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고종이 고구려 정복 의례를 행하다 ( 668년 12월(음) )
한국사DB >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10 > 보장왕(寶藏王) > 당 고종이 고구려 정복 의례를 행하다
十二月, 帝受俘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大常伯·貟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少卿, 僧信誠爲銀青光禄大夫, 泉男生爲右衞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䢖 校勘 028流黔州. 分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萬餘戸, 爲九都督府·四十二州·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 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叅理. 以右威衞大將軍薛仁貴檢校安東都護, 㧾校勘 029兵二萬人, 以鎮撫之. 是髙宗緫章元年戊辰歳也.
校勘 028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建(건)으로 되어 있다.
校勘 029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捴(총)으로 되어 있다.
〔27년(668)〕 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註001에서 포로를 받았다. 왕이 정사는 자신이 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용서하여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註002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천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註 003으로, 승려 신성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註004으로, 천남생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註005으로 삼았다. 이적 이하〔의 사람들〕은 차등을 두어 책봉하고 상을 주었다. 천남건은 검주(黔州)註006로 유배를 보냈다.註007 5부註008, 176성, 69만여 호註009를 나누어 9도독부註010, 42주註011, 100현으로 만들고,註012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註013를 두어 이를 통치하게 하고,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註014 화인(華人)과 함께註015 다스리는 데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註016설인귀를 검교(檢校) 안동도호로 삼아 병력 20,000명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달래게 하였다.註017 이때가 고종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이었다.註018
註 001 함원전(含元殿) : 당 장안의 궁궐인 대명궁(大明宮)의 정전(正殿)이다. 662년에 짓기 시작하여 663년에 완성하여, 이후 223년간 대명궁의 정전으로 기능하였다.
註 002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 공부상서(工部尙書)이다. 당에서는 662~670년 사이 공부상서를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이라고 고쳐 불렀다.
註 003 사재소경(司宰少卿) : 고아록소경(光祿少卿)이다. 당에서는 662~670년 사이 고아록소경을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바꾸어 불렀다. 관품은 종4품상(從四品上)에 해당하였다. 궁중의 선식(膳食)을 담당한 관직이다.
註 004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 종3품(從三品)의 허직(虛職)이었다.
註 005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 우위(右衛)의 장관직으로 관품은 정3품이다.
註 006 검주(黔州)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총장 원년 12월 정사조에는 ‘검중(黔中)’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중국 쓰촨성[四川城] 펑수이현[彭水縣]이다.
註 007 유배를 보냈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총장 원년(668) 12월 정사조 기사에는 이 문장 뒤에 ‘부여풍은 영남으로 유배되었다(“扶餘豊流嶺南”)’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해당 내용이 백제 기사이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생략한 것이다.
註 008 5부 : 여기서는 고구려의 지방행정구역으로 5부를 가리킨다. 지방통치 단위로서 5부의 존재는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 고려의 “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기사와 관련하여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구려 후기에 광역의 지방통치 단위로서 5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있다. 노태돈은 고구려 후기 최고 지방관인 욕살의 존재가 5명을 넘는 8~9명에 이른다는 점을 근거로 5부의 존재를 부정한다(노태돈, 257-266쪽). 김현숙 역시 지방 5부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지만, 행정조직아 아니라 편의에 따른 구분으로 파악한다(김현숙, 346-378쪽). 긍정론은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임기환, 나동욱 등의 견해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이동훈, 2019, 『고구려 중·후기 지배체제 연구』, 서경문화사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1974, 「조선삼국의 군사조직-郡家/영지? 연구서설(朝鮮三国の軍事組織-コホリのミヤケ硏究序說)」, 『고대일본와 조선(古代日本と朝鮮)』, 용계서사(龍溪書舍)
임기환, 1995, 「고구려 집권체제 성립과정의 연구」, 경희대 박사학위논문
나동욱, 2009, 「6~7세기 고구려 지방군사운용체계 -지방통치체제 검토를 바탕으로」, 『역사학연구(史學硏究)』 95
이경미(李慶美), 2017, 「압록강(鴨綠江)~요하(遼河) 유역 고구려 성곽과 지방통치 연구」, 한국외대 박사학위논문
註 009 176성, 69만여 호 : 이 기사는 『신당서』 권220 권145 동이 고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총장 원년(668) 12월 정사조의 기록과 일치하는데, 『구당서』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성170, 호69만7천)城一百七十, 戶六十九萬七千”(『구당서』 권5 본기5 고종 총장 원년 9월 계사조). “(성176, 16호 69만7천)城百七十六, 戶六十九萬七千”(『구당서』 권199상 열전149상 동이 고려)
註 010 9도독부 : 당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영역을 9도독부로 나누었다. 9개의 도독부(都督府)는 신성주도독부(新城州都督府),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 가물주도독부(哥勿州都督府), 위락주도독부(衛樂州都督府), 사리주도독부(舍利州都督府), 거소주도독부(居素州都督府), 월희주도독부(越喜州都督府), 거조주도독부(去旦州都督府), 건안주도독부(建安州都督府) 등이다(『신당서』 권43하 지33하 지리7하 하북도(河北道)). 근래에 발견된 「이타인묘지명(李他仁墓誌銘)」에 의해 책주도독(柵州 都督) 등의 사례가 추가되었다.
註 011 42주(州) : 당은 고구려 구토(舊土)에 처음 42주를 두었는데, 뒤에는 14주(州)만이 남아 그 이름을 전한다. 그것은 남소주(南蘇州), 개모주(蓋牟州), 대군주(代那州), 창암주(倉巖州), 마미주(磨米州), 적리주(積利州), 여산주(黎山州), 연진주(延津州), 목저주(木底州), 안시주(安市州), 제북주(諸北州), 철리주(鐵利州), 불열주(拂涅州), 배한주(拜漢州) 등이다(『신당서』 권43하 지33하 지리7하 하북도(河北道)).
註 012 9도독부 42주 100현 : 고구려 지방성 176개 성을 9도독부 42주 100현로 나누었다고 볼 때, 당시 고구려 지방통치단위의 구성을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고구려 후기에 지방통치 단위는 지방관명을 기준으로 볼 때, 욕살급, 처려근지급, 루초급 등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아마도 9도독부는 욕살급, 42주는 처려근지급, 100현은 루초급에 대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임기환, 2015, 「요동반도 고구려성 현황과 지방지배의 구성」,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77, 111-115쪽)
註 013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평양에 설치하였던 군정기관이다. 초대 안동도호로 임명된 당의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하였다. 669년 무렵에 고구려 유민들을 당의 내지로 사민할 무렵에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신성(新城)으로 옮겼으며, 676년 2월 이후에는 다시 치소를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겼다. 677년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자치를 허락하면서 안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기고 남생을 안동도호로 삼아 보장왕을 견제하였다. 발해 건국 뒤에는 699년에 안동도독부를 두어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에 임명, 부임하도록 하였고, 704~705년경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치소는 714년에 평주(平州)로, 743년에는 요서(遼西)로 옮겼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 폐지되었다.(『신당서』 권39 지29 지리3 하북도(河北道) 안동상도호부(安東上都護府); 『신당서』 권43하 지33하 지리7하 하북도(河北道); 『신당서』 권49하 지39하 백관(百官) 상도호부(上都護府)).
註 014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 고구려인으로 도독·자사·현령 등으로 임명된 사례로서 최근에 발견된 금석문으로서 「고흠덕묘지명(高欽德墓誌銘)」과 「고원망묘지명(高遠望墓誌銘)」을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부자 관계인데, 이들 묘지명에 기록된 이 가문 인물의 관직을 살펴보면 고원(高瑗)-고회(高懷)-고천(高千)-고흠덕(高欽德) 4대에 걸쳐 건안주도독(建安州都督)을 세습 역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흠덕의 출생년이 677년이므로 증조부인 고원은 6세기 말~7세기 초에 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고원이 활동했던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임이 분명하다. 조부인 고희도 고구려 멸망 전에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원과 고희가 역임하였다는 건안주도독은 실제로는 고구려 지방관인 건안성(建安城) 성주이다. 건안성이 9도독부의 하나로 편제된 것을 보면 고구려시기에 건안성은 욕살(褥薩)급 지방관으로 추정된다. 고흠덕 가문은 7세기에 들어 건안성의 성주로서 대를 이어 갔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당의 기미체제에 의해 건안주도독의 자리를 세습해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유력자를 기미부주 장관에 임명하고 그 직을 세습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남단덕묘지(南單德墓誌銘)」을 통해서도 남단덕의 조부가 기미부주 중 하나인 마미주(磨米州)의 도독을 역임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시기의 지방관 혹은 지방 유력자가 기미부주 장관에 임명된 사례의 하나이다.
註 015 화인(華人)과 함께 : 당의 관리들이 안동도호부나 그 예하 기미주의 관원을 역임한 사례는 당 관인 묘지명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예가 「양현기묘지명(陽玄其墓誌銘)」인데, 이에 의하면 양현기가 동책주도독부(東柵州都督府) 장사(長史)를 역임한 것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 사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호규, 2017, 「유민묘지명(遺民墓誌銘)을 통해본 당(唐)의 동방정책(東方政策)과 고구려유민(高句麗 遺民)의 동향」, 『동양학」 69, 7-8쪽 참조
註 016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정3품의 무관직으로 662년에 우둔위대장군이 개명된 것이다.
註 017 12월에 …… 어루만져 달래게 하였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총장 원년(668) 12월 정사조에 보이는 내용이다. 『구당서(舊唐書)』 권199상 열전149상 동이 고려 및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에도 유사한 내용의 기사가 있다.
註 018 이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었다 : 668년의 기미주 편제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에 의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계획에 그치고, 제대로 시행된 시점은 고구려 유민들을 사민시킨 이후인 670년 1월 시점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81, 81쪽; 여호규, 75쪽)
〈참고문헌〉
노태돈, 2020, 『고구려·발해사 연구』, 지식산업사
노태돈, 1981, 「고구려 유민사 연구(高句麗 遺民史 硏究)」,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韓㳓劤博士停年記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여호규, 2017, 「유민묘지명(遺民墓誌銘)을 통해본 당(唐)의 동방정책(東方政策)과 고구려 유민(高句麗 遺民)의 동향」, 『동양학」 69
김강훈, 2018, 「고구려 멸망 직후 당의 고구려 고지(故地) 지배 시도와 유민의 동향」, 『대구역사학(大丘史學)』 113
방용철, 2018, 「고구려 부흥전쟁의 발발과 그 성격」, 『대구사학(大丘史學)』 113
조영광, 2018, 「고구려 멸망 후 요동 지역의 동향-안동도호부 및 치청번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대구사학(大丘史學)』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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