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은 없다" 강경한 국가기록원, 이유 있나?
부실 검색·위법 논란 무릅쓰고 성급한 결론... 정치 행보 의심 받아
13.07.20 13:40 l 최종 업데이트 13.07.20 13:40 l 이경태(sneerc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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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위원인 황진하 새누리당 의원이 18일 오후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예비열람 결과 보고를 마친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 앞을 지나고 있다. ⓒ 남소연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증발' 사태 앞에 신중하다. 상대방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만 확정짓진 않는다. 최종 결론이 사실과 달랐을 때 감당키 어려운 역풍이 닥칠 것을 알고 있어서다. 하지만 유독 이번 사태에 대해 '확정'에 가까운 입장을 연거푸 밝히는 곳이 있다. 바로 국가기록원이다. 

국가기록원은 두 차례에 걸친 여야의 예비열람은 물론 회의록 '증발' 사태로 지난 18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긴급회의에서도 "회의록은 국가기록원에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참여정부로부터 회의록이 이관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이번 사태에 대한 새누리당의 시각과도 일치한다. 

이 같은 모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발언 논란'에 대처했던 국가정보원의 모습과 겹친다. 국가정보원은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에게 회의록을 '단독' 열람케 했고, 야당의 반발이 나오자 "조직의 명예를 위해" 회의록 전문 등을 무단 공개했다. 전문 공개로 'NLL 포기 발언'에 대한 해석 논란이 불거지자 대변인 명의의 성명까지 발표해 "노 전 대통령은 NLL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자의적 해석까지 내놨다. 국방부도 이 같은 국정원의 정치적 행보에 동참했다가 하루 만에 입장을 뒤집은 바 있다.

국가기록원 역시 NLL 논란의 연장선상인 이번 사태에 정치적 판단을 기초로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위법' 논란 무릅쓰고 "회의록 없다" 손 들어준 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에 대한 의구심은 지난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의 태도에서 더욱 짙어진다. 

박 원장은 당시 비공개 회의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기록원에 넘긴) 최종 재가목록에 정상회담 대화록(회의록)이 없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이 국가기록원에 자료를 넘기기 전 최종 재가한 자료 목록에 정상회담 대화록이 있느냐"는 의원들의 질문에 "없다"고 답한 것이다. 박 원장은 "애초부터 이관이 안 된 것이냐"는 질문에도 "받은 게 전부"라고 거듭 답했다. 

사실상 참여정부로부터 회의록을 이관 받지 못했다는 답변이었다. 그는 또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이지원(e知園)'과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 관리시스템인 '팜스'의 운영체계가 달라 대화록을 찾지 못하는 것이냐는 질문에도 "기술적으로 (찾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다. 기술적인 문제로 회의록을 지금까지 못 찾았을 가능성도 배제한 것이다. 

이는 19일 회의록 작성·이관 등에 관여한 참여정부 청와대 인사들에 의해 바로 반박됐다. 박 원장이 밝힌 '재가목록'은 기록원에 이관된 종이문서에 관한 것이고 회의록은 전자문서로 이관됐다는 설명이었다. 기술적 문제에 대한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김정호 전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은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팜스는 접근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 '회의록'을 검색어로 하면 안 나올 수 있다"며 "그렇다고 '회의록이 없다'고 공표하면 (국가기록원의)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결국, 박 원장은 국가기록원에 이관된 회의록의 종류와 검색환경을 무시한 채 "회의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박 원장이 위법 논란까지 무릅쓰고 "회의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는 지적도 있다. 지정기록물의 목록조차 관련법에 따라 열람이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박 원장이 거론한 재가목록이 지정기록물이라면 국가기록원장이 앞장서 관련 법을 위반한 셈이다. 

'본문 검색' 안 했는데 "회의록 없다"... "기록원 측 일부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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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열람위원인 새누리당 황진하·조명철 의원과 민주당 전해철·박남춘 의원이 회의록 원본을 검색하기 위해 19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도착,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무엇보다 국가기록원은 두 차례의 예비열람 과정에서 지정 검색어를 이용해 '본문 검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참여정부 기록물은 전자기록만 총 92만여 건에 달한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검수할 수 없어 여야 열람위원들이 지정한 검색어를 통해 회의록을 찾았다. 회의록 제목이 기밀 보안을 위해 별칭으로 바뀌어졌을 가능성까지 나오는 상황인데도 국가기록원이 제목 검색만 한 채 성급하게 회의록 존재 유무에 대한 결론을 내린 셈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전날(18일) 국회 운영위원회 비공개 회의 당시 (국가기록원이) 본문 검색을 했다고 했는데 안 한 것이 다 드러난 것으로 안다"며 "그쪽에서 일부 사과를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운영위 회의 당시) 새누리당의 관심은 '회의록이 있냐, 없냐' 였고 우리는 '회의록 다 찾아봤나'였다"며 "새누리당에서 있냐고 계속 물어보니 기록원 측에서 '없다'는 뉘앙스로 얘기해 우리가 반발한 것이다, 최경환 위원장도 민주당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 (22일 최종결론을 낸다는)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박경국 원장의 재가목록 답변과 관련, "목록을 어떻게 일별해서 찾을 수 있나, 지정기록물만 34만 건이다, 그러니깐 '못 찾았다'는 의미로 얘기한 것으로 안다"면서 "국가기록원장이라도 목록은 절대 못 본다, 단지 검색된 결과만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대통령기록물관리 엉망 됐다"

한편, 사초(史草)를 보관하는 국가기록원이 사실상 정치적 행보를 하는 원인은 이명박 정부 들어 본래 기록원의 취지가 흔들렸기 때문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전직 대통령이 임명한 기록관장의 임기를 대통령지정기록물 법을 통해 후임 정권이 끝날 때까지 보장하도록 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지난 2008년 임상경 전 대통령기록관장을 직권면직 시키는 등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록 했기 때문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김경수 전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은 이날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 "이명박 정부 들어서 대통령기록물관리제도가 엉망이 됐다"면서 "예를 들면 기록물관리법에 대통령기록관장의 임기는 5년으로 보장이 돼 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참여정부 당시에 임명됐던 대통령기록관장을 7개월 만에 쫓아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태흠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대통령기록관장은 별정직이다"면서 "임명권자의 임기가 끝나면 물러나는 게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장은 이날 YTN라디오 <출발 새아침>에 출연, "(미국의 경우) 더 중요한 특징은 대통령기록관이 조직적으로도 행정부에 속해 있지 않다"며 "(기록관의) 관장이나 전문인력들이 비행정 인력으로, 사회에서 존경받는 전문가들이 배치돼 있어 지금 같은 정쟁에서 올곧은 발언이나 행동을 할 수 있는 그런 구조가 행정체계상이나 문화상으로도 잡혀 있다"고 꼬집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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