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70697980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7>후고려기(後高麗記)(20) - 광인"에서 이사고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이사고 (1)

[癸酉, 平盧淄靑節度使、檢校司徒、平章事李納卒.]
계유에 평로치청절도사 검교사공 평장사 이납이 졸하였다.
《구당서》 본기제13, 덕종 하(下) 정원 8년(792) 5월
 
하여튼 목숨복은 지지리도 없는 이씨 집안이었다. 정원 8년(792) 5월 같으면 그 달 초하루가 을묘니까 계유면 19일. 5월 19일이 납왕의 기일 되시겠다. 농서군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위해서 당조에서는 제후의 예에 준하여 사흘 동안 정사를 폐했다. 《자치통감》에서는 그의 죽음을 표현하되 '졸(卒)'이 아닌 '훙(薨)'으로 기록했으니, 그가 '제'라는 한 나라의 당당한 국왕이었으며 앞서 덕종이 봉천에서 내린 '성신문무의 조'에서 약속했던 '옛 관직과 작위를 모두 인정한다'는 조항을 당조에서 지켜준 것이다.

...

사후에 태부의 직책까지 받은 납왕이지만, 제의 앞낲이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납왕이 죽고 즉위한 어린 아들 이사고 때문이었다.
 
[子師古, 累奏至靑州刺史.]
아들 사고는 누차 아뢰어 청주자사에 이르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납왕이 죽었을 때 이사고는 청주자사라는 제의 요직에 있었는데, 죽기 직전에 자기 입으로 "내 나이 열다섯에 절모를 받았다[吾年十五擁節旄]."(《자치통감》中)고 한 것에서 그의 나이 열다섯에 얻은 자리임을 추정할 수 있다.(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광으로 얻은 자리였지만.)
 
[貞元八年, 納死, 軍中以師古代其位而上請, 朝廷因而授之. 起復右金吾大將軍同正ㆍ平盧及靑淄齊節度營田觀察ㆍ海運陸運押新羅渤海兩蕃使.]
정원 8년(792)에 납이 죽자 군중(軍中)이 사고(師古)를 그 자리에 추대하고 상청(上請)하니 조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起復하여 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 동정(同正)ㆍ평로급청치제절도(平盧及靑淄齊節度) 영전관찰(營田觀察)ㆍ해운육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陸運押新羅渤海兩蕃使)로 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구당서》본기에는 납왕이 죽고 석 달쯤 지난 8월 신묘에 당조는 이사고를 운주대독부장사(鄆州大都督府長史)ㆍ
평로치청등주절도관찰(平盧淄靑等州節度觀察)ㆍ해운육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陸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로
삼았다고 적고 있는데, 아버지 납왕의 관직을 거의 그대로 세습한 것으로서 납왕 때에 비하면 전쟁이나 별다른 무리 없이 미끄러지듯 수월하게 제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즉위할 수 있었다.
 
[貞元八年閏十二月, 渤海押靺鞨使楊吉福等三十五人來朝貢.]
정원 8년(792) 윤12월에 발해의 압말갈사(押靺鞨使) 양길복(楊吉福) 등 35인이 와서 조공하였다.
《당회요》 권제96, 발해전
 
《당회요(唐會要)》. 소면(蘇冕)·최현(崔鉉) 등이 각기 저술한 《회요》에 북송 때의 왕부(王溥) 등이 당말(唐末)까지의 자료를 첨가, 제왕·종실을 비롯해 예악·관제·재제(財制)·외교 등을 514항으로 나눠서 《육전(六典)》의 기본제도며 칙(勅)·격(格)·주의(奏議) 등의 기록을 거의 연대순으로 배열, 961년에 완성한 책이다. 지금 남아있는 현행본은 청(淸) 때 결권(缺卷)을 다른 자료로 보충한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成德軍節度王武俊率師次於德ㆍ棣二州, 將取蛤朵及三汊城.]
성덕군절도(成德軍節度) 왕무준(王武俊)이 군사를 이끌고 덕(德)ㆍ체(棣) 2주에 주둔하면서 합타성과 삼차성을 차지하고자 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문제는 사고왕이 뒤를 이은뒤 곧바로, 성덕군절도사 왕무준과의 충돌로 드러났다. 예전 주도가 당조에 반란을 일으켜 덕종은 봉천으로 도망가고 장안과 낙양이 일시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평로치청의 영지였던 체주를 관할하고 있던 치청의 자사 이장경(李長卿)이 자신의 성을 들어 주도에게 항복했었다. 여러 절도사들이 나서서 주도를 토벌한 뒤, 왕무준은 주도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덕주와 체주를 자신의 영지로 편입시켰지만, 합타만은 납왕이 그대로 관리했다. 이것이 왕무준에게는 위협이자 불만이었다.
 
산동 지역은 춘추시대부터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다. 당조의 소금 생산지는 회남과 강남, 복건과 영남 연안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산동과 하북 연안이 가장 중추지역이었다. 제의 본거지인 산동, 그러니까 평로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양이 70만 관이었다고 하는데, 808년 당시 각염원에서 한 해 동안 거둬들인 양의 절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당조 하남도의 체주와 합타의 1년 소금생산량은 수십만 곡에 달했는데 이곳을 두고 납왕은 왕무준이나 주도와 삼파전을 벌였다. 그 중 주도가 먼저 망하고, 덕주와 체주는 왕무준에게 넘어갔지만, 체주 땅 합타(蛤朵)만은 납왕이 차지한 채, 덕주의 남쪽 강을 가로지르는  삼차구성(三汊口城, 삼각형 모양의 성)을 쌓고서 그 땅에서 나는 소금의 이익을 모두 독점했다. 더구나 위박절도사 전서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길을 빌려 끊임없이 덕주를 공격했다.
 
그러던 차에 납왕이 죽고 사고왕이 즉위했다. 왕무준은 사고왕이 아직 어리고, 납왕 때에 활약했던 구장(舊將)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무척 얕보았다[心頗易之]"고 한다. 잘하면 당조 최대의 소금생산지만 얻는게 아니라 평로치청의 영토 전체까지도 아우를수 있다는 계산하에 왕무준은 기어이, 합타와 삼차성을 공격했다. 선봉에 선 것은 왕무준의 아들 왕사청(王士淸). 이때 사고왕은 앞서 아버지에게 항복했던 전(前) 체주자사 조호에게 왕무준을 막게 한다.
 
[師古雖外奉朝命,而嘗畜侵軼之謀,招集亡命,必厚養之,其得罪於朝而逃詣師古者,因即用之. 其有任使於外者,皆留其妻子,或謀歸款於朝,事泄,族其家,眾畏死而不敢異圖.]
사고는 비록 겉으로는 조정의 명을 받드는 것처럼 했지만 그 전부터 침략할 계획을 세우면서 망명자들을 불러모았을 뿐 아니라 항상 그들을 잘 대우하였다. 조정에 죄를 짓고 도망쳐 사고에게 오는 자들은 지체없이 임용했다. 사신의 임무를 띠고 바깥에 나가는 자는 모두 그 처자를 남겨두게 했는데, 어쩌다 조정에 귀순하려 모의하다가 누설되면 그 가족을 죽였다. 다들 죽음이 두려워 감히 다른 생각을 못 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사고왕의 통치방식은 할아버지 정기왕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체주자사를 지낸 일이 있는 만큼 그가 체주의 지리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기록에도 나오지만 조호뿐 아니라 당조와 여러 번진의 망명자들에 대해 사고왕은 우대와 등용을 아끼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당조에 거역한 죄인의 몸이라 해도. 이미 천자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 지방번진들에 대해 제대로 된 통제를 가할 수 없는 당조와는 달리 제는 이미 독립왕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는 상태였고, 천자의 신하로서가 아닌 제라는 나라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융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
 
그가 제를 다스리던 때 그의 임의에 따라 관리가 처벌된 사례가 하나 있는데, 상주(上奏)의 일로 장안의 조정으로 파견했던 독고조(獨孤造)가 뭔가 왕의 심기를 건드린 것 때문에 대장(大將) 왕제(王濟)를 시켜 그를 목졸라 죽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대체로, 독고조가 사고왕을 버리고 당조에 투항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단다. 그를 내버려두면 다른 누가 또 당조에 투항하려 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벌백계'를 위해서 그를 처형한 것이라고. 아마 이때도 독고조의 식구는 평로치청의 수도인 운주에 남아있었을 것이고 독고조가 죽은 때와 비슷하게 모두 죽었을 것이다. 자기 가신들의 식구를 인질로 남겨두고 유사시 연좌제를 적용해 죽인다거나, 그렇게 죽을 것이 두려워 감히 다른 생각을 못했다는 것은 법을 엄하게 시행해서 몇 사람이 모여도 감히 수군대거나 그러지 못했다는 정기왕 시대의 모습과 흡사하다. 어느 나라나 통치자가 법을 집행하는 것은 엄격하게 그리고 가혹하게 이루어지고 백성들도 그에 따라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인데도, 그 시대의 다른 번진들 다 제쳐두고 사고왕만 특별나게 그랬던 것처럼 적어놓은 것은 후세 사관들의 악평이라 하겠다. 아마 이것도 사고왕이 좀더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나서의 일일테니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여하튼 그가 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성덕절도의 도전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통치는 미처 구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사청의 군사들이 체주 동쪽 끝에 있는 적하(滴河)를 건넜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진다.
 
[會士淸營中火起,軍驚,惡之,未進. 德宗遣使諭旨,武俊即罷還. 師古毁三汊口城,從詔旨.]
마침 사청의 진영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군사들이 크게 놀라면서 불길하게 여기고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덕종이 사신을 보내어 유지(諭旨)하니, 무준은 곧 거두고 돌아갔다. 사고는 삼차구성을 헐고 조지(詔旨)를 따랐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병영에서 일어난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군사들은 이 화재를 불길하게 생각하고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좀더 무리를 해서 해석을 하자면, 성덕절도의 군사들은 내심 평로치청의 고려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전쟁은 치러보지도 못했는데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서 '우린 못 가 배째' 이러고 있고, 강제로 이끌고 전쟁해봤자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이 전장에서 제대로 맥도 못 출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왕무준을 구원해준 것은 덕종이었다. 지난번에 괜히 번진 토벌하겠다고 나대다가 개피본 덕종으로서는 지금 이대로, 현상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랬고, 번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자칫 승리한 쪽의 세력이 커져서 당조에 도전하게 될 위험도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소금생산지는 얻지도 못하고 물자손실에 군사들 사기저하, 손해만 엄청나게 본 왕무준은 '그냥 니가 참지'하고 나서는 덕종의 권고에 못이기는 척 군사를 돌렸고, 이사고 역시 덕종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삼차성을 허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직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못한 사고왕으로서는 왕무준과 대립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대외적으로 자신을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인정해준 당조에 대한 예우도 저버릴 수 없었다.
 
아무튼 이후로 사고왕이 살아있을 동안에 제의 영토를 노리는 번진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사고왕이 다른 번진을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이것도 나름 실리획득이라면 실리획득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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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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