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4>후고려기(後高麗記)(17)
2009/06/06 03:15 광인
이정기가 운주로 옮긴 것은 문왕 보력 4년(777) 12월의 일이었다. 《해동제국기》에 기록된 바, 홍인 천황이 파견한 견당사가 당에 간 해였지.
[後自靑州徙居鄆州. 使子納及腹心之將分理其地. ]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아들 납과 자신의 심복들[腹心]에게 그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여지껏 산동반도 안에서 발해와의 명마무역 거점으로서 그의 위치를 굳건히 해주고 평로치청이 태어날 모태를 제공해주었던 중심지 청주 대신 이정기가 택한 운주는 옛날에는 동평군(東平郡)이라고 해서 한때 안록산의 봉지이기도 했던 곳,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은 청주에서부터 동도 낙양(洛陽)을 향해 2백 km 더 전진, 누가 봐도 당조에 대한 정면대결 포고나 다름없었다. 당조에서 서둘러 운주 서남쪽 200km 지점(낙양과는 150km 거리)에 있는 변주 땅에 성을 축조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다.
[十三年,請入屬籍,從之.]
13년(778)에 속적(屬籍)에 편입되기를 요청하자 허락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운주 천도 이후 이정기는 뜻밖의 요청을 한다. 자신을 속적(屬籍), 즉 당 황실의 족보에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구당서》대종본기에는 봄 정월 무신 초하루 임술 3일 기사 바로 뒤에 붙어 있음) 일본 전국시대 무장이었던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가 관동(關東, 칸토) 진출을 꾀하면서 관동관령(關東官領,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양자로 들어가 성씨를 나가오에서 우에스기로 바꾸었던 것처럼. 원래 당조에서는 각 이민족들에 대한 사성(賜姓) 정책을 펼쳐 이민족 수장들에게 황실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내려주었는데, 오늘날 중국에 이씨 성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로 꼽히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에 왕(王)씨 성을 각 호족들에게 내려주는 일이 흔했지만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왕씨들을 거의 멸살하다시피 하면서 왕씨가 오히려 희귀한 성이 되어버렸는데, 당조에서는 이민족 포섭을 위해 많은 이민족 수장들에게 이씨 성을 내려주다보니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씨 성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고려인인 자신이 이 광활한 중국 천하를 손에 넣게 되면, 분명 자신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이 생겨날 테고 그들에게 내세울 '꺼리'가 필요할 터다. 당 황실의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는 건 피는 안 섞였지만 (안 섞여도 엄청 안 섞였지. 고려인인데) 자신이 당 황실의 법통을 이어받은 '양자'로서나마 이 천하를 지배할 자격이 있음을 천명하기 위한 일종의 포석깔기로, 이때부터 이미 이정기는 자신이 직접 당조를 무너뜨리고 이 중국 천하를 지배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나아가 운주 천도 때문에, 평로치청에 대한 당조의 경계심이 커져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丙午, 先是寶龜七年, 高麗使輩卅人溺死, 漂着越前國江沼加賀二郡. 至是, 仰當國令加葬埋焉.]
병오(30일), 앞서 보귀(寶龜, 호키) 7년(775)에 고려의 사신단 30인이 익사하여 월전국(越前國, 에치젠노쿠니)의 강소(江沼, 에누마)ㆍ가하(加賀, 카가) 두 군(郡)에 표류해왔다. 이때에 이르러 그 국(國, 쿠니)에서 받들어 장사지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9년(778) 4월
월전국 해안에 떠밀려온 것은 끔찍하게도 익사해서 불은 시체ㅡ그것도 앞서 갔던 사도몽의 사신단 일행들이었다. 하마다 고사쿠는 이 익사체가 2년 전인 보력 3년(776) 12월에 사도몽을 따라 사신으로 오다가 에치젠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141명 가운데 일부라면 1년이나 지난 뒤에야 발견된 것으로 시간차가 상당하며,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한 생존자 46명 가운데 일부라면 일본으로 귀국하는 중에 또다시 조난을 당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사도몽의 사신단은 처음 출발했던 187명 가운데 겨우 16명만이 살아 돌아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사도몽의 사신단과는 아무 상관없는 발해인 항해자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밝혀놨지만) 이런 지경이라면 사도몽 본인은 도대체 무사히 살아 돌아가기나 할수 있었던지 심히 의문스럽다.
[癸亥, 送高麗使正六位上高麗朝臣殿嗣等來着, 越前國坂井郡三國湊. 勅越前國, 遣高麗使并彼國送使, 宜安置便處, 依例供給之, 但殿嗣一人, 早令入京.]
계해(21일)에 송고려사(送高麗使) 정6위상 고려조신(高麗朝臣, 고마노아손) 전사(殿嗣, 도노츠구) 등이 내착하여 월전국(越前國) 판정군(坂井郡, 사카이노고오리) 삼국주(三國湊, 미쿠니미나토)에 닿았다. 월전국에 칙하여 송고려사와 아울러 그 나라(발해)의 송사는 마땅히 편처(便處)에 안치하고 예에 따라 양식을 공급하되, 전사 한 사람만은 서둘러 입경하도록 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9년(778) 9월
발해의 사신을 데리고 온 정6위상 고려전사(高麗殿嗣, 고마노 도노츠구)는 다음달 6일에 이르러 종5위하의 관직을 얻었다. 고려전사를 일본에 호송하기 위해 온 것은 장선수. 발해에서의 벼슬은 헌가대부ㆍ사빈소령이었다.
[春正月壬寅朔, 天皇御大極殿受朝. 渤海國遣獻可大夫司賓少令張仙壽等朝賀, 其儀如常.]
봄 정월 임인 초하루, 천황(天皇, 미카도)이 대극전(大極殿, 다이쿄쿠덴)에 행차하여 조하를 받았다[受朝]. 발해국이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司賓少令) 장선수(張仙壽) 등을 보내어 조하하였는데 그 의식은 평소와 같았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10년(779)
사도몽과 같은 관직과 작위를 갖고 있지만 사도몽과는 달리 개국남이니 하는 작호가 붙어 있지 않다. 다만 사빈소령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 사빈시, 즉 발해에서 외교를 맡아보던 관청의 이름이다.
[丙午, 渤海使張仙壽等獻方物. 奏曰 "渤海國王言 '聖朝之使高麗朝臣殿嗣等失路漂着遠夷之境. 乘船破損, 歸去無由. 是以, 造船二艘, 差仙壽等, 隨殿嗣令入朝.' 幷載荷獻物, 拜奉天朝."]
병오(5일)에 발해의 사신 장선수(張仙壽) 등이 방물을 바쳤다. 아뢰어 말하였다. “발해 국왕이 말씀하시기를 ‘성조(일본)의 사신 고려조신(高麗朝臣) 전사(殿嗣) 등이 길을 잃고 표착하여 먼 오랑캐의 땅에 닿았다. 탔던 배는 손[損]이 부서져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배 두 척을 만들어서 선수 등을 딸려 전사를 따라 입조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부끄러운 헌물이나마 싣고 와서 천조에 받들어 바칩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10년(779) 정월
발해국왕이 전하는 내용은 일단 명문화된 '국서'가 아닌 '구두'로 전달되었다. 아무래도 발해 조정에서 일본과의 마찰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아예 이리저리 바꾸기 쉬운 '말'로 국서 내용을 틀어버린 것. 그러고 보면 발해 조정도 일본 조정에 대해 그리 저자세로만 나오지는 않았던 것이, 일본 조정도 번듯하게 격식 갖춘 국서는 어디가고 입으로만 나불나불 거리면서 발해왕께서 어쩌고 하는 말이 기분나빴을 법도 하고 항의라도 한 번 했으련만 싶은데 이상하게 그런 기록이 없다. 되려 자신들의 사신에게 해준 극진한 대답에 감사하듯 일본 조정에서는 정월 무신(7일)과 정사(16일)에 사신단을 불러 조당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녹도 내려주고, 관직도 내려주었다. 그리고 다음달 계유(2일)에 문왕에게 보내는 왜황의 새서와 신물을 갖고 발해 본국으로 귀환했다ㅡ고 《속일본기》에는 실려 있다.
[建中後, 畏懼朝廷, 多不自安. 聞將築汴州, 乃移兵屯濟陰, 晝夜教習爲備.]
건중 이후 조정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불안에 떠는 일이 많았는데, 장차 변주에 성을 쌓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군사를 제음으로 옮겨 주둔시키면서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싸움에 대비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이듬해 보력 6년(779) 5월에 대종이 승하하고, 38세의 나이로 즉위한 덕종은 회유책으로 일관하던 대종과는 달리 독립절도사들에 대한 강경책ㅡ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해체시켜 당조의 지배체계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정책을 택했다. 이듬해에는 재상 양염의 건의로 전통적인 조ㆍ용ㆍ조의 세금제도를 대폭개혁한다. 양세법이 그것이다.
양세법은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세금을 징수하되, 토착민 거류민 따질 것 없이 현지에서 직접 징수, 곡식이나 견면 대신 돈으로 받고 상인에게도 매출액에 따라 세금을 매긴다. 현지징수의 원칙에 따라 추가납세자 180만 명을 편입시킴으로서 재정호전의 효과를 얻은 덕종은 독립절도사들에 대한 토벌에 나섰고, 그 첫 '빳다'가 산남동도절도사 양숭의였다. 이정기와 혼인동맹을 맺고 있던 그 양숭의 말이다. 이정기와 사돈지간인 양숭의를 쳤다간 바로 이정기와도 등을 돌리게 되고, 좀 허풍을 붙이면 그건 당조로서는 스스로 '나 죽을래'하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다. (죽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庚辰, 勅 "渤海及鐵利三百五十九人, 慕化入朝, 在出羽國. 宜依例供給之. 但來使輕微, 不足爲賓. 今欲遣使給饗自彼放還. 其駕來船, 若有損壞, 亦宜修造, 歸蕃之日, 勿令留滯."]
경진(14일)에 칙하였다. "발해와 철리(鐵利)의 359인이 모화(慕化)하여 입조(入朝)하였고 출우국(出羽國, 데와노쿠니)에 있다. 마땅히 상례에 따라 양식을 제공하라. 다만 온 사신들은 경미(輕微)하여 빈례(賓禮)를 적용할 수는 없다. 지금 사신을 보내어 잔치를 열어주고 나면 그대로 돌려보내라. 타고 온 배가 부서졌거든 또한 마땅히 수조(修造)하여 귀번(歸蕃)하는 날 지체되지 않도록 해주어라."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10년(779) 9월
치청의 사정은 이쯤하면 되겠고 발해의 사정으로 돌아가서. 이들이 오기 전인 746년에 발해와 철리말갈 사람들이 이미 출우(데와)에 온 적이 있음은 앞서 말한 일이 있다. 일만복 일행(325명)보다는 숫자가 더 많지만, 746년에 왔던 숫자(1,100명)에 비하면 1/3 규모다.
[癸巳, 勅陸奥出羽等國 "用常陸調■, 相摸庸綿。陸奥税布。充渤海鐵利等祿." 又勅 "在出羽國蕃人三百五十九人, 今属嚴寒, 海路艱險. 若情願今年留滯者, 宜恣聽之."]
계사(27일)에 육오(陸奧, 무츠)ㆍ출우(出羽, 데와) 등의 국에 칙하였다. “상륙(常陸, 히타치)의 조시(調■)와 상모(相摸, 사가미)의 용면(庸綿), 육오(陸奧)의 세포(稅布)를 발해와 철리 등의 녹(祿)에 충당하라.” 또한 칙하였다. “출우국(出羽國)에 있는 번인(蕃人) 359인은 지금 한창 추운 때라 바닷길이 위험하다. 올해에는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면 청한 대로 들어주라.”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10년(779) 9월
이들 사신단의 일원으로는 압령 벼슬의 고양죽과 통사 벼슬의 고설창(일본 조정으로부터 종5위하 관위를 받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고설창은 아래 기록에서도 보이듯 여러 차례 발해와 일본 사이를 드나들며 '사행'으로는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그것은 그가 '통사(通事)' 즉 '역관'의 벼슬을 갖고 있었다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압령'이라는 것은 대개 말갈(예맥) 제족들을 편입시켜 구성한 사신단의 단장이 맡았던 관직이다. 《당회요》에 나오는 압말갈사(押靺鞨使)처럼, 이런 관직을 따로 둬야 될 정도였다면 발해 상류층에게 '말갈(예맥)'이란 곧 지배하고 다스려야 할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乙亥, 勅 "検校渤海人使, 押領高洋粥等, 進表無礼, 宜勿令進. 又不就筑紫, 巧言求便宜, 加勘當勿令更然."]
을해(9일)에 칙하였다. “검교발해대사(檢校渤海人使) 압령(押領) 고양필(高洋粥) 등이 올린 표는 무례하니 마땅히 올리지 말도록 명한다. 또한 축자(筑紫, 치쿠시)를 거치지 않고 교언(巧言)으로 편함을 구하였으니, 마땅히 책망하여[勘當]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시키라.”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10년(779) 11월
746년의 경우처럼 이들도 국가의 공식사절단으로서가 아니라 '교역'을 목적으로 하고서 바다를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데, 공식 사절단이 아닌 이상 일본 조정도 이들을 '빈객'으로 대우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에게 일본 조정으로부터 수여된 녹ㅡ갖가지 섬유제품이야말로 이들이 구하던 최종목적.
[丙子, 檢校渤海人使言 "鐵利官人爭坐説昌之上, 恒有凌侮之氣者." 太政官處分 "渤海通事從五位下高説昌, 遠渉滄波數廻入朝. 言思忠勤. 授以高班, 次彼鐵利之下. 殊非優寵之意, 宜異其例位以顯品秩."]
병자(10일)에 검교발해인사(檢校渤海人使)가 말하였다. "철리(鐵利)의 관인(官人)이 자리를 다투어[爭坐] 설창(說昌)의 위에 가고자 합니다. 恒有凌侮之氣者입니다." 태정관(太政官, 타이죠칸)의 처분은 이러하였다. "발해의 통사(通事) 종5위하(下) 고설창(高說昌)은 멀리서 파도를 헤치고 수차례 입조(入朝)하였다. 언사(言思)가 충근(忠勤)하였다. 높은 반열을 내리고 다음은 철리를 그 아래에 둘 것이다. 특별히 우대하고 총애하지 않음은 마땅히 그 예위(例位)가 다름을 품질(品秩)로 드러내려는 뜻이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10년(779) 11월
고설창과 자리를 다투다가 결국 고설창의 아랫자리로 밀려난 '철리의 관인'에 대해서 하마다 고사쿠는 <발해국 흥망사>에서 이들 사신단의 중핵역할을 맡았던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말갈이 중심이 되어 발해인들을 움직여서 대일관계를 이용하고 일본과의 교역을 주도했던 것에서 발해와의 긴장관계 속에서도 사회적ㆍ경제적으로 성장한 철리말갈족의 단면을 엿볼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9세기부터 성행하며 말갈제족의 수령 65명을 동반한 발해 사신 105명이 행한 공무역의 선구자적 성격이 여기서부터 보인다는 것이다.
[戊午, 檢校渤海人使言 "渤海使押領高洋弼等苦請云 '乘船損壤, 歸計無由. 伏望, 朝恩賜船九隻, 令達本蕃者'." 許之.]
무오(22일)에 검교발해인사가 말하였다. “발해의 사신인 압령 고양필 등이 고청(苦請)하기를 ‘타고온 배가 부서져서 돌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조정의 은혜로우심으로 배 아홉 척을 내리시어 본번(本蕃)에 도달하게 하소서.’라 하였습니다.” 이것을 허락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5, 보귀(寶龜, 호키) 10년(779) 12월
비록 올린 표문은 '예의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바다를 건넜던 배가 파손되었다는 이유로 이들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아홉 척의 배를 얻어 데와에서부터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二年春正月庚申朔. 戊辰, 成德軍節度、恆定等州觀察使、司空、兼太子太傅、同中書門下平章事、恆州刺史、隴西郡王李寶臣卒.]
2년(781) 봄 정월 경신 초하루 무진에 성덕군절도(成德軍節度) 긍정등주관찰사(恆定等州觀察使) 사공(司空) 겸 태자태보(太子太傅)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긍주자사(恆州刺史) 농서군왕(隴西郡王) 이보신(李寶臣)이 졸하였다.
《구당서》 본기제32, 덕종 상(上)
당조가 몇 년을 걸쳐온 세법까지 개혁해가며 절도사 세력들을 진압하려 들고, 절도사들은 절도사들 나름대로 연계를 맺어 당조의 압력에 대항하려는 이 와중에 성덕군절도사 이보신이 64세로 죽고, 장유악(이유악)이 절도사직 세습을 청했지만 덕종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마침내 이정기 편에 가담해버린다. (여러 번진 가운데서도 가장 넓은 영토와 방대한 물자를 지닌 평로치청번진은 절도사들의 '반당동맹' 맹주나 다름없었다)
해족 출신인 이보신ㅡ장쇄고의 양자로서 장씨였던 그는 이회선이 그랬듯이 당 숙종으로부터 황실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받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자신의 세습을 인정해주지 않는 당조로부터 완전히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建中初, 正己, 田悅, 梁崇義, 張惟嶽皆反.]
건중(建中) 초에 정기와 전열, 양숭의, 장유악 등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납
전승사의 뒤를 이은 전열까지 이 대결에 가담하면서 이정기를 맹주로 양숭의와 이유악, 전열이 지지하는 4각 반당동맹이 결성되고, 이정기는 운주 서남쪽 조주로 군사를 옮겼다. 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던 조주 서남쪽 제음 땅에 주둔하면서 장차 변주를 공격하려고 대규모 군사 훈련까지 벌이는 이정기를 보면서 덕종은 당황한다. '이게 아닌데' 싶었겠지. 장안 서쪽에서 위구르와 티벳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시켰던 9만 2천 명의 방추병 병력까지 빼서 이정기가 있는 관동 근처로 전진배치시킨 건 위구르를 끌어들여 장안 약탈을 허용했던 선황 숙종보다도 더 무모하고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이 뭐 그런 게 눈에 들어오긴 하겠어? 그리고 5월에는 군사력 증강을 명목으로 십일세까지 만들어서 부랴부랴 군사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河南騷然, 天下爲憂, 羽檄馳走,征兵以益備.]
하남(河南)이 떠들썩하고 천하가 두려워하였으며,다급한 소식을 알리는 격문[羽檄]이 빗발치니[馳走] 징병[征兵]을 더 늘려 방비를 굳건히 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구당서》열전이 전하는 이 기록에서 우리는 당조의 평로치청에 대한 공포심을 엿볼수 있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잘 훈련된 군대, 그것도 옛날 당조를 그렇게나 괴롭혔던 고려인들의 군대가 이제 곧 당조에 '복수'하러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율 그 자체였다. "다급한 소식을 알리는 격문이 잇따랐다[羽檄馳走]"는 이정기열전의 기록은 암호문같다. 이정기가 당조를 무너뜨리러 쳐들어온다니 그래 다급한 소식은 다급한 소식인데, 여기서 한술 더 떠서 발해까지 당조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면 너무 섣부른 판단일지? 자국 명마무역 VIP였던 평로치청의 움직임을 발해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秋七月 發使安撫浿江南州郡 ]
가을 7월에 사자를 보내 패강(浿江) 남쪽의 주와 군을 위로하였다.
《삼국사》 권제9, 신라본기9, 선덕왕 2년(781)
발해의 군사행동이 신라에 포착된 것일까?
[又於徐州增兵, 以扼江淮, 於是運輸爲之改道]
또한 서주(徐州)에 병사를 증강시켜 강회(江淮)를 누르니, 이에 운하의 운송[運輸]마저 길을 돌려야 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서주는 제음에서 약 14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면서, 이정기의 사촌형 이유가 자사로서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2차 방어선으로 이 서주를 염두에 둔 것인데, 이정기가 노린 곳은 당조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던
'강회' 즉 운하였다. 강남에서 생산되어 장안과 낙양으로 공급되는 물화의 수송이 모두 운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길이 끊어진다는 것은 중국 대륙의 남북을 이어주는 동맥이 끊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사적인 타격에 앞서 경제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가장 먼저 운하를 노렸던 것이다. 당조에서도 이걸 어떻게든 막고자 했다. 우선 서주의 용교(埇橋)와 와구(渦口)ㅡ지금의 숙주(宿州)와 안휘성 회원현의 중요한 물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장만복을 호주자사로 삼아 일부 방추병을 거느리게 해서 와구에 정박시켰다. 각 도에서 보낸 천 척이 넘는 배가 와구에 정박해 있으면서 평로치청이 운하로 접근하는 것을 어느 정도 차단하는듯 보였지만, 이정기를 필두로 한 반당동맹이 움직이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이정기가 군사를 보내 서주의 용교와 와구를 끊고, 양숭의가 병사를 움직여 양양을 막으니 조운로는 모두 단절되어 민심이 공포에 떨었다." 《자치통감》의 이 기록은 결국 이정기에 의해서 용교와 와구가 막혀버렸던 것과, 이정기를 필두로 하는 반당 절도사동맹이 당조를 포위한 것이 얼마나 심했던지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물자들이 물길을 따라 수도로 수송되는 당조에서 운하가 막혔다는 것은 곧 돈줄, 밥줄이 막혔다는 거나 진배없는 말이었다. 동남쪽에서 올라오는 물자 수송이 죄다 막혔는데 앞으로 뭐 먹고 뭐 입고 살 거야.
여기서 잘만 하면 이정기가 정말 당조를 무너뜨리고 이 중국 대륙에 최초의 고려인 왕조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련만, 역사라는 게 참 얄궃지?
[未幾, 發疽卒. 時年四十九. 子納擅總兵政, 秘之. 數月, 乃發喪.]
얼마 지나지 않아 악성 종양[疽]으로 죽었다[卒]. 그의 나이 49세였다. 아들 납(納)이 독단으로 군사와 정치를 다스리면서 이를 숨겼다. 여러 달이 지나고 이에 발상(發喪)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건중(建中) 2년. 흠무왕 보력 8년 태세 신유(781). 하늘이 아직 당조를 무너뜨릴 생각이 없으셨던 모양이다. 다른 절도사들에 비해 유난히 땅복도 많고 재복도 많고 출세복도 많았지만 딱 하나 명복은 없었던 이정기는 불과 49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당조의 심장부 낙양과 장안이 눈앞에 있는데 말이다.
[八月辛卯, 平盧淄靑節度觀察使司徒太子太保同中書門下平章事李正己卒.]
8월 신묘에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ㆍ사도(司徒)ㆍ태자태보(太子太保)ㆍ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이정기가 죽었다.
《구당서》 권제12, 본기제12, 덕종 이괄 상(上), 덕종 건중 2년(781)
이정기가 죽은 것은 7월의 일이었지만, 그것이 조정에 보고된 것은 8월 신묘일. 《구당서》에서 이정기의 죽음을 신하(경대부)의 그것을 나타내는 '졸(卒)'로 처리한 것에 비해, 제후에 준하는 '훙(薨)'으로 이정기의 죽음을 표현한 《자치통감》은 이납이 아버지 이정기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것[秘之]'참 비판을 가혹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평로치청이 제대로 기강이 잡히지 않은데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번진 내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 이 해에, 일본에서는 홍인 천황이 죽고 그의 아들인 산부(山部, 야마베)가 즉위했다. 제50대 환무(桓武, 간무) 천황(天皇, 미카도)이었다.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4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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