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7069772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6>후고려기(後高麗記)(19)(20) - 광인"에서 이납 관련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이납 (2)

[四年, 春正月, 以阿湌體信爲大谷鎭軍主.]
4년(783) 봄 정월에 아찬 체신(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軍主)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9, 신라본기제9, 선덕왕 4년(783)
 
이정기 주변의 절도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당을 공격한 것은 '천하도원수' 이희열이었는데, 여주를 습격해 여주를 지키던 장수 이원평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삼국사》에 기록된 바, 신라에서 대곡진의 군주로 아찬 체신을 발탁한 것도 이 시기와 묘하게 맞물려서 일어났다. 뭔가는 모르지만 신라에서 북방의 움직임에 불온한 기미가 있음을 감지한 탓이기도 하리라.
 
안진경을 보내 '당근'으로 설득하려다가 안 되자, 마침내 덕종은 용무장군 가서요를 보내 '채찍'으로 이희열을 토벌하려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패하고 가서요는 양성에서 포위당했으며, 덕종은 장안 서쪽의 경원 병사들까지 동원하려다가 결국 '이것들이 장난하나!'하면서 발끈한 경원 병사의 반란에 거의 쫓기다시피, 금원 북문을 열고 봉천까지 도망갔다.
 
봉천으로 도망가는 덕종 일가를 호위하는 것은 고작 4백 명의 군사 뿐. 그렇게 장안을 함락시킨 경원군은 대기왕 주도의 형 주차를 원수로 추대했고, 10월 8일에 주차는 대명궁의 선정전에서 천자로 즉위해 국호를 대진(大秦), 연호를 응천(應天)이라 하고 아예 신정부를 세워버렸다.
 
[德宗建中三年五月, 貞元七年正月八月, 十年正月, 皆遣使朝唐.]
덕종 건중 3년(783) 5월, 정원 7년(791) 정월과 8월, 10년(794) 정월, 모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다.
《발해고》
 
반란이 일어나 장안이 어이없이 함락당하고, 절도사들을 쓰러뜨리고 천하의 군주가 되리라 하던 덕종이 참으로 '찌질하게' 봉천으로 몽진하기 다섯 달쯤 전에 발해의 사신은 당에 당도했다. 그 사신에 의해서 당조의 사정은 모두 일일이 발해 조정에 보고되었을 것이고, 덕종 황제의 눈물나게 찌질하신 행보 또한 문왕에게 보고되었으리라.
 
봉천성 동쪽 1km 떨어진 곳까지 주둔한 대진국 반란정부의 군사들은 고종과 측천무후의 건릉에 올라가 술마시고 놀면서 덕종을 조롱했다. 봉천성을 포위한 채 784년ㅡ계해년 새해가 밝았고, 주차는 국호를 다시 한(漢), 연호를 천황 원년이라 바꾼다.

...

한편 마지막 희망이었던 이회광까지 주차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덕종은 건중이란 연호를 흥원(興元) 원년으로 바꾸고 '성신문무의 조'라고도 불리는 조서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그것은 덕종의 항복선언이었다.
 
[興元元年春正月癸酉朔, 上在奉天行宮受朝賀. 詔曰 "立政興化, 必在推誠;忘己濟人, 不吝改過. 朕嗣服丕構, 君臨萬邦, 失守宗祧, 越在草莽. 不念率德, 誠莫追於既往;永言思咎, 期有復於將來. 明征其義, 以示天下. 小子懼德不嗣, 罔敢怠荒. 然以長於深宮之中, 暗於經國之務, 積習易溺, 居安忘危. 不知稼穡之艱難, 不恤征戍之勞苦. 致澤靡下究, 情不上通, 事既壅隔, 人懷疑阻. 猶昧省己, 遂用興戎, 征師四方, 轉餉千里. 賦車籍馬, 遠近騷然;行齎居送, 衆庶勞止. 力役不息, 田萊多荒. 暴令峻於誅求, 疲民空於杼軸, 轉死溝壑, 離去鄉里, 邑里丘墟, 人煙斷絕. 天譴於上而朕不寤, 人怨於下而朕不知. 馴致亂階, 變起都邑, 賊臣乘釁, 肆逆滔天, 曾莫愧畏, 敢行淩逼. 萬品失序, 九廟震驚, 上累於祖宗, 下負於蒸庶. 痛心靦面, 罪實在予, 永言愧悼, 若墜泉谷. 賴天地降祐, 人祗協謀, 將相竭誠, 爪牙宣力, 群盜斯屏, 皇維載張. 將弘遠圖, 必布新令. 朕晨興夕惕, 惟省前非. 乃者公卿百僚用加虛美, 以“聖神文武”之號, 被蒙暗寡昧之躬, 固辭不獲, 俯遂群議. 昨因內省, 良所瞿然. 自今已後, 中外書奏不得言“聖神文武”之號. 今上元統曆, 獻歲發祥, 宜革紀年之號, 式敷在宥之澤, 可大赦天下, 改建中五年爲興元元年. 李希烈、田悅、王武俊、李納, 咸以勳舊, 繼守籓維, 朕扶馭乖方, 致其疑懼, 皆由上失其道而下罹其災. 一切並與洗滌, 復其爵位, 待之如初, 仍即遣使宣諭. 硃滔以泚連坐, 路遠必不同謀, 永念舊勳, 務存弘貸, 如能交辦順, 亦與維新. 硃反易天常, 盜竊名器, 暴犯陵寢, 所不忍言, 獲罪祖宗, 朕不敢赦. 除泚外, 並從原宥. 應赴奉天並進收京城將士, 並賜名“奉天定難功臣”, 身有過犯, 減罪三等, 子孫過犯, 減罪二等. 先稅除陌、間架等錢, 竹木茶漆等稅, 並停. 奉天升爲赤縣."]
흥원 원년(784) 봄 정월 계유 초하루에 상이 봉천의 행궁에 있으면서 조하를 받았다. 조를 내려 말하였다. "정치에 임하여 교화를 일으킴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잊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짐은 선대의 나라를 세우신 위업을 이어받아 만방(萬邦)에 군림하고도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越在草莽. 率德을 不念하고 성(誠)은 既往에 莫追하였다. 永言思咎, 期有復於將來. 그 의(義)를 명정(明征)하여 천하에 보이고자 한다. 소자(小子)는 덕이 대를 잇기에 부족함을 두려워했고 감히 이황(怠荒)한 것을 숨겼다. 그러나 궁중 깊은 곳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경국지무(經國之務)에 어두워 오랜 버릇에 쉽게 물들고, 편안하게 살면서 위태로움을 잊었다. 농사짓기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고 변방을 지키는 노고를 돌아보지 않았다. 연못이 바닥을 드러내니 정(情)은 위에 전달되지 못하고, 일이 이미 그릇되니 사람들은 의심을을 품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돌아볼줄 모르고 마침내 오랑캐를 흥하게 만들어, 정벌하는 군사가 사방으로 향하고 군량 운송이 천리까지 이어졌으며. 부거적마(賦車籍馬)로 원근(遠近)이 어수선하였다. 行齎居送, 뭇 사람들은 勞止하였다. 힘든 노역은 쉴줄 모르고 전답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다. 영을 강제하여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였으니, 지친 백성들은 베틀을 버리고 구렁에서 죽어나가니 정든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로 읍리(邑里)는 쓸쓸하게 변하고, 밥 짓는 연기는 끊어져 버렸다. 하늘은 위에서 꾸짖고 계셨건만 짐은 뉘우칠 줄 몰랐고, 사람들은 아래에서 원망하고 있었건만 짐은 깨닫지 못하였다.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이 난계(亂階)한 것이라 도읍에서 변고가 일어나고 적신(賊臣)이 틈을 타서 움직여 오만방자하게도 반역을 일으킴에 하늘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거듭 겁도 없이 감히 능핍(淩逼)을 행하였다. 만품(萬品)이 서열을 잃고 구묘(九廟)가 두려워 떨었으며 위로는 조종(祖宗)께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모든 백성을 저버렸다. 상심한 나머지 남들 보기 부끄럽고, 죄는 참으로 이 몸에게 있도다.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에 永言하여, 若墜泉谷하였다. 천지의 도움에 의지하고 사람들은 그저 꾀를 모아서 장차 서로가 성의를 다하고 조아(爪牙)는 마땅히 힘을 보태어, 도둑떼가 밀리는 듯 하면, 황유(皇維)는 재장(載張)할 것이다. 장차 원도(遠圖)를 넓히고 반드시 새로운 법령을 퍼뜨릴 것이다. 짐은 새벽에 일어나 저녁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저 이전의 잘못을 반성하겠노라. 이전에 공경백료(公卿百僚)는 헛된 아름다움을 더하게 하여, “성신문무(聖神文武)”라는 호칭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몸에 붙이니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고개숙여 군의(群議)를 따랐다. 지난날 내성(內省)으로 하여 양소구연(良所瞿然)하다. 앞으로 중외(中外)의 서주(書奏)에는 '성신문무'라는 호칭을 쓰지 말도록 하라. 지금은 상원통력(上元統曆), 다가오는 새해에는 상서로운 조짐이 있으리니 마땅히 기년의 호칭을 개혁하고 재유지택(在宥之澤)을 펼쳐 천하에 크게 사면령을 내릴 것이며, 건중 5년을 고쳐 흥원(興元) 원년으로 삼을 것이다. 이희열, 전열, 왕무준, 이납을 훈구(勳舊)로서 대하고 번진을 계속해 유지하게 하며, 짐은 부어괴방(扶馭乖方) 그 의심나고 두려운 것을 다스릴 것이다. 모두가 위로는 그 도(道)를 잃었기로 아래에서는 그 재앙을 근심하게 된 것이다. 일절 다 깨끗이 면제하고 그 작위(爵位)를 복구시키고 처음과 같이 대우할 것이로되, 이에 곧 사신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노라. 주도(硃滔)와는 체수에서 연좌(連坐)하였으되 길이 멀어 분명히 함께 모의할 수 없었을 것이니, 구훈(舊勳)을 길이 생각하여 힘써 弘貸에 存하기를 能交辦順하고 유신(維新)함과 같이 할 것이다. 주(硃)는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이름과 벼슬을 훔쳤으며 능침(陵寢)을 폭범(暴犯)한 것은 차마 말할 수도 없거니와, 조종께 지은 그 죄를 짐은 결코 사할수 없노라. 체를 제외한 모두를 사면할 것이다. 봉천(奉天)에 應赴하고 경성(京城)에 진수(進收)한 장사(將士)들에게는 나란히 “봉천정난공신(奉天定難功臣)”이라 이름을 내리고, 죄를 범한다 해도 죄를 세 급 감할 것이고, 자손이 죄를 범한다 하여도 죄를 두 급 감할 것이다. 선세(先稅)를 면제하여 주고 간가(間架) 등의 전(錢)과 대나무ㆍ차칠(茶漆) 등의 세(稅)는 모두 중지하라. 봉천을 승격시켜 적현(赤縣)으로 삼노라."
《구당서》
 
한문 번역이 형편없는 점을 먼저 양해를 구한다. 대체로 내용은 절도사들에게 지금까지 잘못 다 용서할테니 제발 좀 도와달라는 것인데. 절도사들로서는 그야말로 바닥에 구르고 난리칠 일이다. 우스워서. 이제껏 독립절도사들을 꺾고 천하의 군주가 되리라 하던 덕종이 저렇게까지 비굴하게 나오는 걸 보면서 '결국 저럴 거' 뭐하러 지금까지 개겼나 싶어 한심스럽기도 한심스럽겠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는 독립절도사들에게 그들의 번진을 유지시켜주고 '훈구'로 대한다는 건 "나 살려만 주면 중구난방 깽판치고 날뛰든 말든 그냥 봐준다" 이 소리잖아. 아무튼 이 조서가 내려지고 석 달쯤 지나서, 돌연 이납은 당에 '귀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이납은 군수로서 저항하다가 흥원 원년(784) 4월에 귀순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당시의 관점에서 이정기는 당 조정에 거역한 반역자였고 반역자는 그 연루된 자들까지도 모조리 연좌제를 적용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 조정은 이정기에게 태위라는 벼슬을 추증해준다. 이것은 재상직에 해당하는 지위다.
 
[丙寅, 加李納平章事.]
병인에 이납에게 평장사(平章事)를 더하였다.
《구당서》 덕종본기 흥원 원년(784) 4월
 
사실 납왕(시호는 없지만 일단 왕은 왕이니까)의 '항복'은 그의 입장에서는 당조에 대한 유화책에 가까웠다. 이 무렵 평로치청은 당이 어떻게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져 있었다. 이정기 본인도, 당조에 세금을 바치기는커녕 중앙에서 오는 정령도 따르지 않고 자기 편의에 맞춰 관리를 임용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이납에게 세습하기까지. 당조의 다른 번진절도사나 당조 주변의 여러 제후국(신라나 발해도 포함)들처럼 거의 독립된 국가로서 활약하고 있었던 것. 이 상황에서 이납이 당에게 항복했다고 좋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정작 평로치청측에서 생각하기에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뒤에 정기를 태위로 높여주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이건 납왕에게 평장사 벼슬이 내려지고 한 달 쯤 지난 5월의 일이다.
 
[庚寅, 李納上章稟命, 乃贈李正己太尉.]
경인에 이납이 장(章)을 올려 명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稟命]. 이에 이정기에게 태위(太尉)를 추증하였다.
《구당서》 덕종본기 흥원 원년(784) 5월
 
당 조정 역시 반역자 이정기에게 무슨 공이 있어서 태위를 준 것이 아니라, 그를 내세워서라도 평로치청에 대한 당의 통치권을 회복해보자는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에 충성해서가 아니라 당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수록 더 높은 벼슬이 주어졌던 셈.
 
더욱이 반란정부가 당조를 언제 작살낼지 모르는 상황에서 납왕이 당조의 편에 서준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덕분에 납왕은 이전 아버지가 받았던 검교우복야ㆍ동중서문하평장사의 벼슬까지 수여받고 심지어는 '철권(鐵券)'까지 받았으니. 철권, 그것은 '살인에 대한 면책권'을 뜻한다. 중국 사극에 나오는 '상방보검' 비슷한 건데 천자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든지 죽여도 좋다는 일종의 '살인면허'라고 할 수 있다. 납왕이 다스리는 제의 사법권을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로서 당조에서 납왕을 정식으로 제라는 나라의 군주로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아직 당조를 무너뜨릴 생각은 없으셨기에, 전열을 그 조카 전서를 시켜 피살당하게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하북번진연합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덕종은 재빨리 가림을 보내어 왕무준을 설득시켜 상황을 역전시켰다. 그리고 이납이 '귀순'의 명목으로 당조를 돕기로 한지 한달 만인 5월에 주차의 반란정부는 장안을 빼앗겼고(당조의 입장에서 보면 '탈환'이지만) 주차는 도망치던 도중에 측근의 배신으로 43세라는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흥원 원년 6월, 주차가 죽고 1년 뒤 그에 의해서 황태제로 봉해졌던 주도 역시 유주에서 죽고 말았다.
 
[八月辛丑, 詔所司爲贈太尉段秀實樹碑立廟. 淄青節度使ㆍ承前帶陸海運押新羅ㆍ渤海兩蕃等使, 宜令李納兼之.]
8월 신축에 소사(所司)에 조하여 증태위(贈太尉) 단수실(段秀實)에게 비석을 세워주고 사당에 모시도록 하였다. 치청절도사(淄青節度使) 승전대륙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承前帶陸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는 마땅히 이납이 겸하도록 하였다.
《구당서》 덕종본기 흥원 원년(784)
 
그렇게 일일이 봉해주지 않아도 어차피 치청번진은 확실히 납왕의 영지다. 덕종은 이듬해인 흥원 2년(785)에 다시 연호를 정원(貞元)으로 고쳤는데, 이 연호는 804년까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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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浿江鎭進赤烏.]
패강진(浿江鎭)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제10, 원성왕 원년(785) 3월
 
패강진에서 신라 조정에 붉은 까마귀를 바치던 그 달 3월,
 
[戊午, 宣武帥劉洽檢校司空. 以汴滑節度使李澄普滑州刺史, 充鄭滑節度使. 加李納司空.]
무오에 선무수(宣武帥) 유흡을 검교사공으로 삼았다. 변(汴)ㆍ활(滑) 절도사(節度使) 이징보(李澄普)를 활주자사(滑州刺史)로 삼아 정(鄭)ㆍ활(滑) 절도사(節度使)로 채웠다. 이납에게 사공(司空)을 더해주었다.
《구당서》 덕종본기 정원 원년(785) 3월
 
《구당서》및 《신당서》에 보면 운주, 그러니까 평로치청 제(齊)의 수도 운주는 덕종이 연호를 정원(貞元)으로 바꾼 시점과 맞물려서 '대도독부(大都督府)', 일종의 '총독부'로 승격되었다. 납왕 역시 사공을 거쳐 장사로 제수되었는데, 이미 지방통제력을 상실한 마당에 납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조치였다. 당조의 내부 질서가 이미 절도사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납왕이 있었다.
 
정원 2년(782) 4월에 간교사공(簡較司空)ㆍ평장사 이포진, 간교사공ㆍ평장사 이납, 간교우복야ㆍ평장사 한황, 공부상서 전서 등이 각각 군사 5천을 하남(河南)의 행영에 보내어 토벌에 개가를 올렸다. 이포진과 이납, 한황의 자손 한 사람에게 6품 정원관을 내리고 전서와 위의 인물의 자손에게 각각 한 사람씩 8품 정원관을 주었다.
《책부원귀》
 
천자가 절도사의 아들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연상(延賞) 제도가 보편화된 것도 이때를 즈음해서인데, 사방에 할거하고 있는 절도사들의 환심을 사고자 절도사의 자제들에게도 벼슬을 준 것이다.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운 절도사들에게 각기 그 자손 한 명씩에게 관직을 주도록 한 것은 《책부원귀》에 나오는데, 이때 납왕의 자손 두 사람이 각각 6품과 8품의 정원관 벼슬을 받은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아들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한 명은 납왕의 아들로서 훗날 제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제2자 이사고, 그리고 다른 한 명이 서자 이사도라고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긴 하다.
 
《발해국지ㆍ장편》에는 정원 원년, 즉 문왕 대흥 48년(785)에 반역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었다는 삭방절도사 이회광의 이야기도 함께 싣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 여상(茹常)이 발해인이란다. 무예왕 때에 당나라로 들어가서 유주에서 살았는데, 삭방열장으로서 공을 세우고 이씨 성을 하사받아 이름을 가경(嘉慶)이라 고쳤다는 것. 주도의 반란 때에도 활약했던 자로서 납왕과 마찬가지로 덕종 황제에게 철권을 하사받기도 했지만, 납왕처럼 영화를 누리지는 못하고 그걸 자식들에게 물려주지도 못했으며 결국 역사 속에서 '반역자'로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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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해에 《구당서》에서는 제의 납왕이 당조에 모귀(毛龜)를 바쳤다고 했다. 털이 난 거북이... 라는 것 같은데 뭐지?
 
[乙亥, 以蘇州刺史孫晟爲桂州刺史、桂管觀察使. 荊河自陝州至河陰, 水色如墨, 流入汴口, 至汴州, 一宿而復. 又汴鄭管內烏皆入田緒、李納之境, 銜柴爲城, 方十餘里, 高二三尺. 緒, 納惡而去之, 信宿復如之. 烏口皆流血.]
을해에 소주자사(蘇州刺史) 손성(孫晟)을 계주자사(桂州刺史) 계관관찰사(桂管觀察使)로 삼았다. 형하(荊河)의 물빛이 협주(陝州)에서부터 하음(河陰)까지 먹(墨) 같았고, 변구(汴口)로 흘러들어와서 변주에 이르러 하룻밤 사이에[一宿] 다시 원래대로 되었다. 또한 변(汴)ㆍ정(鄭) 관내(管內)의 까마귀들이 모두 전서(田緒)와 이납의 경내에 들어와서 나뭇가지를 물어다[銜柴] 성을 쌓는데 사방 10여 리였고 높이는 두세 척이었다. 서(緒)와 납이 기분나빠서 그걸 치워버려도 이틀 밤 사이[信宿]에 다시 똑같이 만들었다[復如之]. 까마귀의 부리에서 모두 피가 흘렀다.
《구당서》 본기제13, 덕종 하(下) 정원 4년(788) 가을 7월
 
《구당서》오행지에도 실려있는 이야기다. 초의 희열왕이 783년 12월에 장악한 곳이 변주인데, 그 전에는 이정기가 낙양의 공격을 막고자 성을 쌓았던 곳이다. 정주도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절도사들과 당조 사이에 혹은 절도사들끼리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곳인데, 788년경이면 이 2주는 모두 당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있었다. 까마귀들조차 '중앙정부' 당조보다는 차라리 '반란자' 절도사들의 점령지가 더 안전하고 살기 편하다고 느낄 만큼 중원 땅이 얼마나 어수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丁酉, 王武俊守隸州將趙鎬, 以郡歸李納. 武俊怒, 以兵攻之.]
정유에 왕무준(王武俊)의 수체주장(守隸州將) 조호(趙鎬)가 군을 들어 이납에게 들어갔다. 무준이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
《구당서》 본기제13, 덕종 하(下) 정원 6년(790) 2월
 
《구당서》에서는 정원 6년(790)의 2월 초하루는 무진이라고 했으니까 정유면.... 30일이다. 조왕(趙王) 왕무준의 휘하 장수로서 체주 땅을 지키고 있던 장수 조호가 납왕에게 귀순하면서 둘 사이는 틀어져버렸다.
 
조호의 망명사건이나 왕무준이 이에 발끈해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모두가 당시 당조의 지방 지배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가를 또 한번 보여주고 있다. 당조가 임명한 절도사들이 관할하는 구역인데 당조에서 관리를 못한다. 더구나 절도사들 사이에 영역 다툼을 하면서 군사 동원도 주저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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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棣州之鹽池與蛤朵歲出鹽數十萬斛, 棣州之隸淄青也. 其刺史李長卿以城入硃滔, 而蛤朵為納所據. 因城而戍之, 以專鹽利. 其後武俊以敗硃滔功, 以德ㆍ棣二州隸之, 蛤朵猶為納戍.]
체주의 염지(鹽池)와 합타(蛤朵)에서는 해마다 수십만 곡(斛)의 소금이 산출되었는데, 체주는 치청(淄青)에 속해 있었다. 그 자사 이장경이 성을 들어 주도에게 항복한 뒤에도 합타는 납이 차지하고 있었다. 인하여 성을 쌓아 지키면서 소금의 이득[鹽利]을 독점하였다. 이 후에 무준이 주도를 패배시킨 공으로 덕(德)ㆍ체(棣) 2주를 예속시켰음에도 합타만은 납이 지키고 있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다시 제나라 얘기로 돌아가서, 이번에 조호가 들어서 항복한 체주 땅은 소금 산지였다. 지금이야 뭐 기계로 '찍어내듯' 소금을 만들지만 그때만 해도 소금은 진짜 소금(小金)이라는 단어까지 나올 정도로 고가품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군사들의 월급을 '소금(라틴어로는 '셀러리')'으로 지급했다는 데에서 오늘날 월급쟁이를 가리키는 '셀러리맨'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며, 한(漢)에서는 소금과 철에 대한 국가전매법을 시행해서 나라에서 두 물건의 교역을 제한하고 독점했다. 이정기와 이납이 대를 이어 평로치청을 장악하고 있던 당조, 절도사들은 소금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다. 788년경부터 소금 전매에 대한 염법이 문란해지고 생산량이 부족해지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이 무렵 소금 생산지는 회남ㆍ강남ㆍ복건ㆍ영남 연안에 퍼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산동과 하북 연안이 특히나 중요한 소금산지였다. 후대의 얘기지만 808년경 평로의 소금생산량은 약 70만 관, 당조에서 1년에 거둬들이는 소금 총생산량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 소금은 춘추전국시대 제(齊) 이래로 이 산동의 가장 큰 재원이었고, 제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체주가 이납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건중 2년(781)의 일이지만, 체주가 넘어가는 와중에도 합타만은 이납이 꼭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주도에게 체주가 가담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벌되고, 이때 공을 세운 절도사 가운데 한 명인 조왕(趙王) 왕무준이 덕주와 체주를 자기 소유로 삼았다 (절도사들이 각자 자신이 차지한 땅을 영지로 삼았다고 이정기열전에서 말하고 있지 않던가).
 
[納初於德州南跨河而城以守之, 謂之三汊. 交田緒以通魏博路, 而侵掠德州, 爲武俊患.]
납은 처음에 덕주(德州) 남쪽에 강을 가로질러 성을 쌓아 지켰다. 이것을 삼차(三汊)라 했다. 전서와 가까이 지내면서 위박(魏博)의 길을 통해 덕주를 침략하니 무준의 근심거리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삼차성은 하북도(왕무준의 조趙)의 한 주인 덕주 남쪽에 강을 끼고 쌓은 성이었다. '삼차'라는 이름은 성의 모양이 세모꼴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소금산지인 합차를 지키고 왕무준이 공격해올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열전은 말하고 있다. 나아가 위박절도사 전서의 관할도로망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이 '지름길'을 통해 납왕은 수차례 조왕 무준을 공격했다. 그 상황에서 조호가 항복해버린 것. 왕무준은 조호가 항복한 다음 달인 3월에 아들 왕사진을 보내서 조호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당조에서는 체주를 둘러싸고 벌어진 납왕과 조왕 무준의 싸움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끝에 납왕에게 조서를 내려서 조호가 바친 군을 조왕 무준에게 돌려줄 것을 명했다. 조정이 절도사들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지만, 사실 그러지 않으면 절도사들이 제멋대로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서를 받은 납왕도 덕종의 권고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체주를 해주ㅡ원래 아버지 이정기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이자 사위 장승린이 자사로서 다스리고 있는 땅과 서로 맞바꾸자는 조건으로 타협안을 내놓는다. 자기도 체주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青州李納, 以棣州還王武俊, 並其兵士三千.]
청주의 이납이 체주를 왕무준에게 돌려주고 그 병사 3천도 함께 보냈다.
《구당서》 본기제13, 덕종 하(下) 정원 6년(790) 11월
 
11월에 납왕은 체주를 왕무준에게 반환하고, 조호가 데려왔던 병사 3천 명도 모두 돌려보냈다. 하지만 조호를 돌려보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왕무준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자신을 믿고 귀순한 사람이니만큼 그 신변만큼은 철저하게 보장해주겠다는 정치적인 배려였다.

...

[癸酉, 平盧淄靑節度使、檢校司徒、平章事李納卒.]
계유에 평로치청절도사 검교사공 평장사 이납이 졸하였다.
《구당서》 본기제13, 덕종 하(下) 정원 8년(792) 5월
 
하여튼 목숨복은 지지리도 없는 이씨 집안이었다. 정원 8년(792) 5월 같으면 그 달 초하루가 을묘니까 계유면 19일. 5월 19일이 납왕의 기일 되시겠다. 농서군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위해서 당조에서는 제후의 예에 준하여 사흘 동안 정사를 폐했다. 《자치통감》에서는 그의 죽음을 표현하되 '졸(卒)'이 아닌 '훙(薨)'으로 기록했으니, 그가 '제'라는 한 나라의 당당한 국왕이었으며 앞서 덕종이 봉천에서 내린 '성신문무의 조'에서 약속했던 '옛 관직과 작위를 모두 인정한다'는 조항을 당조에서 지켜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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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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