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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9>후고려기(後高麗記)(22) - 광인"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0>후고려기(後高麗記)(23) - 광인" 에서 이사고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貞元十年五月,師古服闋,加檢校禮部尚書.]
정원 10년(794) 5월에 사고가 복상을 마쳤다[服闋].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尚書)를 더해주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794년 5월, 사고왕은 복상을 모두 마쳤다. 납왕이 죽은 시점으로부터 계산해보면 2년 여에 걸친 긴 복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상중에는 대외적인 적대행위를 자제한다고 한다ㅡ유교적인 관례상ㅡ그 말은 곧, 탈상한 사고왕에게는 더이상 어떠한 행동 제약도 없다는 말이 된다.(나아가 사관들이 사고왕을 깔 구실도 없어졌다는 얘기지.) 상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검교예부상서의 벼슬을 내려준 것은 사전에 제의 도발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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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年正月,檢校尚書右仆射.]
12년(796) 정월에 검교상서(檢校尚書)ㆍ우복야(右仆射)가 되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검교상서우복야는 일찍이 이정기가 요양군왕이라는 작위와 함께 받았던 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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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月, 師古丁母憂, 起復左金吾上將軍同正.]
사고가 모친상[母憂]을 당하였는데, 기복(起復)하여 좌금오상장군(左金吾上將軍) 동정(同正)으로 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구당서》에 따르면 사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당 덕종 정원 12년, 발해 정왕 정력 2년 11월의 일인데, 좌금오상장군 동정이란 벼슬은, 앞서 모친상을 당했던 납왕이 탈상 뒤에 받았던 관직이기도 하다. 기복(起復)이라는 한자에 대해서 찾아봤는데, '기복출사(起復出仕)'라는 단어의 준말로 부모 상중에 벼슬을 한다는 의미다. 원래 부모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도 불구하고 사고왕의 어머니가 죽자마자 당조에서 그를 바로 조정에 복직시킨 것이다.(납왕 때에도 탈상을 모두 마친 뒤에야 새로운 관직을 주었다) 당조는 사고왕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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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달에 당조에서는 제의 사고왕과 두우, 이란의 잉첩들을 모두 '국부인'으로 삼았다.
 
[十五年正月, 師古ㆍ杜佑ㆍ李欒妾媵並為國夫人.]
15년(799) 정월에 사고와 두우, 이란의 잉첩들이 모두 국부인(國夫人)이 되었다.
《구당서》 이정기 열전 부(附) 이사고
 
사고왕의 벼슬을 더 올려주는 것은 당조로서도 부담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높거든. 그래서 나온 방법이 그 부인한테 관품을 내려주는 것이었는데, 회남절도사 두우, 영주대도독부장사 천덕군절도부대사 이란 두 사람의 잉첩과 함께 사고왕의 잉첩 또한 국부인(國夫人)으로 봉해졌다. 여담이지만 두우의 경우 본처가 죽은 뒤에 두우의 정실이 된 이씨가 밀국부인(密國夫人)으로 봉해졌는데, 두우의 친족과 자제들이 밀국부인을 따르지 않는 바람에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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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年六月, 與淮南節度使杜佑同制加中書門下平章事.]
16년(800) 6월에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두우(杜佑)와 함께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해 주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이보다 한 달 앞서 서사호절도사였던 장건봉이 죽었다.(《구당서》中) 이것은 사고왕에게는 기회였다. 앞서 아버지 납왕 때에 이유의 배신으로 잃었던 서주를 수복할 기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사호절도사가 된 장음은 두려움을 느꼈고, 사고왕과 대치하고 있던 왕무준을 끌어들여 사고왕을 막으려 했다. 왕무준은 우선 당조 조정에 표문을 올려 장음을 서주자사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속 고구려왕국, 제(齊)>의 저자 지배선 교수는 당의 관직이 비록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다른 번진의 공격을 막는 '안전판' 역할도 했다고 설명한다. 사고왕은 어떨지 모르지만, 서사호절도와 성덕절도는 당조의 제재를 받는 당조의 신하들이고, 그들을 친다는 것은 당조에게 이 전란에 개입할 구실을 주게 된다. 서사호절도와 성덕절도가 동맹을 맺는 것도 버거운데 당조까지 가세하게 되면 제는 정말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당조는 장음을 서주자사로 인정해주는 한편 사고왕에게 중서문하평장사라는 관직을 주었다. 유화책이었다. 중서문하평장사는 선대 정기왕과 납왕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에 받았던 최고의 관직. 나아가 절도사들을 두려워하던 당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관직을 받는 대신 사고왕은 서주 수복을 포기한다.

[初元聖之薨也. 唐德宗遣司封郞中兼御史中丞韋丹, 持節吊慰, 且冊命王俊邕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 丹至鄆州, 聞王薨乃還.]
처음에 원성왕이 죽었을 때였다. 당 덕종(德宗)이 사봉랑중(司封郞中)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위단(韋丹)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서 조문하고, 또 왕 준옹(俊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신라왕으로 책봉케 하였으나, 위단이 운주(鄆州)에 이르렀다가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만 되돌아갔다.
《삼국사》권제10, 신라본기10, 애장왕 즉위전기(800)
 
원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소성왕. 원성왕의 손자였는데, 원성왕의 두 아들이 먼저 죽는 바람에 맏손자(맏아들의 아들)로서 대를 이어 즉위한 것으로 그 역시 2년 정도밖에 재위하지 못했다. 준옹은 그의 이름이다. 요절한 왕이라 중국 역사에서는 제대로 기록도 남지 못했던지, 《당서》에 기록된 원성왕의 사망년대는 798년이지만 《자치통감》에는 800년으로 소성왕의 재위 2년간이 원성왕의 재위기간과 합쳐져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삼국사》도 우리나라 《고기》를 참조해 틀린 사실을 고증했다. 오래 해먹은 놈만 알아주는 이 더러운 세상, 하고 욕하는 것보다 여기서 위단이 거쳐간 '운주'라는 지명. 그것은 제의 수도였다.

...

805년 2월에 이르러 제에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덕종 황제의 국상 소식이었다. 《구당서》에 따르면 정원 21년(805) 봄 정월 계사에 대명궁 회령전(會寧殿)에서 64세로 세상을 떠났고, 황태자가 그의 관 앞에서 순종으로 즉위하였다. 시호는 신무효문(神武孝文)이고 무덤은 숭릉(崇陵). 덕종은 묘호이다. '신무효문'이란 시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덕종에게는 맞지 않는다. 독립절도사들을 토벌하겠답시고 겁없이 도전했다가 막상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수도까지 잃고 내빼고 하마터면 나라까지 말아먹을 뻔했던 황제 아닌가. 그런 황제에게 무슨 무공이 있다고 '신무(神武)'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혹시 이것도 반어법?)

[及德宗遺詔下, 告哀使未至, 義成軍節度使李元素以與師古鄰道, 錄遺詔報師古, 以示無外. 師古遂集將士,引元素使者謂曰 "師古近得邸吏狀, 具承聖躬萬福. 李元素豈欲反, 乃忽僞錄遺詔以寄. 師古三代受國恩, 位兼將相, 見賊不可以不討." 遂杖元素使者,遽出後以討元素爲名, 冀因國喪以侵州縣. 俄聞順宗即位,師古乃罷兵.]
덕종의 유조가 내려지자 고애사(告哀使)가 미처 이르기도 전에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 이원소(李元素)가 사고와 길이 가까웠으므로[鄰道], 유조(遺詔)를 기록하여 사고에게 보냈지만 바깥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사고는 마침내 장사들을 모아 놓고 원소의 사자를 불렀다. "나 사고는 요사이 뤄양의 내 집에 사는 관리[邸吏]에게 장(狀)를 받았지만 모두가 황제께서 편안하시다는 내용 뿐이었다. 이원소가 뭐 모반이야 꾸미겠느냐마는 무슨 영문인지 황제의 유언을 가짜로 베껴서 보내왔구나. 나 이사고는 3대에 걸쳐 나라의 은혜를 입어 장수와 재상을 겸하고 있는 처지. 적을 보고도 토벌하지 않음은 있을 수 없도다." 마침내 원소의 사자에게 장을 치고, 원소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출병하였다. 이는 국상을 빌미로 주현을 침범한 것이었다. 순종이 즉위한 것을 확인하고서야[俄聞] 사고는 그때서야 군사를 돌렸다[罷兵].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덕종 황제의 붕어 소식을 사고왕에게 전한 것은 이웃한 의성군의 절도사 이원소였는데, 제에 비하면 수도 창안과 가까이 있는 의성군에서 덕종의 붕어소식과 함께 그 유조(遺詔)라는 것을 베껴서 사고왕에게 보내왔지만, 천자가 죽었을 때 조문사신을 수도로 파견한다는 관례를 깨고 군사까지 일으킨 것은 제에서 그들의 자체정보망을 너무 맹신한 데서 벌어진 '헤프닝'이었다.
 
활주 서쪽 지역까지 진격해서 조주에 이르러 덕종의 죽음과 순종의 즉위를 확인하고서야 철수했지만, 이 일은 제라는 나라가 당조와는 독립적으로 그들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던 당시 상황과 고려 이씨 4대가 60년에 걸쳐 대륙에서 유세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또한 이 일로 이사고는 내부적으로 군사들 사기를 높이고 긴장감을 유지시켜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신황(新皇) 순종에게도 무력을 과시하여 위상을 높였다. 더욱이 순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철군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두 나라 사이의 긴장감 완화는 말할 것도 없겠다.

[二十一年, 遣使朝唐. 貞元中凡四朝唐. 順宗加王金紫光祿大夫.]
21년(805) 사신을 당에 보냈다. 정원 중에 무릇 네 번 당에 사신을 보냈다. 순종이 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더해주었다.
《발해고》군고(君考), 강왕 정력 11년(805) 5월 갑진
 
바로 다음달인 3월 무인에 순종은 사고왕에게 '검교사공'을 제수하고, 5월 갑진에는 검교사공 홀한주도독 발해국왕인 숭린왕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도(檢校司徒)로 승진시킨다. 두 달 뒤인 7월 병자에 다시 검교시중(檢校侍中) 관직을 주었다. 정기왕과 납왕이 거쳤던 관직들을 두루 거치는 이씨 일족. 《구당서》열전에는 "그 뒤 점차 관직이 더해져 검교사공에 시중을 겸하게 되었다[後累官至檢校司徒, 兼侍中]."라고 적고 있는데, 정원 21년(805년) 7월에 검교시중이 되었다가 1년 뒤인 원화 원년(806년) 6월에 검교사도와 시중이 되었다는 의미다.
 
순종은 재위한 그 해에 죽었다. 몸이 약해서였는지, 사고왕이 검교시중이 된 다음 달 정유 초하루에 뜬금없이 '태자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장안 동쪽의 흥경궁으로 물러났고, 원화 원년 정월 병인일에 함녕전(咸寧殿)에서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시호는 지덕대성대안효황제(至德大聖大安孝皇帝), 무덤은 풍릉(豊陵)이며 순종은 묘호이다.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황태자가 헌종이다.

[閏六月壬子朔, 淄靑李師古卒.]
윤6월 임자 초하루, 치청의 이사고가 졸하였다. 
《구당서》권제14, 본기14, 헌종 원화 원년(806)
[卒贈太傅.]
졸하자 태부(太傅)를 추증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무슨 놈의 집안이 뭐 단명의 행진도 아니고 어떻게 내리 셋이나 짧게 살다. 깩 갈 수가 있는 건가 참. 납왕이 서른넷에 죽었을 무렵에 열여덟이었다고 쳐도 사고왕이 죽을 때의 나이는 서른둘. 이는 고려 이씨 집안에 전해지는 유전병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정기왕의 종부형으로서 서주를 들어 당조에 투항했던 서주자사 이유도 악성등창으로 죽었는데,
이는 정기왕의 사망원인과 같다.
 
악성 등창. 지금은 악성댓글이 사람을 죽이는데 옛날에는 악성등창이 사람을 죽인다고 정기왕과 납왕 그리고 사고왕까지 그 병으로 죽었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하늘이 아직 당조에게 살 기회를 주신 것이라거나 아니면 고려 이씨 일문에게는 천명을 받아 왕의 자격이 될 근간이 없었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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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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