다가 그 뒤로 벌어진 항복사태에 대해서도 뭉뚱그려져 있고.
 
[遣大將衛俊將兵一千救悅, 為河東節度使馬燧敗於洹水, 殺傷殆盡.]
대장(大將) 위준(衛俊)을 보내어 병사 1천을 거느리고 열(悅)을 구하게 하였는데, 하남절도사(河東節度使) 마수(馬燧)에게 원수(洹水)에서 패하고, 죽거나 다친 것이 대부분이었다[殆盡].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남쪽의 요충지 서주가 넘어간 이래 북쪽의 방어선까지 무너지면서, 이납의 평로치청번진은 남북 양쪽으로부터 당의 협공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다가 정말 죽는거 아닌가 하고 두려움에 차오른 평로치청번진. 반면에 덕종 황제께서는 자신감이 팍 올라서 단번에, "여세를 몰아 이납과 전열을 잡아 죽여라!" 라는 조서까지 친히 내리신다.
 
[詔諸軍誅之.]
여러 군(軍)에 조하여 잡아 죽이게 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이정기와 대치하고 있을 때는 감히 생각도 못했던 것을....
 
[二月, 王巡幸漢山州, 移民戶於浿江鎭.]
2월에 왕이 한산주를 두루 돌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패강진(浿江鎭)으로 옮겼다.
《삼국사》 권제9, 신라본기9, 선덕왕 3년(782)
 
이와 더불어서, 이때 신라에서 북쪽에 대곡성두상(大谷城頭上)을 두었다. 이것이 곧 패강진(浿江鎭). 이곳의 최고 사령관은 두상대감(頭上大監)으로서 급찬에서 사중아찬(四重阿湌)까지인 사람으로 임용했다. 그 밑으로 일곱 명의 대감(大監)과 한 명의 두상제감(頭上弟監)ㆍ제감(弟監), 그리고 보감(步監), 여섯 명의 소감(少監)을 임명했다고 《삼국사》잡지는 전하고 있다.
 
[宣武節度使劉洽攻李納於濮州, 克其外城. 納於城上涕泣求自新, 李勉又遣人說之. 癸卯, 納遣其判官房說以其母弟經及子成務入見.]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유흡(劉洽)이 복주에서 이납(濮州)을 공격하여 그 외성(外城)을 이겼다. 납은 성 위에서 통곡하며[涕泣] 뉘우침[自新]을 구하였는데, 이면(李勉) 또한 사람을 보내어 설득하였다. 계묘에 납은 그 판관 방설(房說)을 보내어 그 모제(母弟) 경(經) 및 아들 성무(成務)를 들여보내 뵙게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3년 임술(782) 2월
 
복양방어선까지 붕괴된 상태에서 남북으로 치달아오는 당조의 공격을 받아낸다는 것은 이납으로서는 너무 버거운 일. 결국 이납은 타협책을 택한다. 판관 방설과 자신의 아우 경(經), 그리고 장남 성무(成務)를 장안에 보내어 천자께 알현시키겠다고 요청한 것. 당조에 대한 항복 선언이었다.
 
아마 여기서 당조가 '반란을 일으킨 자를 그냥 놔둘수 없다'며 토벌을 밀어붙였거나 그 타협책을 받아들였더라면 역사가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일단 이납이 몰락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늘 그렇듯 적은 내부에 있는 법이니까. 이납이 장안으로 파견한 방설 등의 신병처리 문제를 두고 엉뚱한 인간이 하나 끼어들었다.
환관 송봉조. 이 남자가 덕종에게 이납의 사자들을 잡아 가두자고 청한 것이다.
 
[會中使宋鳳朝稱納勢窮蹙, 不可捨, 上乃因說等於禁中, 納遂歸鄆州, 復與田悅等合. 朝廷以納勢未衰, 三月 乙未, 始以徐州刺史李洧兼徐ㆍ海ㆍ沂都團練觀察使, 海ㆍ沂已為納所據, 洧競無所得.]
마침 중사(中使) 송봉조(宋鳳朝)가 납의 세력이 다하여 오그라들었다 하며 사면할 수 없다 하니,상은 이에 설 등을 금중(禁中)에 가두었다. 납은 마침내 운주로 돌아갔으며,다시 전열(田悅) 등과 합쳤다. 조정은 납의 세력이 수그러들지 않자[未衰] 3월 을미에 비로소 서주자사(徐州刺史) 이유(李洧)에게 서(徐)ㆍ해(海)ㆍ기(沂)의 도단련관찰사(都團練觀察使)를 겸하게 하였으나,해주와 기주는 이미 납에게 점령되어[據] 유는 갈수 없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3년 임술(782) 2월
 
이 자의 신분은 중사였다. 중사가 뭔고 하니 천자의 명을 받고 출정하는 군대를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것인데, 이납을 토벌할 중책을 맡은 사령관 유흡조차도 송봉조의 지시를 따라야 했을 만큼 그 권한은 막강했다. 이납이 저자세를 취해오는 것을 본 송봉조는 대번에 이납의 처지가 매우 곤궁한 것을 간파했고, 이걸 계기로 자신이 유흡을 제치고 이납 토벌에 공을 세울 요량으로 이런 청을 올린 것이다. 훗날 이 일은 덕종조 환관의 전횡으로 수만 가지 국사를 그르쳤던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는데, 어쨌거나 방설 등은 결박당해 황궁 금영(禁營)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이납에게 기회였다. 송봉조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까지의 시간이 '기사회생',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회생의 시간을 벌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납 자신에게는 '결사항쟁'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게 해주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고 도둑을 쫓아도 도망칠 길은 터주고 쫓아야지 안 그랬다간 내 쪽이 위험해진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구하게 전해오는 교훈. 더우기 다소 허술한 점이 보인다 해도 '시간'을 주지 말고 '속도전'으로 끝내라는 손자의 말까지 깨끗하게 무시당했으니 이납으로서는 당조에 '거역하기 싫어도 거역해야 하는' 명분을 얻은 셈이다.
 
[李納之初反也. 其所署德州刺史李西華備守甚嚴, 都虞候李士真, 密毀西華於納. 納召西華還府,以士真代之. 士真又以詐召棣州刺史李長卿, 長卿過德州, 士真劫之, 與同歸國. 夏四月戊午, 以士真ㆍ長卿為二州刺史. 士真求援於硃滔, 滔已有異志, 遣大將李濟時將三千人, 聲言助士真守德州. 且召士真詣深州議軍事, 至則留之, 使濟時領州事.]
이납이 처음에 반역하였을 때였다. 그로부터 덕주자사(德州刺史)로 임명된 이서화(李西華)의 수비[備守]가 몹시 엄하였는데,도우후(都虞候) 이사진이 몰래 납에게 서화를 헐뜯었다. 납은 서화를 부(府)로 돌아오게 하고,사진으로 대신하였다. 사진은 또 거짓으로 체주자사 이장경을 불러 들였는데,장경이 덕주를 지나자 사진은 그를 위협하여 함께 나라에 귀순하였다. 여름 4월 무오에 사진과 장경을 2주의 자사로 삼았다. 사진은 주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도는 이미 다른 뜻이 있어, 대장 이제시(李濟時)를 보내어 3천 명을 거느리고 성언(聲言)하기를 사진을 도와 덕주를 지키겠다 하였다. 또한 사진을 불러들여 심주의군사(深州議軍事)에 나아가게 하여 이르자 곧 머물러두게 하고,제시를 시켜 주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3년 임술(782)
 
고언소와 마찬가지로 덕주자사 이사진도 당조에 투항해버렸다. 그것도 혼자 가는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납 밑에서 같이 일하던 체주자사 이장경까지 '협박'해서 데리고 갔는데, 당조로부터 덕주자사의 벼슬을 받기 전에는 공목관과 함께 평로치청번진의 군정을 맡아보던 도우후로서 이납의 녹을 먹던 자다.
 
[甲子, 貶廷玉柳州司戶, 體微萬州南浦尉. 宣武節度使劉洽攻李納之濮陽, 降其守將高彥昭.]
갑자에 연옥(廷玉)을 유주사호(柳州司戶)로, 체징(體微)을 만주남포위(萬州南浦尉)로 좌천시켰다[貶]. 선무절도사 유흡이 이납의 복양(濮陽)을 공격하니 그 수장(守將) 고언소(高彥昭)가 항복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3년 임술(782) 4월
 
설상가상으로, 복양성에서 견성을 거쳐 120km나 떨어져 있는 운주로 퇴각한 이납은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장군 고언소에게 복양 방어를 맡겼지만, 이 고언소라는 자식은 서무절도사 유흡의 공격을 받은 그 해 4월에 당조에 항복해버리고 만다. 《당서》에는 이때 항복한 고언소는 당조로부터 평은군왕(平恩郡王) 작위와 함께 식읍 5백 호를
하사받았다고 나오는데, 뒤늦게나마 다시 튀어나온 당조의 회유책이었다.
 
[李納求援於滔等, 滔遣魏博兵馬使信都承慶將兵助之, 納攻宋州,不克,遣兵馬使李克信、李欽遙戍濮陽、南華以拒劉洽。]
이납은 도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도는 위박절도사(魏博兵馬使) 信都承慶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돕게 하였다. 납이 송주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자 병마사(兵馬使) 이극신(李克信)과 이흠요(李欽遙)를 보내어 복양(濮陽)을 지키게 하고 南華하여 유흡과 대치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27, 당기(唐紀)제43, 
덕종신무성문황제(德宗神武聖文皇帝)제2, 건중 3년 임술(782) 7월
 
복양이 당에게 함락된 지 석 달, 이납은 다시 복양을 탈환한 뒤 이극신과 이흠요 두 절도사를 시켜 복양을 지키게 하고, 이희열ㆍ주도ㆍ왕무준ㆍ전열 등의 절도사와 연합해 당조에 맞섰다. 원래 《자치통감》이나 《당서》에는 이희열이 덕종으로부터 평로치청(平盧淄青)과 연운, 등래, 제주 지역을 총괄하는 절도사의 소임을 받고 이납을 토벌하도록 명을 받았다고 했지만(7월 갑진), 이 관직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평로치청은 누가 뭐래도 이정기의 후손, 고려 이씨 일족의 땅이었고, 곧 이희열은 이것이 당조에서 자신을 이용해 이납과 싸우게 하려는 전형적인 이이제이 전략임을 깨달았다. 때마침 이납으로부터 도착한 편지를 받고, 이희열은 다시금 이납과 손을 잡게 되는데, 이희열 역시 이정기와 마찬가지로 평로군 출신으로서 바다를 통해 산동 지역에 발을 디뎠던 인물이었다.
 
[納遂歸鄆州, 復與李希烈ㆍ硃滔ㆍ王武俊ㆍ田悅合謀皆反, 偽稱齊王, 建置百官.]
납은 마침내 운주(鄆州)로 돌아왔고, 다시 이희열ㆍ주도ㆍ왕무준ㆍ전열과 작당하여[合謀] 모두 반역을 일으켰으며, 참람되게 제왕(齊王)을 칭하고 백관을 두어 임명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그렇게 다른 번진 절도사들과 연합해 힘을 모은 이납은, 마침내 그해 11월에 하늘에 제를 올리고 평로치청번진의 12개 주를 바탕으로 공식적인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이것이 제(齊)의 출범이었고, 시기로는 당 덕종 건중 3년이자 발해 문왕 보력 9년, 신라 선덕왕 즉위 3년, 일본 간무(桓武) 덴노 엔랴쿠(延曆) 원년의 일이며, 간지로는 태세 임술(782), 우리나라 단기로는 3115년의 일이다.
 
[是月, 硃滔、田悅、王武俊於魏縣軍壘各相推獎, 僭稱王號. 滔稱大冀王, 武俊稱趙王, 悅稱魏王. 又勸李納稱齊王. 僭署官名如國初親王行台之制. 丁丑, 李希烈自稱天下都元帥、太尉、建興王, 與硃滔等四盜膠固爲逆.]
이 달에, 주도와 전열, 왕무준이 위박군루(魏縣軍壘)에서 각자 서로 추켜세우면서[推獎] 제멋대로 왕호(王號)를 칭했다. 도는 대기왕(大冀王), 무준은 조왕(趙王), 열은 위왕(魏王)이라 하였다. 또한 이납에게 권하여 제왕(齊王)을 칭하게 하였다. 제멋대로 관명(官名)을 두었으니 국초의 친왕행태(親王行台)의 제(制)와 같았다.
《구당서》 권제12, 본기제12, 덕종 이괄 상(上), 건중 3년(782) 11월
 
한술 더떠서 11월 정축에는 이희열이 스스로 천자도원수(天下都元帥) 태위(太尉) 건흥왕(建興王)이라 일컬으며
주도 등 여러 절도사들(《구당서》에는 '네 도적 무리'라고 썼음)과 맺어 반란을 일으켰다. 당조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발호한 절도사들이 당조의 책봉이나 조공의 형식적인 의례까지 무시한 채 그들 스스로 '왕'을 일컬으며 각자의 번진을 영토로 삼아 중원을 차지하려 드는, 그야말로 난세(亂世)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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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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